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대한제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대한민국
대한제국(1897.10.12 – 1910.8.29)
대한제국은 1897년 고종 황제가 조선 왕조를 개칭하여 선포한 국가로, 1910년까지 존재했다. 이 시기는 조선의 역사에서 근대화를 시도하고, 제국주의 열강의 압력에 맞서려는 중요한 변화의 시기였다. 대한제국의 선포는 조선이라는 전통적인 국가 명칭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구축하려는 시도였다. 이는 내부적으로는 국민에게 새로운 자아상을 제시하고,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현대적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노력이었다.
대한제국이라는 단어는 ‘대한’과 ‘제국’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대한(大韓)’은 ‘큰’ 또는 ‘위대한’을 의미하는 ‘대(大)’와 한국을 의미하는 ‘한(韓)’이 결합된 표현으로, 한국을 강하고 중요한 나라로 지칭한다. 이는 국가의 위엄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제국(帝國)’ 부분은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를 의미한다. 여기서 ‘제(帝)’는 황제를, ‘국(國)’은 나라를 뜻한다. 따라서 제국은 황제의 권위 아래 있는 나라를 나타내며, 국가의 독립성과 주권을 강조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대한제국은 국가 체계를 근대화하기 위해 다양한 개혁을 시도했다. 이러한 개혁은 법률, 교육, 군사, 행정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내부적으로 정치적 불안정과 부패,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이러한 상황은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취약한 상태를 만들었다.
특히 1905년에 체결된 을사늑약은 대한제국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 조약은 일본이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이후 대한제국의 주권은 점점 더 약화되어 갔다.
결국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 지배 하에 들어갔다. 대한제국의 종말은 한국 근대사에서 한 시대의 종식을 의미하며, 국가의 자주성과 독립을 위한 노력의 중요성을 상징한다.
삼일운동 (1919.3.1)
삼일운동은 1919년 3월 1일에 발생한 한국의 대규모 독립 운동이다.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인들이 자주독립을 열망하며 벌인 평화적인 시위 운동으로,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이 운동은 1918년 1월 8일에 발표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시한 ‘민족 자결 주의’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다.
삼일운동의 시작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면서부터였다. 이 선언서는 한국의 독립을 세계에 알리고,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항거를 선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후, 시위는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으며, 수많은 한국인들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 기독교는 전국민의 약1.5%에 불과했으나,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로 서명한 33인 가운데는 기독교인이 16명이었다.
삼일운동은 일본 경찰과 군대의 강력한 진압에 직면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시위 참가자들이 체포되거나 살해되었으며, 상당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한국 독립 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이 운동은 국제 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렸고, 한국인의 민족적 자각과 단결을 촉진시켰다.
삼일운동은 그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졌으며, 한국의 독립 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이 운동은 한국인의 자주독립을 향한 강한 의지와 투쟁의 역사를 상징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4.11 – 1945)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이 정부는 한국 독립 운동의 중심 역할을 맡았다. 임시정부의 수립은 3·1 운동의 직접적인 결과였으며,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대규모 시위를 통해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인의 자주독립과 민족자결의 염원을 표현한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대통령제를 도입했으며,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다. 이후 여러 차례의 정치적 변동과 이동을 겪으며,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등 여러 중요한 독립 운동가들이 이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에 집중했으며, 내부적으로는 한국의 장래 헌법과 법률을 준비하는 등의 행정적 기능을 수행했다. 또한,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받지 못했고, 일제의 강력한 탄압에 직면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한국 독립 운동의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있었다.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한국의 독립이 이루어졌을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정부의 법통성을 계승하는 기초가 되었다.
대한민국 (1948.8.15 – 현재)
대한민국의 건국은 20세기 초반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과 독립 운동의 결과로 이루어졌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면서 시작된 일제 강점기는 한국인의 독립 의지와 정체성을 강하게 부각시킨 시기였다.
1919년 3월 1일, 일본의 식민 통치에 대한 반대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이 3·1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이 운동에 대한 반응으로, 같은 해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정부는 독립을 위한 한국인의 노력을 대표했으며, 국내외에서 독립 운동을 지원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여러 독립 운동 단체들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계속해서 활동했다. 이 기간 동안 무장 투쟁, 외교 노력, 교육 및 선전 활동 등 다양한 형태의 저항이 이루어졌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말미에 연합국의 승리와 함께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제 강점기가 종식되었다. 이는 한국의 독립을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에 설립되었다. 이 날은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기념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전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한반도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이후 1948년에 이승만 대통령의 지도 하에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되었고, 이 날은 광복절로 기념된다.
대한민국의 건립은 남북 분단의 시작이기도 했다. 1948년 같은 해 9월 9일,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어 한반도는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되었다. 이 분단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이어진 한국전쟁으로 이어졌고, 이 전쟁은 한반도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치외법권 (Extraterritoriality)
그리스도인들은 이땅에 살고 있지만 이땅에 속한 사람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법으로 이땅에 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치외법권으로 사는 사람이다.
치외법권(Extraterritoriality)이란 외교 협정에 따라 특정 인물이나 단체가 자신이 거주하는 국가의 법률과 규칙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말한다. 역사적으로 외국 정부나 국가 원수, 대사관 직원 등이 이러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나라에 살면서도 자신의 본국 법률을 적용받는다.
조선과 관련된 치외법권의 대표적인 예는 1876년에 한국과 일본이 체결한 강화도 조약이다. 강화도 조약에 의해 1876년 부산, 1880년 원산에 이어 1883년 인천이 개항했으며 소위 ‘개항장’이 조성되었다. 이 조약의 주요 내용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게 치외법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는 일본인들이 조선에 있을 때에도 일본 법률을 따르고, 법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조선 법원이 아니라 일본 영사 법원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일은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오스만 제국 같은 많은 나라에서도 일어났다.
치외법권 때문에 흥미로운 문화가 생겼다. 인천 차이나타운이 그 예이다. 이 지역은 1884년 청나라의 치외법권지역으로 지정되어 이러한 조약이 도시 및 문화 경관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을 보여주었다. 현재 치외법권이라는 개념은 외교적 면책특권이나 국제기구의 법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외교관들이 다른 나라에서 잘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보내는 나라와 받는 나라의 권리를 존중하는 법적인 규정이다. 이것은 국제적으로 협력하는 데 도움이 된다.
호머 헐버트의 조선사랑
호머 헐버트
헐버트 선교사, 즉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는 구한말 한국에서 활동한 미국의 선교사이자 교육자, 학자로, 한국의 독립과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그의 활동은 다음과 같은 주요 영역에 걸쳐 있습니다:
교육 분야에서의 기여: 헐버트는 조선에서 교육자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1886년에 한국에 도착하여 이화학당(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과 왕립 영어학교(후의 경신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습니다. 그는 서양 교육 방식을 도입하여 한국 교육의 근대화에 기여했습니다.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연구: 헐버트는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의 역사, 언어, 문화에 관한 여러 책을 저술했으며, 이러한 저작들은 한국을 서양에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독립 운동 지원: 헐버트는 한국의 독립 운동을 지지했습니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미국과 유럽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활동을 펼쳤습니다. 또한 그는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과 긴밀히 협력하며 그들의 노력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 기여했습니다.
외교적 노력: 헐버트는 한국과 미국 간의 외교적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미국과 유럽에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를 통해 한국의 입장을 국제 사회에 전달했습니다.
헐버트의 활동은 당시의 한국 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한국의 독립과 근대화에 크게 기여한 외국인으로 기억됩니다. 그의 헌신은 한국과 미국 간의 우호적 관계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의 활동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육과 문화 전파: 헐버트는 이화학당과 왕립 영어학교에서의 교사로서 서양식 교육과 학문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그는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고 이를 서양에 알리는 저술 활동을 했습니다. 그의 저서 중에는 “The History of Korea”와 “The Passing of Korea”가 있으며, 이 책들은 서양에서 한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정치적 활동과 독립 운동 지원: 헐버트는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강력한 목소리였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한국의 상황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며 강연을 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한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그는 또한 한국 독립 운동가들과 긴밀히 협력하며 그들의 노력을 지원했습니다.
외교적 노력: 헐버트는 한국과 미국 간의 외교적 관계 개선을 위해 활동했습니다. 그는 한국의 입장을 서양에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를 통해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국제사회에 알렸습니다.
한국어 교육과 보급: 헐버트는 한국어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한글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이를 서양에 알리는 데 노력했습니다. 그는 한글 교육자료를 제작하고, 한글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특성을 강조했습니다.
한국 사랑: 헐버트는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의 독립과 발전을 진심으로 바라며, 그의 삶의 대부분을 이 땅과 그 사람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의 헌신은 한국인들에게 크게 존경받고 있으며, 한국과 미국 간의 관계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헐버트의 이러한 활동은 그가 단순히 한 외국인 선교사를 넘어서 한국의 독립과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게 합니다. 그는 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외국인 인물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헐버트와 한글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와 한글의 관계는 그가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을 가졌음을 반영합니다. 헐버트는 한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한글을 사용하여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보급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헐버트는 1893년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내한하여 배재학당 교사로 봉직하면서 언어학에 남다른 재능을 지닌 주시경 학생에게 서양 학문을 가르치고 함께 우리말과 글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책임을 맡고 있던 민간 유일 인쇄출판사인 삼문출판사에 가난한 제자 주시경을 사환으로 일하게 하고, 서재필과 함께 창간한 최초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에 교열 보조로 참여시켰습니다. 주시경은 훈민정음을 한글로 명명하고 주어, 서술어, 목적어를 도입한 대한국어문법을 썼습니다. 주시경 선생이 가르친 국어강습소 제자들이 한글 발전에 중추 역할을 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후 수백 년간 천대받아 온 언문(諺文)의 우수성을 발견하고 부녀자의 장롱에서 이를 꺼내 한글로 재탄생시킨 분입니다. 우리나라에 띄어쓰기와 문장 부호를 최초로 도입한 인물입니다.
한글 연구 및 홍보: 헐버트는 한글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성격을 인식했으며, 서양에서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한글이 가진 고유한 특성과 그 효율성에 대해 강조하며, 한글이 한국 문화와 언어의 보존 및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한글 교육 및 사용 촉진: 헐버트는 한국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한글 교육에 힘썼습니다. 그는 한글을 사용하여 교육 자료를 제작하고, 한국인들에게 한글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당시 한국 사회에서 한글 교육의 확산과 한글 사용의 촉진에 기여했습니다.
한글을 통한 역사 및 문화 연구: 헐버트는 한글을 사용하여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했습니다. 그는 한국 역사에 대한 여러 저술을 남겼으며, 이들 저작은 한글로 작성되어 한국인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을 널리 퍼뜨리는 데 기여했습니다.
국제적 인식 제고: 헐버트의 활동은 서양에서 한글과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제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서양에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헐버트의 이러한 활동은 한글의 가치를 인정하고, 한국 문화와 언어의 보존 및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한글을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이를 국내외에 알린 학자이자 교육자로 기억됩니다.
헐버트와 헤이그 특사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와 헤이그 특사 사건의 연관성은 한국 근대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헐버트는 이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의 활동은 한국의 독립 운동과 국제적 인지도 향상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1907년, 고종 황제는 일본의 강압적인 통치에 항의하고 한국의 독립을 국제 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특사단은 이준, 이상설, 이위종으로 구성되었으며, 호머 헐버트는 제 4의 특사로 1907년 5월 8일 고종의 친서를 지니고 서울을 출발했다.
특사단의 조력자: 헐버트는 특사단의 서양 문화와 언어에 대한 지식을 가진 조력자로서, 특사단이 국제적인 무대에서 효과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는 통역과 외교적 조언을 제공하는 등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국제 여론 형성: 헐버트는 헤이그에서 한국의 입장을 국제 사회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서양 언론과의 접촉을 통해 한국의 독립 운동과 일본의 부당한 통치에 대해 알렸습니다.
외교적 노력: 헤이그에서 헐버트는 한국의 사정을 설명하고 지지를 요청하는 등의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의 노력은 한국의 처지에 대한 국제적인 인식과 관심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비록 헤이그 특사 사건이 당시에는 큰 외교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이 사건은 한국 독립 운동의 국제적인 인식을 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호머 헐버트의 역할은 한국의 독립 운동을 국제적으로 알리고 지원하는 데 있어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그의 헌신과 노력은 한국 근대사에서 중요한 장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헐버트와 경천사지 10층 석탑(국보 86호)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고려시대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이 석탑이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위협받을 때, 헐버트는 이를 보호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통치하면서 많은 한국의 문화재를 약탈했으며, 이는 한국의 문화유산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일본 궁내부 대신 다나카 미스야키(田中光顯)는 1907년 1월 황태자 순종의 결혼식 축하사절로 한국에 와 개성 부소산 경천사에 있던 석탑을 무단으로 해체해 수레와 철로로 부산으로 옮긴 뒤 배로 일본으로 가져가 자기 집 뒤뜰에 세웠습니다. 헐버트는 기고문과 함께 현장 사진을 바탕으로 최초로 일본인의 석탑 약탈을 공식화하였습니다. 일본 정부와 언론도 이를 부인하기 어렵게 되자, 1918년에 석탑을 돌려 주었습니다.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용산 중앙국립박물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헐버트는 이러한 일본의 문화재 약탈 행위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으며, 한국의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서양에 한국의 문화유산이 일본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국제적인 관심과 지원을 끌어내려 노력했습니다. 헐버트의 이러한 노력은 한국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국제적으로 인식시키는데 일조했습니다.
이처럼, 헐버트는 단순히 한국 문화를 연구하는 것을 넘어, 한국의 독립과 문화유산의 보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됩니다. 그의 헌신은 한국 문화유산의 보호와 국제적 인식 향상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그의 노력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기억되고 존경받고 있습니다.
헐버트의 한국추방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의 추방 사건은 그가 한국의 독립과 주권을 옹호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헐버트는 한국에서의 장기 체류와 활동을 통해 한국인들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으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일제의 불만을 샀고, 결국 그를 추방으로 이어지게 했습니다.
1906년, 헐버트는 일제의 한국 통치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지속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특히 그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강제적인 통치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당함과 불의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일제로 하여금 그를 위협으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후 일제는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친일파 이완용을 권력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일제는 한국 내에서의 반일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는데, 이 과정에서 헐버트도 그들의 타깃이 되었습니다.
헐버트는 일본의 압력으로 인해 결국 1907년 말 또는 1908년 초에 한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의 추방은 한국과 그의 깊은 유대감을 나타내며, 그가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한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계속했으며, 한국 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헐버트의 추방은 한국 근대사에서 외국인이 한국의 독립과 주권을 위해 희생한 사례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노력과 헌신은 오늘날에도 많은 한국인들에게 기억되고 존경받고 있습니다.
헐버트의 귀환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의 한국 귀환은 그의 생애 마지막 부분에서 일어났으며, 그의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과 헌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헐버트는 한국을 떠난 후에도 한국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노력을 계속했고, 그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한국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1949년, 헐버트는 86세의 나이로 한국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때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이었으며, 그는 자신의 삶을 한국에 바친 후에는 한국에서 그의 마지막을 맞이하고자 했습니다. 헐버트는 한국 독립 운동의 역사를 기록하고, 한국과 미국 간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등, 한국을 위한 그의 일에 계속해서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헐버트는 귀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1949년 8월에 서울에서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은 한국에서 크게 애도되었으며, 그가 한국에 끼친 영향은 크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헐버트의 유해는 서울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치되어 있으며, 그의 무덤은 한국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과 헌신을 상징하는 장소로 남아 있습니다.
<헐버트의 유언>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