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69년 4월 15일, 신라의 1대 거서간 혁거세 (赫居世, BC 69 ~ AD 4) 출생
삼국사기 신라 시조 박혁거세 (朴赫居世) 본기

0 년 (BC 57) : 혁거세 거서간이 왕위에 올랐다.
시조는 성(姓)이 박씨(朴氏)이고 이름은 혁거세 (赫居世)이다.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 갑자(서기전 57) 4월 병진(또는 정월 15일이라고도 하였다)에 즉위하여 거서간(居西干)이라 일컬었다. 이때 나이는 13세였고 나라 이름을 서나벌(徐那伐)이라 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遺民)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며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고,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 진지촌(珍支村) (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하였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인데,
이것이 진한(辰韓) 6부(六部)가 되었다.
고허촌의 우두머리 소벌공(蘇伐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의 숲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었으므로 가서 보니 문득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만 있었다. 그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으므로 거두어서 길렀다.
나이가 10여 세에 이르자 남달리 뛰어나고 숙성(夙成)하였다.
6부 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비하고 기이하였으므로 그를 받들어 존경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그를 임금으로 삼았다.
진한 사람들[辰人]은 박[瓠]을 박(朴)이라 일컬었는데, 처음에 큰 알이 마치 박과 같았던 까닭에 박(朴)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은 진한의 말[辰言]로 왕을 뜻한다.(혹은 존귀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라고도 하였다).
4 년 (BC 54) : 여름 4월 초하루 신축에 일식(日食)이..
4년(서기전 54) 여름 4월 초하루 신축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5 년 (BC 53) : 봄 정월에 용(龍)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 …
5년(서기전 53) 봄 정월에 용(龍)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다.
어떤 할멈이 보고서 이상히 여겨 거두어 키웠다. 우물의 이름을 따서 그의 이름을 (‘알영’이라) 지었는데, 자라면서 덕행과 용모가 뛰어났다. 시조가 이를 듣고서 맞아들여 왕비로 삼으니, 행실이 어질고 안에서 보필을 잘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두 성인[二聖]이라 일컬었다.
8 년 (BC 50) : 왜인(倭人)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변경을 침범..
8년(서기전 50) 왜인(倭人)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가 거룩한 덕을 지니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되돌아 갔다.
9 년 (BC 49) : 봄 3월에 살별이 왕량(王良) [별자리]에….
9 년 (BC 49) 봄 3월에 살별이 왕량(王良) [별자리]에 나타났다.
14 년 (BC 44) : 여름 4월에 살별이 삼(參) 별자리에…
14 년 (BC 44) 여름 4월에 살별이 삼(參) [별자리]에 나타났다.
17 년 (BC 41) : 왕이 6부를 두루 돌면서 위무하였는데…
17 년 (BC 41) 왕이 6부를 두루 돌면서 위무하였는데, 왕비 알영이 따라 갔다.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쓰도록 권장하여 토지의 이로움을 다 얻도록 하였다.
19 년 (BC 39) : 봄 정월에 변한(卞韓)이 나라를 바쳐…
19 년 (BC 39) 봄 정월에 변한(卞韓)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
21 년 (BC 37) : 서울[京]에 성을 쌓고 금성(金城)이라…
21 년 (BC 37) 서울[京]에 성을 쌓고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이 해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東明)이 왕위에 올랐다.
24 년 (BC 34) : 여름 6월 그믐 임신에 일식이 …
24년 (BC 34) 여름 6월 그믐 임신에 일식이 있었다.
26 년 (BC 32) : 봄 정월에 금성(金城)에 궁실을 지었다.
26 년 (BC 32) 봄 정월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30 년 (BC 28) : 여름 4월 그믐 기해에 일식이 …
30 년 (BC 28) 여름 4월 그믐 기해에 일식이 있었다. 낙랑인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범하려다가 밤에도 집의 문을 잠그지 않고, 노적가리를 들에 그대로 쌓아둔 것을 보고는 서로 말하였다. “이 지방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도(道)가 있는 나라라 할 만하다. 우리들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습격한다면 도둑과 다름이 없으니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32 년 (BC 26) : 가을 8월 그믐 을묘에 일식이..
32 년 (BC 26) 가을 8월 그믐 을묘에 일식이 있었다.
38 년 (BC 20) : 봄 2월 호공을 마한에 보내…
38 년 (BC 20) 봄 2월에 호공(瓠公)을 마한(馬韓)에 보내 예방(禮訪)하였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하였다. “진한 변한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貢物)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는 두 성인이 일어나서부터 인사(人事)가 잘 다스려지고
천시(天時)가 순조로와,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공경하고 겸양할 줄 압니다. 그래서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임금님은 겸허하게 신하인 저를 보내 안부를 묻게 하였으니, 예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여 군사로써 위협하니 이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마한]왕이 격분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좌우의 신하들이 간언(諫言)하여 말리니, 이에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이 진(秦)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다수가 마한의 동쪽에 터를 잡고 진한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 이때 이르러 점점 번성해진 까닭에 마한이 그것을 꺼려서 책망한 것이다. 호공이라는 사람은 그 종족과 성(姓)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본래는 왜인이었다.
처음에 박을 허리에 매고서 바다를 건너온 까닭에 호공(瓠公)이라 불렀다.
39 년 (BC 19) : 마한 왕이 죽었다.
39 년 (BC 19) 마한왕이 죽었다. 어떤 사람이 임금을 달래어 말하였다. “서한의 왕이 지난번에 우리의 사신을 욕보였는데 지금 상을 당하였으니 그 나라를 치면 쉽게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재난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 하고는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40 년 (BC 18) : 백제의 시조 온조가 왕위에 올랐다.
40년 (BC 18)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溫祚)가 왕위에 올랐다.
43 년 (BC 15) : 봄 2월 그믐 을유에 일식이
43 년 (BC 15) 봄 2월 그믐 을유에 일식이 있었다.
53 년 (BC 5) : 동옥저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53 년 (BC 5) 동옥저(東沃沮)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저희 임금이 남한(南韓)에 성인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신을 보내 [말을] 바치게 하였습니다.”라 하였다.
54 년 (BC 4) : 봄 2월 을유에 살벌이 하고에…
54 년 (BC 4) 봄 2월 을유에 살별이 하고(河鼓) [별자리]에 나타났다.
56 년 (BC 2) : 봄 정월 초하루 신축에 일식이…
56 년 (BC 2) 봄 정월 초하루 신축에 일식이 있었다.
59 년 (AD 2) : 가을 9월 그믐 무신에 일식이…
59 년 (AD 2) 가을 9월 그믐 무신에 일식이 있었다.
60 년 (AD 3) : 가을 9월에 두 마리의 용이 금성의 우물…
60 년 (AD 3) 가을 9월에 두 마리의 용이 금성의 우물 가운데에서 나타났다.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으며 금성 남문에 벼락이 쳤다.
61 년 (AD 4) : 봄 3월에 거서간이 …
61 년 (AD 4) 봄 3월에 거서간이 죽었다[昇遐].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는데, [능은] 담암사(曇巖寺) 북쪽에 있다.

*참고 : 혁거세 거서간
혁거세 거서간 (赫居世 居西干, 기원전 69년~기원후 4년, 재위: 기원전 57년~기원후 4년)은 신라의 초대 국왕이다. 삼국유사에는 불구내(弗矩內)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서간은 진한의 말로 왕 혹은 귀인의 칭호라 한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혁거세 거서간이 백마가 낳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였으나 사소부인(娑蘇夫人)이 혁거세 거서간을 낳았다는 전설도 함께 전하고 있다. 혁거세의 역사는 신화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출생과 사망은 신화적으로 과장되어 있다고 평가된다.
赫居世, 弗矩內는 실제로 ‘발그놀/불그놀’라고 불렸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赫(붉을/밝을 혁)은 ‘밝/붉’을 표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世(누리/세상 세)는 ‘놀/눌’을 표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內(안 내)의 옛 한자음은 ‘노’에 가까웠다.
.이름의 뜻
양주동의 연구에 의하면, ‘朴赫居世’의 ‘赫’과 ‘朴’은 둘다 ‘ᄇᆞᆰ’(밝다)의 뜻을 반복하여 쓴 것이다. 혁거세는 빛날 혁,살 거,인간 세.세상에 빛나게 살다라는 뜻이다.
○ 생애
- 출생
그는 사로국 6부 촌장들이 임금을 세우는 회의를 하던 중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가 낳은 알에서 출생했다. 즉, 기원전 69년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각기 자기 자녀들과 함께 알천 언덕에 모여 “우리들에게는 우리들 모두를 다스려 줄 임금이 없어 모두가 안일하여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도무지 질서가 없다. 그러하니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나라를 만들자.”라고 의논하였다. 그런데 그 때, 회의 장소인 알천 언덕에서 남쪽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양산(楊山)이라는 산기슭에 번갯불 같은 이상한 기운이 보였다. 촌장들은 더 잘 보기 위해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는데, 양산 기슭에 있는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곁에서 번갯불이 솟아오르고 있었고, 그 옆에는 하얀 말 한 마리가 절하는 것처럼 한참 꿇어 엎드려 있다가 길게 소리쳐 울고는 하늘로 날아올라가 버렸다. 말이 떠나자 촌장들은 그 말이 누었던 장소로 일제히 몰려가 봤더니 그 곳에는 자줏빛의 큰 알이 하나 놓여 있었다. 촌장들이 그 알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깨져버렸다. 그 안에 생김새가 몹시 단정하고 아름다운 한 사내아이가 있었다. 모두들 놀라고 신기해 하며, 아기를 동천(東泉)이라는 샘에 데리고 가서 몸을 씻겼다. 그러자 아기의 몸에서 광채가 나고, 짐승들이 몰려와 덩달아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고, 하늘과 땅이 울렁이며 태양과 달의 빛이 더욱 밝아졌다. 촌장들은 그 아이의 알이 매우 커서 박과 같다고 하여 성을 박(朴)으로 지었고 이름을 혁거세(赫(爀)居世)라고 지었다. 일연은 사소부인에게서 출생했다는 설도 기록하였다. 여기서 서술성모는 선도성모와 같은 여신이다. 사소부인의 출신지는 정확하게 전하지는 않으나 그녀가 정착하였다는 형산이란 서형산(西兄山), 선도산(仙桃山)이라고도 부르는 산으로, 중국 황실의 딸인 혁거세 거서간 어머니가 중국을 떠나 정착하였다 한다. 여기서 중국을 지금의 중국이 아닌 말 그대로 중국(中國). 여러 제후를 다스리는 중심적 나라라는 견해도 있다.
- 서라벌 개국
혁거세 거서간은 10세 때 남달리 뛰어나고 숙성하였고 촌장들의 추대를 받아 13세인 기원전 57년 6월 8일(음력 4월 28일 병진일)에 즉위하고 왕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고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였다. 기원전 41년(즉위 17년) 6부를 두루 돌면서 위무하였는데, 왕비 알영부인이 따라 갔다.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쓰도록 권장하여 토지의 이로움을 다 얻도록 하였다. 기원전 39년(즉위 19년) 봄 정월에 변한(卞韓)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는 기록이 있으나, 신채호는 이를 신뢰하지 않았다. 기원전 37년(즉위 21년) 수도 금성에 성을 쌓았으, 기원전 32년(즉위 26년)에 금성에 궁실을 지으니 이때 나라의 기틀이 잡혔다. 기원전 28년 낙랑이 침범하였으나 도덕의 나라라 하여 스스로 물러갔다. 기원전 20년(즉위 38년) 봄 음력 2월 마한에 사신 호공(瓠公)을 보냈는데, 조공을 바치지 않는 것을 탓하는 마한 왕에게 호공이 그럴 필요가 없다 하자, 마한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놓아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마한 왕이 죽어 신하들이 마한을 정벌할 것을 권하나 혁거세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요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 하여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이는 그 무렵 신라의 정치 체제가 바로잡혀 마한에 매여있지 않게 되어있다는 것을 말한다. 기원전 5년(즉위 53년)에 동옥저(東沃沮)의 사신이 와 말 20필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나, 신채호는 이를 신뢰하지 않았다.
- 나정의 혁거세 설화
남산의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를 지칭)에 궁궐을 짓고 신성한 두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사내 아이가 알에서 나왔는데 그 알이 박처럼 생겼다. 그래서 사람들이 박을 박(朴)이라 하였기 때문에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 여자 아이는 그 아이가 나온 우물의 이름을 따서 이름(나정)을 지었다. 두 성인이 나이 13세가 되자 오봉(五鳳) 원년 갑자(기원전 57)에 남자는 즉위하여 왕이 되었고 이어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지금 풍속에 ‘경(京)’을 ‘서벌’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 하는데, 혹은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도 한다. 처음에 왕후가 계정(雞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계림국(雞林國)이라고도 하였는데, 계룡이 상서로움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일설에 따르면, 탈해 이사금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을 당시에 숲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고쳐 계림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후세에 와서 드디어 신라(新羅)라고 정하였다.
- 박씨 족보와의 차이
신라 박씨 족보는 혁거세 거서간의 장남 박특(朴忒)을 신라 개국공신으로 기록하고 있어 혁거세 거서간의 출생이 사료의 기록(기원전 69년)보다 이를 것이라 추측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현존하는 각종 박씨 관련 보학 자료들이 조선 중기 또는 후기 이전에 소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일단은 12세기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13세기 편찬된 ‘삼국유사’의 내용을 정설로 보고 있다.
- 사망
혁거세 거서간은 재위 62년 만에 하늘로 승천하였다가 7일 만에 시신이 부위별로 나뉘어 흩어져서 지상으로 떨어졌다. 백성들이 혁거세 거서간의 나뉜 몸을 다시 하나로 모아 장사를 지내려고 하였으나 커다란 뱀 한 마리가 나타나 사람들을 쫓아내며 훼방을 놓았다.백성들은 할수없이 양다리와 양팔과 몸통과 얼굴을 따로 묻었다.혁거세 거서간의 무덤은 5개가 되었고 혁거세 거서간의 무덤들을 오릉(五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뱀 때문애 혁거세 거서간의 나뉜 몸을 따로 묻어서 사릉(巳陵)이라고도 한다.오릉(五陵)은 담암사(曇巖寺) 북쪽에 있다.
- 가계도
부친 : ?
모친 : 사소부인
왕후 : 알영(巴胡夫人 金氏) 인간과 계룡의 딸
장남 : 박특
차남 : 남해 차차웅
삼남 : 일지갈문왕
사남 : 허루갈문왕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