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잡기장

감탄 (感歎)
사전적으로 <감탄>이란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하여 깊은 느낌이나 공감이 생겨나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라고 되어있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신비스런 자연 현상이나 사회적 변화, 혹은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이나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에 대하여 기쁨을 느끼거나 슬픔이 생겨나서 소리나 행동으로 이를 나타내는 것이 <감탄>이다. 한자로 感은 <느낄 감>이고 歎은 <탄식할 탄>으로 어떤 것에 대하여 느낌이 와서 소리를 지른다는 뜻이다. 영어로는 흔히 amazing, admiring, 혹은 impressing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우리 말에서 놀람과 두려움, 슬픔과 아픔, 기쁨과 행복감 같은 인간의 감정을 나타내는 감탄사로 사용되는 말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아, 야, 어, 예>를 비롯하여 <아이고, 에구, 에구머니, 아풀싸, 아차, 옳소, 천만에> 같은 말들이 흔하게 사용되는 감탄사들이다. 이와 흡사한 단어는 영어에도 많이 있다. <Oh! Ah! Wow! Oop! Hooray! Alas! Oh Dear! Oh, Yeah!, Oh No! Oh my God! Oh Jesus!> 이런 단어들은 영어를 잘 몰라도 잘 듣기도 하고 때로는 쓰기도 하는 감탄사들이다.
그런데 이즈음 우리 부부는 점점 가면 갈수록 감탄사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이것도 노망이거나 혹은 초기 치매 증상은 아닐까 염려가 되기도 한다. 확실히 8학년에 들어서니 신체적으로만 연약해 지는 것이 아니라 지성적으로도 어눌해 지고 감성적으로도 점점 둔감해지는 것이 현실이다. 제 아내에게도 18세 소녀시대가 있었고, 나도 20대 낭만의 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시절 우리는 아름다움과 추함, 참된 것과 거짓된 것, 기뻐 할 일과 슬퍼해야 할 일 그리고 신비로움과 거룩한 것에 대해 웃으며 소리도 지르고, 기뻐하며 행복해 하기도 했고, 또 울며 슬퍼하기도 했었다. 다른 이들과 비슷하게 우리도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슬픔과 기쁨의 감탄 속에서 한 시대를 살아왔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지 우린 서서히 감격과 감탄, 신비와 놀라움에 대하여 감정이 둔해지고 있다. 이젠 세상 모든 것이 다 그게 그것 같고, 전에 어디선가 보았던 일들이고, 수도 없이 많이 경험해 본 일들 처럼 느껴져서 무덤덤해 진다. 사실 나는 지난날 50년이 넘는 목회의 과정을 통해서 생명의 신비로운 탄생과 생명체의 놀라운 회생을 많이 경험해 왔다. 그리고 동시에 숫한 인간의 죽음과 슬픔도 함께 지켜보면서 인간의 온갖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어 왔다. 이들 하나하나의 개별적 경험과 인간적 및 영적 만남 속에는 이루 말로는 다 할수 없는 기쁨과 감사가 묻혀 있는가 하면 동시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슬픔과 절망이 교차되기도 한다. 우리는 지옥에 가도 더 슬퍼 할 것 같지 않은 경험도 해 보았고, 천국에 가도 더 이상은 기뻐하지 않을 것 같은 순간들도 여러 번 경험해 왔다. 그레서인지 이즈음 우리 부부는 점점 더 감정은 매말라 가고 감탄의 소리는 줄어들어 가고 있다. 우린 자연의 신비로움에 대해서도 별로 놀라지 않고 감탄하지 않는 바보들이 되어가고 있다. 30년전 나이아가라나 이과수나 빅토리아 폭포 앞에서 흥분하고 환성을 지르며 하나님을 찬양했던 일들은 점점 까마득해지고 있다. 우린 이즈음 후배들의 청첩장이나 부고에 대해서도 별로 크게 반응하질 않는다. 우린 뛰어난 자연경관이나 미술 작품이나 음악을 들어도 전처럼 흥분하지 않는다. 우린 아무리 슬픈 추도사를 들어도 별로 마음에 닿지 않는다. 하도 많이 들어서 둔감해진 미사여구들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린 6-70년대 한국에서 우리를 웃겼던 개그맨들 – 구봉서나 배삼룡이나 서영춘 – 은 물론이고 지난 세기 세계를 들었다 놓았다 했던 시대의 개그맨이었던 버나드 쇼가 나타나서 독설을 퍼붓어도 좀처럼 감탄하지 못할 것 같다.
그럼 이것은 무슨 현상인가? 병이다. 나와 나의 아내는 지금 점점 정서적으로,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인간적으로 병들어가고 있다. 공감능력을 상실하고 감탄하는 것을 잊어버린 중병에 걸렸다. <웃는 자들과 함께 웃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야 하는 감탄과 공감의 신앙>을 잃어버렸다. 사실 기독교 신앙의 목표는 <나 구원 받는 것>을 넘어서서 <너 구원해 주는 것>에 까지 이르러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우린 예수 믿고 구원 받은지가 언제인데 지금도 여전히 <나 구원 받는 것>에만 매달려서 <너 구원해 주어여 할 책임>은 외면한채, 영적, 정신적 공감과 감탄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가 싶어 참 부끄럽다. 물론 여러가지 핑게거리를 댈 수는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 시대 우리의 감성을 무디게 만들고 감탄하는 법을 빼앗아 간 물질주의와 그 주인공들에게 삿대질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 않된다. 그럼 희망이 없다. 쏟아지는 폭우속에서 우산을 받쳐주던 아님 같이 비를 맡으며 걸어가던, 방법은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공감과 감탄이다.
비슷한 말 같지만 <감탄한다>는 말과 <감탄이 나온다>는 말에는 차이가 있다. <감탄한다>는 말은 스스로 감탄하려고 마음먹고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감탄이 나온다> <감탄이 우러난다> <감탄이 터진다>는 말은, 나의 의지나 마음 먹음과는 관계 없이 그냥 속에서 자연스럽게 터져나오는 반응이다. 감탄과 감격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공감과 나눔도 힘쓰고 노력해야 한다. 감탄과 공감도 <감탄하려고 노력 하다>보면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날>이 올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데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아! 그랬었구나! 알고나니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고 나니 사랑하게 되는구나!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온다.
시인 나태주의 <풀꽃>을 읊조려 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아! 정말 그렇구나! 자세히 보고, 오래 보고 나니 정말 예쁘고 아름답구나! 이젠 저절로 감탄이 터져나온다!
우리 부부는 나이를 더해 감에 따라 점점 더 자연과 인간, 사회와 역사에 대해 둔감해지는 우리들의 감탄사를 회복하기 위하여 주어진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하고 사랑하리라 다짐한다. (*) 홍길복 (2025. 7. 22)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