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은퇴목사 주일예배설교
주제 ; <죽음 – 제 3의 이민>
두 강도의 죽음 – 끝이 좋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 누가복음 23장 39절 – 43절 (참고 ; 마태 27장 38-44 / 마가 15장 27절 – 32절)
<죽음 – 제 3의 이민>이라는 주제에 따라 오늘 34번째로 나누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의 좌우편에서 함께 처형당했던 두 강도의 죽음 이야기입니다. 본문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 말씀에 대한 큰 그림부터 그려 보기로 하겠습니다.
꼭 신학교에 가서 신학공부를 하지 않으신분들도 <공관복음서>라는 말은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이 말은 신약성경 첫 부분에 나오는 마태, 마가, 누가라는 3개의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나 사역에 대해서 그 어떤 <공통된 관점에서 기록한 복음서>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좀 더 관심을 갖고 조금만 깊이 들여다 보면 마태, 마가, 누가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사역에 대해서 그 어떤 공통된 이야기와 관점도 있긴 하지만, 동시에 그렇지 않은 부분도 적지 않게 많이 있음을 발견 할수 있습니다. 예컨대 누가복음서만 살펴보아도 이 복음서 안에는 마태나 마가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오직 <누가복음서에만 나오는 스토리들>이 거이 50%나 됩니다. 첫장 부터 데오빌로각하 이야기, 사가랴와 엘리사벧 이야기, 마리아의 송가, 목자들의 경배, 안나와 시므온의 찬가, 소년 예수의 성장과 12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간 스토리로 부터 시작하여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한 죄 많은 여인 이야기, 예수님의 여제자들 명단,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잃은 은돈을 찿아 헤매는 여인의 비유, 탕자 이야기,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10명의 나병환자들을 고치셨는데 그중에서 유독 사마리아 사람만이 감사한 스토리, 과부와 재판장 이야기, 바리새인과 세리 이야기, 삭게오 이야기,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들은 다른 복음서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오직 누가복음서에만 나오는 이야기들입니다. 이런 누가의 특수한 이야기들은 누가복음서 전체의 거이 반이나 됩니다. 물론 누가의 이런 자료들 –영어로는 L Source라고 합니다만 – 누가에만 나오는 이런 누가의 특수자료들을 누가는 어디에서 찿아온 것인지 – 구두전승자료인지 아니면 이미 기존의 어떤 문서자료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여기에는 분명히 마태나 마가와는 다른 누가만이 지녔던 그의 특별한 어떤 신학적 관심과 성격이 반영되어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은 누가를 단순히 공관복음서 기자로만 보지 않고 마태나 마가와는 다른 독립된 <신학자>로 보고, 이해하려고 합니다. 길게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이렇듯 공관복음서와는 다른 누가 신학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수님은 그 어떠한 사람도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사랑하시며 구원해 주시는 분> 이라는 것입니다. 남자나 여자, 어른이나 어린이, 박사나 목자, 유대인이나 이방인, 바리새인이나 세리, 건강한 사람이나 장애인, 부자나 가난한 사람 등등- 모든 인간은 예외없이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은 죄인들이며 동시에 그분의 사랑과 용서에는 결코 차별이 없다는 입장에서 그의 복음서의 자료들을 취사, 선택하여 기록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그 어떠한 제한이나 차별이란 없다. 돈이 있던 없던, 나이가 많던 적던, 남자이던 여자이던, 강도이던 아니던 간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한없는 그 사랑을 의지하고 받아드리기만 하면 그 사람에게는 구원과 영생이 주어진다>는 것이 누가신학의 특징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 이야기>도 오직 누가에만 나오는 누가의 특수자료 중 하나입니다. 물론 마태나 마가에도 이 두 강도들의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거기에는 그냥 짧게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같이 예수를 욕하더라>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유독 누가만은 <그 중에 한 강도는 예수를 욕했는데, 다른 강도는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자기의 영혼을 예수님께 부탁함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스토리를 길게 첨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앞서 우리가 잠시 살펴본 누가복음서의 특징이며 누가신학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제는 본문 말씀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시겠습니다. 예수님 당시, 십자가 처형은 주로 사상범들, 정치범들, 독립운동가들에게 시행했던 사형방법이었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씻기 원하네>라는 귀절이 나오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 나오는 <강도들>은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로마의 식민지적 통치권력에 저항했던 독립운동가들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일 가운데 세워놓고 그 좌우편에 두 강도를 세워서 처형한 것은 <이 예수라는 자도 이들 강도와 똑같은 악인이고 그 셋 중에서도 제일 큰 죄인이며 따라서 죽어 마땅하다>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그의 죽음을 욕되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오래전에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그는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사 53:12)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와 마가에 의하면 처음 이 두 강도들은 똑같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욕을 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런데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 다시 말하면 그날 십자가에 못박힌 시간이 아침 9경이고 예수님이 운명하신 시간이 오후 3시 경이니까 약 6시간이라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두 강도들은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7마디 가상칠언을 들으면서 서로 말 싸움을 하게 됩니다. 한 강도는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보시요.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당신과 우리를 이 십자가에서 구원해 주시오> 그런데 다른 강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아라.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하여 이렇게 죽게되었지만 그러나 지금 십자가 위에서 이 분이 하시는 말씀이나 기도를 들어보니 이 사람이 하는 일은 모두가 다 옳은 일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부탁합니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이를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시옵소서> 이때 예수님은 즉각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본문에서 제일 논쟁적 단어는 <낙원>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낙원>이란 인간이 <죽은 후에 마지막으로 가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지옥과 천당 사이에 있는 중간지대로써 흔히 말하는 <연옥>이라고 보는 입장도 퍽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과 동시에 그 즉시 천당 아니면 지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재림 후 최후의 심판이 있기까지는 어디선가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을수 밖에 없는데 그곳이 바로 <낙원>이라는 해석입니다. 라틴어로는 paradisus, 영어로는 paradise라고 하는데, 이 파라다이스, 즉 <낙원>이란 백보좌 심판 후 최종적으로 가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하늘나라>에 가기 전에 일시적으로 가 있는 곳이라는 해석입니다. 성경에는 낙원에 대한 기록이 3번 나오는데 오늘 본문 이외에 바울이 환상 중에 3째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는 그곳을 <낙원에 끌려 올라가서>(고후 12장 2-4)라고 표현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계2장 7절) 하는 말씀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범죄한 후에 쫓겨났던 곳을 창세기 기자는 <낙원>이라고 부르지 않고 <에덴 동산>이라했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죽은 후에 옮겨간 곳도 누가는 <낙원>이라하지 않고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했습니다. 직접적으로 하늘나라니, 하나님 나라니 하는 표현을 쓰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 즉 사람이 죽은 후에 가는 낙원에 대해서는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선 아직도 논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두 강도들의 이야기에는 몇가지 상징적 의미들이 있습니다. 그중 첫째는 <모든 인간들은 다 강도들이요, 강도들과 같은 존재들이며 따라서 죽어 마땅하다>는 메시지입니다. 강도짓을 했느냐, 않했느냐와는 상관 없이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탐욕적 존재요, 교만한 존재로써 세상살이를 하는 동안 꼭 강도같은 삶 까지는 살지 않았다 하더라도 오십보 백보 인생길을 걸어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외 없이 강도요, 죄인들이요,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마땅한 존재들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밝혀주는 것이 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의 스토리가 전하려고 하는 오리지날 메시지입니다. 둘째로 이 강도 이야기는 <모든 인간들은 마침내 구원받는 사람과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누어 지게 되어있다> 메시지입니다. 삶이 끝나면 죽음이 옵니다. 그러나 죽음이 오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는 영생과 영벌이 기다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누구든지 심판 받지 아니하고 영생 얻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차별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대한 인간들의 반응은 두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자신의 죄인됨 –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 인간의 한계와 무능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아드리는 자와 그렇지 아니한 자>로 갈라집니다. 구원얻는 강도와 구원 받지 못하는 강도로 나누어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죽을 때>가 가까워오면 그의 말이 선해지게 됩니다. 옛말에 <鳥之葬事에 其鳴耶悲하고 人之葬事 基鳴耶善>이라했습니다. <새는 죽을 때가 되면 그 소리가 구슬퍼지고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그 말이 선해지느니라> 곧 죽음의 순간이 다가 올텐데도 불구하고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면서 자신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깨닫질 못하고, 여전히 다른 사람을 향하여 비아냥 거리고, 조롱한다면 그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아무리 잘못된 삶을 살아왔다 하더라도 죽음의 그림자가 낮게 드리우면 <行有不得 反求諸己>해야 합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시옵소서> 이런 것이 죽음 앞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바른 자세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사람들이 이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 이야기>에서 더 심각하게 관심을 갖는 내용은 <누구던지 죽기전에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그 사람도 구원을 얻을수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여기 성경에 나오는 한 강도처럼 비록 아무리 강도 짓을 하고 예수님을 전혀 믿지 않았다 할지라도 죽기 직전, 숨을 거두기 직전에 회개하고 깨달아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당신의 나라에 이를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말만하면 그럼 그 사람은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고 엇갈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가족 중 병상에서 초조하게 운명을 기다리는 이들을 찿아가서 <믿으시지요? 믿으세요! 아멘! 아멘! 따라서 해보세요!> 하면서 안타갑게 임종 기도를 드리는 목사님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심방이나 기도는 한 목회자의 사랑으로 가득찬 목회적 배려의 차원에서 하는 것이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아멘> 한 마디한다고 해서 구원을 얻고 국천에 갈수 있다고 말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도 적지는 않습니다. 오랜전에 이창동감독이 제작했던 영화 <밀양>에서 우리는 살인자 송강호 처럼 <나는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갔지만 거기에서 예수를 알게되어 그분을 믿고 영접함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다> 말하는 것에 대하여 도저히 이를 받아드리기가 힘들어 고민하는 아들을 잃은 여주인공 전도연의 부르짖음을 맞다트리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누구든지, 그 어떤 악행을 했던지간에, 마지막 순간에 예수를 믿기만하면 구원을 받은 같이라는 생각에 선듯 동의하기가 쉽지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개신교에서도 장로교와 감리교에서는 그 강조점이 같질 않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영접하면 그것으로 구원은 완성된다. 인간은 그 누구던지 자신의 의나 공로로 구원을 얻을수는 없다. 오직 은총! 오직 믿음! 이것이 구원의 키다! 그러므로 누구던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믿기만하면 구원을 받는다!>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아니다! 주님을 믿고 영접하는 것은 구원의 시작일 뿐이다. 그 후엔 구원 받은 사람답게 성화된 삶을 살아야지 마침내 최종적 구원은 완성된다! 만약 믿기만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면 ,그럼 무엇 때문에 일찍 부터 예수 믿고, 십자가를 지고, 헌신 봉사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예배드리고, 십일조를 드리고, 전도하고, 선교하며 그 힘들고 어려운 골고다의 길을 걸어가야한단 말인가?>하는 주장이 엇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AD 313년 콘스탄틴 대제는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승인해 주었으면서도 그 자신은 평생 죄를 지을수 밖에 없는 제왕이기에 죽기 직전에 가서 세례를 받겠다고 했던 적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마주한 구원받은 강도와 버림받은 강도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한 수많은 기록과 해석 가운데 하나의 예시요, Example이라 할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구원론>대한 여러가지 해석들과 다양한 교리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서에 등장하는 이 구원받은 강도 이야기는 그런 많은 구원 스토리 중 하나의 특별한 케이스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일반화하려는 유혹에 빠져서는 않됩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그 어떤 특별한 케이스, 예외적인 스토리를 마치 일반적인 것인양 설명하거나 해석하는 우를 범하지 않토록 조심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누구를 막론하고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다 구원을 받는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 누구던지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어떤 특별한 상황 속에서, 특별하게 주어진 예외적인 케이스를 가지고, 그것이 마치 일반적인 진리인양 말하지 않토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 순간 예수님을 알아보고 고백함으로 구원받은 이 한 강도 스토리에 대해서는 <이런 케이스도 있습니다>라고 말해야지, 일찍 주님 영접하고, 십자가를 지고 순교 당하고, 이웃을 내몸 처럼 사랑하여 모든 것을 내어주고, 주를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해 헌신해온 주님의 자녀들에게 기쁨과 영광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강도 스토리는 우리들에게 <끝이 좋아야만 모든 것이 좋다> <죽을 때 잘 죽어야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사람마다 성공할 확율, 돈벌수 있는 확율, 병고칠수 있는 확율은 다 다릅니다. 허지만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100% 딱 들어 맞는 확율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사람에 따라 죽는 시간, 모습, 방법, 형태, 원인들은 천차만별이겠지만 그러나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 9:27)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니>(시 146:4)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창3:19)는 말씀은 진리입니다. 저도 여러분들도 100% 죽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를 4가지 케이스로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첫째는 시작도 좋고 끝도 좋은 경우입니다. 둘째는 시작은 좋았으나 끝이 않좋은 경우입니다. 셋째는 시작은 나빳지만 끝은 좋은 경우입니다. 마지막 넷째는 시작도 나쁘고 끝도 나쁜 경우입니다. 본문의 한 강도는 <시작은 나빳지만 끝은 좋은 케이스>였고, 다른 한 강도는 <시작도 나빳고 끝도 나쁜 케이스>라 할수 있습니다. 독일 속담에 Ende gut alles gut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All is well that ends well.입니다.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 그렇습니다. 마무리를 잘해야합니다. 인생의 마무리는 죽음입니다. 잘 죽어야합니다. 우리 모두 다 잘 죽기를 바랍니다. 끝내기를 잘해야 합니다. 바둑도, 골프도, 그림도, 음악도, 말도, 글도, 그리고 설교도 끝내기, 마무리를 잘해야합니다. 사작과 과정은 그럴듯하고 칭찬도 받고 제법 잘 나간다고 좋아하다가도 끝이 않좋으면 모든 것이 다 도루묵입니다. <유종의 미>를 영어로는 Crowning glory, <면류관을 쓰는 기쁨>이라고 표현합니다. 맨 나중에 웃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He laughs best who laughs last. 성경에는 시작은 좋았지만 끝이 별로 않좋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사울, 아나니아와 삽비라, 그리고 오늘 본 십자가상의 한 강도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마무리가 정말 좋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요셉, 다니엘, 스데반, 사도 바울, 그리고 또 다른 한 강도 같은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최고 정점, 최대의 peak time은 죽음입니다. 죽을 때 잘못 죽으면 일생을 망치게 되고, 죽을 때 아름답게 마무리하면 그의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지만 끝이 나쁘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끝 마무리는 죽음의 때가 점점 다가올수록 <자신의 죄인됨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손 꼭잡고 주님 바라보면서>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해 주소서> 라고 말하면서 숨을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점점 죽음의 순간을 가까이 대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시작도 좋았으니 꼭 끝도 좋게 마무릴 잘 할수 있기를 바라며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갑니다. 주 니를 외면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갑니다> 찬송하면서 이 땅에서의 삶을 가장 아름답게 마무리 할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