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잡기장

양심 (良心)
양심 (良心, Conscience)이란 무엇인가? 굳이 사전을 펼쳐 보지 않더라도 잘 알고 있는 개념 중 하나다. <배우거나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무엇이 선하고 또 무엇이 악한지를 판단하는 마음>을 흔히 양심 – 착한 마음씨 – 라고 한다. 더 나아가 그렇게 선과 악을 판단한 다음엔 최선을 다하여 악은 물리치고 선을 따라서 말하고 행동 하려는 도덕적 의식과 행위를 일컬어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 <양심>이라고 부른다.
한자로 良心의 뜻은 <착하고 선량한 마음>이다. 영어 Conscience는 그리스어에서 변형된 말로, con <더불어, 함께, 다같이>에다, science <앎, 지식, 인식>을 합성한 단어로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것, 우리 모두가 다함께 알고 있는 공통된 인식>을 의미한다. 칸트가 말한대로 이다. <양심이란 천부적이며 선험적이다. A priori한 것이다> 그는 꼭 공부를 하거나 경험해 본적이 없고 또 법률이 정해 주지 않아도 태어날 때 부터 선천적으로 무엇이 옳고, 또 무엇이 틀린지를 아는 것이 양심이요, 이는 인간 모두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룻소는 <양심이란 영혼의 소리>라고 했고 대한민국 헌법도 그 19조에서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고 밝혀 놓았다. 은유적 표현으로 양심은 <인간 내면의 목소리>요, <인간 내면에 숨겨져 있는 빛>이라고도 한다. 기독교에서는 양심을 <인간 자신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회개하는 것>이라고 보았는데, 루터는 이를 <죄의식>이라 했고 깔뱅은 <하나님의 법정>이라고 말했다. 최근 최재천교수는 <양심, 더 클래스, 2025>이라는 책에서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양심>이며 <양심이란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타고있는 촟불로써 꺼질듯 꺼질듯 하면서도 결코 꺼지지 않는 빛>이라고 말하고 있다. 법은 물론이고 종교적 신앙 까지도 나라와 민족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하느님에 대한 믿음도 유태인들과 사우디 사람들은 다른 신관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 사람들과 인도 사람들도 마찬가지며 일본 사람들과 한국사람들 사이에도 신앙적 전통과 형식은 천양지 차이가 난다. 그런데 칸트에 의하면 유태인들이나 아랍사람들이나 중국, 일본, 인도, 한국인들, 즉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양심에 있어서만은 일체의 차이나 차별이 없다. 인간은 모두가 똑같은 양심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법과 도덕과 종교는 시대와 지역과 민족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지만 인간의 양심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보편적 심성이라는 것이 칸트나 룻소의 생각이었다..
법이나 관습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제각기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리스나 로마 시대, 춘추전국 시대나 고조선 시대의 법과 사회적 풍습이 오늘 우리 시대에 그대로 적용될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종교도 다 마찬가지다. 모든 법과 제도, 풍습과 전통, 문화와 종교적 의식이란 끊임없이 변해 왔고 또 다양한 해석을 낳아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도 가장 느리게 변하거나, 혹은 별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양심이다. 개인의 도덕적 책임성과 공동체의 정의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로써 양심은 모든 시대와 모든 역사를 아우르는 것이라 여겨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흔들려도 인간성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인간의 양심만은 반듯이 지켜져야 하고 또 지켜질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주 오랜 옛날 부터 이즈음에 이르기 까지 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양심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말하고 힘을 실어왔다.
그런데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양심에도 엄청난 이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점점 양심을 잃어가고 인간의 양심은 심각하게 조롱을 받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양심에 털난 사람들>이 늘어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이 점점 더해지고 있다. 이곳 저곳에서 <양심을 사고 파는 일들>이 성행해 지고 있다. <양심도 없는 놈들>이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종교계에서도 활개를 친다. 소수의 양심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이런 시대를 <양심의 위기, Crisis of Conscience>라고 이름한다. 미국의 정치인들로 부터 시작하여 온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자기 자신과 자기가 속한 나라나 집단의 이익만을 앞세우고 있다. 본래 양심이란 아무리 숨기려하고, 부정하려고 하고, 미화하려고 하고, 아닌 척 하고, 선한 척 하고, 옳은 척 해도 그래도 그 인간자신을 괴롭히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지 않는가? 그런데 이 포스트 모던 사회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아무리 양심에 어긋난 일을 하고서도 <양심에 꺼리킴이 없다> <양심이 부끄럽지 않다>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불편하지 않다>고 큰 소리를 치며 활개를 치는 판국이 되어 가고 있다. <무슨 놈의 양심이 밥먹여주냐?>면서 일체 인간 행위의 기초와 출발점을 오직 물질과 자신의 이익에다만 집중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양심, 좋아하네>하는 비아냥을 하게 되는 것이다. <탈양심시대> <탈양심 사회>가 깊어 지면서 <양심불량자들>만 양산되어 가는 형국은 하루가 다르게 심화되고 있다. 예전엔 <아무리 그래도 양심을 팔아먹을수는 없다>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질 않다. 오히려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이 큰 소리치며 모든 일의 주도권을 잡아가고 있는 세상이 되었다. 과거의 良心이 이젠 兩心이 되어 인간성과 인간들이 모여 사는 우리 사회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다. 한 때는 양심이 <하나니의 음성>이요 <영혼의 목소리> 였으나 그것은 아주 오래된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이제 양심은 시장에서 사고 파는 물건 처럼 취급되고 있다. 영혼도, 양심도, 진리도 가격이 달리 먹여지는 매물이 되어 우리 시대는 글자 그대로 <양심 부재의 시대>가 되었다는 탄식이 도처에서 들려온다.
모든 것이 그렇거니와 결국 나는 이 문제 역시도 마지막엔 나 자신에게로 돌아간다고 본다. 정치권력자나 재벌 사업가나 박학다식한 지식인들이나 이름난 종교인들에게 손가락질을 하기 전에 나는 나 자신에게 묻는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치라>는 음성을 들으며 고개를 숙인다. 홍길복 – 너는 과연 양심에 따라 말하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냐? (*)
홍길복 (2025.6. 23)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