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은퇴목사 주일예배설교
주제 : <죽음 – 제 3의 이민>
예수의 죽음 – 다 이루었다
오늘의 본문 : 요한복음서 19장 28절 – 30절
교회력에 따르면 사순절을 마쳐가는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이 한주간은 고난주간으로 지키며, 특히 이번주 금요일은 <성 금요일, Good Friday>이고 오는 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성서에 나타난 여러 인물들의 죽음>을 살펴온 시리즈 설교로써 35번째 시간인데, 때마침 오늘은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게 되어 참으로 시의가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저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인간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기는해도, 그 어떤 목적을 가지고 죽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죽음이란 자연적입니다. 그냥 병이 들거나, 늙어지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사고를 치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죽음에는 목적이 있는 죽음도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도 목적이 있는 것 처럼, 인간이 죽는데도 나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죽는 경우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태평양전생시 일본군인들의 가미가제 자살 처럼 죽는 경우나 지금도 폭탄을 안고 죽음 속으로 뛰어드는 극단적 무슬림들을 포함하여 국가와 민족, 혹은 자신의 신념이나 신앙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자유와 정의, 진리와 양심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불태우거나 단식을 통해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고, 종교적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처참하게 죽임당하는 순교 또한 목적있는 죽음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자식이나 부모나 이웃의 목슴을 건지기 위해서, 살신성인하는 소방대원들이나 구조대원들 같은 의로운 이들의 죽음 또한 우리 모두의 가슴을 찡하게 만들어 주고 눈물 흘리게하는 목적있는 죽음이라 할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각종 신화나 호머의 서사시나 소포클레스의 비극적 작품, 혹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통하여 흔히 다음과 같은 5가지의 형태의 죽음은 <숭고한 죽음, Noble Death>이라 칭하였습니다. 첫째 신의 뜻에 순종하는 죽음, 둘째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적 죽음, 셋째 죽지 않을수 있는데도 끝까지 피하지 않고 받아드리는 죽음, 넷째 마지막 까지 고통을 감수하는 죽음, 다섯째 신을 감동 시키는 종교적 죽음 – 그런데 그들은 그 어떠한 사람도 동시에, 한꺼번에, 자기 몸 하나를 가지고 이 5가지를 모두 다 만족시킬수 있는 죽음을 택할수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일부 기독교 신학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이야말로 그리스적 Noble Death의 최고 정점이라 하면서 예수님의 죽음은 이 5가지를 모두, 동시에 만족시킨 죽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하려고하는 예수님의 죽음은 어떤 죽음이고 어떤 목적을 지닌 죽음이었을까요? 물론 예수님의 죽음은 자연적 죽음도 아니고, 앞에서 말씀드린 사람들의 목적있는 죽음과도 확연히 다릅니다. 예수님의 죽음 또한 분명한 <목적있는 죽음>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분의 죽음은 자신이 세운 자기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 전우주적 목적, 모든 인류를 위한 구속사적 목적>이었다는 데서 동서양의 철인들이나 순교자들이나 자신을 죽여 남을 구해낸 사람들의 희생적 죽음과는 구별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의 변형이었으니까 우리들 처럼 언젠가는 죽을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도 아니고, 인간사회의 어떤 부분적, 지역적, 종교적, 이념적 자기 희생을 위해서 죽으신 분도 아닙니다. 그의 죽음은 <결코 죽을수 없는 생명 그 자체의 자기 버림>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생각과 상상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예수님은 본래부터 <생명 그 자체이며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데도 불구하고 그의 생명을 버리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 인간이란 <아무리 죽지 않고 살려고 몸부림을쳐도 결국은 죽을수 밖에 없는 존재인데> 예수님은 사실 <아무리 죽으려고 해도 절대로 죽을수가 없는 존재인데> 스스로, 억지로, 무리해서, 그 불가능한 죽음을 불러들임으로 사망을 생명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우리 묵상의 촛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살려고 너무 안달하지 말아라. 인간이란 어짜피 죽게 되어있다. 죽을려고 해 보아라. 그런 살게되어 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인간을 살리셨고 인간들은 끝까지 살려고 하지만 결국은 죽는다. 죽으면 살게 되고 살려고하면 꼭 죽게된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출발점입니다. 우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가장 오래된 신학적 설명중 하나는 <대속적 죽음>입니다. 그는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스스로 죽음을 자취하셨다는 이론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을수 밖에 없는 죄인이고 죄의 값은 사망이므로 모든 인간은 예외없이 그 누구나 다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시어 우리 대신 그 죄의 값을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이론입니다. 옛날 유대교에서는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 같은 동물을 죽여 그 피를 흘리게하는 동물제사를 통하여 <나의 죄는 씻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죄란 인간 보다 차원이 낮은 동물같은 것을 죽여가지고서는 인간들의 그 죄를 씻을수가 없고, 오히려 인간 보다는 높은 차원의 존재인 하나님 자신이 친히 자기 생명을 버려 제물이 되어 주실 때만이 마침내 인간의 죄는 씻어진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양, 고전 5장 7>이니,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 요한 1장 29>혹은 <아사셀 염소>라고 부릅니다.
성경에는 한분 하나님에 대해 서로 모순되고 충돌되듯이 보여지는 두가지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상입니다. 법과 원칙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밑바탕에 깔려있는 기본적 대전제가 바로 이 법적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하나의 법을 정하셨습니다. <동산 나무의 모든 실과는 다 먹을수 있다. 그러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아라. 먹는 날에는 반듯이 죽으리라> 그러면서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원칙을 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정하신 법을 거슬려 순종치 아니함으로 범죄자가 되었고 그후 이 땅에 태어난 아담의 후예들인 우리 인류는 그 죄의 유전자, 죄의 DNA를 이어받음으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게> 되었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을 들어내는 말씀입니다. <주의 오른 손에는 정의가 충만하며> <그는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앉고 일어섬과 모든 행위를 아시나니>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오직 너희는 공법을 물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리게하라>고 하십니다. <하지말라>는 것을 하거나, <하라>는 것을 하지 아니하는 것은 죄요, 죄인에게는 심판이 있고, 그후에는 형벌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는 <죄형법정주의, Principle of Legality, no penalty without a law>라고 이름합니다. 처음부터 사랑이 차고 넘치는 하나님께서는 그냥 <오냐, 오냐> 하시면서 어린아기 다루듯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어도 묵인히시고, 용서하시고 무조건적으로 사랑만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한번 정해놓은 법과 원칙에 따라 엄격하고 공의롭게 행하십니다. 때문에 인간의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 죄를 묻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그야말로 인간 세상과 역사는 엉망 진창이 되고 말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공의로우신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는 또 하나의 다른 하나님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모습과는 사뭇 어긋나거나 충돌이 되는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셔서 그의 지은 죄를 용서하지 않으지만 동시에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성하신 분, 시편 103:8 145:8>으로써, <나는 여호와라 나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며 인자와 긍휼이 많은 하나님이라. 너희의 죄와 허물 묻지 아니하고 그 죄를 죄대로 갚지 아니하며 너희 자손에게 그의 죄를 넘기지 아니하리라, 출 34:6>고 선포하십니다. <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줄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하리라, 사 1:18>고 하십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과 <사랑이 차고 넘치며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며 용서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이 두가지 서로 충돌되는 하나님의 속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법과 원칙과 공정성에 따라 인간의 죄를 묻고 심판하시고 형벌에 쳐하여 영원히 죽게 하실 것인가? 그럼 <사랑의 하나님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고해서 이미 죄를 범한 인간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냥 무조건 용서해 주시고 덮어 버리시고 바다보다 넓고 하늘 보다 크신 그 사랑으로 용서해 주실 것인가? 그렇게 한다면 먼저 정해놓은 공의와 원칙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여기에 하나님의 고민이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공의도 이루고 사랑도 온전히 이루어 낼수가 있을까? 이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만족 시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한번 정한 그 법과 원칙도 온전히 지키는 <공평하신 하나님>과 영원히 변치아니하는 <사랑의 하나님>도 확실하게 증명하는 길은 무엇일까?
여기에서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이 바로 <내가 벌을 받자! 내가 만든 인간들이니까 내가 그들 대신 매 맞고 벌을 받고 내가 죽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곧 하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신으로써의 하나님이 보이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분입니다. <나를 본 자는 곧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한 14:9>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인간들을 대신하여 자기가 만드신 법과 정의의 질서에 따라 자신이 친히 십자기를 지고 벌을 받아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우신 공의와 법과 원칙도 지키시도 또 하나님은 온전히 사랑과 자비의 아버지 되심도 동시에 완수할수 있다고 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럼 내가 벌을 받자! 내가 대신 죽자!>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것을 훗날 루터나 칼뱅을 중심한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형벌 만족설, Penal Satisfaction Theory>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예컨대 어떤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에게 훈육 차원에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해 봅시다. < 야, 너 이러 이러한 잘못을 하면 곤장 100대를 맞고 집에서 내쫓아버릴거야!> 그런데 그만 어느날 그 아들이 아버지의 명을 가볍게 여기고 금지한 법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이 때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세우고 종아리를 겉으라고 하신 다음 짝! 하면서 한대를 때렸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않되겠다. 100대 다 때리면 넌 꼭 죽을 것 같구나! 나머지 99대는 내가 네 대신 맞을께! 법은 법이니까 지켜야 하지만 그래도 너는 내 아들이니까, 내가 대신 맞으마!> 그리 말씀하신 후 인정 사정 없이 죽도록 자기 자신의 종아리를 후려쳤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 상에서 죽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을 동시에 보게 됩니다. 우리 인간들은 사랑이 많거나 의롭거나, 그 둘 중 어느 한편으로 기울어질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사랑이 많으면 우물 우물 하면서 의를 지키기가 어렵고, 추상 같이 공의로운 사람은 반대로 사랑과 용서를 베풀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대립되는 <공의와 사랑> <자비와 정의>의 관계를 동시에, 일시에, 한꺼번에 완전하게 완성시킨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당신이 친히 죄값을 다 치루시고, 벌을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묻지도 아니하시고 무조건 그냥 용서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에게>물으신 것입니다. 우리 대신 <그를> 죽이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는 사랑과 의를 동시에 완성하신 하나님 만이 하실수 있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오는 금요일이 바로 그날입니다. 서구에서는 오랫 동안 이날을 God’s Friday – 하나님의 금요일이라고 불렀습니다. 언어학자들에 의하면 원래는 이렇듯 God’s Friday, 하나님의 금요일, 성금요일, 거룩한 금요일이라고 불렀던 날이 음운의 변화를 통하여 Good Friday가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마치 영어의 Good-Bye, <잘가>라는 말도 본래는 God be with you – 하나님이 함께 하시길 – 이라는 인사의 음운이 변화가 된 것과 비슷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여튼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죽으신 날 – 하나님이 벌 받으신 이 날, 이날은 Good Day요, Good Friday요, Holy Day요, Great Day, Wonderful Day입니다.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가 산 날이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다싶이 신약성서 처음에 나오는 4복음서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에 대하여 동일하게 똑같이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 객관적 기술을 하고 있는 역사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신앙의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한 주체적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신앙의 책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셨다고 전해지는 7마디 말씀인 가상칠언도 복음서 마다 제각기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서에 따로따로, 들쑥날쑥하게 기록된 가상칠언도 듣기 좋고, 보기 좋게 정리해서 읽고 묵상하도록 정돈된 것입니다. 가상칠언 중, 제일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도 마태에서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마태 27:46>라고 하신 것으로 되어 있고 누가에서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신 후 숨지시니라, 누가 23:46>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가싱칠언 중 마지막 말씀을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라고 기록해 주고 계십니다. <다 이루었다 하시고 마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 가시니라> 이는 요한복음서의 특수자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AD 1세기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사도 요한의 신학사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서에 의하면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33년의 사역을 마치시고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라는 선포요, 선언입니다.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 가시니라> 이 <다 이루었다>는 헬라어로 <tetelestai, 테텔레스타이>로 되어 있는데, 영어성경에는 It is finished. It is accomplished. 혹은 completed 등으로 번역되여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모두 <다 이루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다 이루었다, tetelestai, finished, completed>라는 말에는 몇가지 다양한 의미들이 모여있습니다. <맡겨주신 일을 다 완수했습니다> <빌린 돈이나 은행 모기지를 다 갚았습니다> <계획했던 미술 작품이나 음악 작품이나 건축물을 다 끝내고 완수했습니다> <불완전하게 생겼던 것을 완전하게 다 고쳤냈습니다> <병든 몸을 완치했습니다>이렇듯 맡겨진 사역에 대한 완수, 세웠던 목적의 달성, 빚진 것에 대한 청산,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만듬 같은 것을 통털어서 <다 이루었다>고 하였습니다. 주석에 의하면 본래 헬라어 tetelestai란 당시 주인이 종에게 무슨 일을 시켰을 때, 그 일을 다 하고 난 후 종이 주인에게 와서 하는 말이 tetelestai 라고 보고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주인님, 시키신 일을 다 했습니다>하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서 17장 4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라는 귀절에서도 tetelestai, <내가 다 이루어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번 주 금요일,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아들되는 종에게 맡기신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빚진 것을 대신 다 갚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것을 대신 죽어 주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의와 사랑은 동시에 완수되어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역사는 온전케 되었고, 빚은 청산이 되었고, 죽음은 생명으로 전환되었습니다. Good ! Good Friday !God Friday ! Great ! Wonderful ! <다 이루었습니다 ! Tetelestai ! It is finished ! It is completed !> 이럴 때 외치는 것이 바로 <할렐루야!>입니다. 할렐루야! 주를 찬양합니다! 주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는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 아멘. 아멘. 아멘. 할렐루야 !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