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기념일
4월 7일, 1994년 르완다 집단 학살 국제 반성의 날 (International Day of Reflection on the 1994 Genocide in Rwanda)
4월 7일은 르완다 집단학살 국제 반성의 날 (International Day of Reflection on the 1994 Genocide in Rwanda)이다. 르완다 집단 학살은 르완다 내전에서 비롯된다. 1959년에서 1996년까지 아프리카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벌어진 다수파 피지배계급 후투족과 소수파 지배계급 투치족의 인종 간 갈등으로 르완다 사태라고도 불린다.
수십 년간의 끔찍한 학살과 질병과 기아 등으로 수백만 명이 죽었고 1994년 여름부터 불과 몇 개월 동안 국제사회의 방관 속에 100일만에 80만명에서 1백만명이나 죽어 나가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정치상 목적으로 특정한 인종에 대한 말살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특별히 르완다 집단학살 (Rwanda genocide)이라고도 부른다.

– 분쟁의 시작
원래 르완다와 부룬디는 후투족이나 투치족이 아니라 여러 부족이 부족국가를 이루며 살던 원시사회였다. 물론 크게 봐서 투치족/후투족 구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냥 다른 부족 취급이었다. 하지만 이곳을 지배하게 된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 정책 탓에 양 민족을 구별하고 이것을 부추겨 부족 간 갈등이 생겨났다. 정확하게는 당시에도 투치족나 후투족이나 트와족 간의 구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미 양반-평민-천민의 구분처럼 신분다운 구분에 가까웠거나 사실상 옆에 있는 부족 마을 정도 취급이었고 기본으로 언어와 문화와 풍습도 어느 정도는 공유했기에 전혀 다른 부족들끼리 묶이던, 아프리카의 여타 국가와 다르게 르완다와 부룬디는 잘만 했으면 하나의 부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도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벨기에가 식민지를 원활히 통치하려고 모호한 기준을 가지고 일부러 분열을 부추기면서 재앙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부족 구분의 기준은 키와 콧대 길이 혹은 재산. 제국주의자들의 부족 구분이 얼마나 쓸데없는지 알려 주는 좋은 사례로 뽑힌다. 알고 보면, 이러한 방식으로 르완다의 부족을 구분했었던 잉글랜드 국적의 탐험자 스피크가 시초였었는데 여기에 인종주의다운 편견이 겹치면서 대다수가 상위층에 속했던 투치족을 키도 크고 정치상으로 민첩하다고 적어 놨고 그자가 탐험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르완다와 부룬디의 생활상이 유럽에 전해졌는데 그 후에 점차 투치족은 우월한 부족, 후투족이나 트와족은 열등한 부족이란 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후의 식민 통치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다가 19세기 중후반을 거치면서 르완다와 부룬디 지역 내의 갈등을 틈타 독일 제국이 식민지 통치하게 되었는데 독일 제국은 르완다와 부룬디가 풍유로운 땅이라서 취할 게 있다고 파악되고는 있지만 내륙 깊숙히 위치해 있었기에 착취는커녕, 독일 제국 본토에서 이민자를 내보내기에 수월치 않아서 부족다운 선입견이 있었긴 해도 투치족과 후투족이 분리된 부족이라는 인식을 퍼트리고 현지 족장이나 왕에게 지원을 내보내서 상징을 표현한 건축물을 세우게 하고 그 대가로 자원을 얻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독일은 대놓고 한쪽을 차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18년 이후 패전국 독일 대신 벨기에 사람들이 르완다를 위임 통치하게 되었는데 벨기에는 햄족 이론을 내세워 폭력다운 방식으로써 투치족 출신 왕들을 내세워 후투 족장을 강제로 폐위하고 후투 왕국을 해체했으며, 소수 상류층인 투치족과 다수한 후투족을 차별하는 정책으로써 후투족과 투치족을 분열하게 해 르완다와 부룬디 지역을 유효하게 지배했다. 게다가 식민지 지배가 고착화하면 여기 부역하는 자들도 나오게 마련이어서, 강제노동 정책들과 무거운 세금이 투치족의 이름으로 실시되었는데 반발하는 투치족이 딱히 없었다. 당시의 많은 젊은 후투족은 높은 세금과 배고픔에서 벗어나려고 우간다로 이주하기도 하였지만, 우간다도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독립 이후, 그동안 쌓여 온 증오는 외양으로 구분된 부족 사이의 선을 고착화하게 했고 투치족이 한 번 선점했던 기득권을 두고 양 부족은 계속 갈등과 원한을 쌓아 올리게 된다.

– 증오의 순환
1959년 드디어 투치족과 후투족 사이의 전쟁이 일어나자 국왕 키겔리 5세는 망명을 하고 1961년 1월 르완다는 공화국을 선포했다.
독립 후에 많은 투치족이 외국으로 쫓겨났고 1963년 이웃나라 부룬디의 투치족이 르완다를 기습 공격하여 이에 대한 후투족들의 복수로 르완다의 투치족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그러다가 1966년에 부룬디에서도 왕정이 뒤엎어졌으나 부룬디에서 대체로 투치족들이 득세하는 양상이었다. 르완다에서 1973년 후투족의 쥐베날 하뱌리마나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투치족 지도자들을 살해했다. 살아남은 투치족들이 이웃 나라 우간다로 도망쳐 1987년 르완다애국전선(Rwandan Patriotic Front)을 결성했다.
1990년, 대다수가 투치족 난민들로 구성된 르완다애국전선(RPF)이 우간다의 지원을 받으며 북부 르완다로 침입했다. 프랑스와 프랑코포니 아프리카의 지원을 받는 후투족 정권과 우간다의 지원을 받는 르완다애국전선 (RPF) 간에 벌어진 르완다 내전으로 인해 르완다 국내의 인종간 긴장이 높아지고 후투파워 (Hutu Power)의 등장을 가져왔다. 이데올로기로서의 후투파워는 투치족이 후투족을 노예로 만들려고 하고 있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1980년대 후반들어서 커피값 폭락으로 르완다의 경제가 파탄나자 후투 기득권층은 빈민층으로 전락한 후투족들의 불만을 투치족들에게 돌렸다. 이 당시 후투족 촌락에는 투치족을 죽여야 한다고 하루종일 방송되었다고 한다.
계속되는 민족 갈등과 반군에 의해 상당수의 후투족이 북부에서 밀려나고 투치족이 남부에서 조직적으로 학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쥐베날 하뱌리마나 정부에 대한 압력의 결과 1993년 정전 협정이 체결되고 아루샤 조약 (Arusha Accords, 조약이 체결된 탄자니아의 아루샤 시의 이름에서 유래)이 소급 실시되었다. 하지만 이는 후투족 기득권층의 반발을 더욱 불러일으켰는데 이 조약을 준수하자면 후투족이 독차지하고 있던 르완다 정부와 군의 고위직을 후투족과 투치족이 나눠가져야 하는데다가 후투족 몫에서 또 여당인 MRND가 야당들과 나눠가져야 했기 때문이다.
한편 남부의 부룬디에서는 반대로 투치족 독재정권 시대가 마무리되면서 민주선거가 치러졌고 그 결과 후투족 출신의 멜키오 은다다예 정권이 들어서게 되는데 멜키오 은다다예는 복수심에 사로잡힌 것은 아니라서 신중하게 정책을 펴면서, 투치족을 고위직에 임명하는 행보를 보였지만 이로 인해 의회와 관계가 악화되었고, 한편으로는 투치족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기 위해 군대 재편과 토지개혁 정책을 폈고, 후투족 난민을 귀환시키는 정책을 폈다. 하지만 이로 인해서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한 투치족들과의 긴장관계는 더더욱 고조되면서, 투치족 장교들이 멜키오 은다다예를 살해하는 쿠데타 미수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그래도 쿠데타가 진압되고 1994년에 시프리앵 은타랴미라가 대통령이 되면서 총리를 투치족으로 임명하는 화합정책을 계속 유지하지만 후투와 투치족간의 갈등은 위험수위로 올라가게 된다.
한편, 르완다에서는 아루샤 조약이 범 과도정부를 요구했으나 과도정부는 성립되지 않았고 르완다 후투족 내에서의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던 와중에 19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 르완다 대통령 쥐베날 하뱌리마나와 부룬디 대통령 시프리앵 은타랴미라가 비행기 요격 사고로 수도 키갈리 근처에서 사망했다. 이 암살 사건으로 인해 르완다와 부룬디의 위기는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촉발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의 진범은 오랫동안 오리무중 상태였다가 2012년 프랑스 조사단의 조사결과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인 것으로 밝혀졌다.

– 르완다 학살
“친절했던 이웃집 아저씨와 학교 선생님, 목사님이 하루아침에 저를 죽이려고 달려들었어요. 저는 죽어라고 계속 달렸어요. 그들이 계속 뒤에서 제 이름을 불렀어요. 너를 꼭 죽이고 말겠다고요.” _ 르완다 대학살 생존자 인터뷰 中
“처음에는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언제고 누구에게나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다만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죽더라도 잔인하게 죽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요. 칼에 맞아 죽느니 차라리 총에 맞아 죽기를 바라지요. 돈을 주고 죽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대게 총으로 죽여 달라고 말할 겁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게 오히려 예삿일이다 보니 절로 체념이 되더군요. 싸울 의지조차 생기지 않았습니다. 키갈리 이웃 도시인 카시루에서만 투치족 4,000명이 살해되었습니다. 군인들이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려와 한데 모여 앉으라고 말하더군요. 수류탄을 터뜨려 한꺼번에 살해할 생각이었던 게지요. 사람들은 모여 앉았습니다.” _ 당시 대학살의 생존자 중 한 명이었던 로랑 은콩골리가 필립 고레비치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
르완다 학살은 1994년에 불과 100일만에 약 800,000명이 인종 학살당한 사건으로 그 규모나 잔혹성에서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 이후 최악의 인종 학살로 꼽힌다. 1994년 4월 6일 대통령 하뱌리마나의 암살 사건부터 시작하여 7월 중순까지 Human Rights Watch의 추산에 의하면 최소 80만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사망자 수는 50만명에서 1백만명까지도 잡는다. 일반으로 인용하는 수치는 80만명, 혹은 르완다 전체 인구의 20%다.
대통령 암살로 촉발된 이 인종 학살은 후투족 정치 단체에게 지원받는 후투족 민병대인 인테라하므웨, 임푸자무감비 [Impuzamugambi; 같은 목적을 가진 이들이라는 의미의 르완다어.]가 실행하였고 아카주 (Akazu)라는 후투족 권력 집단이 지도했다. 신청서를 작성하면 AK-47 같은 총기가 지급되었으며 수류탄은 서류를 작성할 필요도 없이 그냥 지급됐다. 이 대량 학살은 필연으로 평화 협정의 끝을 의미했으며 투치족 르완다 애국 전선은 공격을 재개하여 최종으로는 국가를 점령했다.
수도 키갈리에서는 자동화기로 무장한 군과 민병대가 학살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학살이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가담자가 많아짐에 따라 원시적 살인 무기들이 동원되기 시작했고 여기에 보태서 평소 쌓였던 개인감정과 분노를 학살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칼과 창, 벌채용 칼 (마체테: Machete), 망치 등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모든 도구가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되었으며,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는 한쪽 손에는 무기를, 다른 한쪽 손에는 밀 콜린 방송을 들으려고 라디오를 들고 있는 때도 잦았다.
이게 가능했던 건 당대 르완다의 청년 실업률과 양극화가 그그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르완다는 인구는 많은데 땅은 부족했고 전형다운 농경사회로 후투족 청년들의 대다수는 실업자였다. 당연히 은둔형 외톨이로 살거나 청년 실업자로 마을 여기저기 쏘다니면서도 무시당하기 일쑤였던 그들은 대학살 지시를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할 기회 겸 죽창을 들 기회로 생각했고, 때마침 종족 지도부에서 죽창 들라고 소리치니까 들려오자 일시에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기가 평소 당한 억울함과 분노를 투치족 학살로 풀면서 학살의 양상이 더욱 잔혹해지게 되었다.
실제로 르완다 학살의 경우는 학살 가해자들의 처벌이 상당히 제한됐는데 일반다운 가해자가 평범한 후투족 민중이었기 때문이다. 이자들의 숫자는 전체 르완다 인구의 거의 1/3 정도로 잡는데 수치가 이 정도 되면 처벌할 방법도 없다. 실제 처벌은 민병대 지도층 일부로 끝났다.
르완다 학살은 불과 100일 동안 80만명 (최대 1백만명까지도 잡는다)의 투치족이 학살당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학살당한 사람들 중 약 10%는 강경파 후투족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은 온건파 후투족들이었다. 민족 간 분쟁이라 서양인이나 동양인들은 통행이 꽤 자유로웠기에 지금도 영상을 검색하면 도로에 경계석 같이 형태를 유지하는 시체들의 줄이라든지 르완다 호텔로 짐작되는 높은 곳에서 촬영한 집단 린치 및 학살 장면도 볼 수 있다. 학살 중에는 서양이나 UN의 외부 조력은 전혀 없었기에 정부 수반들도 대통령 경호대에 의해 암살되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총리 포스탱 트와기라뭉구 (Faustin Twagiramungu)는 르완다에 주둔 중이던 유엔 평화유지군에게 보호받아서 처형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보호받지 못한 투치족이나 온건 후투족은 당연히 후투족 청년 실업자들의 칼에 죽었다.
당시 학살이 벌어진 100일 동안 정말 천인공노할 만행들이 계속 보고되었다. 후투족이 밀림에서 쓰는 넓적한 벌목용 칼 마체테를 휘두르며 투치족의 아킬레스건과 수족을 자르고 죽어가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게 하는 등 참혹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르완다에는 국제연합 평화유지군이 주둔했지만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소속 국가들이 반대한 탓에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 국제연합의 캡스톤 원칙 (Capstone Doctrine)에 따라 국제연합 평화유지군은 폭력 사태를 저지하는데는 재량권이 있지만 강제력을 행사할지를 결정하는 건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벨기에만이 강력히 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세계의 반응은 “평화유지군을 보내자”는 말뿐이었다.
결국 총리 아가테 우윌링기아마나 (Agathe Uwilingiyimana)를 보호하던 평화유지군 소속 벨기에 병사 10명이 수상 부부와 함께 살해당하는 사건이 터졌다. 배후자인 대령 투야하가는 후에 체포되어 벨기에에서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런 일 때문에 국내 여론이 나빠진 벨기에는 병력을 철수하게 했다. 거기에 더해서 평화유지군의 병력은 270명으로 감축되었다. 이렇게 되자 평화유지군 총지휘관인 중장 로메오 달레르 (Roméo Dallaire)는 그나마 남아 있던 네덜란드, 가나, 캐나다인 평화유지군을 모아서 안전지대를 형성하는 데 주력했다. 당시의 경험을 회고한 저서 ‘악마와의 악수’ (Shake Hands with the Devil)가 있다. 그리고 중장 달레르은 이때의 경험으로 인해 PTSD를 앓았다.
이렇게 최악의 상황에서도 평화유지군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평화유지군 일원으로 파병된 세네갈 육군 대위 Mbaye Diagne는 단순히 검문소를 통과하면서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것으로 약 1,000명의 목숨을 구했으며 다른 평화유지군은 투치족 피난민들이 숨어 있는 교회 앞에서 경비를 서서 투치족을 구했다. 평화유지군이 앞에 서 있으면 후투족 민병대가 그냥 침입 자체를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후투족의 목적은 정복전쟁이나 무차별 테러가 아니라 투치족 말살을 통한 르완다 전체의 후투족화였기 때문에 투치족이 아닌 다른 민족이나 세력은 공격하지 않았고 나중에 이걸 강조하면서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원래라면 그냥 르완다로 다 인도될 상황이었지만 이즈음 콩고 전쟁이 터지면서 백지화했다.
한편 아루샤 조약에 따라 키갈리에 주둔하던 르완다 애국 전선 (투치족)의 부대는 비행기 사고가 일어나자마자 곧 공격받기 시작했다. 이들은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북부의 본대와 합류했다.
1994년 7월 4일, RPF는 반격을 개시하여 수도 키갈리를 함락하고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를 차단했다. 이에 수도 키갈리에 갇힌 후투족 민간인 6만명이 투치족인 반군의 보복이 두려워 탈출하기 시작했고 RPF가 르완다 제2의 도시인 부타레와 후투족 최후 거점인 기세니까지 진격하자 후투족들이 피난을 떠났다.
그동안 르완다 및 세계의 구호 기구들은 미국 정부 및 국제연합의 개입을 요청했다. 학살이 일어나기 전에 Mouvement Démocratique Républicain de Parmehutu라는 단체에서 고위 층에 속하는 후투족 남성이 국제연합과 미국에 학살에 관련된 문서를 팩스로 송부했다. 이 문서에는 학살에 관련된 구체다운 설명이 들어었지만 이 정보는 무시되었다. 미국은 모가디슈 전투 이후 여론의 반발 때문에 움직이기 어려웠고 국제연합도 서양 국가들의 눈치를 보느라 돕지 못했다.

– 르완다 학살 이후
피난을 떠난 후투족들은 키갈리에서 서남으로 30km 떨어진 임시정부의 잠정 수도 기타라마시로 가거나 서북부의 국경을 넘어 콩고 민주 공화국 등지로 피난했다. 피란 중 후투족 난민이 3백만명 발생했고 식량 부족과 콜레라 등 전염병으로 많은 피난민이 죽었다. 또한 이 피난민들 사이에 르완다 학살 사건 때 주도하는 역할을 했던 후투족 민병대원들이 섞여서 난민촌을 병영화시켰다. 이것은 내전이 종결된 후 르완다와 콩고 민주 공화국 (옛 이름은 자이르) 간의 국경 분쟁 원인이 되었으며 1998년에 일어난 아프리카의 세계대전이라는 별명이 붙은 2차 콩고 전쟁의 불씨 중 하나가 되었다.
한편 RPF는 7월 말에 전투 중지를 선언했고 국제사회의 지지받고자 후투족을 향한 사사로운 보복을 금지, 후투족 난민은 1996년 말과 1997년 초에 르완다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난민 1,200여 명을 100일간의 학살 속에서 보호한 호텔 지배인이 있었는데 이후 호텔 르완다라는 영화로 각색되었다.
피그미라 불리는 트와 (Twa)족은 이 전쟁에 애꿎게 30%가량이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 트와족이 학살되었다는 것 때문에, 후투와 투치의 민족문제보다 경제문제가 더 큰 것 아니냐는 반응도 있다. 위에서는 후투족 희생자를 온건파 후투족이라고 칭하지만, 지방에서의 학살은 대부분 마을 사람들 간, 심지어 친족들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왜냐하면 학살 뒤에는 죽은 사람이 가지고 있던 재산 (농사할 땅, 가축 등)의 분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르완다는 아프리카 최고 인구 밀집 농업국였다.
여기서는 르완다만 다루지만, 부룬디에서도 대학살이 벌어졌다. 차이가 있다면 르완다에서는 후투가 투치를 일방으로 학살했다면, 브룬디에서는 후투 극단주의자들의 학살을 시작으로, 투치족 군대가 보복하는 피의 보복전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르완다 정부는 학살에 연루된 프랑스 관리들에 대한 공식 조사에 착수하기로 했다.
2017년 3월 20일, 바티칸을 방문한 르완다 대통령 폴 카가메와 만난 교황 프란치스코는 르완다 내전 당시 학살에 가담한 로마가톨릭교의 일부 성직자의 잘못을 사과했다.

– 르완다 학살을 고발한 영화 ‘호텔 르완다’
4월의 어느 날의 르완다 학살을 다룬 영화다. 호텔 르완다는 수도 키갈리 한 호텔에서 투치족과 온건파 후투 천여 명을 수십일간 지켜낸 호텔 지배인 폴 루세사바기나의 이야기로, 주로 호텔과 부근만 묘사된다.
호텔 르완다의 원작인 “We wish to inform you that tomorrow we will be killed with our families” (저희는 내일 저희 가족과 함께 살해당할 것을 당신께 알려드리고 싶습니다)는 저자 (필립 고로비치)가 르완다 내전 직후 르완다를 돌아다니며 후투족과 투치족을 인터뷰하며 모은 일화를 엮은 책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