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마음 (Psyche)이란 무엇인가?
심리학(psychology)의 어원인 ‘psyche’는 마음.정신, ‘logos’는 지식.연구를 뜻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Spirit)과 혼(Soul)과 몸(Body)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에서 인간을 영-혼-육의 삼중구조로 나누었다. 여기서 혼에 해당하는 헬라어 푸쉬케(ψυχὴ)가 영어로 마음(Psyche)이다. 심리학에서는 혼이란 용어 대신 ‘마음(Mind)’ 혹은 ‘정신'(Soul)이라고 한다.
심리학(Psychology)은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나아가 행동을 예측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심리학의 아버지를 ‘프로이트'( Freud)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독일의 심리학자 겸 철학자인 ‘빌헬름 분트'(Wundt)이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자(Psychoanalyst)이지 심리학자(Psychologist)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심리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학자 가운데서 한 사람이다. 특별히 그가 발견한 ‘무의식의 세계’는 인간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칼 융(Carl Jung)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발전시켜 마음을 3영역으로 분리하였다.
의식(Consciousness)
우리가 알거나 느낄 수 있는 모든 경험과 감각은 의식이다. 마음은 극히 일부분만이 의식의 범위 안에 포함된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빙산으로 비유한다. 수면 위에 있는 부분은 의식, 수면 밑의 있는 부분을 무의식이라고 한다. 융은 “무의식을 바다에 비유한다면 의식은 그 가운데 있는 자그마한 섬과 같다”고 했다. 의식의 중심부에는 ‘자아’(Ego)가 있다. 나의 생각, 나의 지각, 나의 느낌으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우리는 의식, 또는 자아의식이라 한다. 자아의식은 ‘유전과 환경’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발생된다.
융은 자아(Ego)와 자기(Self)를 구분하였다. “자아(Ego)는 의식의 중심이고, 자기(Self)는 의식과 무의식의 중심이다”라고 했다. 인간은 성숙하면 할수록 Ego가 아닌 Self가 마음을 지배한다.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하지 못하고 충돌하면 ‘분열된 인간’이 된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같이.
인생은 ‘자아(Ego)가 자기(Self)’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얼마 전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eat pray, love)”라는 영화를 보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안정적인 직장, 번듯한 남편, 맨해튼의 아파트까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지만 언젠가부터 이게 정말 자신이 원했던 삶인지 의문이 생긴 서른 한 살의 저널리스트, 리즈는 결국 진짜 자신을 되찾고 싶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일, 가족, 사랑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무작정 일 년간의 긴 여행을 떠난다.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신나게 먹고, 인도에서 뜨겁게 기도하고, 인도네시아에서 자유롭게 사랑하는 동안 진정한 행복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가 먹기 위해서 간 Italy, 기도하기 위해서 간 India, 사랑하기 위해서 간 Indonesia 는 모두 I (나)로 시작한다.
개인 무의식 (The Personal Unconscious)
‘무의식’이란 글자 그대로 ‘의식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의식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는 마음의 세계는 모두 무의식이다. 자기가 하고도 ‘왜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르는 것’은 모두 무의식의 결과이다. 융은 프로이트와는 다르게 무의식을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으로 구분하였다.
개인 무의식은 자아(Ego)에 의해 인정되지 않는 경험들은 소멸되지 않고 무의식에 저장된다. 개인무의식은 의식적인 개성화나 기능과 조화되지 않은 모든 정신적 활동과 내용을 받아들이는 장소이다. 너무 약하기 때문에 의식에 도달할 수 없거나 또는 의식에 머물러 있지 않은 경험은 모두 개인 무의식에 저장된다. 개인 무의식의 여러 내용은 필요할 때에는 언제나 쉽게 의식에 접근할 수 있다.
개인 무의식에는 하나의 공통된 주제와 관련된 정서, 기억, 사고가 집합을 이루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콤플렉스(Complex)이다. 콤플렉스는 특정한 생각이나 감정이 억압되어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심리적 쓴 뿌리이다. 콤플렉스는 무의식이므로 자아는 콤플렉스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자아도 인식하지 못하는 콤플렉스는 ‘투사’(Projection)를 통하여 나타난다. 우리 중에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다. 왜 그런가? 내 안에 그 미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의식이 내 무의식’을 미워하는 것이다.
집단 무의식 (The Collective Unconscious)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은 융이 제창한 분석심리학(Analytical Psychology)의 중심개념이며, 인간의 무의식의 심층에 존재하는 개인의 경험을 넘은 선천적 구조 영역이다. 이를 ‘보편적 무의식’이라고도 부른다. 개인 무의식보다 더 아래에 위치한 하부구조이다. 집단 무의식은 개인 무의식과 달리 개인적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일류에게 공통적으로 유전되어온 ‘집단 무의식’이 마음의 심층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융은 집단 무의식 속에 있는 것을 ‘원형'(Archetype)이라고 하였다. 이 단어는 ‘시작·원리’ 등의 의미를 가진’ arche’와 ‘각인’이란 뜻의 ‘type’의 합성어이다. 고고학이란 단어인 ‘Archaeology’도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원형의 상이 신화적이고, 인류의 태고의 역사나 종족의 기억에 거슬러 올라가듯 융은 이 말을 집단적 무의식에 존재하는 역동작용을 표현하는데 사용하였다.
‘원형'(Archetype)은 인간 심리에 내재하고 있는 역사적이고 집합적인 기억이다. 융은 “집단 무의식의 구조 안에는 인간 심리의 원형적인 건축 자재들이 저장되어 있으며, 인류 전체에 관한 ‘집합적 기억’이 축적되어 있다”고 했다. 대표적인 원형으로 그림자(Shadow), 여성성(Anima)과 남성성(Animus), 페르소나(Persona), 자기(Self) 등이 있다.
개인 무의식이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반면, 집단 무의식은 초개인적이며 객관적이다. 유전되는 것은 개인 무의식이 아니라 집단 무의식이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뱀을 싫어하고, 무서워한다. 왜 그럴까? 한 번도 뱀을 본적 없는 아이들까지도 말이다. 자기도 알지 못하는 ‘집단 무의식’ 때문에 그렇다. 물론 예외도 있다. 땅꾼은 뱀을 보면 ‘심봤다’, ‘유레카’, ‘할렐루야’
교만과 방관 그리고 시기 (오바댜)
‘교만과 방관 그리고 시기’
구약성서에서 가장 짧은 책은 ‘오바댜’이다. 1장으로 된 에돔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다. 에돔은 에서의 후예이고, 에서는 야곱의 쌍둥이 형이다. 에서는 동생에게 사기 당하여 장자의 권리를 빼앗겼다. 에서는 아버지 이삭이 돌아가시면 동생을 죽이려고 벼르고 있었다. 어머니인 리브가는 이 사실을 알고, 야곱을 하란에 살고 있는 삼촌의 집으로 빼돌린다. 20년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던 야곱은 큰 부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20년이 지났지만 형의 복수의 칼은 녹슬지 않았다.
야곱이 돌아온 다는 소식을 듣고 에서는 300명의 자객들과 함께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야곱은 싸늘하게 얼어붙은 에서의 마음을 녹이기 위해, 물질도 보내고 아내와 자녀들을 먼저 보냈다. 그러나 정작 야곱은 두려움에 떨며 얍복강을 건너지 못했다. 그날 밤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후,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뀐다. 사기꾼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여 이긴 자로 바뀐 것이다. 그 후 에서를 만난 야곱은 이렇게 고백한다. “제가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창33:10) 그렇게 형제는 화해하는 듯했다. 하지만 에서의 자손인 에돔은 이스라엘과 적이 되어 역사를 이어갔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에돔의 땅을 통과해야 했다. 정중하게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돔은 거절하였다.(민20) 다윗이 에돔을 정복한 이후(삼하8:14)에 세일 산(Sele)의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해 계속해서 싸웠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할 때 에돔은 바벨론에 가담하여 유다의 성읍을 점령하였다.(애4:21,겔 35:15) 알렉산더 대왕 시대부터 에돔은 ‘이두매’로 알려졌고, 로마는 유대 지역의 왕으로 에돔 출신의 헤롯을 임명했다. 헤롯은 유화 정책으로 두가지 방법을 썼다.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예루살렘 성전을 확장시키고 여러 지역에서 건축 사업을 펼쳤다. 헤롯은 건축광이었다. 또한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하스몬 왕가의 딸 미리암과 결혼했다. 하지만 에돔은 AD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오바댜는 ‘왜, 에돔이 멸망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오바댜는 에돔이 멸망한 이유는 3가지 죄 때문임을 밝히고 있다. 첫째 교만, 둘째 방관, 셋째 시기이다.
교만(Pride) : “너의 교만이 너를 속이고 있다.”(3절)
‘교만의 의미’는 무엇인가? 아퀴나스는 교만을 “본래의 자신보다 더 자기를 높은 데 놓는 것”이라고 정의했고, 어거스틴은 교만은 “우뚝 솟고 저명해지고자 하는 욕구”로 이해했다. C.S. 루이스는 교만이란 “하나님에 맞서는 악한 마음의 상태”라고 했다. 교만은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사는 것이다.
인간이 에덴에서 추방된 것은 교만 때문이고, 바벨탑 사건도 교만 때문이다. 성서는 우리에게 계속하여 교만에 대한 경고를 한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잠18:12)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벧전5:5) 했다.
요르단에 가면 ‘페트라'(Petra)가 있다. 이곳은 기원전 1400~1200년 경 ‘에돔과 모압’의 접경지에 자리였으며, 구약에서는 ‘에돔의 셀라’라고 지칭하고 있다.(왕하14:7,사16:1,42:11) 셀라는 히브리어로 바위이고 페트라는 헬라어로 바위라는 뜻이다. 사해의 남편 약 80km이고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남으로 190km 떨어진 곳이다. 이 페트라는 고대 국가 ‘에돔’(Edom)의 수도였다. 구약의 오바댜와 예레미야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바위틈에 거하며 높은 산에 사는 자여”(옵1:3), “바위틈에 거하며 산꼭대기를 점령한 자여”(렘 49:16), “셀라의 거민들은 노래하며 산꼭대기에서 즐거이 부르라”(사 42:11) 등은 모두 페트라의 셀라 거민들을 의미한다. 그곳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러한 교만이 스스로를 속인 것이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방관 (Looking on) :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12절)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싸울 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은 중립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강한 자의 편을 드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침략을 받을 때, 방관하는 것은 에돔은 바벨론 편이란 뜻이다. 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소극적인 죄’(Omission),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은 ‘적극적인 죄’(Commission)이다. 소극적인 죄는 방관, 침묵, 무관심 등이다.
에스더에서 유대인 전체가 위험에 빠지게 사건이 발생한다. 이 때 모르드게는 왕비인 에스더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말한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스더4:13-14)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만약 에스더가 침묵하면 “하나님은 다른 방법을 통하여 유대인을 구원하고 너와 네 집은 멸망할 것이다”라는 경고가 담긴 메시지이다.
신약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이다.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눅19:37-40)
시기 (Jealousy) : “너는 그들을 보면서 기뻐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가 고난 받던 그 날, 너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지 않았어야 했다”(12절)
욕심이 많은 사람은 남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기만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시기가 많은 사람은 ‘상대방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다.
욕심보다 무서운 것은 시기이다. 시기심이 많은 두 사람이 있었다. 천사가 나타나서 두사람의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했다. 무엇을 구하든지 먼저 말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고, 말하지 않은 사람은 두 배를 주겠다고 했다. 눈치를 보면서 서로 먼저 말하라고 종용을 했다. 약속된 시간이 가까워지자, 결국 한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 눈 하나를 뽑아 주세요”
창세기 3장은 타락장이다. 인간은 죄를 범함으로 에덴에서 추방되었다. 4장에는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장면이 나온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만 받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는다. 가인은 시기심이 발동되어 인류 최초의 살인죄를 저지른다. 시기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인간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동물에게도 시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집에 개 두 마리가 있다. 한 마리는 몰티즈 순종이고 이름은 ‘솜’이다. 다른 한 마리는 몰티즈와 폭스테리의 잡종으로 이름은 ‘테리’이다. 1년 전 솜이 혼자 있는 것이 외롭다고 해서 태어 난지 2개월 정도 되는 테리를 데리고 왔다. 개를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운다. 개를 키우기 전에는 개는 다 똑같다고 생각했다. 막상 두마리를 키우다 보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본성 때문인지, 환경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다. 둘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특별히 테리는 아주 시기심이 많다. 따로 먹이를 주더라도 테리는 먼저 솜의 것을 빼앗아 먹고 다음에 자기 것을 먹는다. 테리는 ‘솜’이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한다.
개는 개니까 이해가 간다. 그런데 인간은 인간이니까 이해가 안간다. 더구나 크리스천은 더 이해가 안간다. 왜 꼭 그랬어야만 했을까? 함께 잘 살 수도 있었는데! 자신의 능력만 믿고 ‘교만’했고, 형제의 고통에 ‘방관’했으며,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으로 착각하며 ‘시기’하다 멸망했던 오바댜의 이야기다.
인생은 선물인가, 상인가?
겸손은 ‘자신을 아는 것’이다. 델포이 신전에 쓰인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가 인용하여 우리에게 잘 알려졌다. “너 자신을 알라”란 말은 “너 자신의 무지함을 깨달아라”는 뜻이다. 소크라테스가 지혜자인 이유는 역설적으로 자신이 지혜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지혜는 ‘무지(無知)의 지(知)’이다.
심리학에서 ‘메타코그니션'(Mega-Cognition)이란 용어가 있다. Meta란 의미는 위, 넘어(Beyond)란 뜻으로, ‘상위인지’, ‘초인지’라고 번역이 된다.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Thinking about thinking), “아는 것을 아는 것”(Knowing about knowing)이란 의미이다. ‘메타코그니션’은 ‘자신이 누구인지’인지(Cognition)할 수 있는 능력이다. ‘메타코그니션’이 높은 사람일수록 겸손한 사람이다.
겸손(Humility)
겸손이란 Humility는 Humus에서 왔다. Humus는 ‘흙’이다. 인간은 자신이 흙에서 왔다는 것을 아는 것이 겸손이다. 아담(Adam)은 히브리어로 집합적인 의미에서의 ‘사람’을 뜻한다. 창세기 1장 27절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Adam)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창조하였다”고 했다. 창세기 2장 7절, ‘아담'(Adam)은 ‘흙’이란 ‘아다마'(adamah)에서 나왔다. 어원적으로 인간의 근본이 흙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이란 ‘집합명사’인 아담은 개인이름인 ‘고유명사’가 되었다.
흙인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생기(생명의 기운)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 비로소 아담(흙)이 생령(생명체)가 되었다. 생령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네페쉬 하야’는 땅과 바다에 사는 살아있는 ‘생물’에게도 사용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적 존재이다. 겸손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겸손은 은혜가 뿌리를 내리는 유일한 토양이다. 겸손은 모든 장점이나 미덕의 근본이다. 왜냐하면 겸손으로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세를 가질 수 있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만(Pride)
‘겸손’의 반대는 ‘교만’이다. 교만은 ‘자신을 모르는 것’이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으면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에, 어떻게 살지도 모른다. 교만은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사는 것이다. 교만 때문에 인간은 에덴에서 추방이 되었고, 언어가 분열되었다. 성서는 교만에 대하여 계속된 경고를 하고 있지만, 인간은 자신이 교만한 것조차 모르고 살아간다. 교만한 사람은 절대로 감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자기 힘으로 했다는데 누구에게 감사할 것인가?
교만한 사람은 인생을 ‘상(Award)’으로 보고, 겸손한 사람은 인생을 ‘선물(Gift)’로 본다. 상이란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고, 선물은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받는 것이다. 인생을 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감사하지 않는다. 자신이 잘해서 받았기에 감사할 대상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인생을 선물로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것에 감사한다. 선물이란 은혜이다. 은혜가 은혜 됨을 알고 사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불행은 교만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다”(잠16:18)고 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벧전5:5)
겸손과 교만
사람들은 ‘겸손’이 신앙인의 최고의 미덕 중 하나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예수께서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고 말씀하셨다. 겸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기독교인의 덕목이다. 그래서 설교자들도 “겸손하라”고 외친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겸손하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겸손한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가장 큰 교만은 스스로 겸손하다고 착각하는 것이고, 가장 큰 겸손은 자신이 교만한 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제자 한 사람이 질문했다. “선생님,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첫 번째 덕목이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은 지체 없이 ‘겸손’이라고 대답했다. “두 번째 덕목은 무엇입니까?” “그것도 겸손이다”, “세 번째 덕목은 무엇입니까?” “그것도 겸손이다”. 제자는 다시 물었다. “선생님, 겸손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만이다” “선생님,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까?” 어거스틴은 그를 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교만한 놈이다.”
믿음의 기도란?
선교를 4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첫번째 해안선 선교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교통이 편리하과 위험이 덜한 해안선 지역의 선교이다. 현대선교의 아버지인 ‘윌리암 캐리’가 처음 선교를 시작했을 때는 해안선 지역의 선교였다. 두번째로 내지 선교이다. 내지 선교는 해안에서 떨어진 지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해안 지역에 비해 많은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 아프리카를 선교한 ‘리빙스턴’이나, 중국 내지를 선교한 ‘허드슨 테일러’와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세번째 선교는 미전도 종족 선교이다. 한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특정 그룹이나 사람들을 겨냥한 선교이다. 이 용어는 좀 더 광범위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민족적, 문화적, 사회적 특성을 기반으로 한다. 마지막으로 도시선교이다. 도시선교는 도시와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에 초점을 맞춘다. 이시대는 땅끝이 도시로 몰려오고 있다. 도시선교는 높은 인구 밀도, 다양한 인구, 종종 빠르게 변화하는 생활 방식과 같은 도시 환경의 과제에 직면한다. 도시 선교는 특히 노숙자, 이민자, 불법체류자 등의 소외된 계급의 사람들이 포함된다.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최대의 명령’이다. 신앙생활에서 말씀을 듣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믿지도 않은 분을 어떻게 부르며, 듣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는가? 전하는 사람이 없이 어떻게 듣겠는가?
선교가 선교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확신에 깊이 뿌리를 둔 기도이다. 믿음의 기도는 성경에 명시된 대로 약속이 성취될 것이며, 그분의 뜻에 따라 반드시 응답될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한다.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생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1. 믿음으로 구하는 기도(Prayer in Faith)
믿음의 기도는 믿음으로 구하는 기도이다. 기도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의 기도는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 기도가 반드시 응답될 것을 확신하며 하는 기도이다. 아무리 오래 기도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도 의심하면서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외부의 상황이나 내부의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도해야 한다.
2. 하나님 중심의 기도(God-centered Prayer)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 중심의 기도이다. 하나님 중심의 기도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기도에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에 대한 사랑과 경배를 표현하고, 그분의 뜻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 강조된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기도의 목적이 이기적이거나 불순한 동기, 특히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개인적인 쾌락이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도는 응답을 받을 수 없다. 기도는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하여 하나님의 편이 되는 것이다.
3. 믿음의 선포기도(Proclamation Prayer)
믿음의 기도는 믿음으로 선포하는 기도이다.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선포하는 기도이다. 선포기도는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선포기도는 특히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나,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강조할 할 때 자주 사용된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것처럼 기도가 곧 사건이 된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요 11:45)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 주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기도는 주의 사랑과 능력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에 대한 응답의 역사이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