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한편
장지연 (張志淵, 1864 ~ 1921)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 이 날에 목놓아 우노라)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은 ‘황성신문’의 주필인 장지연 (張志淵, 1864년 11월 30일 ~ 1921년 10월 2일)이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올린 글의 제목이다. ‘시일야방성대곡’이란 “이 날에 목놓아 우노라”라는 의미이다.
장지연은 이 글에서 고종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을 규탄했다.
- 내용
이 신문의 주필이었던 장지연 (張志淵, 1864 ~ 1921)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 논설을 써서 을사조약의 굴욕적인 내용을 폭로하고, 일본의 흉계를 통렬히 공박하여 그 사실을 전국민에게 알렸다.
이로 인하여 ‘황성신문’은 사전 검열을 받지 않고 신문을 배포하였다고 해서 3개월간 정간되었으며, 그는 일본 관헌에 붙잡혀서 90여 일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 논설은 국한문혼용체로 쓰여졌는데, 그 내용은 민족정의를 호소하면서 격렬하고 비분강개 (悲憤慷慨)한 논조를 담고 있다.
논설은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가 한국에 왔을 때, “… 천만 뜻밖에 5조약이 제출되었다.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의 분열을 빚어낼 것을 조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등박문의 본의는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을사조약에 숨겨진 일본의 침략적 저의를 폭로하였다.
또한, “…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라는 자는 각자의 영리만을 생각하고, 위협에 벌벌 떨면서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어, 4,000년 역사의 강토와 500년 종사를 타인에게 바치고, 2000만의 영혼을 모두 타인의 노예로 되게 하니, 저 개돼지만도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 (朴齊純)과 각 대신은 족히 엄하게 문책할 가치도 없거니와, 명색이 참정대신이라는 자는 정부의 우두머리임에도 불구하고, 다만 ‘부 (否)’자로써 책임을 면하며 이름만 팔려고 꾀하였다.”라고 하면서, 을사조약에 서명한 을사5적을 통렬히 공박하고 있다.
이것은 한말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을 통한 항일언론활동의 대표적인 논설이다.
당대의 경쟁지였던 ‘제국신문’이 을사조약에 대해 “한때 분함을 참으면 100년 화근을 면함이라.” 하면서 후일의 자주력을 기르고, 국민이 자중할 것을 역설하는 신중한 논조를 펼친 데 비하여, ‘황성신문’은 강제적 조약체결의 정황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이 논설을 통하여 ‘오늘에 이르러 목놓아 통곡하는’ 전국민의 분노를 대변해 항일의 필봉을 휘둘렀던 것이다.
- 전문
지난번 이등 (伊藤, 이토 히로부미)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 (대한제국, 청나라, 일본 제국)의 정족 (鼎足, 솥발)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 (대한제국)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 (官民上下, 공무원과 민간인, 윗사람과 아랫사람)가 환영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하기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 밖에 5조약 (을사늑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즉, 그렇다면 이등 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고종 황제) 폐하의 성의 (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 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천년의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 (生靈, 살아있는 영혼, 백성)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 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 (參政)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 (首席, 가장 높은 자리)임에도 단지 부 (否)자로써 (반대함으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란 말이냐.
김청음 (金淸陰, 청음 김상헌; 淸陰 金尙憲)처럼 통곡하며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 동계 정온; 桐溪 鄭蘊)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檀君)과 기자 (箕子) 이래 4천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참고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