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영적 올림픽에 참여하자 (고전 9:24-27)
제 33회 파리 올림픽이 막바지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2024년 7월 26일에 시작해서 8월 11일에 끝납니다. 파리 올림픽은 많은 기록과 이야기를 남기고 내일이면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고대 올림픽은 기원전 776년에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처음 열렸습니다. 이 대회는 제우스 신을 기리기 위한 종교적 행사로 시작되었으며, 4년마다 한 번씩 열렸습니다. 고대 올림픽은 서기 393년에 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폐지되었습니다. 근대 올림픽은 프랑스의 쿠베르탱 남작에 의해 부활되었습니다. 그는 고대 올림픽에서 영감을 받아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1회 근대 올림픽을 개최했습니다. 올림픽의 상징인 오륜기의 하얀 바탕은 평화와 순수함을 의미하며, 다섯 개의 고리가 서로 얽혀 있는 모습은 전 세계 대륙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상징합니다. 이는 인종, 종교, 정치적 이념을 초월한 화합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바울은 당시의 운동경기를 보면서 신앙생활을 운동경기에 비유하여 설명했습니다. 그는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열정, 절제, 훈련, 헌신 등을 강조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9:24-27절에서 사용한 비유는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메시지가 더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1.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자 (24절)
“운동장에서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
사도 바울은 신앙생활을 달리기에 비유하며, 상을 받기 위해 달려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언젠가 썩어 없어질 것을 위하여 달리지만,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면류관 얻기 위해서 달립니다. 삶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은 인생을 항해하는 것이고, 목적이 없는 사람은 인생을 표류하는 것입니다. 오래전 나섬 공동체의 대표인 유해근 목사님에게 “선교란 무었입니까?”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선교란 나그네를 순례자로 만들어 주는 겁니다”라고 했습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왜 삽니까?”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살아 있으니까 사는 겁니까?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겁니까? 요즘 MZ 세대는 “삶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했습니다.
영광이란 헬라어로 ‘독사’이고 히브리어로는 ‘카보드’입니다. 영광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 현존 등을 뜻합니다. 성막이 완성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 안에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첫 번째 문답은 인간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있는 발광체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빛을 받을 때만이 그 빛을 세상에 반사할 수 있습니다. 마치 달빛이 햇빛을 반사하는 거울의 역할을 하는 것과 같이, 인간은 하나님의 빛을 받을 때만이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라고 했습니다.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깊은 기쁨과 만족을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생의 목적이 행복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행복은 파랑새와 같고 무지개와 같습니다. 아무리 쫓아가도 잡을 수 없습니다. 행복은 생명이신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을 때에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절제와 훈련을 실천하자 (25절-26절)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다름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운동선수들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절제하고 훈련하듯이, 우리도 신앙 생활에서 절제와 훈련이 필요합니다. 절제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며, 훈련은 말씀과 기도,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훈련을 통해 우리는 더욱 강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올림픽에서 한국이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진 분야가 있습니다. 양궁입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부터 양국 단체전이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여자 양궁은 그때부터 파리 올림픽까지 무려 40년 동안 10회 연속 한번도 금메달을 빼앗긴 적이 없습니다. 양궁에는 5개의 금메달이 걸려 있는데 이번에는 싹쓸이까지 했습니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마지막 금메달이 걸린 남자 개인전이었습니다. 정규 경기에서 결정이 되지 않아 마지막 Shoot Off까지 갔습니다. 마지막 한발로 중앙에 가깝게 쏜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한국의 김우진 선수와 미국 선수 모두 10점을 쏘았는데, 김우진 선수가 중앙에 4.9MM가 가까워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김우진은 한국의 최고의 5개 금메달의 수상자입니다. 김우진과 관련된 우스개 유머가 있습니다. ‘김우진을 이기려면 11점을 쏘던가 아니면 김우진을 쏘던가’. 외신이 집중을 하며 혹시 대한민국 사람의 DNA에 활을 잘 쏘는 있는가 질문을 했을 때, 김우진 선수는 “공정한 경쟁과 혹독한 훈련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3.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자 (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라”
바울은 자신이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도 우리의 욕망과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다스리고, 영적 훈련을 통해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고백론(Confession)을 썼습니다. 그는 고백록에 요한일서 2장 16절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대한 언급을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내면에 잔재하고 꿈틀거리고 있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병이며, 자신은 이 병에 걸린 환자이며, 하나님만이 이 병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의사라고 고백했습니다. 죄인은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도 젊었을 때 지적인 방황과 영적인 방황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결론은 인간은 어쩔 수 없다는 한계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루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수도사로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며 하나님에게 가까워지려고 했는데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신의 의로서 하나님과 가까워지려고 했던 것입니다. 로마서1:17절의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말합니다. ‘구원을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받은 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된 존재가 아니라 되어가는 존재이고, 인생은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가는 그 날까지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오늘도 계속하여 영적인 경주를 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영적 올림픽에 참가한 자입니다.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절제와 훈련을 실천하며, 육신의 욕망을 물리치고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우리 모두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영광”이라는 단어는 헬라어와 히브리어에서 각각 다른 단어로 표현됩니다.
헬라어: 독사 (δόξα)
헬라어로 “영광”은 “독사 (δόξα)” 입니다. 이 단어는 “생각하다, 여겨지다”라는 뜻의 “도케오 (δοκέω)”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독사는 “의견, 판단, 견해”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더 나아가 “장엄, 탁월, 존귀, 품위”를 의미합니다1.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위엄을 나타내는 데 자주 사용됩니다.
히브리어: 카보드 (כָּבוֹד)
히브리어로 “영광”은 “카보드 (כָּבוֹד)” 입니다. 이 단어는 “무거움, 영광, 명예, 존귀”를 의미합니다. 카보드는 하나님의 임재와 위엄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며,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장면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24장 16절에서는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물렀고”라는 구절에서 카보드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두 단어는 모두 하나님의 위대함과 거룩함을 표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드러내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1. 하나님의 본질적인 특성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의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그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 자신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2. 하나님의 임재와 나타남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으로, 성경에서는 종종 빛이나 구름, 연기 등의 형태로 표현됩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의 얼굴이 빛났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은 물리적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행위와 역사
하나님의 영광은 또한 하나님의 행위와 역사 속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 그리고 역사 속에서 이루신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4.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
신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 그리고 그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 그리고 그의 행위와 역사를 통해 드러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분을 경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는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기본적으로, 이는 우리의 삶과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함과 선하심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1.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말과 노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의 이름을 경배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2. 순종과 헌신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따르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선한 행실
우리의 선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돕고, 사랑을 실천하며, 정의와 자비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입니다.
4.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전파
하나님께서 하신 크신 일, 즉 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세상에 전파하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입니다.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게 되고, 그분을 경배하게 됩니다.
5. 일상 생활에서의 실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 일하고 쉬는 모든 순간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높이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의 말과 행동, 생각과 태도 모두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아하스에로와 아닥사스다
아하스에로와 아닥사스다는 모두 성경에 등장하는 페르시아 왕들로, 이 둘의 관계는 역사적으로나 성경적으로 주목할 만합니다.
– 아하스에로 (Xerxes I):
성경에서: 아하스에로는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왕으로, 그의 아내인 에스더가 페르시아 제국의 왕비가 되면서 유대 민족을 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역사에서: 아하스에로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 크세르크세스 1세 (Xerxes I)로, 기원전 486년부터 기원전 465년까지 통치했습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중 테르모필레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을 포함한 여러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 아닥사스다 (Artaxerxes I, Artaxerxes II, Artaxerxes III):
성경에서: 아닥사스다는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 등장합니다. 에스라서에서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허락한 왕으로, 느헤미야서에서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도록 허락한 왕으로 등장합니다.
아하스에로 (Xerxes I)는 아닥사스다 1세(Artaxerxes I)의 아버지입니다. 따라서, 아하스에로와 아닥사스다는 부자 관계입니다.
성경적 관계: 성경에서 이 두 왕은 각기 다른 이야기에 등장하지만, 그들의 통치는 유대 민족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에스더서에서는 아하스에로가 유대인들의 생명을 구하고,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서는 아닥사스다가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재건을 돕습니다.
아둘람, 헤브론, 예루살렘
– 다윗이 아둘람으로 피신한 이유는 사울 왕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1. 사울의 질투와 추격
질투의 시작: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친 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사무엘상 18장 7-9절에서는 다윗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사울이 다윗을 질투하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백성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한 것이 사울의 분노를 촉발시켰습니다.
반복된 공격 시도: 사울은 여러 차례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궁전에서 하프를 연주하며 사울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사울은 다윗을 창으로 찌르려 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다윗이 사울의 집을 떠나게 만든 결정적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사무엘상 18:10-11, 19:9-10)
미갈의 도움: 사울의 딸이자 다윗의 아내인 미갈이 사울의 계획을 알리고 다윗을 도망치게 도왔습니다. 미갈은 다윗이 도망가는 동안 시간을 벌기 위해 침대에 형상과 염소 털로 만든 가발을 놓고, 다윗이 병들었다고 거짓말했습니다. (사무엘상 19:11-17)
2. 생명의 위협과 도피
라마에서 사무엘에게로: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피해 라마로 도망가 사무엘 선지자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그곳까지 다윗을 추격해오자, 다윗은 다시 도망쳐야 했습니다. (사무엘상 19:18-24)
요나단의 경고: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의 친구이자 동맹자로, 사울의 계획을 다윗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아둘람 굴로 도망치도록 경고했습니다. (사무엘상 20장)
도피처로서의 아둘람: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피하여 아둘람 굴로 도망갔습니다. 아둘람 굴은 비교적 안전한 장소였으며, 다윗은 이곳에서 그의 가족과 추종자들을 모아 함께 생활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었지만, 다윗은 그들을 잘 이끌어 그의 동료로 삼았습니다. (사무엘상 22:1-2)
3. 새로운 시작
새로운 동료들: 아둘람에서 다윗은 사울에게서 도망친 이스라엘 백성 중 불만을 가진 사람들, 빚진 자들, 억울한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이들은 다윗의 리더십 아래 훈련되고 조직된 군대가 되었고, 이후 다윗의 왕국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무엘상 22:2)
리더십의 성장: 아둘람은 다윗이 그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충성스러운 부하들과 함께 그의 비전과 계획을 세우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그의 신앙을 더욱 깊이 있게 발전시켰습니다.
– 이와 같이, 다윗이 아둘람으로 피신한 이유는 사울의 질투와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으며, 이는 그가 왕으로서의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 아둘람 (Adullam)
아둘람은 다윗의 도피처 중 하나로, 그의 삶에서 중요한 장소입니다.
도피처: 다윗은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 아둘람 굴로 도망갔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의 동료가 되었고, 이후 다윗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22:1-2)
지도자의 시작: 다윗은 이곳에서 그의 리더십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다윗에게 모였고, 그는 그들을 이끌며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했습니다.
2. 헤브론 (Hebron)
헤브론은 다윗이 유다 지파의 왕으로 처음으로 즉위한 곳입니다.
유다 왕국의 수도: 사무엘하 2장에서 다윗은 유다 지파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동안 통치했습니다.
통합 왕국의 시작: 다윗은 이곳에서 유다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후 북쪽 이스라엘 지파들도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여 통합 왕국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3. 예루살렘 (Jerusalem)
예루살렘은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된 후 수도로 삼은 도시입니다.
왕국의 수도: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곳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습니다. 이로써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사무엘하 5:6-9)
성전 계획: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비록 성전 건축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다윗의 통치 기간 동안 예루살렘은 영적으로 중요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다윗 왕조의 기틀: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그의 왕조를 확립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그의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사무엘하 7장)
이와 같이, 다윗의 삶에서 아둘람, 헤브론, 예루살렘은 각각 그의 도피와 초기 지도력, 왕국의 시작과 통합, 그리고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 다윗의 삶을 아둘람, 헤브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1. 아둘람 (Adullam)도피처
배경: 다윗은 사울 왕의 시기와 질투를 피하여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서 도망쳐 여러 지역을 전전하였고, 그 중 한 곳이 아둘람이었습니다.
굴: 아둘람 굴은 다윗이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 숨었던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다윗은 그의 가족과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을 모았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빚이 많거나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었으며, 다윗에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형성과정: 사무엘상 22장 1-2절에 따르면, 다윗이 아둘람 굴에 머무는 동안 약 400명의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들어 다윗의 동료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다윗의 지도력 아래 점차 군대의 형태를 갖추어 갔습니다.
사울과의 대치: 아둘람에서의 생활은 다윗이 사울에게서 도망치는 동안 그의 생존과 리더십을 시험하는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그는 사울에게 쫓기면서도 사울을 죽이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켰습니다. 이는 다윗의 신앙과 인내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2. 헤브론 (Hebron)유다의 왕
배경: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죽은 후, 다윗은 블레셋 땅을 떠나 유다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기름부음: 사무엘하 2장에 따르면, 다윗은 유다 지파 사람들에 의해 헤브론에서 기름부음을 받고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는 다윗이 공식적으로 왕위에 오른 첫 번째 단계였습니다.
통치: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동안 유다 지파를 통치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북쪽 이스라엘 지파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갈등: 헤브론에서의 통치는 이스보셋(사울의 아들)과의 갈등으로 복잡했습니다. 다윗은 이스보셋과의 전쟁에서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이 과정에서 아브넬과 같은 강력한 인물들이 다윗에게 귀순하게 되었습니다.
3. 예루살렘 (Jerusalem)이스라엘 전체의 왕
배경: 이스보셋이 암살된 후,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다윗을 찾아와 그를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인정했습니다.
정복과 수도 선정: 사무엘하 5장에 따르면, 다윗은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곳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예루살렘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중립적인 장소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통합을 이루는 데 유리했습니다.
중심지로서의 역할: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치적, 군사적 중심지로 발전시켰으며, 이곳에서 그의 통치 구조를 강화했습니다.
성전 계획: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예루살렘에 세우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은 다윗이 아닌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성전을 위한 재료를 준비하고, 예루살렘을 종교적 중심지로 만드는 데 기여했습니다.
언약: 사무엘하 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의 왕조가 영원히 지속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는 다윗 왕조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그의 후손들이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 다윗이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주된 이유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치적 중립성: 예루살렘은 당시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어느 한 지파의 소유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윗은 이 도시를 수도로 삼아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통합과 단결을 위해 중요한 결정이었습니다.
종교적 중요성: 예루살렘은 중요한 종교적 의미를 가진 장소였습니다.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이곳을 종교적 중심지로 삼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전략적 위치: 예루살렘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 도시는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방어에 유리했고, 주요 교통로의 교차점에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 군사적 이점을 가졌습니다.
헤브론의 한계: 헤브론은 남쪽 유다 지파의 중심지였지만,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기에는 지리적, 정치적 한계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보다 중심적이고 영향력 있는 위치로 수도를 옮길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다윗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새로운 수도로 삼아 왕국을 확립하고 통합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 결론
아둘람, 헤브론, 예루살렘은 다윗의 생애와 왕국 건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아둘람은 다윗의 도피와 지도력의 시작을 의미하며, 헤브론은 유다의 왕으로서 그의 통치가 시작된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를 통합하고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로 만든 도시로, 다윗 왕조의 기초를 마련한 장소입니다. 이 모든 장소는 다윗의 삶과 이스라엘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들입니다.
–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은 후 약 15년 만에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고, 그 후 7년 6개월 후에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과정이 있었습니다:
기름부음과 첫 번째 왕위
나이: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다윗의 정확한 나이를 명시하지 않지만, 학자들은 그가 약 15세에서 17세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사무엘상 16장)
과정: 사무엘은 이새의 집으로 가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다윗을 기름부었습니다. 이는 다윗이 사울 이후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예고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6:13)
나이와 시기: 다윗이 유다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헤브론에서 통치하기 시작한 것은 약 30세 때입니다. (사무엘하 2:1-4)
기간: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동안 유다의 왕으로 통치했습니다.
– 이스라엘 전체의 왕위
이스라엘 전체의 왕 즉위: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스보셋(사울의 아들)이 암살된 후,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다윗에게 와서 그를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사무엘하 5:1-3)
나이와 시기: 다윗은 약 37세 때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후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기고, 이곳에서 그의 왕국을 확장하고 강화했습니다.
기간: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33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그의 총 통치 기간은 40년입니다. (사무엘하 5:4-5)
– 요약
기름부음 시기: 약 15세에서 17세
유다 왕 즉위: 약 30세 (기름부음을 받은 후 약 15년)
이스라엘 전체의 왕 즉위: 약 37세 (유다 왕 즉위 후 7년 6개월, 기름부음을 받은 후 약 22년)
따라서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은 후 약 15년 만에 유다의 왕이 되었고, 그 후 7년 6개월 후에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과 도나투스 논쟁 그리고 펠라기우스 논쟁
–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 논쟁
아리우스 (Arius):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지 않았으며, 성부에게 종속된 존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예수가 창조된 존재이며, 영원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
아타나시우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며, 영원한 존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예수의 신성을 강력히 변호했습니다. 이 논쟁은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절정에 달했으며, 공의회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을 지지하고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이 논쟁은 기독교 교리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남아 있습니다.
– 단성론과 네스토리우스
네스토리우스 (Nestorius):
네스토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성과 인성 두 가지 본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두 본성이 분리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네스토리우스의 견해는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습니다.
단성론 (Monophysitism):
단성론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단일한 본성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결합되어 하나의 본성을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이 견해는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습니다.
–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
펠라기우스 (Pelagius):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통해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도덕적 완전성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원죄의 개념을 부정하고,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어거스틴 (Augustine):
어거스틴은 인간이 원죄로 인해 타락했으며,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논쟁은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펠라기우스의 주장이 이단으로 규정되면서 마무리되었습니다.
– 어거스틴과 도나투스파의 논쟁 (신사참배와 유사한 논쟁이다)
도나투스파 (Donatism):
도나투스파는 4세기 초 북아프리카에서 발생한 기독교 교파로, 박해 시기에 배교한 성직자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이들은 배교한 성직자가 베푼 성례는 무효라고 주장하며, 교회의 순결성을 강조했습니다.
어거스틴 (Augustine):
어거스틴은 도나투스파의 주장을 반박하며, 성례의 유효성은 성직자의 도덕적 상태와 무관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일치와 용서를 강조하며, 도나투스파의 급진적인 분리주의를 비판했습니다. 이 논쟁은 411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절정에 달했으며, 결국 도나투스파는 이단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