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
기도는 길입니다. 육의 기도(氣道)는 숨길이고, 영의 기도(祈禱)는 하나님과 소통의 길입니다. 육의 기도가 막히면 육이 죽고, 영의 기도가 막히면 영이 죽습니다. 영의 기도(祈禱)는 일방적으로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켜 내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어 하나님 편이 되는 것입니다.
1. 기도의 태도
기도의 태도는 기도자가 취해야 하는 내적 자세와 심리적, 영적 준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가르치기 전에 기도의 태도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 기도할 때 은밀한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며, 중언부언하지 말아야 함을 가르칩니다(마 6:5-7). 기도는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분의 도우심에 의존해야 합니다(약 4:10).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약 1:6). 모든 기도는 감사로 충만해야 하며(빌 4:6),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그분의 선하심을 인정하는 중요한 태도입니다. 감사의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고, 우리가 이미 받은 것에 대한 만족과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표현합니다. 기도는 단순히 새로운 것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과정입니다.
2. 기도의 대상
기독교의 기도와 다른 종교의 기도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본질적인 차이는 기도의 대상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그들의 기도를 합니다. 이슬람교는 공식적으로 5번을 기도합니다. 그 사람들은 시간이 되면 메카를 향하여 기도합니다. 고목나무에게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목나무가 속이 썩은 이유는 해주고는 싶은데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답답해서 썩었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기도의 대상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창조주시며,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의존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우리의 삶을 세밀하게 돌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고 신뢰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중보자이자 구세주로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립니다. 성령님: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를 돕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기도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모를 때에도 성령님은 대신 간구하십니다(롬 8:26).
왕상 18장에서 엘리아의 갈멜산 전투에 대해서 나옵니다. 이 사건은 엘리아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참된 신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왕상 18:21)
출애굽기 3장에 하나님은 불타는 떨기나무로 모세를 부르고 내 백성을 구하라고 합니다. 모세는 제가 누구관대 바로에게로 갑니까?(11-12절) 여호아는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13절에 그들이 이름을 물으면 뭐라고 합니까?, 14. “나는 스스로 있는자이다”라고 말씀을 하시고 15절에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는 히브리어 YHWH에서 유래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도나이’의 모음을 합해서 여호와(야훼)라고 발음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출 3:14) 또는 “독립적인 존재”라는 뜻으로, 이는 여호와는 창조주로서 자존적이고 변하지 않는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Omni’라는 단어로 설명합니다. Omnipotent, Omniscient, Omnipresent, 여호와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편재하십니다.
3. 기도의 내용
기도의 내용은 우리의 신앙의 수준을 반영합니다. 육신의 기도는 물질적 필요와 감정적 욕구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는 건강, 경제적 안정 등 세속적 필요를 포함합니다. 반면, 영의 기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영적 성장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깨달음을 구합니다. 육신의 기도는 나 중심의 기도이고, 영의 기도는 하나님 중심의 기도입니다. 기도가 자신의 필요와 욕망에만 집중되어 있다면, 이는 신앙이 아직 성숙하지 않음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반면, 먼저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구하는 기도는 더 깊은 신앙의 표현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기도의 태도는 중언부언하지 말고, 기도할 때 의심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겸손하게 감사하며 기도해야 한다. 기도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통치하며, 전능하시고 진지하시고, 편재하신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기도의 내용은 육신의 기도가 아니라 영의 기도가 되어야 하고, 나 중심의 기도가 하나님 중심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진리가 무엇인가?
진리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의미를 남기고 있다. 진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있다. 철학에서 진리란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법칙이나 사실’이고, 논리학에서는 ‘논리의 법칙에 일치한 지식’이다. 동양에서는 길을 뜻하는 도(道)라고 한다. 전도란 ‘도’를 전하는 것이다.
진리는 사실이 분명하게 맞아 떨어지는 명제, 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사실 혹은 참된 이치나 법칙을 뜻한다. 공자는 “아침에 도(道)를 깨닫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고 했다. 부처는 “도(진리)를 깨달은 자”란 뜻이다. 예수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라고 했다. 공자는 “아직 나는 진리가 뭔지 모르겠다”는 입장이고, 부처는 “어떤 진리가 있는데 그것을 깨달았다”는 말이고, 예수는 “내가 진리”라고 말씀하며 제자들에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했다.
1. 예수님이 진리이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선언하셨다(요 14:6). 헬라어로 “진리”는 “알레테이아(alētheia)”로, 이는 “숨겨지지 않고 드러난 것”, “진리”, “신뢰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동일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하셨다(히 13:8). 예수님은 단순히 진리를 가르치거나 설명하시는 분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이시다. 이는 진리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구현되고 인격화된 것임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단순히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것으로 제시하신다. 이 진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예수님이 진리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통해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게 된다.
2.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다
예수님은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기도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진리는 믿는 자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진리를 통해 거룩해지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거룩하게 되는 과정을 경험해야 하며, 진리 안에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말씀 중심의 삶은 진리 안에서의 거룩함으로 이끌며, 그것이 믿는 자의 궁극적인 소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가 살아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준다.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불신과 의심을 제거해 준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묵상하고, 그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할 때,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며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고, 우리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9). 그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
3.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예수님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8:32). 진리는 예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을 때, 우리는 죄와 세상의 억압에서 해방되어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 자유는 단순히 외부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해방시켜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한다. 예수님 안의 진리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영원한 자유를 선물로 준다. 이 자유는 단지 물리적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적인 자유는 우리를 참된 자아로 살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한다.
세상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리를 속박하고 억압하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한 자유는 우리로 하여금 그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 하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와 율법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자유를 주셨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확고히 지키고,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진리를 통해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미국 워싱턴DC의 한국전쟁참전용사기념공원 내에 있는 기념비 벽에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수많은 용사들의 이름과 함께 “Freedom is not free” 새겨져 있는 글귀이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많은 사람들의 피의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의 참 뜻을 모르는 후세 사람들에게 자유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는 준엄한 경고문이다. 우리는 자유를 방종으로 전락시켜서는 안된다.
어떻게 살다가 죽어야 하나 (롬14:7-8)
로마서 배경
신약 성서는 27권이고 이중 바울이 13권을 썼다. 바울서신의 순서는 연대순이 아니라 책의 두께에 따라 배열을 했다. 로마서가 가장 두껍기 때문에 가장 앞에 있다. 로마서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에 고린도에서 3개월을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때 바울은 고린도에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쓴 글이 로마서이다. 바울이 선교하기 전에도 로마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 책을 가리켜 ‘성서 속의 다이아몬드’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듯이 다른 서신서에서 볼 수 없는 구원론의 진수가 들어 있다. 고대에 방탕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3-14) 말씀을 읽고 변화되었다. 중세의 마틴 루터는 로마서를 통하여 감동을 받고 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었다. 감리교 창시자인 웨슬레는 그의 일기장에 1738년 5월 24일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모인 작은 집회에서 사회자가 마틴 루터의 책 ‘로마서 서문’을 읽을 때 회심을 체험하였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현대신학자인 칼 바르트에게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로마서는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서신이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7)
예수를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세 차례 언급되었다. 사도행전 11:26 , 26:28; 베드로전서 4:16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핍박을 피하여 안디옥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안디옥 사람들은 자기들과 말, 문화, 행동, 세계관 등이 다른 이상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인은 안디옥에 살고 있지만, 안디옥에 속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이 땅에 속한 사람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시민권(빌3:20)을 가지고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다는 것은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가 나의 주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주인이 바뀐 것이고, 중심이 바뀐 것이고,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다”(빌1:21)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8)
그리스도인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 왜냐하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3:23절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전10:31)고 했다.
사는 것도 주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인의 전반적인 삶을 지배하는 기본원리이다. 교회에서 하는 일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은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되어야 한다. ‘왜 아침에 눈을 뜨는가, 왜 직장에서 일을 하는가, 왜 친구를 만나는가, 왜 공부 하는가’ 등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사관학생 때 자선냄비 대신 기업모금을 했었다. 그때 유한킴벌리 인력개발 부장을 만났다. 그는 갈보리 교회 집사였다. “제 본업은 전도이고 제가 하는 일은 부업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부업이니까 소홀하게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일을 대하는 태도이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3:17) 28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이덕진
몰링 칼리지 학장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이분은 변호사였다가, 목회자로, 신학자로, 방송인 그리고 정치인으로 다양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무엇을 하든지 ‘목회자의 심정으로 한다’고 했다. 라디오 방송을 13년간 주일 밤 9시부터 12시까지 일반 방송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했다. 주일 오전과 오후에는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밤에는 방송하고 집에 귀가하면 거의 새벽 2시가 된다. 피곤하지만 학교나 교회에서 할 수 없는 일, 방송을 통하여 복음을 안방에까지 전하는 일이 얼마나 신나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왜 정치를 하게 되었는가도 물어 보았다. “초기 호주는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세워진 나라인데 점점 세속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최근 몇 년 동안에 급속화되고 있습니다. 내일의 호주를 위하여, 내 자녀들을 위하여 이제 크리스천이 일어나 적극적으로 소리를 높여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호주 교회가 함께 일어나야 합니다. 기독교 전통을 지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기 위하여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더 이상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정치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그는 5월말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가 국민투표(referendum)를 통해 첫 번째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나라가 되면서 “호주에서도 합법화 법안 추진이 다시 확산되고 있다”며 우려를 표명하였다. 세계적으로 유럽, 북미, 남미 등 22개국 합법화 아르헨티나 벨기에 브라질 캐나다 덴마크 핀란드 프랑스 아이슬란드 룩셈부르크 멕시코(일부) 뉴질랜드 노르웨이 포르투갈 아일랜드 슬로베니아 남아공화국 스페인 스웨덴 네덜란드 영국 미국(일부) 우루과이 등 22개국이 동성결혼을 합법화하고 있다.
죽는 것도 주를 위하여
2015년 6월호 ‘크리스찬 리뷰’에 라오스로 선교를 떠나는 백대석, 유제실 선교사와 인터뷰한 글이 실렸다. 라오스는 사회주의 국가이고 불교국가이기 때문에 일반 선교사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위험하다고 해서 나라이름 대신에 L국이라고 했다. 그들은 전문인 선교사로 국제학교 교사비자를 받고 그곳에 갔다. 조금 걱정이 되어 심경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부인되는 유제실 선교사는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크리스천으로서 당연한 것이니, 뭐 선교한다는 것에 특별하게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선교란 한국에서 살던 크리스천의 삶을 L국에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너무 부담 갖지 않고 L국으로 떠나려 합니다.”
이슬람권을 선교하는 한 선교단체의 초청을 받아 설교를 한적이 있다. 선교의 사각지대인 이슬람권을 선교하는 것은 순교를 각오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증인이란 단어는 순교자이다. 자기 신앙도 지키기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증인이 된다는 것은 순교를 각오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이슬람권의 선교가 그렇다. 어찌 이들이라고 죽음이 두렵지 않겠는가? 하지만 죽음의 두려움보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기에 떠날 수 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죽음이란 땅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하늘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본향으로 가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완성이다.
우리는 살아야 할 이유와 죽어야 할 이유가 동일해야 한다. 만약 이것이 다르다면 삶의 끝자락에 섰을 때 살아왔던 삶에 대하여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위하여 살 수는 있지만 자신을 위하여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바울은 살아야 될 이유와 죽어야 될 이유가 동일하였기에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어야 하겠는가? 주를 위해 살다가, 주를 위해 죽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7-8)
법이란 무엇인가?
법이란 어렵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의 질서를 규범화하고 제도화한 것이다. 법이란 말 속에는 규칙과 아울러 원리라는 뜻이 있다. 법은 한마디로 한 사회의 생활방식의 거울이요, 문화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법을 불편한 규제의 대상이나 불필요한 구속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질서 있는 사회생활을 보장해 주는 공동의 약속으로 받아들여야 하겠다.
국가의 법 (The Law of Nation)
법은 법 자체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법을 지키는 국민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법이 국민의 멍에가 되고, 속박이 된다면 우리는 법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 이 때가 ‘개헌’이 필요한 시기이다. 작금의 한국 정치는 정말 가관이다. 한 기업의 회장이 자살하기 전에 남긴 메모와 인터뷰가 한국 사회 전체를 불신의 바다로 몰아가고 있다. “국회의원과 수녀가 한강에 빠졌을 때 누구부터 구해야 할 것인가?”라는 퀴즈가 있었다. 답은 국회의원이다. 국회의원이 물 속에 오래 있으며 한강 물이 오염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직업 중에서 가장 신뢰 받지 못하는 직업이 정치인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법을 지켜서 자유인이 되려고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법을 어겨서 자유인이 되려고 한다. 법이란 자유를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유를 주려 하는 것이다.
영국의 헨리 4세는 법을 숭상했던 인물이다. 그는 법을 여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의 아들을 감옥에 보냈을 정도이다. 그런 헨리 4세 시대에 유부녀들의 사치가 극에 달했다. 거듭된 계몽과 경고도 소용없었다. 마침내 헨리 4세는 황금이나 보석으로 몸을 치장하는 사치를 금한다는 법을 공포했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헨리 4세는 고민 끝에 묘안이 떠올랐다. 법안의 부칙에 단서 하나를 추가한 것이다. “이법은 매춘부나 소매치기에겐 적용되지 않는다.” 단서 조항의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그렇게 심하던 사치 바람이 가라앉았다. 누구도 매춘부나 소매치기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나님의 법 (The Law of God)
성서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롬8:2)고 했다. 성서가 말하는 법은 무엇인가? 구약에는 613가지의 법이 있다. 하지 말라는 것 365가지, 하라는 것 248가지이다. 하라는 것을 하지 않으면 ‘소극적인 죄'(Omission), 하지 말라는 것을 하면 ‘적극적인 죄'(Commission)가 된다. 613개의 법을 요약한 것이 10계명이고, 10계명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랑’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자기 사랑이다.
마태복음 22장을 보면 율법사가 예수께 질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큰가요?” 그때에 예수께서 이르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디베랴 바닷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는 베드로에게 하실 말씀이 많았을 것 같은데, 똑 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했다.“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대접하라”(눅6:31) 이것이 기독교의 황금률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법이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What is Happiness?)
2012년 유엔(UN)에서는 매년 3월 20일을 ‘세계 행복의 날’ (International Day of Happiness)’로 제정했다. 2015년 ‘세계 행복의 날’을 맞이하여 한 여론조사기관이 세계 143개국의 사람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얼마나 행복한가?”
한국인이 느끼는 행복감은 100점 만점에 59점으로 나타났다. 세계 성인 행복지수 평균은 71점, 한국 성인 행복지수는 한참 못 미치는 셈이다. 행복순위는 143개 나라 중 118위에 머물렀다. 또한 유엔이 자체적으로 조사하여 발표한 ‘2015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158개 국가를 상대로 한국인의 ‘행복도’는 10점 만점에 총 5.984점으로 47위를 기록했다. 2013년에 41위 였는데 6계단이나 하락되었다. ‘나라는 점점 부자가 되는데, 왜 국민은 더 불행하다고 하는가?’ ‘혹시 부와 행복은 반비례하는 것은 아닐까?’ ‘한국 경제구조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등의 다양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나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행복은 과정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추상적인 용어라서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정의를 가지고 있다. 국어사전을 보면 행복이란 ‘생활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껴 흐뭇한 상태’라고 했다. 특별한 일이 아닌 일상의 생활에서 느끼는 기쁨과 만족감을 행복이라고 했다.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이런 면에서 나는 ‘위대한 역경'(The University of Hard Knocks)의 저자 ‘랠프 팔레트'(Ralph Parlette)의 ‘행복론’에 전적으로 동감을 한다. “행복이란 위로 향해 가는 도중에 있는 것입니다. 커다란 팔과 커다란 마음과 커다란 인격을 체득해 가는 길에 있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장애물을 뛰어넘는 기쁨입니다. 행복이란 의식을 넓혀가는 즐거움입니다. 행복이란 하늘 높이 춤추며 올라가는 독수리의 목소리입니다. 행복이란 자신이 발전해 나간다는 증거입니다.” 혹시 우리의 ‘결과 지향적’인 사고가 우리의 행복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출애굽은 했지만 아직 가나안에 도착하지 못했다. 광야에는 길이 없다. 유대인들이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의 인도함을 받았듯이, 우리도 날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불완전한 자신의 생각이나 뜻대로 살면 광야에서 미아가 될 수도 있다. ‘존재와 실존’은 다르다. 존재는 그냥 있는 것이지만, 실존은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묻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이란 단어는 인간에게만 사용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으면 어디로 가는가’ 등의 질문은 인간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존한다는 것은 자체가 불안하다. 시공간의 지배를 받는 ‘한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인간은 실존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환경을 변화시키고, 마음을 바꾸어 보지만 그래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왜 그럴까?
“행복은 예수를 믿는 것이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Spiritual Being)이기에 그렇다. 영이신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다. 창조자인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가 없이는 진정한 행복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라고 했다. 인간이 육을 위하여 떡을 먹는 것과 같이, 영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말씀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복이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시 1:3)라고 했다. 묵상한다는 것은 말씀을 마음과 생각의 중심에 두어 되새김질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히 4:12).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영혼을 사모하도록 창조되었다.(전 3:11)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참 행복을 누릴 수 없다. 요한복음 3장에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관원이었던 니고데모가 어느 날 밤 예수님을 찾아왔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거듭나다’란 말은 영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아무리 크고 많아도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다. 인간은 결코 영적인 문제를 육으로 해결할 수 없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물질 만능주의 사상이 팽배하다. 물질 만능주의란 모든 관계를 돈과 연관시켜 생각하려는 행위이며,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이다. 과연 그럴까? 미국의 시인 겸 수필가인 ‘헨리 벤 다이크'(Henry Van Dyke)는 “세상에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이라 불리는 상품은 없다”고 했다. 우리는 괴테의 작품인 ‘파우스트'(Faust)를 알고 있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란 악마의 덫에 빠져, 자신의 영혼을 담보로 세상의 쾌락을 선택한다. 인간은 돈 때문에 자신의 영혼을 팔 수 있지만, 돈으로 영혼을 살 수는 없다. 인간은 돈으로 헌금은 할 수 있지만 구원은 살 수 없다. 인간은 돈으로 시계는 살 수 있지만 시간은 살 수 없다. 인간은 돈으로 괘락(Pleasure)은 살 수 있지만 행복(Happiness)은 살 수 없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삶의 반대인가? “삶은 어떤 것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그 이루어 나감의 완성입니다.” 죽기 얼마 전에 테레사 수녀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Ross)에게 한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192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세 쌍둥이 중 첫째로 태어났다. 취리히 대학에서 정신의학을 공부하였고 뉴욕, 시카고 등지의 병원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정신과 진료와 상담을 맡았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세미나를 열고, 세계 최초로 호스피스 운동을 의료계에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평생을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그녀가 70세가 되던 해 쓴 ‘생의 수레바퀴’는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들은 나를 죽음의 여의사라 부릅니다. 30년 이상 죽음에 대한 연구를 해왔기 때문에 나를 죽음의 전문가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 연구의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핵심은 삶의 의미를 밝히는 일에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지 결코 반대의 개념이 아니었다. 그녀의 마지막 작품인 ‘인생수업’에서 미켈란젤로의 말을 인용하여 삶과 죽음의 관계를 설명한다. “삶이 즐겁다면 죽음도 그래야 한다. 그것은 같은 주인의 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감정의 5 단계
퀴블러 로스는 인간이 죽음에 직면할 때,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감정의 5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1) 부정(Denial) – ‘It’s not happening’의 단계이다. “아니야, 믿을 수 없어, 나에게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어.” 등의 표현을 한다. 진단을 잘못 내렸다는 생각과 좀더 나은 진단이 내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여러 의사와 여러 병원을 찾아 다니게 되며, 환자는 검사 결과가 다른 사람의 것과 바뀌지 않았나 생각하기도 한다.
2) 분노(Anger) ‘Why Me?’의 단계이다. “수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이면 나야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찾아 오는 거야” 마음에서 끌어 오르는 분노를 폭발시키는 단계이다. 자기 자신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또는 절대자에게 분노를 발산한다.
3) 협상(Bargaining) ‘Seeking Compromise’의 단계이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절대자와 타협하는 단계이다. “고쳐주면 정말 착하게 살겠습니다. 주를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재산 모두를 사회에 환원하겠습니다.” 등의 거래를 한다.
4) 우울(Depression) ‘Giving up hope’의 단계이다. 협상을 시도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고, 해답도 찾지 못하면 그 다음 단계는 체념이다. 만사가 귀찮아 지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된다. 자신의 삶에 대한 죄책감과 수치심에 빠질 수도 있다.
5) 수용(Acceptance) ‘Being at peace’의 단계이다. 억울함이나 분노가 사라지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단계이다. 이때에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삶을 돌아보고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며 죽음을 받아들인다.
죽음은 일상 안에서 경험하는 보편적인 현상이자 엄연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죽음을 처음부터 수용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더구나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힘든 일이다.
인생수업 (Life Lessen)
그녀는 2004년 8월, 78세의 나이로 죽었다. ‘인생수업’은 그녀가 죽기 전에 데이비스 케슬러와 함께 쓴 마지막 작품이다. “평생에 죽어가는 사람들 곁에서 죽음에 대한 책을 써온 나는 꼭 책 한 권을 더 쓰고 싶었다. 죽음에 대한 책이 아니라 삶과 살아가는 일에 대한 책 말이다. 삶의 끝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글로 남기기 위해 이 책을 썼고, 아직까지 삶에 도전하고 그 결과를 음미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선사한다.” 그녀는 죽음에 대하여 글을 썼지만, 사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삶의 소중함이 절실할 때는 죽음의 강가로 내몰린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 “생의 어느 시점에서 누구나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진다.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일까? 인생의 비극은 짧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너무 늦게야 깨닫는 다는 것이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