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사랑의 피라미드
신앙의 여정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은 시내산과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선포하신 팔복산은 각각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시내산의 율법과 산상수훈의 말씀은 구원을 위한 조건이 아닌, 이미 구원받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성결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 시내산의 모세율법
시내산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후, 광야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며 받은 삶의 기준입니다. 출애굽기 19장부터 20장까지 등장하는 이 장면은 단순한 율법의 전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백성과 맺으신 거룩한 언약의 선언입니다. 이때가 밀을 거두는 오순절이고, 신약에서는 성령강림절입니다.

구약에서 율법을 받은 날이 신약에서는 성령을 받은 날과 같습니다.
시내산에서의 율법 선포는 단순히 도덕적 규칙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에 걸맞은 거룩한 삶의 방식에 대한 총체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사건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율법은 백성이 구원받기 위해 지켜야 할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이 어떻게 거룩하게 살아가야 하는 지를 알려주는 삶의 지침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율법의 핵심은 외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을 삶 속에서 실천하고 내면적으로도 변화되는 성화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2절에서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단지 도덕적인 수준에서의 거룩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을 본받아 공동체 속에서 그분의 거룩함을 반영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초청입니다.
따라서 시내산 율법은 구원 이후의 삶에서 성화의 과정을 걷는 모든 신자 여러분께 여전히 중요한 영적 원칙과 방향성을 제공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 팔복산의 산상수훈
예수님께서 팔복산에서 제자들에게 전하신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단순한 윤리적 지침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천국 백성으로 부름받은 자들이 이 땅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천국 시민의 헌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팔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등은 모두 세상 기준으로는 연약하고 약한 자로 보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들을 복되다 선언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 음욕과 분노의 문제를 다루는 가르침, 이웃을 향한 진실함과 용서를 강조하는 말씀들은 외적인 행동뿐 아니라 내면의 동기까지 다스리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5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말씀하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닮은 온전함을 목표로 하는 삶을 제시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도덕성의 완성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지속적인 변화와 성숙의 과정입니다.
따라서 산상수훈은 구원받은 백성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며, 천국 백성으로서 이 땅을 거룩하게 살아가는 삶의 실제적인 지침이 됩니다.

- 사랑은 율법의 완성
율법은 모두 613개가 있습니다. 이 중에 하라는 것이 248개와 하지 말라는 것 365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613개의 율법은 십계명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이 십계명은 다시 두 가지 큰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이는 수직적인 관계에서의 사랑을 의미하며,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수평적인 관계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이 두 계명은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강조하신 내용입니다. 이 두 계명을 통합하는 중심에는 ‘자기 사랑’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즉,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건강한 자기 인식과 자기 사랑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출발점임을 시사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으며, 이는 곧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에도 한계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자기 사랑은 자만이나 이기심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왜 우리가 우리를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한 나를 내가 미워한다면 그만큼 어리석고 교만한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요한일서 4장 19절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사랑의 기준이며 출발점임을 보여줍니다.

에베소서 5장 2절은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존재로서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고, 그 사랑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곧 건강한 자기 사랑의 시작입니다. 자기 사랑이 올바로 자리잡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깊이 사랑하게 되며, 그 사랑을 이웃에게도 진실하게 나누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결국, 자기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자가 보여주는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한 가지 중요한 모순과 마주하게 됩니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부정하고 무가치하게 여기면서도 타인의 칭찬과 인정을 갈망하는 이 내적 충돌은 우리 영혼을 지치게 하고 관계를 왜곡시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가까운 배우자나 가족을 무시하거나 냉대하면서 정작 사회적 관계에서는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기를 바라는 이중적인 태도 역시 깊은 자기 불일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진정한 자기 사랑은 이러한 모순을 치유하는 열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를 바라볼 때, 나는 더 이상 스스로를 숨기거나 과장할 필요가 없으며, 진실한 존재로서 하나님과 이웃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은 거짓 없고 온전하여, 나의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도, 그리고 세상 속 이웃들에게도 동일한 사랑으로 연결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자기 사랑은 단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참된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근원이 됩니다.

여호수아를 아십니까? (여호수아 1:1, 24:29)
오늘 읽은 본문을 의지하여 “여호수아를 아십니까?”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여호수아’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김수아입니다. 수아 엄마 아빠는 제 사관학교 동기이고, 우리 교회에서도 설교를 했습니다. 어제 저녁 왜 수아라고 지었는가 알고 싶어서 카톡을 했습니다. 수아 오빠의 이름이 창민인데 아명이 모세입니다. 모세 동생이라서 여호수아라고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수아는 여호수아와 같이 진취적이고 담대합니다. 원래 미국을 가기 위한 교두보로 호주에 왔다가, 산치를 만나 미국 대신 호주를 정복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사관 후보생입니다. 복음으로 호주의 여호수아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이고, 여호수아서는 가나안 정복기입니다. 이 책은 아브라함과 맺었던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약속의 성취를 강조하며, 백성의 순종과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모세오경은 하나님께서 민족을 형성하고 법을 주신 이야기이고, 여호수아는 땅을 주신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며, 원래 이름은 호세아(Hosea) 였습니다. 모세가 그의 이름을 여호수아(Yehoshua) 로 바꾸어 불렀습니다(민 13:16). 여호수아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호세아, 여호수아, 예수는 같은 의미입니다. 여호수아가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곳은 출애굽기 17장 9절입니다. 이 장면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아말렉과의 전투를 벌이는 때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군대를 이끌고 아말렉과 싸우라고 명령하며, 자신은 산 위에서 지팡이를 들고 기도하겠다고 합니다. 이 전투에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우세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론과 훌이 모세의 팔이 지치지 않도록 붙들어 주었고, 결국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무찌르게 됩니다(출 17:13).
또한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탐하러 보내진 12명 중 한 명으로, 갈렙과 함께 믿음의 보고를 했습니다. 당시 대다수 정탐꾼들은 가나안의 강한 군사력을 보고 두려워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승리할 수 있다”고 믿음으로 고백했습니다(민 13, 14장).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임명하라고 명령하셨고, 그는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책임을 맡게 됩니다(민 27:18-23).

여호수아서
기독교 성경에서 여호수아서는 역사서의 첫 번째 책으로 분류되지만, 히브리 성경(타나크)에서는 예언서의 첫 번째 책으로 들어갑니다. 기독교 성경에서는 여호수아서를 출애굽 이후의 가나안 정복을 다루는 역사적 기록으로 보지만, 히브리 성경에서는 여호수아를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예언적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강조합니다. 또한, 신학적으로 여호수아서는 “모세 6경”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는 모세오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이 여호수아서에서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는 못했고, 그 역할을 여호수아가 이어받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복을 이루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여호수아서는 24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24장을 4가지 동사로 구분하여 나눌 수 있습니다. ‘건너다’를 중심으로 1-5:12절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입성한 이야기, ‘취하다’ 5장 13절부터 -12장까지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야기, ‘나누다’를 중심으로 13장부터 22장까지 각지파에게 땅을 나누는 이야기, ‘섬기다’를 중심으로 23-24장까지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임을 강조하는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서의 하이라이트는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정복하는 장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5장에 길갈에서 할례의식을 치르고, 유월절을 지킨 후에 여리고로 가던 길에서 그는 칼을 든 사람을 만납니다. 여호수아는 칼을 든 자를 보고 묻습니다. “너는 누구 편이냐?” 그는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왔다”고 답합니다. 그는 여호수아에게 “이곳은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으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3장에 모세가 하나님을 만날 때의 장면을 연상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은 교만의 신, 자존심의 신, 위선의 신, 거짓의 신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고, 그분의 뜻 안에 거하며,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지만, 진정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링컨 대통령의 부관이 “하나님이 우리 편이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말했습니다. 이때 링컨은 “아닐세, 나는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기를 원하네.”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6장은 여리고 성 함락 사건에서, 그는 군사 전략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승리를 거둡니다. 7장은 작은 아이성에서는 대패하였습니다. 아간의 죄로 인하여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쳤듯이, 우리의 작은 불순종도 신앙 공동체와 개인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상대방의 강하고 약함이 아니라 내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 편에 섰을 때는 강한 여리고 성도 무너트릴 수 있었지만, 하나님을 멀리할 때는 작은 아이성 전투에도 패배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종
여호수아 1장 1절에서 여호수아는 “모세의 수종자”로 불립니다. 이 표현은 여호수아가 초기에는 모세의 조력자이자 제자로서 섬겼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 시기의 여호수아는 모세의 지도력 아래 충실히 따르는 위치에 있었으며, 그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부름보다는 모세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24장 29절에서는 여호수아를 “여호와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그의 영적 성숙과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한 지도자로서의 전환을 보여줍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단지 모세의 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직접 순종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참된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수종자”에서 “여호와의 종”으로 변화한 과정은 신앙 여정의 깊은 의미를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인간 지도자의 가르침 아래에서 배우고 자라났지만, 시간이 흐르며 순종과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된 지도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 신앙의 여정에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도 처음에는 믿음의 선배들의 인도를 받으며 신앙을 배워갑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자신의 소명을 책임지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 지도자에게 의존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성장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맞긴 사명이 있고, 여호수아에게 맞긴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섭니다.
비교와 경쟁은 너와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하는 것입니다. 비교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하는 것이고, 경쟁은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나로 만들었습니다. 마지막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너는 왜 베드로 같이 살지 못했어, 왜 바울 같이 살지 못했어라고 책망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왜 너 답게 살지 못 했어” 우리의 정체성은 남과 비교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정체성은 사람이 변하면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물질이나, 명예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정체성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정체성을 형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