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3번의 눈물의 의미
금요일에 세계선교대회와 선교지 탐방을 은혜 가운데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떠나면서, 새로운 만남과 경험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아, 새로운 비전을 품고 돌아올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슬플 때만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과 기쁨, 공감과 연민, 고통과 분노 등의 감정을 가질 때도 눈물을 흘립니다.
성경에 예수님은 3번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각각의 눈물은 예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과 연민, 그리고 그가 직면한 십자가의 고통을 상징합니다.
오늘 저는 예수님의 3번의 눈물의 의미를 생각하며, 저의 3번의 눈물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나사로의 무덤에서의 눈물 (요한복음 11:35):
요한복음 11장 35절은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는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매우 큽니다. 예수님은 친구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 사건은 인성을 가진 예수님은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기적의 무대를 마련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한국에 도착한 다음날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를 찾아 뵈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 나이로 100세이십니다. 10년 전 치매로 지인의 추천으로 안성에 있는 요양원으로 갔습니다. 서울과 거리가 멀어서 불편할 뿐 아니라, 갈 때마다 근무하는 요양보호사에게 돈을 주어야 했습니다. 어느 날은 어머니의 손발을 묶은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더 이상은 두고 볼 수가 없어 과천에 있는 구세군 요양원을 알아보았습니다. 때마침 자리가 나서 그곳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과천 구세군 요양원은 환경도 좋고, 요양사들도 친절했습니다. 형수는 단한번도 요양사에게 돈을 준 적이 없다고 합니다.
작년에 갔을 때 저 이외에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4형제 중 막내인 저를 특별히 사랑하셨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와 헤어질 때 저에게 한마디 하시더군요. “너도 이제 결혼해야지” 올해는 더 약해지셨고, 저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눈을 감고 시종일간 “몰라요”로 일관하셨습니다. 어머니의 머리는 아무것도 써 있지 않은 하얀 백지장과 같았습니다. 혹시나 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어머니,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세요” 어머니는 감은 눈을 뜨시고 “그분은 정말 좋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제 눈에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2. 예루살렘을 향한 눈물 (누가복음 19:41-44):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때의 눈물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시며, 그 성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불신앙과 죄악에 대한 슬픔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음을 보며 예수님은 깊은 슬픔을 느끼셨습니다.
어머니를 방문 후 서울삼성요양원에 입원하고 있는 둘째 형을 찾아갔습니다. 5개월 전에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져 요양원에 입원 중입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족한 분이나 아직 예수를 믿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위기가 하나님의 기회라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생각한 것보다 많이 호전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두번째 방문 때는 혼자 갔습니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마치고 기도까지 했지만 제 안에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 순종하여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죄인은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강력하게 증거하고,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 10:10)”는 말씀을 증거하며 믿는다면 ‘아멘’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형님은 거짓말은 할 수 없다며 눈을 지그시 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이야기 시작했습니다. “거짓말하라는 것이 아니라 진짜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 계속하여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형은 눈물을 흘리며 ‘아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저는 통곡하였습니다. 제가 너무 큰 소리로 우니 형이 오히려 저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오기 전날에도 김사관과 함께 방문하여 기도하여 주니 ‘아멘’으로 화답하였습니다.
3.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눈물 (히브리서 5:7):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며 큰 고통 속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서는 예수님이 육체에 계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인간의 연약함을 깊이 체험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감당해야 할 고난을 인식하며 흘리신 눈물입니다. 이 세 번의 눈물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감정과 하나님의 사명을 동시에 드러내며, 인류에 대한 깊은 사랑과 헌신을 나타냅니다.
한국에서 김은려 사관은 건강종합진단을 받았습니다. 건강종합진단은 기본적인 것 이외에의 것을 하려며 가격이 높아집니다. MRI는 워낙 많이 들어본 터라 틱을 하고, 그 옆의 MRA라는 항목에 틱을 했다가 취소하려고 다시 나갔으나 지워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MRI는 신체의 연조직과 구조를 보는 데 초점을 맞추고, MRA는 혈관과 혈류 상태를 확인하는 데 특화된 영상 촬영 기법입니다. 1주가 조금 지나서 결과가 나왔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부실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뇌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뇌동맥이 심하게(Severe) 협착되었다고 합니다. 뇌혈관 전문의를 만나서 상의해야만 했습니다. 조현상 부교님에게 일단 결과를 보냈습니다.
병원에 근무했던 처형들은 호주로 돌아가는 것을 결사 반대하며 한국에서 전문의를 만나 치료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한국도 의료파업으로 전문의를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셋째 처형의 친구 아들이 뇌전문의라서 연락했습니다. 정상적으로 검진을 받으려면 9월에나 가능하나, 일단 등록을 하라고 하여 등록을 했습니다. 다음 날에 연락이 와서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진을 보니 다른 곳의 혈관은 투명한데 문제 있는 부분은 까맣게 되어 있었습니다. 의사는 수술은 위험하니 ‘콜레스테롤 낮출 수 있는 고지혈증약과 피를 묽게 하는 아스피린을 처방해 주었습니다. 오른쪽 뇌동맥이니 만약 문제가 생기면 외쪽 팔다리에 마비가 생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날 밤 집사람은 별일 없다는 듯이 잠을 잘 잤습니다. 저는 자고 있는 김사관을 보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항상 튼튼하게 같이 있어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이런 일이 생기고 나니,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였는데 은혜가 은혜된 줄 모르고 감사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세가지 질문’이라는 짧은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오늘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과거에 만난 사람도 아니고 미래에 만날 사람도 아니고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과거에 했던 일도 아니고, 미래에 할 일도 아니고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당연한 것도 없고, 영원한 것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모두 있을 때 잘합시다.
켈틱의 창조신학과 구속신학
창조신학과 구속신학은 기독교 신학의 두 중요한 영역으로,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구속에 대한 이해를 다룹니다. 두 신학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각각 고유한 초점과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조신학
창조신학은 하나님이 세상과 모든 존재를 창조한 사실에 대한 신학적 탐구입니다. 이는 성경의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이 창조주로서의 역할과 그 창조의 의미를 깊이 있게 다룹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역할: 창조신학은 하나님이 전능하신 창조주로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임을 강조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존재하며, 이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를 드러냅니다.
창조의 선함: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은 본래적으로 선하며, 창조의 완전함과 아름다움을 반영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창세기의 표현은 창조의 선함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역할과 책임: 창조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강조하며, 인간에게 주어진 특별한 역할과 책임에 대해 논의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창조 세계를 돌보고 관리해야 하는 청지기적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자연과의 관계: 창조신학은 자연 세계와 인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중시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며, 환경 보호와 생태계 보전도 이와 연관된 신학적 주제입니다.
구속신학
구속신학은 인간의 죄와 타락,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구원의 과정을 다루는 신학입니다. 이는 주로 신약 성경, 특히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의 타락과 죄: 구속신학은 인간이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음을 강조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죄의 본성을 가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인간의 죄를 속량하고 구원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완전한 희생 제물로서, 인류의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은혜와 믿음: 구속신학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이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강조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새로운 생명과 변혁: 구속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생명과 성령을 통한 변화를 다룹니다. 구원받은 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살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살아갑니다.
관계와 통합
창조신학과 구속신학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원래 계획과 의도를 드러내며, 구속은 그 창조의 타락 이후의 회복과 완성을 목표로 합니다. 창조의 선함과 인간의 타락,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회복은 기독교 신학의 큰 그림을 이루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두 신학을 통합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그 사랑이 어떻게 구속의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켈틱 신학
켈틱 신학은 켈틱 기독교 전통에서 유래한 신학적 사상으로, 자연과 창조 세계에 대한 깊은 사랑과 존중,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깊은 친밀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이 전통은 주로 5세기부터 12세기까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즈 등지에서 발전하였으며, 켈틱 수도사와 신학자들의 영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켈틱 신학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연과 창조의 신성: 켈틱 신학은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이 신성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매개체로 여겨지며, 이를 통해 하나님과 교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자연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밀함: 켈틱 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과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와 일상적인 삶 속에서의 동행을 중요시하며, 기도와 명상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화하려고 합니다.
일상 생활의 영성: 켈틱 전통에서는 일상 생활의 모든 순간이 영적 생활의 일부로 여겨집니다. 일상적인 일들, 예를 들어 가사일이나 농사일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자 하며, 이를 통해 삶 전체를 영적으로 바라보려고 합니다.
공동체와 환대: 켈틱 신학은 공동체와 환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서로를 돌보고 환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지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순례와 여행: 켈틱 전통에서는 순례와 여행이 중요한 영적 훈련으로 여겨집니다. 이를 통해 새로운 경험과 성장을 추구하며,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기 위한 여정으로 이해됩니다.
켈틱 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을 자연과 조화롭게 통합하며,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추구하는 독특한 영성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사상은 현대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과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3대 사역과 한국 선교
3대 사역과 한국 선교(마 9:35)
구세군에는 ‘한손에는 빵, 한손에는 성경’이란 모토가 있습니다. 빵만 가지고 가면 구제이고, 성경만 가지고 가면 전도이지만, 두 손으로 가면 선교입니다. 전도는 ‘영혼구원’을, 선교는 ‘전인구원’을 강조합니다. 구원이란 단어는 ‘소테리아’로서 우리를 억누르는 ‘그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그 무엇’이 정신적인 무지일 수도 있고, 육신적인 병일 수도 있고, 영적인 죄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3대 사역은 교육(teaching), 치유(healing), 그리고 전도(preaching)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3대 사역을 통해서 한국 개신교의 선교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한국 개신교 선교의 3인방은 아펜젤러, 알렌, 언더우드입니다. 이들은 선교사가 아니라 의사와 교사로 왔습니다. 고종은 의사와 교사만을 허락했습니다.
대천 밑에 서천이란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최초로 성경이 전래된 곳이고, 아펜젤러의 순교기념관이 있습니다. 아펜젤러는 순교기념관에서 초기 한국 선교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1909년 한반도 선교지 분담도’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 장로교와 감리교가 많은 이유는 선교사의 대부분이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북장로교, 남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호주 장로교 등의 교단에서 파송하였습니다. 이들은 선교의 효율성을 위하여 선교구역을 나누었습니다. 선교의 후발 주자인 호주는 부산과 경남 지역을 선교지로 분할 받았습니다. 최초의 선교사인 데이비스가 부산에 도착하고 다음 날인 1890년 4월 5일 소천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멜본 선교부에서는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약 127명이 경남과 부산의 복음화를 위하여 피와 땀을 흘렸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빛을 졌습니다. 이제 한국은 선교를 받던 국가에서 선교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아프리카 등의 오지 뿐 아니라, 기독교가 쇠퇴하는 선진국에도 갑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했주었던 국가에 가서 복음의 빚을 갚고 있습니다.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인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한 영국의 하노버 교회의 담임 목사가 한국인이고, 한국에서 사역한 선교사들의 유가족이 다니고 있는 멜본의 딥딘 교회도 담임 목사가 한국인입니다.
1. 교육(Teaching) – 학교
예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산상수훈, 비유, 그리고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삶의 지혜를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랑, 용서, 겸손, 정의 등 많은 주제를 포함하며, 그의 가르침은 신약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발견됩니다.
초기의 학교들은 거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최초의 서양학교가 배재학당이고, 여자는 이화학당입니다.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하던 시대에 여학교를 세웠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이화 학당을 세운 스크랜튼 여사의 어려움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해방과 함께 이화여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대학이 되었습니다. 세계선교대회가 열렸던 부산 외국어 대학교의 교훈은 잠언 1장 7절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어떤 학교가 기독교 학교입니까? 매주 예배를 드린다고 기독교 학교입니까? 신학과가 있어서 기독교 학교입니까? 아닙니다. 모든 과목을 기독교 정신으로 가르치는 학교가 진정한 기독교 학교입니다.
2. 치유(Healing) – 병원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이러한 치유 사역은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영적, 육체적 구원을 제공하셨습니다. 조선의 최초의 병원은 ‘광혜원’이다. 고종은‘제중원’이란 이름을 하사했습니다. 제중원이란 중생을 구원하는 병원이란 뜻입니다. 제중원은 에비슨 선교사가 미국의 부호 세브란스로부터 자금을 받아 세브란스 병원으로 바꾸었고, 1957년 연희대학교와 합하여 지금의 연세대학교 의료원이 되었습니다.
대구에 가면 ‘청라언덕’이 있습니다. 청라언덕은 ‘푸른 덩굴이 우거진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청라언덕은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언덕으로, 대구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대표하는 장소 중 하나입니다. 청라언덕은 대구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많은 선교사들이 머물렀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제중원이 서울 뿐 아니라 지방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3. 전도(Preaching) – 교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회개와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도록 촉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향해 있었으며, 이는 예수님의 메시지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최초의 한국교회는 소래교회입니다. 소래교회는 1884년 서상륜 형제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개신교 교회로서 한국에서 가장 먼저 세운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커를 선교사는 진주에 배돈병원과 광림학교, 시원여학교 그리고 진주 교회를 비롯한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커를은 교육, 치유, 복음 사역을 동시에 이룬 유일한 선교사일 것입니다.
진주교회는 창립 110주년을 맞이하여 카를 선교사인 외손자인 ‘기드온 루더포드’ 부부를 초청하였습니다. 그는 할아버지가 남기고간 많은 유품을 진주교회에 기증했습니다. 진주교회는 기드온 루더포드(Gideon Rutherford)씨 기념패를 드렸습니다.
“커를 선교사님은 진주를 비롯하여 삼천포, 남해, 하동, 찬선 등지에 많은 교회를 설립하여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또 선교사님 부부는 진주에 남녀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시고 배돈 부인기념병원을 세워 많은 환자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우리 진주교회와 교인들은 너무나 고귀하신 하나님의 선교사역을 감당하신 커를 선교사님 가족을 언제나 추모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커를 선교사님 후손이 우리 교회를 방문하심에 그 감사하는 마음을 이 패에 새겨 드립니다.”
바라고 원하는 것은 이 패에 담긴 진주교회가 커를 선교사에게 드리는 마음이,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에 복음을 들고 생명 바치며 땀과 피를 흘려 헌신한 모든 선교사들에게 드리는 ‘우리의 마음’이기를 기도합니다.
나팔절
나팔절(욤 트루아)은 유대교에서 중요한 절기 중 하나로, 히브리력으로 7월 1일에 시작됩니다. 이 절기는 성경에서 ‘로샤샤나’라고도 불리며, 유대인의 새해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나팔절은 주로 회개와 반성의 시기로 여겨지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회복하는 기간입니다.
나팔절의 주요한 특징은 나팔(쇼파르)을 부는 것입니다. 쇼파르는 보통 숫양의 뿔로 만들어지며, 그 소리는 회개의 신호로 사용됩니다. 성경에서는 이 날을 거룩한 집회로 지키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레위기 23:24-25).
나팔절은 열흘 뒤에 오는 ‘욤 키푸르'(속죄일)와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나팔절부터 시작되는 열흘 동안을 ‘참회의 10일’로 여기며, 이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죄를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종합적으로, 나팔절은 새로운 시작을 기념하고, 회개와 용서를 통한 영적인 새로움을 추구하는 중요한 유대교 절기입니다.
나팔절의 신약에서의 의미는 유대교적 전통과 상징을 통해 그리스도인에게 영적인 교훈을 제공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나팔절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나팔절의 요소들이 신약의 가르침과 상징적으로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재림: 나팔절은 유대인의 새해를 알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시작됩니다. 신약에서는 나팔 소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알리는 신호로 사용됩니다. 고린도전서 15:52에서는 “마지막 나팔에”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우리는 변화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데살로니가전서 4:16에서도 주님께서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을 예고하는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회개와 반성: 나팔절은 유대교에서 회개와 반성의 기간입니다. 신약에서도 회개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시며 회개를 강조하셨고, 사도들은 회개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가르쳤습니다. 나팔절의 회개와 반성의 의미는 신약의 회개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합니다.
새로운 시작: 나팔절은 유대인의 새해를 기념하는 날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고린도후서 5:17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나팔절의 새로운 시작의 의미와 연결됩니다.
결론적으로, 나팔절은 신약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그 상징성과 의식은 예수님의 재림, 회개와 새로운 시작이라는 주제와 연결되어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인 교훈을 제공합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