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도금신앙과 정금신앙
고대 그리스 학자 아르키메데스가 남긴 유명한 감탄사가 있다. 이 단어는 “유레카”로 “내가 찾았다”라는 뜻이다. 배경은 이렇다. 시라쿠사의 히에로 2세 왕은 왕관을 만들기 위해 금세공인에게 금 덩어리를 주었다 왕관이 완성되자 왕은 금 세공인이 금의 일부를 은으로 바꾸어 자신을 속였다고 의심했다. 그는 아르키메데스에게 왕관을 훼손하지 않고 순금으로 만들어졌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아르키메데스는 이 문제를 고민하다가 목욕을 하다가 마침내 해결책을 찾았다. 그는 욕조에 넘친 물의 양이 물에 잠긴 몸의 양에 비례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 관찰을 통해 그는 동일한 원리를 사용하여 왕관의 부피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왕관의 부피를 무게와 비교하면 그것이 순금으로 만들었는지 아니면 다른 금속이 섞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흥분한 아르키메데스는 욕실에서 뛰어내려 알몸으로 “유레카”를 외치며 시라쿠사 거리를 달렸다고 한다.
두 종류의 신앙이 있다. 도금신앙과 정금신앙이다. 도금신앙은 겉과 속이 다르고, 정금신앙은 겉과 속이 같다. 도금신앙은 표면적인 신앙이고, 정금신앙은 뿌리 깊은 신앙이다. 도금신앙은 외면적인 신앙이고, 정금신앙은 내면적인 신앙이다. 도금신앙은 사람 앞에서의 신앙이고, 정금신앙은 코람데오의 신앙이다. 코람데오는 고넬료가 고백한 말이다.(행 10:33)
1. 도금신앙(The Gilded Faith)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7-28)
회칠한 무덤과 같은 사람에 대한 비유는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당시 종교 지도자들, 특히 바리새인들을 비판하며 사용하신 말씀이다.
겉으로는 아름답고 경건해 보이지만 내면은 부패하고 위선적인 사람들을 지적하는 말이다. 위선자는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도금신앙은 종교생활을 하고,
정금신앙은 신앙생활을 한다. 종교생활은 율법중심으로 살고, 신앙생활은 은혜중심으로 산다.
2. 정금신앙(The Pure Gold Faith)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8) 하박국의 신앙이다. “임금님의 손에서도 구해 주실 것입니다.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임금님의 신들은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단 3:17-18) 다니엘의 3 친구 신앙이다. 정금신앙은 상황이나 사람에 흔들리지 않는 순전하고 신실한 신앙이다. 정금신앙은 뿌리 깊은 신앙이다. 용비어천가에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니 꽃 좋고 열매가 많으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끊이지 않으니 시내를 이루고 바다로 가나니”란 시가 있다. 바람이 불어도, 가뭄이 닥쳐도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은 외부의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열매를 맺고 바다로 간다.
3. 도금신앙에서 정금신앙으로(From gilded faith to pure gold faith)
“나의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욥은 자신의 고통과 그 고통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자비로우심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라는 표현은 욥이 자신의 시련을 믿음과 인격의 시험으로 믿고 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욥은 시험을 통해, 마치 불 속에서 정제된 금처럼, 자신의 믿음이 더 순수하고 강해질 것을 믿었다. 시험은 진짜 친구인지를 알려 주고, 또한 자기 신앙의 현주소도 알 수 있다.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모른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고후 13:5)
“이 모든 일에 너희가 크게 기뻐하느니라 그러나 이제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간 근심하게 될 수 있었을지라도 이것이 온 것은 너희 믿음의 진실함을 입증하게 하려 함이니라.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는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딤전 1:6-7)
내가 누구를 보낼까?
제사장은 사람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이고,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 앞에 선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제사장이 활동할 때는 나라가 평화로운 시기이고, 선지자가 활동할 때는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이다. 선지자는 악한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사람이다. 모두가 찬성할 때 반대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모두가 Yes할 때 No라고 할 수 있는 소신이 있어야 한다. 이사야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이 통치하던 기원전 8세기 유다의 선지자이다. 그의 시대는 앗수르 제국의 확장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으로 특징지어졌으며, 앗수르 제국은 북왕국을 722년에 멸망시키고, 호시탐탐 남왕국을 침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 이사야의 거룩(Holiness of Isaiah)
“화로다 나에게 화로다 내가 망하였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느니라”(5절)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마주하고 자신의 부정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 스랍 천사 중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단에서 벌겋게 타는 숯불을 집어 가지고 나에게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이렇게 말하였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이제 네 죄는 사라졌고 너는 용서받았다.’고 했다. 인간은 계속하여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왔다. 인간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인간을 창조한 하나니을 알지 못하면 결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 이사야는 주님의 거룩함을 마주하며 주님의 임재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거룩 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부정 압도당하면서도 하나님의 깨끗케 하심에 감동받은 이사야는 변화를 경험한다. 이는 우리의 부르심이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분의 은혜를 받는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딤후 2:20-21절에 그릇에 대한 비유가 있다. 큰집에는 금그릇, 은그릇만 아니라 나무그릇 질그릇등 다양한 그릇이 있다. 주인이 쓰시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이다.
2.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 of God)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 것인가?'(8절), 소명은 부르심이고, 사명은 보내심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산 기슭으로 부르시고, 아론과 함께 애굽으로 보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부르시고, 땅끝으로 보내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부르셨고, 은사를 주시며 세상으로 보내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일회성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지속적인 순종의 여정이다. 그것은 매일 그분을 위한 우리의 계획을 포기하고, 모든 일에서 그분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디오게네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견유학파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어느날 그는 대낮에 등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거리의 사람들을 대낮에 대낮에 등불을 켜 들고 다녔다. 그 이유를 묻자 “나는 사람을 찾고 있소. 날을 밝은데 시대가 어둡군요”라고 했다. 그는 시대를 밝힐 사람을 찾고 있었다.
3. 이사야의 응답(Responding of Isaiah)
“내가 여기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8절)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자신의 안전지대에서 벗어나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헌신이란 한자어는 몸들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이 개념은 죽은 동물을 바치는 것과 관련된 구약의 희생제사와 대조된다. 자신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순종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이다. 세상의 방식과 욕망을 따르기보다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분의 은혜에 감사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신자의 삶의 모든 측면이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순종의 행위가 되어야 한다. 산제가 있으면 죽은 제사도 있고, 영적 예배가 있으면 육적예배도 있다. 죽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신앙 생활이 아니라 종교 생활을 하는 것이다. 육적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예식을 지키는 것이다.
구세군의 영성과 조직
1. 구세군의 영성
첫째는 전투적 영성이다. 구세군은 초창기부터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군대로서 제복을 입고 계급과 지휘체계를 따라 전투 현장인 거리로 나갔다.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향해 복음을 외치는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가로전도’ 방식은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는(saved to save) 구세군 정신을 표현하는 독특한 영성이다. 창립자의 전투적 영성은 오직 영혼구원을 향한 뜨거운 열정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 열정과 영성으로 “가라! 최 악인에게로 가라!”고 외쳤다. 이러한 전투적 영성은 구세군의 전통으로 계승되어 오늘날에도 전 세계 곳곳에서 ‘가로전도’를 펼치며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둘째는 자비석 영성이다. 자비석(Mercy Seat)은 구원을 향한 회개의 초청에 응답하여 무릎을 꿇고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속죄함과 구원을 받기 원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곧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를 가르친다. 초기 구세군에서는 거리에서 복음을 외친 후에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설교자 앞에 북을 눕혀놓고 그 앞으로 나와 회개하도록 자비석 초청을 했다. 천막집회에서는 의자를 사용하기도 하였고, 교회 안에서는 긴 의자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자기가 있는 그 곳이 바로 자비석이 될 수도 있다.
셋째는 절제의 영성이다. 초기 구세군 시절에는 선교의 대상이 대부분 가난한자였으며, 무서운 술꾼들이었다. 구세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술과 맥주를 금하였다. 이로 인하여 양조업자와 유흥업자들로부터 매수된 ‘백골단’이라는 조직으로부터 수많은 테러와 공격을 받았다. 그래도 끝가지 포기하지 않고 금주를 지켜왔으며, 구세군 병사가 되기 위한 서약에 금주를 포함시켰다. 구세군의 강력한 금주운동으로 수천명의 알코올 중독자들과 다른 약물 중독자들이 중독으로부터 회복되어 가정으로 복귀되었다.
넷째는 극기의 영성이다. 구세군의 삶의 양식으로서 ‘극기(克己)’는 금욕을 목적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적인 악한 유혹으로부터 자기를 지키고 관리하는 것이며, 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 위함이다. 극기의 삶이 없이는 성결의 신앙과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초기 구세군에서부터 지켜온 구세군의 정신이다. 이러한 정신의 발로에서 구세군에서는 고난주간을 극기주간으로 지킨다.
다섯째는 나눔의 영성이다. 구세군의 나눔은 청빈(淸貧)을 수반한다. 청빈한 삶에서부터 진정한 나눔의 미덕이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이 구세군의 정신이며 대표적 영성이다. 중세교회의 권력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함으로 타락하였고, 오늘날에는 시장경제와 신자본주의 가치가 교회와 성직자를 사로잡아 타락시키고 있다. 일찍이 구세군에서는 청빈과 나눔의 실천을 위해 단순한 삶을 가르쳤다. 청빈에 기초하여 열악한 환경에서 고통 받는 어려운 이웃과 가진 것을 나누고자 하는 삶은 초기 구세군에서부터 한결같이 성결 신앙의 사회적 실천으로 수행된 구세군의 대표적 영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영성은 구세군의 모토라고 말해지는 이사야 58장 6~7절에 잘 나타나있다.
2. 구세군의 조직
구세군은 인간의 영혼만을 구원하는 개인구원의 차원을 넘어 그 개인이 살아가는 사회적 환경을 개선하고 잘못된 사회구조로 인하여 고통받고 소외된 자들의 육체적 필요를 채워주는 전인적 구원을 그 선교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교정신에서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Heart to God, Hand to Man)’라는 선교 모토를 갖고 지난 160년간 발전해 왔다.
초기 구세군은 ‘가라! 영혼에게로, 극악한 자에게로’라는 창립자의 외침과 복음적 열정을 따라 주로 거리에서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대중을 향해 나갔다. 당시 영국사회는 산업혁명의 여파로 도시빈민과 실직자들이 거리에 즐비하였다. 구세군의 전투적인 복음전도의 방법은 때로 반대와 핍박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힘을 잃고 소망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대중들에게 마음의 위안과 그리스도 안에 새 삶의 희망을 갖게 하였다. 특히 오늘날 사회복지의 고전으로 알려진 창립자 윌리엄 부스의 저서 ‘최 암흑의 영국과 그 출로(In Darkest England & The Way Out, 1890)’는 19세기 말, 영국사회를 일깨우며 구세군의 존재와 위력을 널리 알리고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구세군의 본부는 영국에 있고 구세군의 최고지도자인 대장(General)이 있다. 대장을 보좌하는 최고 참모로서 참모총장(Chief of the Staff)이 있으며, 그 아래 세계 구세군을 유럽부(Europe Zone), 미주부(America Zone), 아태부(South Pacific and East Asia), 남아시아부(South Asia Zone), 아프리카부(Africa Zone) 총 5개 지역으로 구분하여 각 지역의 행정을 치리하는 국제부장을 두고 있습니다. 현재 구세군은 134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구세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구세군 교회를 통해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일정기간 잘 출석하게 되면, 그 후에 병사준비반에서 교육을 받고 구세군병사서약서에 서명한 후에 병사입대식을 갖게 된다. 각 교회에 소속된 병사들은 일정기간 하사관으로 필요한 교육을 이수한 후에는 각자의 재능과 역량에 따라 교회의 직분을 받고 봉사하게 된다. 구세군 병사로서 사관으로 헌신하게 되면 사관후보생으로 훈련을 받게 되며, 사관후보생 선발회의에서 엄격한 선발과정을 거쳐 사관학교에 입교하게 된다. 신임사관은 부위(Lieutenant)계급으로 시작하여 5년이 되면 정위(Captain), 15년이 되면 참령(Major)으로 진급하게 된다. 대체적으로 일반 사관은 참령으로 은퇴를 하며, 그 이상은 부정령(Lieutenant-Colonel), 정령(Colonel), 부장(Commissioner) 등으로 개인의 능력과 지도력에 따라 행정직책과 계급이 주어진다.
공의와 사랑이 만난 십자가
구약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이고, 신약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이다. 히브리서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옛 언약과 대조하면서 새 언약의 개념을 강조했다. 히브리서 1장 1-2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의 연속성과 성취를 강조하며 구약과 신약을 연결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은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저런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구약이다. 2절 하나님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신약이다. 구약은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하고, 신약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십자가에서 만났다.
하나님의 공의 (Righteousness of God)
공의란 ‘공평’과 ‘정의’를 하나로 줄인 말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상급을 주지만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벌을 내린다.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의가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의 죄로 인해 육으로 태어났다. 육에 속한 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을 자랑을 쫓는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렘 17:9)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죄인은 결코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한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이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이다.
하나님의 사랑 (Love of God)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 사랑이다. 아가페 사랑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며, 이타적인, 자기희생의 사랑이다. 아가페는 개인적 이득이나 감정적 연결에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최선을 추구하려는 의도적인 선택에 기반을 둔다는 점에서 낭만적인 사랑(에로스)이나 형제애(필리아)와 같은 다른 형태의 사랑과 구별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다보다 넓고, 하늘보다 높고, 우주보다 크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을지라도 하나님이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다.
우리가 아무리 큰 문제를 만날지라도, 하나님께서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며, 우리의 믿음을 통해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아가페 사랑은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지고,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Cross of Jesus Christ)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만난 곳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를 바탕으로 한 사랑이다. 공의가 없는 사랑은 ‘무법주의’이고, 사랑이 없는 공의는 ‘율법주의’이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공의가 완성된 곳이다.
우리는 아담의 죄로 인해 육으로 태어났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믿음으로 영으로 다시 태어났다. 요한복음 4장 3절에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born again)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다. ‘거듭난다’(born again)는 것은 ‘영으로 나는 것’(born spiritually)이고, ‘위로부터 나는 것’(born above)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제물이 되고, 제사장이 되어 제단인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시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3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광야에서 미드바르의 축복
영어에서 외로움(Loneliness)이라는 단어와 고독(Solitude)이라는 단어가 있다. 일반적으로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만, 심리학적으로 보면 Loneliness는 혼자 있는 외로움이고, Solitude는 주님과 함께 있는 즐거움이다. 외로움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고, 고독은 내가 선택할 때 존재한다. 현대인은 고독을 잃었기에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다.
카이로에 가면 콥틱 박물관이 있다. 사막의 교부로 잘 알려진 안토니우스 교부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품과 당시의 문헌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막은 상실과 결핍이 있는 곳이다. 사막은 여러 가지 시험이 있는 곳이다. 안토니우스는 상실과 결핍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시험을 통해서 더 성화될 수 있었다.
- 미드바르 (광야, Wilderness)
성경에서 광야는 중요하고 되풀이되는 주제 중 하나이다. 광야는 황량하고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 일반적으로 가혹하고 황량한 풍경을 의미한다. 광야에는 낮에는 뜨거운 햇볕이 쏟아지고 밤에는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든다.
왜 광야가 모래 사막인 줄 아는가? 일교차가 심하여 수축과 팽창이 반복되면서 바위는 부서져 모래가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흔히 광야에 비유한다. 광야는 메마른 황무지다.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다. 마실 물도 구하기 어렵고, 먹을 양식도 없는 곳이 광야다.
광야는 살아내기 힘든 고난의 땅이며 적막하기만 한 고독의 땅이다. 광야는 버려진 땅이며 황량한 곳이다. 인생은 광야와 같고, 광야에는 원래 길이 없다. 인간은 자기가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따라 산다. 부정의 길을 만든 사람은 부정의 길을 따라 살고, 긍정의 길을 만든 사람은 긍정의 길을 따라 산다.
- 베미드바르 (민수기, Numbers)
민수기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 겪은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와 더불어 ‘모세오경’으로 분류된다. 민수기는 ‘백성의 수를 계수했다’는 의미로, 헬라어 성경인 70인 역의 제목이다.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지침과 계획을 따르며 여정을 이어가는 모습을 담고 있으며, 그들의 믿음과 순종에 대한 가르침을 전한다. 민수기에는 두 번의 인구조사가 나온다. 1장 시내광야를 출발하기 전과 26장 가나안 입성 전 모압평지에서이다.
출애굽 1세대의 인구는 60만 3천550명이고, 출애굽 2세대의 인구는 6만 1천730명이다. 1세대가 2세대보다 1,820명이 많았다. 인구조사는 20대 이상의 남자만 계수하였고, 레위지파도 계수하지 않았다.
인구 조사의 목적은 첫째는 싸움에 나갈 만한 자의 수를 파악하는 것이고, 둘째는 가나안 정복 후 땅의 공정한 분배를 위한 것이다.
- 다바르 (말씀, Words)
히브리어로 미드바르는 ‘광야’이고, ‘다바르’는 말씀이며, 드비르는 지성소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미드바르)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다바르)하여 이르시되”(민 1:1)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있다. 법궤 안에는 모세의 십계명과 만나가 들은 금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그곳에서 만나서 말씀하겠다고 했다.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1-22)
광야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우리에게 주시는 곳이다. 광야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곳이다. 미드바르의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이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