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근 목사 칼럼
겨울 나무에서 배우는 지혜
필자는 가끔식 겨울을 견디는 나무들을 보면서 어떻게 저토록 추운 겨울에 살아 남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저토록 강한 생명력을 가진다면 못 살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특히 젊은이들의 자살률이 높아가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2023년 한국의 10대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9.9명 (2022년 대비 10.4% 증가)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바라보면서 겨울을 살아남는 나무들의 지혜를 한번 알아 보겠습니다. 겨울 나무는 단순히 겨울을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추위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놀라운 지혜를 발휘합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우리에게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소중한 가르침을 줍니다.
1. 미리 준비하는 지혜
나무는 겨울이 오기 전, 미리 월동 준비를 합니다. 두꺼운 코르크층을 만들어 찬 바람을 막고, 세포 속의 물을 빼내 어가는 것을 방지합니다. 참으로 지혜롭다고 생각이 됩니다. 마치 우리가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하고,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삶의 어려움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흔들리지 않도록 미리 대비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은 나무에게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지혜입니다.
2. 버리고 비우는 지혜
나무는 겨울이 되면 잎을 떨어뜨립니다.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아끼고, 봄에 새롭게 잎을 틔우기 위한 준비입니다. 우리도 삶에서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중요한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물건, 관계, 습관 등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들을 정리하고, 진정으로 중요한 가치에 집중할 때 더욱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특히 나이가 들어 갈수록 버리고 정리하면서 살아야합니다.
3. 멈추고 쉬어가는 지혜
나무는 겨울 동안 생장을 멈추고 휴면 상태에 들어갑니다. 움직임을 최소화하여 에너지를 보존하고, 추위를 견디는 데 집중합니다. 끊임없이 경쟁하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멈추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멈추고 쉬어갈 때 비로소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쉴때는 쉬고 놀때는 마음껏 놀아야 합니다. 잘 놀줄아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무는 겨울 동안의 휴식을 통해 봄에 더욱 힘차게 성장할 수 있는 에너지를 비축합니다.
4. 희망을 잃지 않는 지혜
겨울은 춥고 어둡지만, 나무는 봄이 올 것을 믿고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햇빛을 최대한 흡수하고, 봄에 틔울 새싹을 준비합니다. 지금 코로나 이후에 모두가 삶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희망은 어둠 속에서 길을 밝히는 등불과 같습니다. 긍정적인 마음과 믿음으로 희망을 품을 때,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겨울 나무는 침묵 속에서도 끊임없이 생명력을 유지하며,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주고 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나무의 지혜는 우리에게 큰 감동과 용기를 줍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잠 3:15)
She is more precious than rubies; nothing you desire can compare with her.
감동 시대
“감동을 받았다” 라는 말은 어떤 것에 마음이 깊이 움직여 벅찬 느낌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감동은 단순히 ‘좋다’거나 ‘기쁘다’는 감정을 넘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림을 주는 강렬하고 긍정적인 경험입니다. 21세기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감동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감동하는가!
김동은 다양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숭고한 행위나 희생을 목격할 때 우리는 감동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은 깊은 감동과 함께 인간의 존엄성을 일깨워줍니다. 아름다운 예술 작품 또한 감동의 원천입니다. 그림, 음악, 영화, 연극 등 예술 작품을 감상하며 아름다움에 취하고, 작가의 영혼과 시대를 초월하는 메시지에 감동합니다.
진심 어린 마음과 호의는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줍니다. 누군가의 진심 어린 배려와 친절은 감동을 선사하며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워줍니다. 경이로운 자연 앞에서도 우리는 겸허해집니다. 웅장한 산맥, 광활한 바다, 신비로운 자연 현상은 경외감과 함께 깊은 감동을 자아냅니다. 마지막으로, 오랜 노력 끝에 목표를 달성했을 때, 소중한 사람과 재회했을 때 등 감격스러운 순간에도 우리는 감동의 눈물을 흘립니다.
특히 우리는 감동을 받았을 때 우리 몸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감동적인 순간, 우리 몸은 마치 마음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 하듯 다양한 변화를 보입니다. 눈물이 흐르는 것은 물론이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혈관이 확장되는 등 심혈관계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치 심장이 감동과 함께 벅차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하죠. 또한 얼굴이 붉어지거나 온몸에 따뜻한 기운이 도는 것을 느낄 수도 있는데, 이는 혈관 확장으로 혈액 순환이 원활해지기 때문입니다.
이와 동시에 우리 몸에서는 옥시토신, 엔도르핀과 같은 호르몬이 분비됩니다. ‘사랑의 호르몬’ 옥시토신은 편안함, 안정감, 행복감을 높여주고, ‘행복 호르몬’ 엔도르핀은 통증을 완화하고 스트레스를 감소시켜 줍니다. 마음이 정화되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솟아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죠. 또한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가 감소하면서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감동적인 순간 몸에 전율이 흐르거나 소름이 돋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데, 이는 자율 신경계의 반응으로 감정적인 흥분 상태를 나타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감동이 면역 체계 강화에도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감동적인 경험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면역 체계가 강화되어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긍정적인 감정은 면역 세포를 활성화시켜 질병으로부터 우리 몸을 보호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죠. 이처럼 감동은 단순히 정신적인 경험에 그치지 않고 신체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감동적인 순간을 자주 경험하고, 주변 사람들과 감동을 나누는 것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한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성령의 감동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죄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회개에 이르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며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또한 영적으로 성장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인도받으며, 교회를 섬기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다양한 은사를 받게 됩니다. 더 나아가 어려움을 이겨내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까지 받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성령의 감동을 기다리고 추구해야 합니다. 이는 기도와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며 성도와의 아름다운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은 우리들의 삶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일상에서 감동을 주는 삶은 특별한 능력이나 재능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진심을 담고,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며,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 따뜻함을 전하고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갈 것입니다. 오늘도 감동을 주고 받고 살아가는 하루의 복된 삶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3).
Greater love has no one than this: to lay down one’s life for one’s friends.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in thi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나그네와 순례자
어제 4시경에 저희들과 함께 성시화에서 함께 기도하고 거리전도를 했던 이성희 집사님께서 63세로 주님의 품에 안기웠습니다. 세상적으로 말할 때에는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사셨지만 영적으로는 참으로 복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 이유는 이 분은 항상 천국을 소망하고 살았던 순례자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두 종류의 삶을 살아갑니다. 즉 순례나, 아니면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살다가 누구나 한번은 죽습니다. 또한 언제, 어디서 죽을 지도 알지 못합니다.라틴어 격언에 ‘메멘토 모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우선 나그네와 순례자의 차이점을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우선 나그네는 특정한 목적지 없이 떠돌아다닙니다. 쾌락, 재미, 호기심 등을 찾아 이곳저곳을 떠돌지만, 궁극적으로 어디로 향하는지, 왜 떠나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마치 바람 부는 대로 떠 다니는 낙엽과 같습니다.
나그네는 여정 자체보다는 순간의 즐거움과 만족에 집중합니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낮선 곳을 탐험하며 즐거움을 얻지만, 그 경험들은 깊이 있는 성찰이나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단편적인 기억으로 남을 뿐입니다. 마치 관광지에서 사진만 찍고 떠나는 관광객과 같습니다.
그리고 수동적이고, 외부 환경에 쉽게 흔들립니다. 세상의 유혹과 쾌락에 이끌리고, 어려움에 직면하면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합니다. 마치 흐르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나뭇가지와 같습니다.
하지만 순례자는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그 목적지가 주님이 함께하시는, 그리고 앞서간 성도들과 함께하는 천국입니다. 이것은 더이상 이별이나 아픔, 그리고 눈물이 없는 곳입니다.
순례자의 여정 자체가 의미를 지닙니다. 고난과 역경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며, 하나님의 밀씀을 통해 날마다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갑니다. 그들의 여정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자기 성찰과 변화의 과정입니다. 마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구도자로 살아갑니다.
능동적이고, 목표를 향해 끈기 있게 나아갑니다. 고난과 역경을 만나더라도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마치 거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배와 같습니다.
다음으로는 나그네와 순례자의 공통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 보겠습니다.
둘 다 현재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며 새로운 경험을 추구합니다.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낯선 곳을 향해 떠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닙니다. 나그네는 새로운 자극과 즐거움을 찾아 떠나고, 순례자는 영적인 성장이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단히 애써고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이 둘은 모두 여정 속에서 어려움을 경험합니다. 낮선 환경, 예측 불가능한 상황, 예상치 못한 만남 등은 나그네와 순례자 모두에게 challenges를 안겨줍니다.
둘 다 여정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기회를 얻습니다. 낯선 환경과 새로운 경험은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고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나그네는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 다양한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이나 신념을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순례자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기도와 묵상, 성경 읽기, 다른 순례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더욱 깊이 있게 성찰해 나아갑니다.
네, 이성희 집사님의 소천을 통해 나그네와 순례자의 길을 되짚어보며 순례자의 삶에 담긴 행복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마 16:16)로 고백하는 우리 모두는 순례자입니다.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사랑과 믿음으로 하나 되어 천국의 문을 향해 함께 나아갑시다. 이성희 집사님의 삶이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주었듯이, 우리의 삶 또한 다른 이들에게 믿음의 귀감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성희 집사님의 가족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립보서 3:20)
죽어야 산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죽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이뤄질 수 없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현재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다른 생명체의 죽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육신도 다른 식물이나 동물들이 죽음을 통해 제공하는 영양으로 연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죽어야 산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보여줍니다. 씨앗은 땅에 묻혀 죽어야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희생은 이러한 진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의 희생이었으며, 그 희생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삶, 영원한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고후 5:17).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웨시트민스트 소요리 교리문답 제 1번에서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이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말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합니다.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형제를 칭찬하고 격려합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와 칭찬은 다른 사람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지지하며 함께 성장하는 기쁨을 누립니다. 겸손하여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빌 2:3), 내가 드러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높아지게 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주장을 심하게 하지 않는 일입니다. 불필요한 고집을 세우지 않는 일입니다.
시간, 재능, 물질을 나누고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사랑을 실천하는 삶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시간을 내어 봉사하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마음을 전하며,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자신의 재능을 활용하여 사회에 기여하고, 전문 지식이나 기술을 통해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고, 마음을 담아 베풀며, 소비 습관을 돌아보고 절약하여 나눔을 실천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작은 것부터 사랑을 실천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며, 용서와 관용을 베풀고 화해와 평화를 위해 노력합니다. 헌신하고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참된 행복과 기쁨을 경험하고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죽어야 산다”는 말은 희생과 헌신을 통해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는 일입니다. 일석이조의 삶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면, 나는 살지만 다른 사람은 죽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죽으면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게 됩니다. 이것만이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진리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본인도 부활을 경험하셨고, 우리들도 죄에 다시 살아나게 하신것입니다. 죽어야 사는 것이, 만고 불변의 진리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
Very truly I tell you, unless a kernel of wheat falls to the ground and dies, it remains only a single seed. But if it dies, it produces many seeds.
나는 더 이상 오래 살고 싶지 않습니다
햇살 따스한 오후, 한적한 길을 따라 걷다 우연히 벤치에 앉아 콜라 캔 음료를 마시고 계시는 80대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백발이 성성하고 주름진 얼굴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쓸쓸함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어르신께 인사를 건네며 “정정하시네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일반적으로 탄산 음료를 마신다면 건강하다는 의미이기도합니다. 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콜라 같은 단 음료가 건강에 좋지 않다는 생각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르신께서는 예상치 못한 답변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더 이상 오래 살고 싶지 않아요.” 순간 저는 당황했지만, 어르신의 말씀 속에 담긴 깊은 의미를 헤아려보려 애썼습니다.
어쩌면 어르신은 이미 충분히 긴 삶을 살아왔기에 건강에 대한 염려가 크지 않으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또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려워하고 계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남은 삶은 그저 편하고 자유롭게,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며 살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하신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양하고 복잡한 생각을 저로하여금 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어르신의 말씀을 곱씹으며 저는 삶과 죽음, 그리고 삶의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어르신의 솔직하고 담담한 태도가 멋있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문득, 만약 그분이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건강을 소중히 여기고,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려 하지 않았을까요? 어르신의 짧은 한 마디는 저에게 삶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져주었고, 저 스스로도 더욱 건강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제가 노인이었다면, “주님이 부르시면 언제라도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부르시는 그날 까지 복음을 전하면 사랑을 실천하는 최선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답을 했을 것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 4:7)
I have fought the good fight, I have finished the race, I have kept the faith.
사명자의 길
세상에는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평범한 삶의 길, 또 하나는 위대한 사명자의 길입니다. 사명자는 하늘의 부름을 받아 이 땅에 온 사람들, 그들은 가슴 속에 타오르는 불꽃, 삶의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들의 눈은 미래를 향하고, 그들의 심장은 세상을 품습니다.
사명자는 돈이나 명예, 권력 따위에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세상의 가치는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그들의 영혼을 사로잡는 것은 위대한 목표, 세상을 바꿀 숭고한 사명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칩니다. 목숨조차 아깝지 않을 만큼, 그들의 열정은 뜨겁습니다.
사명자는 자신의 짐을 스스로 짊어집니다. 남에게 의지하거나 변명하지 않습니다. 고난과 역경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섭니다. 그들은 시간의 소중함을 알고, 단 한 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습니다. 마치 불꽃처럼 짧고 강렬하게,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습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십시오. 세상을 바꾼 위대한 영웅들, 그들은 모두 사명자였습니다. 간디는 비폭력 저항으로 인도의 독립을 이끌었고, 마틴 루터 킹은 평화적인 시위로 흑인 인권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넬슨 만델라는 27년의 감옥 생활에도 굴하지 않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차별을 철폐했습니다. 이처럼 사명자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이끌어 왔습니다. 우리 선택한 대한민국의 윤석열 대통령도 어려울 때 한국을 다시 세우는 위대한 사명자로 우뚝 설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것입니다.
소명 (The Call) 책의 저자는 오스 기니스 (Os Guinness)이렇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답하는 것이다.”
또한 오늘도 우리 모두는 성령의 소리에 민감해 져야 합니다. 사명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당신의 열정을 발견하고, 숭고한 사명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세상은 사명자를 찾고 있습니다.
아, 대한 민국 !
그대는 나의 어머니,
찢기고 상처 입은 가슴으로 나를 품어준 어머니.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꿋꿋이 나를 지켜낸 강인한 어머니.
그대는 나의 꿈,
가난과 절망 속에서 피어난 꿈.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위대한 꿈.
그대는 나의 함성,
광장을 가득 메운 함성.
민주주의를 향한 뜨거운 열망,
정의를 향한 외침,
그 함성이 세상을 바꾼다.
그대는 나의 눈물,
세월호의 아픔,
IMF의 고통,
그 눈물을 딛고 일어서는
불굴의 의지.
아, 대한민국!
그대는 나의 심장,
뜨겁게 뛰는 심장.
내 안에 흐르는
영원한 생명.
그대가 있어,
나는 희망을 노래하고,
그대가 있어,
나는 미래를 꿈꾼다.
정의가 강물 같이 흐르고,
사랑이 햇살 같이 내리쬐는,
그런 대한민국을 꿈꾼다.
아, 대한민국!
영원히 나의 조국이어라!
김병근 목사
시드니성시화운동 대표회장, 엠마오상담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