홍길복 목사의 설교 : 성서속에 던져진 질문들 (8)

주제 : 성서속에 던져진 위대한 질문들 (The Great Questions in the Bible)
오늘의 본문 : 열왕기상 19장 9절 – 14절
오늘의 제목 :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는냐? (Elijah, what are you doing here?)
○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는냐? (열왕기상 19:9~14)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한글로 된 이 질문을 RSV나 Good News Bible 등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Elijah, what are you doing here?” – 엘리아야, 너지금 여기서 뭘하고 있는냐?” 오늘 본문 9절과 13절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엘리야에게 두번씩이나 동일하게 던지셨던 이 질문이 오늘 우리가 7번째로 묵상해 보려는 주님의 물음입니다. 저는 오늘 던지신 이 물음을 나를 향하신 질문으로 받아드립니다. “홍길복아, 너 지금 여기서 뭘하고 있는거냐? 너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좀 길긴 하지만 이 물음에 대한 배경부터 살펴보시겠습니다.
엘리야가 활동하던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은 아합왕이 통치하던 시대였습니다. 아합은 솔로몬 이후 유대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된 후 북왕국 이스라엘의 일곱번째 왕이었습니다. 쿠테타를 통하여 집권했던 오므리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아합은 이스라엘을 주변의 다른 어떤 나라들 보다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앞선 나라로 만들어 북이스라엘 최대의 전성기를 이루어 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는 결혼도 외교로 여겨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 대상이 북쪽에 있던 도시국가인 시돈의 왕이며 동시에 바알신당의 제사장이었던 <엣바알>의 딸, 이세벨이었습니다. 아합의 왕비가 된 이세벨은 당연히 시돈의 主神인 바알신을 이스라엘 땅으로 끌고 왔습니다. 시돈은 전통적으로 아주 옛날 부터 풍요와 다산의 신이라고 믿었던 바알을 섬겨왔습니다. 지금도 그런 역사적 흔적과 유물들을 곳곳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저도 한 20 수년전 시돈을 포함한 레바논 지역으로 학술탐사를 갔다가 잘 알려진 3천년 전 도시 <바알벡 Baalbek>을 방문했는데 우리 나라의 경주 불국사와 해인사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찬란한 바알신전과 각종 유물들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세벨은 남편 아합을 꼬드겨 이스라엘 온 땅에서 여호와 신앙을 몰아내고 바알 신당을 세우고 바알의 제사장들을 대량으로 양산해 냈습니다. 이세벨과 합작한 아합은 신실하게 여호와를 섬기던 나봇의 포도원을 강제로 빼앗고 그를 죽이고 또 수 많은 여호와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죽이는 등 북왕국 이스라엘 땅에서 가장 지독한 바알 숭배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하나님께서는 온 이스라엘 땅에 3년 6개월이나 비를 내리지 아니하시고 흉년이 들게 하셨습니다. 이때 혜성과 같이 나타난 사람이 엘리야였습니다. 엘리야는 아주 담대하게 바알선지자들 450명과 대결을 신청했습니다 “우리가 갈멜산에 모여 제각기 제단을 쌓자. 그리고그 제단 위에 송아지 한마리씩을 올려놓고 기도로 시합을 하자!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테니 너희는 바알의 이름을 불러라. 그리고 그때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모든백성들이 동의했습니다. 저도 성지 순례 중 두 번이나 갈멜산에 올라가 엘리야 기념관에 들어가 보았고 새롭게 재건해 놓은 갈멜산 대결의 자리에 가서 오늘의 성경을 소리내어 읽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렸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갈멜산 – 지중해를 바라보는 이스라엘 북쪽 항구도시 하이파 근처에 자리한 구릉지역, 높이는 서울의 남산 정도인 550M, 지금은 Mount Carmel National Park로 지정되어 있는 일명 <엘리야의 산>에 또 한번 더 가고 싶어집니다. 하여튼 그날 먼저 바알선지자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울부짖으며 기도를 했으나 바알은 아무 응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저녁 무렵이 되어 엘리야는 부르짖었습니다. <주 여호와가 참 하나님임을 알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자 즉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나무, 돌, 흙, 도랑의 물까지 다 핥아내고 말았습니다. 엘리야가 승리했습니다.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겼습니다. 그후 엘리야는 바알선지자들 450명을 가까이에 있는 기손 시내로 끌고가 모두 처형했고 그 즉시 하늘에서는 구름과 바람이 일더니 마침내 3년 6개월 만에 온 이스라엘 땅에는 큰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인간 역사, 사람이 살아가는 이 세상이란 항상 정의와 진리가 계속해서 승리하는 것 만은 아닙니다. 승승장구만 이어지는 인생이란 없습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습니다. 승리 후에는 좌절도 찾아오고 이긴 다음에는 우울증도 생기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 동안의 자총지종을 다 알게 된 아합과 이세벨은 즉시 사신을 보내어 엘리야에게 통보합니다. “엘리야야, 즉시 왕궁으로 오너라. 너는 내일 이맘 때가 되면 반드시 죽고 살아남지 못하리라” 이런 연락을 받은 엘리야는 겁이 났습니다. 그는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갈멜산에서의 그 담력과 용기와 신앙은 어디로 갔는지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즉시 남쪽 유대를 통과하여 한참 아래인 브엘세바를 거쳐 광야, 사막길에 들어섰습니다. 지친 엘리야는 한 로뎀나무 밑에 앉아 죽기를 간구합니다. 기도인지 한숨과 푸념인지 알수 없는 소리를 합니다. “여호와여 내 생명을 거두어 가시옵소서” 현대 의학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극심한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걸려 더 이상 살아 갈 희망이나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갈멜산의 승리 다음에는 바드시 로뎀나무 밑에서의 탄식도 있게 마련입니다. 엘리야는 약해진 정신력, 무력해진 신앙, 그리고 지친 몸을 가누지 못한채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난 후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그를 깨웠습니다. 천사는 엘리야에게 떡과 물을 마시게 하면서 힘을 내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이에 엘리야는 다시 일어나 40일을 밤낮으로 걷고 또 걸어 마침내 호렙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호렙산이란 때때로 시내산과 함께 쓰이고 있습니다. 호렙산이란 시나이 반도에 위치한넓은 지역을 통털어서 부르는 지명이고 시내산은 그 호렙산 중에서도 높이가 2285m에 이르는 정상으로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산을 지칭하는 이름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저도 이제는 엄두도 못내지만 한때 젊은 날엔 시내산 밑에 있는 성 캐더린 수도원에서 새벽 3시에 일어나 낙타를 타고 강한 바람과 추위를 견더내며 시내산 꼭대기 까지 올라가서 떠오르는 새벽 햇살을 받으면서 찬송하고 십계명을 읽고 기도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새벽 시내산 산정에 있는 작은 커피집에서 마신 커피맛을 제 평생 최고 최대로 따뜻하고 향기롭고 맛있는 커피로 기억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주로 그 지역을 시내산이라고 부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호렙산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백두산이라고 하지만 중국사람들은 장백산 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흔히 호렙산이라면 “은혜의 산” “위로의 산” “격려의 산” “율법의 산” “사명의 산” 이라고 말합니다. 한 번은 이겼지만 지친 엘리야, 거기서는 승리했지만 지금은 도망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호렙에서 다시 나타나 물으셨습니다.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9절 말씀입니다. 엘리야는 말합니다. “주님, 이젠 저만 남았습니다. 그들은 나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때 크고 강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러나 그 속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엔 땅이 흔들리는 지진이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이번엔 커다란 Bush Fire가 온 산을 불태웠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손길은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얼마 후 이 모든 것들이 다 지난 다음 마침내 고요한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그 때 세미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3절입니다. 두 번째로 나타나서 친히 그의 이름을 부르시며 9절과 똑같은 내용으로 물으신 질문이 바로 오늘 우리의 주제입니다.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아야, 너 여기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늘 불과 우뢰, 번개와 지진 같은 뜨거운 열정 가운데서만 역사하지는 아니하십니다. 주님은 오히려 고요하고 은밀한 가운데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우리 다 알고 있듯이 엘리야는 비문서 선지자들은 물론, 문서 선지자들 까지 포함된 모든 선지지들을 통털어 구약에 나타난 선지자들의 대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눈 사람도 모세와 엘리야였지 않습니까? 엘리야란 이름은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란 뜻을지니고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하나님이라고 믿고 고백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던 선지자의 대표요, 선지자의 모형이요, 선지자의 모델이 바로 엘리야입니다. 그런 엘리야에게 지금 하나님께서 던지신 질문,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물음은 무슨 뜻일까요? 이 질문 속에는 표현 이상의 깊은 뜻이 있다고 봅니다. 말이란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듣고 해석하느냐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개떡같이 하는 말도 찰떡 같이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말끼를 못 알아들으면 진실을 놓치기 쉽고 오해를 불러 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던지신 이 질문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아야, 너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하는 물음도 질문하신 하나니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 지금 호렙산 동굴에 들어와 있는 걸 모르셔서 그런 걸 물으십니까?> 라고 대답하게 되면 않됩니다. 언어의 형식논리에 사로잡히면 말의 본래 의도를 놓치게 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다투고 화를 내며 등을 돌리게 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도 단지 늙어 가면서 점점 귀가 어두워져서 만이 아니라 실은 상대방의 말끼를 잘 못 알아듣는데서 비롯됩니다. 저는 가끔 사람이 하는 말도 잘 못 알아듣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자주하는 편입니다. 전체적 문맥을 보면 지금 하나님은 엘리야가 있는 자리, 지금 그가 호렙산 동굴에서 뭘 하고 있는지, 그런 것이 궁금해서 물으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던지신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이 물음 속에는 한 두가지 깊은 뜻이 있다고 보는데 그 첫째는 자아를 반성하고 자신의 지난날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보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봅니다. <자아 성찰>과 거기에 따른 반성과 회개를 촉구하시는 음성이라 하겠습니다. 실존주의자들의 표현으로 하자면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서 자아의 현존, Dasein을 다시 발견해 보라는 음성이라 하겠습니다. 그 동안 엘리야는 갈멜산에서의 위대한 승리와 바알선지자들을 물리치는 쾌거를 거두었습니다. 심리적으로는 우쭐거리고 영적으로는 교만해 졌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450대 1의 영적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살아 계시고 자기와 함께 하시고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는 확신이 충만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아합과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내일 이맘 때에는 내가 반드시 너를 죽이리라> 급전직하의 위기가 엄습해 왔습니다. 아무리 크고 놀라운 승리를 거두웠다 하더라도 생명을 위협하는 공포와 두려움을 이겨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이스라엘 땅을 벗어나 도망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멀고 먼 시나이 반도의 남쪽 끝 까지 도망을 쳐서 마침내는 아무도 찾아내기 어려운 해발 2천 미터도 더 되는 호렙산 꼭대기의 한 동굴로 숨어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바로 이런 모습, 이런 꼴, 이런 행동과 자세에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엘리아야, 너 지금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너 진짜로 나를 의지하고 확신하는 선지자가 맞냐?> 이 물음은 엘리야로 하여금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인생과 주의 종으로써행해 왔던 역사를 반추해 보고 반성하고 회개하고 영적 자세를 다시 한번 새롭게 추수려 보라는음성입니다. 사실 좀 꼼꼼히 살펴보면 엘리야는 겁도 많고 교만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에는 자기만 남은 선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오직 나만 홀로 남았거늘이 그들이 내 생명을 빼앗으려 하나이다> 두 번씩이나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벌써부터 충성스런 종 오바댜를 비롯하여 100여 명의 선지자들을 따로 숨겨두고 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그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사람들을 따로 7천이나 남겨두고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알았어야 합니다. 순교의 길, 정의와 진리의 길에는 <나 홀로>가 아닙니다. <나 혼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잘 압니다. 보이지 아니하고 나타나지 아니하는 어둠 속에도 이름 없고 빛도 없는 신실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든 주님은 남은 자들, The remnant들을 두고 계십니다. 인생과 신앙의 길, 목회와 사명자의 길에는 늘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숨겨진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둘러서는 않됩니다.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고 참아야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주어진 현실로 인하여 패배의식에 사로 잡혀서는 않됩니다. 실의에 빠져서도 않됩니다. 물론 교만에 빠져서도 않됩니다. 승승장구만 계속되는 인생살이란 없습니다. 한번도 지지 않고 이기기만 하는 전쟁도 없습니다. 모든 금메달은 거듭된 실패와 넘어짐을 거친 다음에 얻게 되는 것입니다. 갈멜산에서의 승리도 있지만 로뎀나문 밑에서 내쉬는 탄식과 시내산 동굴로 숨어드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인생길이요, 목회자의 걸음입니다.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아야, 너 지금 여기서 뭘하고 있는냐?> 이 질문 속에서 우리는 오늘도 나 자신을 성찰하고 돌아보고 다시 한번 더 깨우치라는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홍길복아, 천보영아, 최정복아, 김석호야, 전승호야, 손종란아,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너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그 다음 한 가지 더 하나님께서 던지신 이 질문은 도망자의 길에서 낙심과 실의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과 용기와 격려를 북돋아 주시는 음성입니다.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이 물음은 단순한 비난이나 꾸중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께서 동행 하시고 함께 하는 인생길에도 지치고 힘들 때가 있다는 것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인생길에는 거듭해서 넘어지고 낙심되는 순간이 수도 없이 많이 찾아온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신 하나님, 선하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험한 세상 살다보면 때때로 우리는 마치 나 혼자인 것 같이 고독하고 외롭고 쓸쓸한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이 질문속에서 하나님은엘리야를 붙잡아 주시고 새 힘과 능력을 더해 주시며 더 나아가 새로운 밋션괴 비젼과 꿈을 각인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새로운 세상,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리라 약속하십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엘리야 한 개인에 대한 격려와 용기의 차원을 넘어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사회적, 역사적 사명을 북돋아 주시는 음성으로 들어야 합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아무리 악하고 불의한 권력자라 할지라도 기죽지 말고 싸우라는 음성으로 들어야 합니다. 세상 권세 잡은 자들이 아무리 포악하고 강력한 힘을 지닌 것 처럼 큰 소리를 친다 할지라도, 그래도 우리로 하여금결코 포기해서는 않되는 신본주의적 신앙과 사회정의와 진리와 평화를 위한 싸움을 멈추지 말고 계속해야 한다는 음성으로 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연이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아야, 이제 너는 자리에서 일어나라. 그리고 다시 돌아가라. 광야를 거쳐 저 북쪽에 있는 다메섹으로 가거라. 거기에서 너는 하시엘에게는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도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여라. 그리고 무엇 보다도 젊은 사람 엘리사를 만나게 될것이다.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서 선지자로 삼고 너의 후계자가 되게 하여라. 왕상 19:15-18>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는 이 질문은 실망과 좌절과 포기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이제 이후 내가 너에게 주는 새로운 밋션을 향해 나가라는 말씀입니다. <엘리아야, 너 절대로 낙심하지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가 무엇을 하든지,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한다. 지금까지도 너와 함께 했고, 너를 지켜왔고, 또 너를 보호했던 것 처럼, 이제 이후에도 너를 향한 나의 기대와 꿈은 반드시 계속 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놀라지 말아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잡아 주리라, 이사야 41:10> 바로 이런 약속이 이 질문 속에는 녹아 있습니다. 이 아침 말씀을 마치면서 저는 다시 한번 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진실로 하나님만이 우리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참으로 아합의 후손들이 쥐락펴락하는 칠흑 같이 어두워가는 세상사라 할지라, 그래도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인간 역사의 흥망과 성쇠를 주관하시는 왕의 왕이요, 주의 주가 되십니다. Clearly and distinctly I proclaim Our Lord is the King of kings and the Lord of lords. Amen>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