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잡기장

세상의 모든 철학
• <세상의 모든 철학>의 영어 원서 제목은 <A Short History of Philosophy>이다. 제목만 보면 흔한 철학사들 가운데 하나 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책은 대부분의 철학사들 처럼 서양철학사 만을 취급하고 있지는 않는다.
이 책은 동서양의 모든 철학사를 비교적 골고롭게, 또 균형있게 다루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역자가 원저에는 표시되어 있지않은 <세상의 모든 철학>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은 아주 잘 한 것이다.
초판은 30년전 (1996년)에 나왔고 한국어 번역판도 거이 20여년전 (2007)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미국 텍사스대학의 철학과 교수들인 로버트 C. 솔로몬 (Robert C. Solomon)과 캐슬린 M. 히긴스 (Kathleen M. Higgins)가 함께 쓴 책이다. 한국어로 옮긴이는 박창호 평론가이다.
<나는 오래전 부터 시드니에서 인문학교실이라는 작은 독서모임을 해 오면서 이 책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었는데 최근 이 책을 다시 읽게 되었다. 이 잡기장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밑줄 친 부분들을 약간 가다듬어서 옮겨놓은 것들이다>

• 옛날 사람들은 신을 믿으려고 하는 신앙심이 있어서 신을 섬긴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두렵게 하는 성난 신은 우선 달래는 것이 제일 급선무라고 생각해서 신을 믿기 시작했다.
• 크세노파네스의 말이다. <신이란 인간이 만든 것이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 동양에서는 신들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사람들이 서로 조화롭게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삶의 기본이요, 기초는 가족이라고 보았다. 그럼 사회와 국가란 무엇인가? 이것들은 모두 가족이 확장된 것이라고 보았다.
• 유교와 불교에는 신이 없다. 신이 없어도 종교가 되었다. 이 두 종교는 신학이나 교리나 형이상학적 이론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인간과 인생이란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질문할 뿐이다.
• <힌두>라는 단어는 종교를 가르키는 말이 아니라 <인더스 강의 동쪽>이라는 뜻이었다.
• 힌두교에서는 신들에게도 수명이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신들도 죽는다고 보았다. 그런데그 신들 역시 인간이나 자연과 마찬가지로 죽지만 다시 살아난다고 믿었다. 힌두교의 어떤 문서에 따르면 신들은 보통 약 300조 년 마다 다시 살아난다. 힌두교에서 신들이 많은 것으로 보이는 것은 하나의 신이 여러가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 요가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듯이 육체적 훈련이 아니다. 요가는 <정신적 자기 훈련>이다. 그래서 요가는 <철학>이고 일종의 종교적 <수행>이다. 요가는 몸을 뜬뜬하게 하는 체력운동이 아니라 인생의 불의와 악, 슬픔과 비극, 늙음과 죽음으로 부터 자기를 해방시켜 보려는 정신적, 종교적 영성훈련이다. 요가가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무욕>이다.
• 히브리성서에서 여호와는 말한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아라> 이는 히브리인들도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한 말이다. 다른 신들이 아예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들도 있기는 한데, 그 중에서도 여호와 신이 최고신 이라는 것을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 히브리인들은 자기들 이외의 다른 민족들은 <이방인> 혹은 <야만인>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런 현상은 유대인들만 그런 것이 아이었다. 이집트인들은 누비아인들을, 로마인들은 북방민족을, 영국인들은 프랑스인들을, 프랑스인들은 독일인들을, 독일인들은 폴란드인들을, 폴란드인들은 러시아인들을, 러시아인들은 시베리아인들을, 미국인들은 인디안들을, 호주인들은 애보리진들을, 뉴질랜드인들은 마오리인들을, 유럽인들은 잉카, 마야, 아스텍인들을 늘 <이방인, 야만인, 사람처런 생기긴 했지만 사람이 아닌 존재>로 여겼다.
• 철학은 신화로 부터 분리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일을 처음 시도한 사람들은 그리스인들이었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신학적 교리로 만들지 않고 인간 삶의 다양한 모습으로 해석했다. 인간들에게 불을 전해 준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나 떨어지는 바윗돌을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끌어올리는 시지프스의 신화는 그리스인들이 신들의 이여기를 통하여 인간들의 삶을 해석하는 정형적 방식이라 할 수 있다.

• 모든 설명은 합리적, 이론적, 과학적으로만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적, 자연적, 은유적, 감성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이 둘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조화되고 상호보완적으로 인간과 신의 세계를 설명한다.
• 모순과 부조리를 꼭 해결해야 할 과제로 생각하지 말아라. 그것들은 해결되지 않는다. <모순과 부조리>는 인생의 해결되지 않는 본질이며 결코 풀리지 않는 속성이다.
• 위대한 과학자들일수록 과학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 오직 어설픈 과학숭배자들만이 과학이 모든 문제의 최종적 해결자라고 믿고 있다.
• 니체는 과학적 진리는 지극히 단편적이고 편협하다고 보았다. 그는 오히려 과학적 진리 보다 훨씬 포괄적이고 포용성이 넓다고 보았다. 미적 진리가
•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했다. <로고스란 들어도 모르고, 알아도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 <로고스, Logos>란 설명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설명을 할 수도 없지만 혹시 설명해 준다해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 헤라클레이토스
• 우리가 무엇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과거에 존재했거나, 지금 존재하고 있거나, 아니면 앞으로 존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생각 할수 없다. – 파르메니데스
• 철학은 지난 2천년 동안, 앞선 전제를 공격하기, 논리를 비판하기, 결론을 재해석하기, 논증을 재해석해 보기 같은 것으로 허송세월을 하다가 마침내는 상식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더욱 더 곤혹스러운 역설로 만드느라 시간을 낭비해 온 것이 아닐까?
• 인간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결코 자신의 주관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 프로타고라스
• 아테네의 황금기인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네의 민회는 군대의 장군들 조차도 투표로 선출했다.
• <철학의 최대 임무는 자신의 무지를 깨우치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
• <우리가 실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다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통치자들은 절대로 특권을 누려서는 않된다. 통치자들은 절대로 행복해서도 않된다> – 플라톤
• <인간 최고 최대의 목표는 이성적 존재가 되어 이성의 명령에 따라서 사는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 <실체란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없다가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실체란 그냥 그렇게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는 것이다. 난로는 불을 피우지 않아도 난로이고 소크라테스는 늙어서 대머리가 되어도 여전히 소크라테스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 <덕, Arete>란 물론 용기, 절제, 정의감을 지닌다. 그러나 아레테는 동시에 유머, 진정성, 우정 같은 것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덕있는 사람이란 <그냥 같이 살기에 편안하고 재미있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 유독 인간들만이 신에 대해서 더 큰 관심을 갖는 것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신께서는 자기가 만든 식물, 동물, 무생물 등 관심을 기울일 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신은 바쁘시기에 인간들에게만 특별히 더 큰 관심을 기울이질 못하신다. 세상 만물 중 유독 인간만이 유별나게 신을 찾는데 그 이유는 불안해서 그런 것이다. 현자는 불안해하지 않는다. 현자는 가장 불행한 상황속에서도 행복해 한다. 그것이 <아타락시아> 곧 평정심이다. 아타락시아란 신이 없어도 불안해 하지 않고 행복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 에피큐러스.
• 루크레티우스도 그의 <자연의 길, De Rerum Natura>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신은 인간들의 말과 행동에 따라서 이랬다 저랬다 하는 분이 아니다. 만약 신이 인간들의 말이나행동에 따라서 왔다갔다 한다면 그것은 신답지 못한 행동이다. 신은 인간을 자연 중 하나로 여기시는데 인간들은 유독 다른 자연물 보다 신에 대하여 더 크게 관심을 기울인다>
• 나는 여기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 – 그의 묘비명이 다시 떠오른다. <I hope nothing. I fear nothing. I am Free. 나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운 것이없다. 나는 자유다>
• 그 어떤 것도 바라는 것이 없을 때, 그 때 찾아오는 것이 평온이요 행복이다. – 피론
• 욕망을 줄이면 고통도 줄어든다. – 붓다

• 무엇을 희망하거나 간구하지 말아라. 그냥 되는대로 놓아두면 오히려 더 잘 되도록 정해두신 것이 신의 뜻이다. – 에피크테투스
• 행복 조차도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 세네카
• 자이나교에서는 말한다. <이 세상이 불행해 진 이유는 우리가 자꾸 그 누구에게, 그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가르치고, 주입시키려고 하는 데서 생겨난다. 그냥 가만히 놔두어라. 그러면 세상은 행복해 진다>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에서 말하는 <아마도주의, Maybe-ism>는 이런 것으로 부터 출발된 것이 아니가 싶다.
• 인도철학자 나가르주나 (Nagarjuna)는 앎과 지성에 대해 반대한다. <지적으로 알려고 애쓰지 마라. 모든 것은 그냥 주어진대로 맡기고 진실되게 살면 된다. 너의 집이 불이났을때, 너는 “아, 불이란 무엇인가?” 하면서 불의 정의, 불의 속성, 불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토론하고 공부할 것이냐? 인생이란 복잡한 것이 아니다. 간단하다. 지금은 그냥 불을끄고, 집을 다시 세우고, 열심히 사는 것이 인생의 바른 자세이다> 날마다 화재가 연이어지는 세상에서는 화재학을 연구하는 것 보다는 화재속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옳바른 태도이다.
• 인도철학에서는 종교와 철학, 신앙과 이성, 속된 것과 성스러운 것을 구별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것 같지만 좀 더 찬찬히 들여다 보면 그게 그것이요, 다 비슷한 것이라고 여긴다.
• 자이나교에서는 <모든 생명을 지닌 것들은 똑같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그들은 모기 한마리를 죽이는 것도 사람 한명을 죽이는 것과 똑같이 살인 행위로 취급한다.
• 카르마, Karma의 기본원리는 <모든 것은 준 것 만큼 받는다>는 것이다.
•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와는 달리 <하나의 신>만 인정하고, 하나의 신만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무슨 신을 믿어도 결국은 그것이 그것이라고 말한다.
• 힌두교나 불교에서는 전도를 하지 않는다. 전도하여 개종 시킬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신이 그 신이고, 그 하느님이 그 하느님인데, 굳이 그 신, 그 하느님 한분만 고집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 불교는 신성으로 가득 차 있는 종교이긴 하지만 신 자체는 없다고 가르친다.
• 붓다의 기본철학은 사성제 (四聖諦)로 요약된다. 1) 삶이란 고통이다. 2) 모든 고통은 욕망에서 생겨난다. 3) 허지만 우리는 모든 욕망은 콘트럴 할수 있다. 4) 욕망을 컨트럴하기위해서는 8가지 정도, 즉 팔정도 (八正道)를 따라야 한다.
• 팔정도 (八正道) 다음과 같다. 1 )올바로 보아야 한다 (正見) 2) 올바로 생각해야 한다 (正思惟) 3) 올바로 말해야 한다 (正言) 4) 올바로 살아야 한다(正業) 5) 올바로 노력해야 한다 (正精進) 6) 올바로 살펴야 한다 (正命) 7) 올바른 마음을 갖어야 한다 (正念) 8) 올바로 결정해야 한다 (正定)
• 유교의 핵심적 가르침은 <균형과 조화>이다. 공자는 <음악의 조화> 처럼 <사회를 조화롭게 만들어 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현명한 지도자란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은 것이라고 본 것이다)
• 유교에서는 인간을 독립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 <독립적 개인>이란 악한 것이라고 본다. Individualism은 반사회적이고, 개인주의자들은 사회적 유대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본다. 유교에서는 가정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며 더 나아가 그 가정이 확장된 마을, 동네, 이웃, 지역사회, 국가, 인류를 인간존재의 기본적 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서구의 개인주의 사상은 공동체를 더 중요시하는 동양사상과는 끊임없이 충돌하게 되어 있다. (시진핑과 트럼프가 충돌하는 것은 그들 두 사람 사이의 정치적 성향이 문제가 아니라 유교사상과 기독교 사상의 충돌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도록 가르치지만 유교는 <우리 모두의 행복>을 추구한다. 우리집, 우리 동네, 우리 사회, 우리 니라, 우리 모두의 행복이 개인의 행복 보다 앞서는 것이라고 본다. 나를 포함한 우리네 한국인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집 사람’ ‘우리 남편’이라고 말하는 것도 다 이와같은 ‘we-consciousness’가 그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 나아가 나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서구 사회는 정치-사회적으로 개인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를 하게 되어있지만, 유교를 뿌리로 하고 있는 동양사회는 불가피하게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더 가까워 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 유교에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 보다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유교는 인간 삶의 뿌리, 기초, 근본은 인 (仁)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仁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孝나 忠, 義나 信, 慈悲나 兼愛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고 가르친다. 유교는 계시, 말씀, 신앙 같은 것들을 중시하지 않는다. 서로 어울려서, 함께 살아가야 할 공동체적 세상에서는 어질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공자는 종교적 예언자가 아니라 인생의 스승이요 교사라고 보는 것이 맞다.

• 노자는 말했다. <가장 위대한 德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無爲가 최고의 덕이다> 그에 의하면 가장 위대한 통치자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자요, 가장 위대한 교사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아니하는 자이다.
• 장자는 무정부주의자였다. 그는 인간 행복의 최대 장애물은 정치요, 정부라고 보았다.
• <영원전 부터 영원 후 까지 살아 계시는 하느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기 전엔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지내셨을까?>
•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릴려다가 양으로 대치한 스토리는 고대 사회에서 인신공양이 동물제사로 대치된 기원을 말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흔히 <홀로코스트 Holocaust> 라고 한다. 그 뜻은 <동물을 불에 태워 드리는 제물>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쇼아 Shoah>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쇼아>는 히브리어로 <멸절, 파국, 싹쓸어 버림>이란 뜻이다.
• 서구 종교철학이 오랫동안 직면해 온 주제는 <왜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은 인간들에게 고통을 주시는가?> 였다. 서로 충돌되는 신의 속성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해석이 필요한 말은 올바른 말이 될 수 없다. 진리는 해석하지 않아도 알 수 있어야 한다. 성서는 해석 없이도 이해가 가능한가? 왜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은 그리도 말이 많은가?
• 선악과 이야기의 본질은 인간이란 처음 부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 존재라는 점에 있다.
• 유대교는 모든 정치적 문제에는 반드시 종교적 해석이 따라야 한다고 가르친다.
• 욥기가 가르치려는 핵심은 3가지다. (1) 인간 세상의 모든 비극과 고통의 배후에는 하느님이 있다. (2) 하느님이란 분은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분이다. (3) 이해되지 않는 불의와 고통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그래도 인간은 그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해서는 않된다.
• 신앙이 이성에게 양보해야 하는가? 이성이 신앙에게 양보해야 하는가? 헬렌이즘은 신앙이 양보하라고 외치고, 헤브라이즘은 이성이 양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필론은, 아담은 이성을, 이브는 감성을, 뱀은 욕망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 개인뿐만이 아니라 역사 자체를 아담과 이브와 뱀의 투쟁사, 즉 이성과 감성과 욕망의 투쟁사로 보았다. 이런 필론에게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사람은 사도 바울이다.
• 본래 예수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라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AD 313년 이후 카이사르는 하느님의 것도 자기가 다 갖고 말았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자 교회도 하느님의 것 뿐만이 아니라 카이사르의 것 까지도 다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카이사르는 하느님이 되고, 하느님은 카이사르가 되고 말았다. 역사상 기독교가 잘못한 것들이 적지 않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잘못은 <카이사르의 것 까지 다 자기들이 가져간 것이다> 예수교가 예수님 말씀을 제일 않듣는 집단이 되고 말았다.
• <이슬람>이란 말은 <살람, Salam>에서 나왔고 그 살람이란 말은 <샬롬, Shalom>에서 나왔다. 평화의 종교 이슬람과 평화의 민족 유대인들은 이 세상에서 제일 언행이 불일치 하는 비평화적 종교집단이 되고 말았다.
• 깨달은 사람은 결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침묵이 진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말이 많은 사람은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그 스님이 온갖 유투브를 통해서 말을 많이 하고 그 목사님과 신부님의 설교와 강론이 그렇게 긴 것을 보고 있노라면 그분들은 깨우치려면 아직 갈길이 먼 것이 아닌가 싶다.
•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도 그렇고, 그 후 이어진 모든 종교나 종파의 분렬은 신학적 의견의 불일치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은 거의가 다 정치적이고 탐욕적인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16세기 종교개혁을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인문학적 시각에서 보자면 이 또한 그들 집안 싸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인간의 행위가 그의 구원에 영향을 준다고 기르쳤으나 루터는 그것은 하느님에게 뇌물을 주고 구원을 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에라스무스는 그의 책 <우신예찬>에서 말했다. <인간이 때때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경우는 인간이 지혜로울 때가 아니라 어리석을 때 만들어진다>
•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한마디로 하자면 이런 것이다. <정치는 절대로 도덕적이지 않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부도덕한 것은 정치다>
•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이렇게 시작된다. <탐욕과 이기심이 정치의 기본 원리다. 인간의 역사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사이다>
• 16세기 식민지 약탈과 노예제도는 다른 의미에서의 뒤틀린 <산업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납치된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유럽과 남북미에서 가장 값나가는 자원이었다. 기독교 선교를 앞세워 아프리카로 진출한 정복자들은 포획한 인간 자원을 원자재로 활용하여 각종 신제품들을 생산하여 판매했다.
• 유럽인들은 신대륙 아메리카에서 접한 마야문명, 잉카문명, 이스텍문명은 모두가 악마의 표상이니 그것들은 부수고, 죽이고, 없애버리는 것이 자신들이 믿는 기독교 하느님의 뜻이며 명령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행동했다.

• 유럽인들이 새로운 식민지 땅에다 준 것은 자신들의 종교와 각종 질병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빼앗은 것들은 생명과 도덕 그리고 아름다움과 거룩함이었다.
• 최근 까지의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에서 <아프리카의 역사>는 주로 영국 선교사들의 활동과 노예 무역상들의 활동을 중심하여 백인들이 기록한 역사였다. 아프리카인들에 의해서 기록된 <아프리카의 역사>는 단 한 줄도 없었다. 그러니 그 백과사전을 최고의 책이라고 믿고 인용하는 자들을 우리는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 아메리카 인디안들은 사냥을 통해 무엇을 잡으면, 그 사냥감을 앞에 두고 이렇게 기도를 드렸다. <내 생명을 위하여 이 생명을 살해해서 미안합니다. 나는 이 생명을 존중합니다.> 그런데 정복자들은 이것을 <추수 감사절>로 바꾸면서 생명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버리고 오직 감사한 기도만 드리게 했다.
• 우리가 <현대> <현대적>이라고 부르는 말 속에는 <과거에 대한 부정> <전통과 역사에 대한 거부와 파괴> <인간의 오만과 어리석음>과 같은 것들을 숨기고 있음이 확실하다.
• 뉴턴은 과학자이면서도 신학자였다. 그는 이성과 신앙은 하나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려고 그의 인생 중 반 이상을 신학 연구에 받쳤다.
• 데카르트는 진리는 불변한다고 믿었다. 그는 진리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몽테뉴는 진리란 시간과 장소, 그리고 개인에 따라 달라진다고 믿었다. 데카르트는 <이성>을 최고로 여겼고 몽테뉴는 <너그러움>과 <관용>을 더 높이 샀다.
•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핵심 명제는 뒤집어서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라고. 존재하기에 생각하는 것이지 생각하기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 플라톤은 <참된 지식>과 <단순한 의견>을 구분했다. 수학, 논리학, 기하학 같은 것들은 <참된 지식>에 속하고 설교, 명상록, 시, 소설 그리고 정치적 연설 같은 것들은 <단순한 의견>이라고 보았다.
• 파스칼은 말했다. <신의 존재는 믿지 않는 것 보다 믿는 것이 훨씬 더 쉽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그에 의하면 믿음만이 아니라 이성도 하느님이 주신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뇌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심장도 만드신 분이다.
• 유럽의 식민지 종주국들은 아프리카를 비롯한 아시아, 태평양, 중남미 등 여러 식민지를 정복할 때 이런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이 땅은 주인이 없는 땅이다. 둘째,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무리들은 인간 처럼 생기긴 했지만 아직 인간은 아니다. 셋째,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무리들에게는 영혼이란 없다.
•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자본주의의 성경책>이라고 믿는 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 대부분의 새롭게 발명하고 개발된 제품들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들은 타인을 행복하게 하거나 우리 사회를 발전 시키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개인의 부를 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착각해서는 않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들이 웃음을 짓는 것은 나를 즐겁게 하려는 데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지금 웃음을 판매중인 것이다.
• 칸트는 순진한 사람이었다. 그는 말했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해서는 않된다. 인간은 항상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 확실히 그는 18세기 사람이다. 그는 <아름다움>을 <도덕의 상징>으로 보았다. 그가 21세기에 살았더라면 할 수 없는 말들이다.
• 헤겔 철학의 결론은 <겸손한 인간이 되자>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철학적 겸손>이란 <인간의 모든 지식이란 부분적이고 한시적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한 말이다. 사실 그가 말한 변증법이란 별게 아니다. <정반합, 정반합> 하면서 우리는 나를 포기하고 상대를 받아드림으로 역사는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발전해 나간다는 이론이다.
• <인류의 역사는 영원한 자유의 저변 확대사>라는 헤겔의 생각은, 자유를 단순히 어떤 속박이나 간섭으로 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본 것이 아니다. 그는 <자유란 마침내 너와 내가 하나를 되는 것>으로 본 사람이었다.
•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헤겔과는 반대로 역사란 결코 진보하거나 발전 되는 것이 아니라,늘 다람쥐 채바퀴 도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인류의 역사란 유사 이후 한번도 발전된 적이 없다는 것이 그의 역사관이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의지>란 <인간의 욕망>이요, 역사의 발전이란 <이 욕망에서 저 욕망으로 이동하며 확장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욕망의 본질은 무엇인가? 고통이다. 모든 고통은 모두 다 욕망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어떤 인간도 솟아나는 욕망으로 부터 자유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인간의 삶이란 본질적으로 고통이다> 그의 생각은 동양의 불교사상과 매우 흡사하다. 그는 불교로 부터 영향을 받은 서양철학자이다.
• <인간의 이 비극적 고통으로 부터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쇼펜하우어는 <체념하고 포기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염세주의 철학자라 불리우는 쇼펜하우어는 말만 그렇게 했을 뿐이지 자기 자신은 전혀 금욕적이거나 체념과 포기의 인생길을 걸어가지 않았다. 그는 70이 넘도록 안락한 삶을 살았다. <모든 철학자들은 자신의 철학과 일치된 삶을 살지 않는다. 모든 설교자들도 그들의 설교 처럼 살지는 않는다. 정치인들을 향하여 손가락질만 할 일이 아니다> 참 유쾌하지 않은 인간의 실존이다.
•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무척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규칙적이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자주 규칙과 규범을 어그러뜨린다. 그러나 진정한 아름다움과 참된 진리는 누가 더 잘 발견하고 만들어 내는지 아는가? 예술가들이다.
• 키에르케고르의 목표는 <루터가 부수고 나온 수도원으로 다시 돌아 가는 것>이었다. 그는 평생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을 가지고 고뇌한 사람이었다.
• 그 어떤 것도 다른 것과 연계되어 있지 않은 것은 없다. 부분은 전체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 비트겐슈타인은 인간 이성의 최대 약점은 <이성이란 무엇인지를 이성적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켐브릿지대학의 교수직을 떠나면서 말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큰바보들의 집합체는 대학교수 집단이다. 그들은 이성의 한계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말을 할 수가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잔인하고 비열하고 성적 욕구와 물질적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보았다. 인간이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와같은 인간 자체의 본성에서 부터 출발된다고 하면서 이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려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프로이트는 말했다. <우리가 찾아가야 할 최대의 목표는 신대륙도 아니고 우주도 아니고 신도 아니다. 우리가 끝까지 끈질기게 찾아나서야 할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 윌리암 제임스의 말했다. <변하지 않는 신념이란 하나도 없다> 모든 사람은 <현금가치>가 있는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긴다. 현금가치란 <실용적 용도>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실용주의자들이다. 우리는 정치, 경제는 물론이고 종교와 도덕 까지도 실용적일 때<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 존 듀이는 참된 교육은 자유방임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들어진 교과과정이란 인간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세뇌시키고 노예화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 카뮤의 생각이다. <인간은 부조리한 존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부조리한 세상이다. 그러므로 부조리를 그냥 받아드리고 사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해 지는 길이다. 부조리한 세상에는 결코 죄와 악이 없어질 수가 없다. 인간은 상황으로 부터 자유스러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 인생이란 게임이다. 게임에는 목적이나 목표가 없다. 없어야 맞다. 어떤 사람들은 게임의 목적은 즐거움과 기쁨이라고 말한다. 틀렸다. 게임은 즐겁지 않아도 <그냥 하는 것이다> 보아라! 아무 목적이나 목표, 규칙이나 법칙이 없어도 다들 잘 놀고 있지 않은가!
• 보통 생물학적 性은 sex라고 하고 사회학적 性은 gender라고 부른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 2의 성>에서 말했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진다>
• 서양철학사에는 주로 남자들만 등장한다. 그럼 여성 철학자들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다. 다음의 책들은 주목해야 할 대표적 여성철학자들의 저서들이다. 1)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2) 주느비에브 로이드: <이성적 인간 – 서양 철학사에서의 남성과 여성> 3) M. 에스턴: <근세 초기의 여성 철학자들> 4) 샌드라 하딩: <페미니즘에서의 과학문제> 5) 헬렌 롱기노 <사회적 지식으로써의 과학 : 과학적 탐구에서의 가치와 객관성> 6) 주디스 버틀러 <성분쟁 :페미니즘과 정체성 정복> 7) 주디스 버틀러 : <문제되는 신체들 : 성의 추론적 한계에 대하여> 8) 재니스 레이먼드 : <우정 : 여성의 애정에 관한 철학적 연구> 9) 캐롤 길리건 : <다른 목소리로 : 심리학 이론과 여성의 성장> (영어로 된 책 이름과 저자, 출판년도와 출판사를 여기에 일일히 기록해 드리지는 못하지만 관심있으신 분들이 연락을 주시면 따로 전해드리겠습니다)
• 기독교는 그 바탕에 백인우월주의 사상을 깔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백인들만이 유독 뛰어난 민족은 아니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가 백호주의자가 되었음을 깨닫고 이제 그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 기독교에서 선교란 무엇인가?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는 미신, 우상, 혹은 열등한 종교이기에 가장 우월한 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드리도록 설득, 강압, 회유하는 행동이 아닌가?
• African – American (아프리카 계통의 미국인)들에게는 <이중적 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들의 뿌리인 아프리카의 역사, 철학, 문화, 종교와 함께 백인들이 주입한 세계관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지금 <용광로 문화>에서 <모자이크 문화>로 이동 중이다.
• 백인들은 –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예술이든 법이든 종교든 – 거의 모든 것들을 백인 중심으로 보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제도화하고, 세뇌 하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은 백인들만 사는 세상이 아니다. 인디언, 인디오, 마오리, 애보리진을 포함한 수많은 아프리카인들, 아시아인들, 폴리네시안인들, 멜리네시아인들이 함께 살아간다. 법과 관습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과연 어떤 법과 관습을 존중하여야 할지는 서로 타협하고 이해하고 양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뉴질랜드에서는 유럽계 백인들과 토착 마오리족은 서로 다른 재판 제도를 시험하고 있다. 유럽계 백인들은 범죄에 대하여 개인적 책임을 묻는다. 그러나 마오리족은 대부분의 범죄에 대하여 가족과 부족 공동체의 책임을 함께 따진다. 한 개인의 범죄 행위도 깊이 따지고 보면 그를 낳고 기르고 함께 살아온 가정이나 부족의 영향과 책임이 있다고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뉴질랜드의 1심 지방법원에서는 한 사람의 피고를 놓고도 가정과 마을 전체를 상대로 재판한다.

• 모든 철학은 환경철학이다. 그 동안의 서구철학은 자신들이 서구문화의 틀 속에 갇혀 있었음을 인정하고 이제는 <하나의 철학은 없고 다양한 철학들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 포스트모던니스트들은 <그 어떠한 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난날의 주장들을 철회하고 하나씩 하나씩 지워 가는 중이다. 포스트모던이즘은 <포괄적>이고 <총체적>이다. <객관>이란 없다고 본다.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자기의 해석>을 덧붙이는 사람들이다. 자기의 해석을 객관적이라고 말해서는 않된다.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 <나>라고 하는 존재 조차도 사실은 <하나의 나>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인간이란 천의 얼굴과 만 가지 생각과 마음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 포스트모던이스트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이론을 다른 사람들이 받아드리는 것도 원치 않는다. 따라서 자신의 경험, 주장, 신념을 증명하고 타인을 설득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포스크모던이스트들은 자신이 하는 말도 수많은 담론 중 하나라고 여긴다. 괄호치기, 하이폰 긋기, 슬래시 넣기 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던이스트들은 그 어떠한 것이 대해서도 <최종적 결론>이란 말을 하지 않는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 중 하나는 완고함을 버리는 노력이다. 우리는 말 잘하는 논쟁자가 아니라 겸손한 청취자가 되어야 한다. 현대인들에게는 인간미와 개방성이 가장 필요하다.
• 사람은 한 가지 음식만 먹고는 살 수가 없다. 한 가지만 먹으면 영양의 균형이 깨어진다. 철학적 식단도 골고롭게 만들어져야 하고 고루고루 먹어야 한다. 지난날 우리는 너무 편식만해서 편향적 독선에 빠져 인간과 역사를 슬프게 만들어 왔다. 손은 손등, 손바닥, 손목, 그리고 팔로 이루어져 있다. 날에는 아침, 낮, 저녁, 밤이 있다. 음도 있고 양도 있다. 인간에게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다. 물질도 있고 정신도 있는 것이 세상이다. 생명과 죽음, 현실과 초월이 섞여 있는 것이 인간 세상이다. 넓게 보고, 함께 보고, 골고루 볼 수 있는 눈과 생각과 마음을 갖도록 더욱 더 노력하는 것이 <철학함>이다.
• 철학의 최종적 목적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다. <앎>이 아니라 <삶>이다. (끝) *홍길복 (2026.1. )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