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믿을 수 있는 믿음 (막 9:14-29)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치유의 이야기가 아니라,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통찰하게 해주는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은혜란 자격없는 자에게 조건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잘해서 받은 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의 행위로 난 것이 아니니 자랑할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합니다.
구약의 율법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법이고, 신약의 은혜의 법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어서 구원을 얻는 법입니다.

믿음은 고백(Confession)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함께 변화산에서 내려와 제자들에게 갔습니다. 그곳에는 제자들이 한 아이를 고치지 못해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무슨 일인가 묻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때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 온 아버지가 대신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생님, 제 아들을 좀 봐주십시오. 제 아들에게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이 들렸습니다. 그 귀신이 아이를 사로잡으면, 아이는 땅에 쓰러져 거품을 물고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집니다. 제자들에게 데려왔지만, 아무도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더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 사람들이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오자, 귀신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아이를 심하게 흔들어 넘어뜨렸습니다. 아이는 땅에 쓰러져 거품을 물며 몸부림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이의 아버지에게 물으셨습니다. “이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어릴 때부터입니다. 귀신이 아이를 죽이려고 불 속이나 물 속에 자주 던졌습니다. 선생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은 그를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외쳤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24절)라고 말하며, 자신의 믿음이 온전하지 않음을 인정합니다. 믿음은 고백입니다. 자신의 믿음 없음을 고백합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믿음이란 모든 것을 다 아는 척하거나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드러내는 용기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책망하시기보다, 그것을 통해 우리를 더욱 깊이 만나시고 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완전한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상한 심령과 겸손한 마음을 기뻐하시며, 그런 자들과 함께하시고 힘을 더해 주십니다. 우리가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자신의 믿음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태도입니다.
지난 화요일 벨모아에서 목회할 때 교인이 연락 와서 만났습니다. 참 어렵게 살았던 분인데, 지금은 캔버라에 정착하여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겸손하고 순수한 분입니다. 송구 영신 예배 때, 그가 기도제목과 함께 헌금을 드린 것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헌금 봉투에는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저에게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2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그의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신앙 때문입니다. 이번 만났을 때는 순수함에 성숙함까지 더했습니다. “과거에는 받을 때 기뻤는데 지금은 나눌 때가 더 기쁩니다. 얼마전에 캄보디아 선교를 갔습니다. 선교는 처음이라 비행기에서 많이 걱정을 했습니다. 기도를 하니 네 일이 아니라 내일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냐는 마음을 주시면서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저는 은혜를 나누러 갔는데 오히려 제가 더 많은 은혜를 받고 왔습니다.” 이분은 타일, 돌, 수도, 화장실 등을 모두 수리하고 고칠 수 있는 분입니다. 선교지에서 정말 필요한 분입니다.
믿음은 행동(Action)
아이의 아버지는 단지 말로만 믿음을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아픈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직접 찾아온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기대나 감정이 아닌, 실제적인 행위로 나타난 믿음입니다. 믿음은 단지 마음의 고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 순종으로 이어질 때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듣고 끝나는 자보다, 그것을 따라 행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행동하는 믿음은 때로는 불편함과 희생을 요구하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우리가 성장하게 됩니다.
믿음은 단순한 감정이나 지적인 동의에 그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삶 속에서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보이지 않는 믿음은 보이는 믿음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보이는 믿음이 바로 행함입니다. 성경은 믿음이 보여지는 것이며, 움직이는 것임을 명확히 가르쳐 줍니다. 성경의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조들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는 미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시 순종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는 그런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는 불편함을 느낍니다.
심리학적에서 ‘인지부조화’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 느끼는 불편함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그는 ‘흡연은 건강에 해롭다’는 지식과 ‘나는 담배를 피운다’는 행동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게 된다. 환경 보호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일회용품을 자주 사용하는 경우, 다이어트를 결심했지만 야식을 먹는 경우 등에서도 같은 경우입니다. 이러한 불편함을 없애기 위하여 생각을 바꾸든지 행동을 바꾸어야 합니다. 믿음과 행동이 일치해야 하는데 일치하지 못할 때 오는 불편함 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다가, 요즘 제가 왜 설교하기가 어려워졌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설교한 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강의할 때는 별 문제가 없는데, 교회에서 말씀을 전할 때는 설교에 대한 부담이 큽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아직 신앙이 살아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만약 양심에 화인을 맞았다면 이런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앞으로 군법을 어긴 병사가 끌려 왔습니다. 알렉산더가 그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알렉산더입니다”, 알렉산더는 놀라며 다시 물었습니다. 그는 다시 대답합니다. “알렉산더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대노하며 “네 이름을 바꾸던지 아니면, 네 태도를 바꾸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기적(Miracle)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23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지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신뢰를 두고 그분의 능력을 의지할 때 가능한 놀라운 약속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불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께 도움을 구했고 그 결과 아들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기적은 시작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 믿음의 통로를 따라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 임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악한 귀신을 꾸짖어 말씀하셨습니다.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되게 하는 귀신아, 내가 너에게 명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말아라.” 귀신은 소리치며 아이에게서 떠나 도망가고 아이는 일어섰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믿음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세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첫째, 믿음은 연약함을 숨기지 않고 고백하는 용기입니다. 둘째, 믿음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셋째, 믿음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믿음은 삶의 여정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며, 우리를 하나님과 깊이 연결시키는 다리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겸손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하게 은혜를 주십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태도입니다. 은혜는 물과 같습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은혜는 겸손한 자에게 주십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믿음으로 더 깊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난민이란
국제 사회는 난민 문제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난민 보호와 지원을 위한 핵심 기관으로, 난민들에게 식량, 의료, 교육, 법적 보호 등을 제공합니다. 또한, 유엔은 난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1951년 난민 지위에 관한 협약을 채택했으며, 이를 통해 난민들이 안전한 피난처를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유럽연합(EU)은 난민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난민 분배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으며, 일부 국가들은 난민 수용을 확대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난민 수용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도 존재하며, 일부 국가들은 국경 통제를 강화하고 난민 유입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은 난민 보호 정책을 조정하며, 난민 수용을 확대하거나 제한하는 정책을 주기적으로 변경하고 있습니다. UNHCR과 협력하여 난민 재정착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난민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난민 문제는 단순한 인도적 지원을 넘어 정치, 경제, 사회적 영향을 미치는 복잡한 사안입니다. 국제 사회는 난민 보호와 국가 안보 사이에서 균형을 찾기 위해 지속적으로 정책을 조정하고 있으며, 난민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동시에 각국의 부담을 줄이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국제 사회는 난민 문제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주요 대응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1.유엔난민기구(UNHCR)의 활동 : UNHCR은 난민 보호와 지원을 위한 핵심 기관으로, 난민들에게 식량, 의료, 교육, 법적 보호 등을 제공합니다. 또한, 난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1951년 난민 지위에 관한 협약을 채택하여 난민들이 안전한 피난처를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2.난민 재정착 프로그램 : 일부 국가들은 난민을 안전한 지역으로 재정착시키는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과 캐나다는 난민을 받아들이고, 정착을 돕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3.난민 수용국 지원 : 난민을 많이 수용하는 국가들은 경제적, 사회적 부담을 겪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국제 사회는 난민 수용국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고, 난민들이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4.국제 협력 및 정책 조정 : 유럽연합(EU)은 난민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난민 분배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으며, 일부 국가들은 난민 수용을 확대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난민 수용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도 존재하며, 일부 국가들은 국경 통제를 강화하고 난민 유입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5.자발적 귀환 및 현지 통합 : 난민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자발적 귀환 프로그램이 운영되며, 일부 난민들은 새로운 국가에서 영구적으로 정착하는 현지 통합 정책을 통해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가기도 합니다.
난민 문제는 단순한 인도적 지원을 넘어 정치, 경제, 사회적 영향을 미치는 복잡한 사안입니다. 국제 사회는 난민 보호와 국가 안보 사이에서 균형을 찾기 위해 지속적으로 정책을 조정하고 있으며, 난민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동시에 각국의 부담을 줄이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는 난민 문제와 깊이 얽혀 있는 국가 중 하나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주요 경로로 자리 잡으며 많은 난민들이 그리스 해안을 통해 입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난민들의 상황은 매우 열악하며, 그리스 당국의 대응 방식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23년 6월에는 그리스 남부 해안에서 난민선이 전복되어 최소 79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실종되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또한, 2024년 BBC의 보도에 따르면, 그리스 해안경비대가 난민들을 강제로 바다로 밀어내는 사례가 최소 15차례 발생했으며, 이 과정에서 43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2. 이러한 ‘난민 밀어내기’ 정책은 국제법적으로 불법이며, 인권 단체들의 강한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는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럽연합(EU)과 협력하고 있지만, 난민 보호와 국경 관리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난민 문제는 단순한 정치적 논쟁을 넘어 인도적 차원의 접근이 필요한 복잡한 사안입니다. 이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하고 싶다면, 난민들의 실제 경험과 국제 사회의 대응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입니다.
호주는 오랜 기간 동안 난민을 받아들이면서도 강경한 이민 정책을 유지해 왔습니다.
1.초기 난민 수용 (1940~1970년대)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호주는 유럽에서 온 난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947년부터 시작된 이민 정책을 통해 약 90만 명의 난민과 이민자가 호주에 정착했습니다.
2.베트남 전쟁 이후 (1970~1980년대) : 1970년대 후반,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 많은 베트남 난민들이 배를 타고 호주로 도착했습니다. 당시 호주 정부는 난민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시행했으며, 이들을 위한 정착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3.강경한 난민 정책 도입 (1990년대~현재) : 1992년부터 호주는 비자 없이 입국하는 난민을 자동적으로 구금하는 정책을 도입했습니다. 이후 2000년대 초반에는 난민을 호주 본토가 아닌 파푸아뉴기니와 나우루의 난민 수용소로 보내는 ‘역외 구금’ 정책을 시행했습니다3.
4.최근 변화와 논란 : 2022년 노동당 정부는 나우루 난민 수용소의 수용 인원을 0명으로 줄이는 정책을 발표했지만, 2024년에도 여전히 일부 난민이 역외 시설로 보내지고 있습니다.
호주의 난민 정책은 국제적으로 논란이 많지만, 난민들의 사회 통합을 위한 다양한 지원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호주의 난민 정책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요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강경한 국경 통제 : 호주는 난민이 배를 타고 입국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며, 이를 위반한 경우 자동적으로 구금하거나 역외 수용소로 보내는 정책을 시행합니다. 반면, 캐나다와 독일은 난민을 받아들이는 절차가 상대적으로 개방적이며, 난민 신청자들이 본국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2.난민 재정착 프로그램 : 호주는 공식적인 난민 재정착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매년 일정 수의 난민을 받아들입니다. 캐나다도 유사한 프로그램을 운영하지만, 난민들이 지역사회와 더 쉽게 통합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이 더 강조됩니다.
3.사회보장 및 정착 지원 : 호주는 난민들에게 의료 서비스, 교육, 사회보장 혜택을 제공하지만, 난민의 고용과 지역사회 통합 측면에서는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반면, 독일과 프랑스는 난민들이 노동 시장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사회 통합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1.
4.난민 인정 비율 : 한국의 경우 난민 인정 비율이 매우 낮으며, 난민 신청자의 1.9%만이 난민 지위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반면, 미국은 연간 7만 3천 명, 호주는 1만 1천 600명씩 난민을 받아들이며, 난민 인정 비율도 미국(39.8%)과 호주(26.7%)가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호주의 난민 정책은 강경한 국경 통제와 공식적인 재정착 프로그램을 결합한 형태로, 다른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난민의 입국을 제한하면서도 일정 수의 난민을 받아들이는 방식입니다.
호주의 난민 정책은 온쇼어(Onshore) 난민과 오프쇼어(Offshore) 난민을 구분하여 운영됩니다.
- 온쇼어 난민 (Onshore Refugees)
호주 본토에서 난민 신청을 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비자를 소지하고 입국한 난민들은 난민 신청 절차를 거쳐 정착할 수 있으며, 사회보장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자 없이 입국한 난민들은 자동적으로 구금되며, 난민 신청이 처리될 때까지 구금 시설에서 대기해야 합니다.
- 오프쇼어 난민 (Offshore Refugees)
배를 타고 호주로 입국하려는 난민들은 자동적으로 역외 난민 수용소로 보내집니다.
대표적인 역외 난민 수용소는 나우루(Nauru)와 파푸아뉴기니(Manus Island)에 위치해 있으며, 난민들은 이곳에서 난민 신청 절차를 진행해야 합니다.
호주 정부는 난민들이 본토로 입국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강경한 국경 통제 정책을 유지하고 있으며, 난민들은 장기간 구금될 수 있습니다.
- 논란과 정책 변화
호주의 오프쇼어 난민 정책은 국제적으로 논란이 많으며, 인권 단체들은 난민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2.
최근 호주 정부는 일부 난민을 본토로 이송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여전히 역외 난민 수용소 운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호주의 난민 정책은 강경한 국경 통제와 공식적인 재정착 프로그램을 결합한 형태로, 난민 보호와 국가 안보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순교자를 배출한 버가모 교회 (Pergamum Church)
계시록 2:12 좌우에 날선 검
버가모는 서머나 북쪽 약 100km되는 곳에 위치한 수도로 주전 133년에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그 전까지 미술 등의 문화가 매우 발달한 곳으로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서관이 있었던 도시이다. 로마시대에는 황제숭배를 하는 예배처가 있었으며, 이방종교와 헬라신의 신전이 있었던 곳이다. 특히 의학이 발달한 도시로서 의학교가 있었다. 특별히 치료의 신으로 이해되었던 “아스클레피오스”라 불리는 뱀신과 주신인 ‘제우스’, 그리고 황소로 상징되는 ‘디오니소스’ (로마의 박카스 신)등을 숭배하는 곳이었다. 재미 있는 것은 음료수 박카스가 캄보디아에서 제일 인기 있는 음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한글로 박카스라고 쓰여 있다.
그리스 신화 아폴론의 아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의 신’이다. 이 의술신의 딸이 들고 다니는 단장에는 언제나 한 마리의 뱀이 둘둘 말려 있었다. 이 뱀은 의신의 신성한 하인이었고, 해마다 다시 소생하여 탈피함으로서 새로운 정력을 소생시킨다는 스태미너의 심벌로 간주돼 왔다. 지금도 군의관의 배지는 십자가 나무에 뱀 두 마리가 감긴 도안이고, 유럽의 병원과 약국의 문장은 치료의 신, 의술의 신을 상징하는 뱀이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쓰는 편지에서 다양한 차원에서 예수님은 자기계시를 하고 계신다. 버가모 교회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이’라고 했다. 에베소서 6장에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에 말씀하고 있다. 5가지는 수비형 무기인데 오직 하나 공격형 무기가 있다. 17절의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은 하나님이고 곧 예수님이다.(요1:1)
2:13 외적 핍박
‘사단의 위’라는 것은 ‘사단의 왕좌’라는 뜻으로 제우스신전을 뜻한다는 견해도 있으며, 혹은 ‘아스클레피오스’라고 불리던 치료의 뱀신을 뜻한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학자들은 버가모에는 황제숭배를 위한 예배처가 있었던 것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위란 단어는 영어성경에는 Seat 즉 ‘자리’라고 번역했다. 이 말은 헬라 원문대로 보면 ‘드로노스’로 왕위, 보좌란 뜻이다. 단순한 ‘자리’ 라는 뜻이 아니라 권세를 의미한다. 즉 사단의 권세가 지배하는 곳이란 뜻이다. 이러한 곳에서 예수를 믿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혼자 믿음을 지키는 것도 어려운 곳에서 증인이 된다는 것은 순교를 각오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증인이란 단어는 헬라어 순교자란 뜻이다. 버가모 교회는 ‘안디바’라는 순교자를 배출했다. 안디바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로서, 계시록 일곱교회에서 유일한 순교자이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순교한 자가 가장 미련한 자일 것이다.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 중의 한분은 주기철 목사이다. 그의 4째 아들이 주광조 장로의 아버지에 대한 간증을 들은 적이 있다. 감옥에서 너무 많은 고통을 받은 후에 풀려난 주 목사는 어느날 밥을 먹고 있는데 일본 경찰이 체포하기 위하여 들어오자 뒷마당으로 도망하셨다고 한다. 우리는 주목사님이 슈퍼맨과 같이 의연하게 대처할 것을 기대하지만 주목사도 정말 피하고 싶었던 길이셨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기까지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인간 주기철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한 성령이었던 것이다. 그의 아들 주광조 장로는 ‘순교자 나의 아버지 주기철 목사’란 책을 발간했다. 책안에는 이런 글이 있다. ‘주 목사님이 나약해서 힘이 모자라서 무식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말해야 할 때 벙어리 될 수가 없어서 그리고 당연히 가야 할 길을 도망치거나 피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당연히 죽어야할 이 시간에 살아남을 수 없어 죽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닌 자만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캄보디아에 2013년 6월에 방효원 선교사 가족이 2년간의 현지적응과 언어 연수를 마치고 수도인 프놈펜에서 사역지인 시엠립으로 가는 도중 교통사고로 2명의 자녀 그리고 부인과 함께 순직하셨다. 이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주의 일을 시작하려는 분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어디 이뿐인가 한국 최초의 호주 선교사인 데이비슨은 1889년에 한국에 들어와 6개월간의 언어 연수를 마치고 선교지인 부산에 도착하여 다음 날에 소천 하셨다. 사도행전 7장의 최초의 순교자인 스테반은 어떤 사람인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사람들의 칭찬을 받아 7 집사로 선택이 되었다. 그런 그가 돌에 맞아 순교를 당했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는가! 그 사건을 통하여 기독교가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고, 데이비슨 선교사의 순교를 통하여 더 많은 호주 선교사들이 한국에 파송되었다는 사실을. 가끔 우리는 우리의 시각으로 이해할 수 없어 의심의 뿌리를 내리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분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2:14 내적 유혹
외적 핍박에 강했던 교인들이 내적인 유혹에는 약한 면모를 보였다. 발람은 어원적으로는 백성을 정복하라는 니골라와 동일한 뜻을 가지며, 민수기22-24장에 의하면 불의한 삯을 사랑하는 거짓 예언자를 말한다. 또한 민수기25장에 의하면 이스라엘백성들이 우상숭배와 모합 여인들과 음행을 저지르는데, 그들은 자신들을 잘못 인도한 책임이 발람에게 있다고 보아 발람을 죽였다. (민31:8) 계시록 본문에서도 발람이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행음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러한 발람의 교훈은 “벧후2:15, 유1:11”에서도 언급되어지므로 거짓선지자로서 언급됩니다.
니골라 당이란 영지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영적인 것은 거룩한 것이고 육적인 것은 악한 것이니, 영적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은 육적으로는 어떻게 살아도 상관이 없다는 사상이다. 이들은 ‘자유와 방종’을 구분 못하는 자이다. 우리가 영적인 구원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들은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위한 방종으로 착각하고 자들이다. 루터가 자유의 헌장이라고 말한 갈라디아서 5:13에는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마틴 루터는 이를 ‘종의 자유’라고 했다.
2: 6 회개하라
머리 위에 새가 날아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새가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계속하여 사단은 우리 마음에 악한 둥지를 만들려고 시도를 한다. 우리는 오직 회개를 통한 성령 충만함으로 이길 수 있다. 불을 품고 옷이 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는가! 숯불을 밟고도 발이 대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잠6:7,28절)
유럽 어느 마을에 신부가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성이 너무 자유로워서 문제가 많이 있었다. 고해성사는 언제나 “신부님 오늘도 간음했어요”라는 내용이다. 신부는 이 말을 듣기가 역겨워서 “간음했다고 하지 말고 넘어졌다” 하라고 말을 바꾸었다. 사람들은 고해성사 할 때마다 한두번도 아니고 하루에도 몇번씩 넘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너무 화가 난 신부는 시장에게 가서 신도들이 자주 넘어지니 도로공사를 하셔야 하지 않겠냐고 요청을 했다. 시장은 재미있어하며 박장대소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화가 난 신부가 이게 어디 웃을 일이냐며 “당시 부인도 어제 두 번이나 넘어졌습니다.”라고 말했다.
2:16 말씀의 검
버가모 교인들이 회개하면 ‘내 입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저들과 싸우겠다고 했다. 마태복음 4장에 광야에서 사탄에게 3번의 시험을 받았으나 예수께서는 모두 ‘기록되었으되’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성도의 승리의 비결은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사역은 모두가 인본적이다. 인복적인 목회를 한다는 것은 기업경영을 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기업도 경영을 잘하면 돈도 벌고 직원도 많아지고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곳에는 생명이 없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세상적인 경영 기법을 도입하면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말씀이 없는 교회는 살았다고 하나 죽은 교회이다.
2:17 만나과 흰돌
사도요한은 그리스도가 일곱교회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상을 상징적으로 기록하였지만, 모두 최종적인 영광의 구원과 하늘의 영생복락을 뜻하며, 최종적으로 받게 되는 상이다. 감추어진 만나는 신령하고 참된 영적 양식의 상징적인 의미로 메시야이신 예수의 재림을 통하여 주어지는 상을 말한다. 흰돌에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연회에 초대할 때 주는 돌이라는 의미도 있고, 재판과정에서 무죄 판결이라는 의견도 있으며 승리하는 자에게 주는 돌이라는 뜻도 있다. 새이름이란 이기는 자들에게 종말에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시는 영광스러운 지위와 신분들 뜻한다.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 (Laodicea Church)
라오디게아 교회
라오디게아(Laodicea)는 금융, 무역, 직조, 제약기술 등이 발달되었던 도시이다. 재정적으로도 튼튼하여 주후 60년경에 있었던 대 지진도 외부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복구할 정도였다. 또한 히에라볼리의 유황성분이 있는 온천물을 이용하여 연고로 된 안약을 제조하는 기술로도 유명했다 한다. 하지만 라오디게아 교회는 소아시아 7개 교회 중 가장 많은 책망을 받은 교회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3:16)는 주님의 책망을 받았던 교회였다. 물이 부족한 라오디게아 에서는 약 10K 떨어진 ‘히에라 포리스’의 온천수를 끌어다 썼다. 뜨거운 온천수는 라오디게아에 도착할 때쯤은 미지근해 진다. 주님은 미지근한 물을 비유하여 라오디게아 교인의 영적인 상태를 책망했다.
‘히에라폴리스’의 현재 이름은 ‘파묵깔레’이다. 파묵깔레는 ‘목화성’이라는 뜻으로 온천수의 석회질이 흰색 바위같이 대규모로 응집되어 멀리서 보면 목화를 쌓아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마치 반바지를 입고 겨울 산을 등반하는 것 같았다. 주요한 유적으로는 사도 빌립 기념교회, 개선문, 아폴로 신전, 야외극장, 대규모 공동묘지 등이 있다. 사도 빌립은 전도가 거의 불가능한 이곳에서 복음을 증거하다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 기념교회는 기독교가 공인된 5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6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7절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미지근하다는 말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는 분명해야 한다. 여호수아는 미지근하여 분명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방신과 여호와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수아는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 노라”고 말했다(수24:15). 갈멜산에서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꾸짖는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왕상 18:21)
18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 부자라고 하나 가난한 사람들이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 보기에는 아주 가난한 자였다. 그들은 세상적으로 부족함이 없으니 부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교인들에게 주님은 “불로 연단한 금”을 사야한다고 했다. 이 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같은 시련으로 연단된 믿음”을 가리킨다. 용광로를 통과하지 못한 원석은 쓸모가 없다. 진짜와 가짜는 시련이 있을 때 가려진다. 친구도 마찬가지다. 목자와 삯군도 마찬가지다. 평안할 때는 알지 못했던 신앙의 비밀을 시련을 통하여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래서 라오디게아가 교인에게 불로 연단한 믿음의 금을 가지라는 것이다.
2) 눈은 떴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요한계시록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안약은 라오디게아의 특산품으로서 이 지방에서 생산되는 프리기아석(Phrygian stone)의 분말가루를 원료로 하였다. 라오디게아는 안약으로 유명한 곳이었지만 그 곳의 교인들은 영적으로 눈이 멀었던 것이다.
왕하 6장을 보면 이스라엘과 아람이 전쟁할 때 아람 왕 벤하닷이 밀실에서 작전을 짠다. 그때 엘리사는 영적인 능력으로 그 작전 짜는 소리를 듣고 이스라엘 왕이 어디로 가서 어디를 방비해야 할지 철저히 대비시키니까 아람이 당할 수 없었다. (8-10절). 결국 아람왕이 내부 스파이가 있는 것 아니냐고 하자 한 신하가 말했다. “아닙니다. 저쪽에 엘리사란 선지자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도 다 듣고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는 것입니다(12절).” 그러자 아람 왕은 엘리사를 잡으려고 병사를 보내 엘리사가 있는 도단성을 포위했습니다(14절).사환이 아침에 나가보니 무수한 아람군대가 성을 둘러싼 것을 보고 놀라서 그 보고를 하자 엘리사가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다(16절).” 그때 엘리사는 영안으로 아람 군대보다 더 많은 하늘 군대가 자신과 함께 함을 보았다. 영안이란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보는 눈이다.
3) 옷은 입었지만 벌거벗은 사람들이다.
양모산업은 라오디게아 재정의 또 다른 주요 수입원이었다. 로마의 플리니(Pliny)는 이곳의 양모에 대해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검고 윤이 나기까지 하여 단연 최고의 품질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옷을 잘 입고 살았던 사람들이다.
마태복음 22장에 결혼 잔치에 대한 비유가 나온다. 왕이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 했다. 초대 받은 사람 중에 예복을 입지 않고 온 사람들이 있었다.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 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22:11-14)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천국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다. 이제 우리는 초대한 합당한 옷을 입어야 한다.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3:27) 그렇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한다. 어린양의 피로서 우리의 죄를 씻고, 새옷을 입고 천국잔치에 참여해야 한다. “흰옷을 입고 나온 무리들은 어린양의 피로 씻어 이 옷을 입고 있었다” (계7:14).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께서는 영적으로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다가가셔서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어 주를 영접하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순종과 믿음을 통해 그 문을 열게 될 때 영원한 행복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라오디게아 교회는 회개하고 주께로 돌이켜서 그분과 함께 그의 하나님의 축제에 참여하기를 종용받고 있다. 홀맨이란 화가가 이 말씀을 근거로 ‘세상의 빛’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밖에는 문고리가 없다. 문은 안에서만 열수가 있다. 주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 열기를 원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딤전2:4)

약하지만 강한 빌라델비아 교회 (Philadelphia Church)
빌라델비아 교회
빌라델비아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뜻의 필로스(Pilos)와 형제라는 아델포스(Adelpos))가 합쳐진 복합명사로서 ‘형제사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미국의 펜실베니아 주의 필라델피아시가 있는데 원래의 미국의 수도가 이곳에 있다가 지금은 워싱턴 시티로 옮겼다. 빌라델비아 지역은 두 가지가 유명하다. 이곳은 지진이 많았던 지역이다. 오늘 본문에서 집과 관련된 문, 기둥 등이 나오는 것은 빌라델비아 지역이 특수한 사정과 연관해서 묘사된 용어이다. 둘째 이곳은 포도주 생산지로 유명하여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던 지역이다. 디오니소스는 로마시대에 와서는 ‘박카스’라고 불렀다. 아마 박카스는 한국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음료가 아닌가 생각한다. 놀라운 것은 캄보디아에서도 인기 음료라는 것이다. 캄보디아에서 내가 탄 차량 기사 옆에 한글로‘박카스’라고 쓴 음료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료수가 박카스라고 한다. 다른 지역에 비하여 빌라델비아는 작고도 발전되지 않은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 교회는 책망 없이 칭찬만 들었다. 서머나 교회와 함께 우리에게 가장 모범적인 교회로 본을 보여 주고 있다. 주님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한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문이 열려 있는 교회
8절을 보면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했다. 만약 문이 언제나 닫혀 있다면 벽이지 문이 아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을 향한 책임적인 공동체이지 교인만을 위한 방주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교회는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선교 공동체이다. ‘우리끼리’라는 말이 참 좋은 것 같은데, 사실 보이지 않은 벽을 만들고 있다. 그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소외가 된다. 만약 교회가 그러한 의식을 가지면 교회 밖의 사람들은 자연히 이방인이 될 것이다. 얼마 전 ‘구세군 글리브 교회’ 옆 술집에서 매주 금요예배를 드려 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상식적으로 술집에서 예배 드린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구세군 본부에서 많은 토론 끝에 예배 드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구세군은 원래 모이는 교회보다는 흩어지는 교회에 초점을 두었다. 아무도 원치 않는 곳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또한 교회는 하늘을 향해서도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 주께서 우리의 예배를 열납하여 받으시고, 찬양을 기뻐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둘째 적은 능력에도 말씀을 지키고 주를 배반치 않은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는 규모가 작고 교인수도 소수였으며, 특별한 부자도, 유력한 실력자도 없는 약하고 작은 교회였다. 그럼에도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핑계대지 않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삼하 19:24-30절을 보면 다윗이 므비보셋을 책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예루살렘 성을 떠날 때 므비보셋은 동행하지 않았다. 복귀한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많이 서운 했었던 것 같다. 다윗은 “너는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않았느냐” 묻는다. 이때 므비보셋은 자신은 혼자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이고, 자신의 종도 자기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다윗이 베푼 은혜를 생각하면 죽더라도 다윗을 따라갔어야 했다. 우리도 핑계가 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할 때, 본능적으로 환경이나 자신의 능력을 탓한다. 하지만 오늘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적은 능력을 가진 교회 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 적은 능력이 핑계 거리가 아니라 , 주님을 더 의지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가시를 놓고 세 번이나 간절하게 기도를 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 주시기를 “네가 약한 중에 강하여 질 것이라”고 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 때문에 주님을 더 의지할 수 있기에 더 강해 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된 교회
빌라델비아 지역에는 지진이 많이 일어나서 기둥이 튼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집이 파괴된다. 대만, 일본, 뉴질랜드, 터키 같은 곳은 지진대에 속해 있다. 일본의 지진 소식을 심심치 않게 접한다. 지진과 관련하여 우리는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 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커다란 인명과 재산 피해가 생겨나고 민심이 흉흉했다. 일본은 어지러운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당시 관동지방에는 세번에 걸쳐 강력한 지진으로 지방이 초토화되었다. 이때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하달한 내용 중에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보도되었고 보도내용에 의해 더욱더 내용이 과격해진 유언비어들이 신문에 다시 실림으로서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있다” 라는 헛소문이 각지에 나돌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분개하여 조선인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관동 지방에 조선인이 삼만명 정도 살았는데, 지진후 2만 정도가 실종되었다고 한다. 마치 AD 64년 로마가 불타고 있을 때 네로 황제는 기독교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민심을 달랬던 것처럼.
지진대에 위치한 나라들은 건축공법이 뛰어나다. 1996년에 교환사관으로 뉴질랜드에 간적이 있다. 수도인 웰링톤에 있는 국회를 방문했다. 함께 간 사람이 나를 국회 빌딩을 지탱하는 기둥으로 데리고 가서 건축공법을 설명해 주었다. 기둥아래에는 지진 때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스프링 장치 같은 것이 있었다. 정말 강한 기둥은 딱딱한 기둥이 아니라,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유연한 기둥이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세상과 하늘을 향하여 문이 열려 있는 교회이고, 적은 능력이 핑계가 아니 기회가 된 교회이며, 무엇보다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된 교회이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