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목사의 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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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돌봄
한 여성이 비만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키는 150센티 미터 중반인데 몸무게는 100kg이 넘었다. 이 여성이 비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전문가의 도움을 받게 되었는데 이 여성의 비만의 문제에는 심리적인 부분이 많이 작용한 것을 볼 수가 있었다. 10대 때 누군가 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후로 자신을 사랑할 수가 없었고 사람들 앞에 서면 자신감이 떨어지고 사람들의 시선을 늘 의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랬던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외모가 뚱뚱하고 보기 싫어야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의 외모를 돌보지 않게 된 것이다. 잠깐 체중을 관리하고 예뻐진 적이 있는데 그것이 남성들의 시선을 사게 되는 것 같아서 다시 많이 먹어서 체중을 늘려서 매력이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녀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왜 그녀는 문제의 원인을 자기에게 돌려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자신을 미워하는 행동을 하게 된 것일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외부로부터 온 상처나 자극에 의해서 어려움을 겪고 난 후에 그 어려움을 겪은 나를 위로해주고 잘 돌보기는커녕 그 어려움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고 나를 학대하고 나를 미워하는 많은 행동들을 자신에게 행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 돌봄’은 치유의 여정을 겪는 많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부분이다. 상처받고 힘들었던 내가 힘을 얻고 다시 나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돌봄이 필요한데 많은 경우 인간 관계로 인한 상처들을 회복하는데 있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자신을 돌보려 하기 보다는 주위의 사람이 배우자가 또는 누군가가 나의 상처를 싸매어 주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누군가 나를 위로해 주어서 잠깐 마음이 편안해지고 긍정적으로 된다 하더라도 지속적인 자기 돌봄이 없으면 우리는 금방 쉽게 또 좌절해 버리고 또 다른 상처를 받아서 또 누군가의 위로와 돌봄을 기다리게 된다. 현대의 많은 정신 질환을 치료하는 약들이 탁월한 효과들을 자랑하지만 어디까지나 약은 증상을 완화시키는 것이지 원인을 찾거나 삶의 습관이나 생각의 틀을 바꾸어 놓지 않는다. 그런 것처럼 타인을 통해서 위로와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그것은 증상을 완화시키는 약과 같은 역할에 그치는 것처럼 장기적인 변화를 가져다주는 역할을 하긴 어렵다. 그래서 결국은 내가 나를 정기적으로 잘 돌보는 법을 알고 자신을 잘 돌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성숙한 인간으로서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자기 돌봄이라는 단어는 1950년대, 60년대에 등장한 말로 정신 질환자들이 기관 시설에서 나오면서 생겨난 말이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관련해서도 사용된 말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정신 질환과 관련해서 건강하게 살기 위해 자기 돌봄을 해야 한다고 했다면 지금 시대에는 전문적이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누구나 정기적으로 실행해야 할 삶의 한 부분이라고 여겨진다. 사람들은 자기 돌봄을 잘 해야 한다고 알고 있지만 자기를 잘 돌보는 것을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거나 자기 돌봄을 잘 하다 보면 성공을 못한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일 중독’과 ‘완벽주의’의 사회가 정상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에 살다 보면 자기 돌봄을 해야 하는 줄을 알면서도 사회에서 요구하는 시스템에 속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필자의 딸이 직장을 옮겼는데 그 사무실에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루에 8시간을 일하는 것이 아니라 9시간이나 9시간 30분을 하루에 일을 한다고 한다. 본인은 일찍 와서 충분히 일을 하고 시간에 맞추어 집에 가고 싶은데 주위의 사람들이 더 늦게까지 일을 하고 눈치를 주는 것 같아서 자신도 그 자리를 빨리 박차고 나올 수가 없다고 한다.
자기 돌봄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가 크다.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생각해 보자. 보통은 정확하게 그릇에 맞추어서 커피를 주는데 조금 만 더 부어도 그 커피는 넘쳐 버리게 된다. 넘치지도 않고 커피잔 안에 분량을 정확히 맞추어서 커피를 만드는 것이 기술인 것처럼 내가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를 자기 돌봄을 통해서 적절하게 잘 하면 정확한 분량으로 인해 그 기능을 다 할 수 있지만 자기 돌봄이 없이 내가 담을 수 있는 커피의 분량을 생각하지 않고 조금 더 부어 버리면 마시기에 적합하지 않은 커피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내 몸도 망가지게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탈진(burnout)을 경험하게 되고 더 이상 일의 흥미를 잃어버리게 될 뿐 아니라 몸도 마음도 망가지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어떤 여성분은 융통성이 좀 부족하고 매뉴얼이 있으면 매뉴얼 그대로 해야 마음이 편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맡은 일에서 매뉴얼처럼 하나하나 정확하게 지키려고 했고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을 했는데 그렇게 온 힘과 정성을 다하는 자신의 일로 인해서 매일 저녁 집에 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서 침대에 누워만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지친 그 분에게 일터에서 최선을 다할 필요는 있지만 완벽주의가 될 필요는 없으며 최선을 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에너지를 100% 그것에 다 쏟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에는 자신을 돌볼 수 있는 것도 들어가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이 일을 오래 하기 위해서 나는 하루의 에너지를 얼마나 써야 하는 지를 계산하는 것도 최선을 다하는 것에 속한다고 생각을 바꾸어 주었더니 그 분의 삶에 변화가 찾아왔다. 매일의 삶에서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어서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집에 돌아와서 개인적으로 즐거워하는 일들을 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만 두어야겠다 는 극단적인 생각도 멈추게 되었다.
자기를 돌보는 것은 가던 길을 더 잘 가기 위해 지금 잠깐 멈추는 것이다. 집중이 잘 되어도 50분마다 한 번씩 일어나 체조를 하며 자신의 몸을 돌보는 것이고 자기 돌봄은 아플 때만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나의 우물이 마르지 않게 재충전시켜주는 건강한 습관이다. 그럴 때 우리는 방전된 밧데리같은 사람이 되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 넘치는 샘물과 같은 기쁨과 에너지가 있는 풍성한 삶을 살게 된다.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은 더 많이 자기 돌봄을 하고, 건강한 사람도 꾸준히 ‘자기 돌봄’을 적용함으로 ‘굿 라이프’를 모두가 살아 내길 소망한다.
진심어린 작은 친절
얼마전, 차에 사고가 나서 앞에 범퍼가 부서져 바람에 덜렁거리고 운전석의 문은 열리지 않는 상태였다. 차를 고치기 위해서 수리소에 맡기는 과정에서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지나가는 소리로 정비소 직원에게 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직원이 친절하게도 문이 열리도록 앞부분을 펴주고 부서진 상태에서도 차를 운전할 수 있게 테입을 단단하게 붙여 주었다. 그 직원은 차가 얼마나 부서졌는 지를 점검하고 대략 수리 비용이 얼마나 들지에 대해서 견적을 내는 직원이었기에 꼭 그렇게 문을 펴주고 범퍼에 예쁘게 테이프를 발라줄 의무는 없었다. 그렇지만 문이 안열려 운전을 못하고 있는 나의 사정을 듣고는 스스로 도움을 준 것이다. 그 직원의 친절을 베푸는 행동을 보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너무 감사하다고 표현을 하자 직원은 뿌듯해하며 기뻐하는 표정을 보였다. 작은 친절로 서로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경험이었다.
이렇게 작은 친절로 인해서 우리는 마음이 녹아지기도 하고 마음이 상하기도 하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일상에서 작은 친절을 베풀고 공감을 잘 하는 사람들이 결혼 생활을 성공적으로 잘 할 수 있는 확률이 크다고 한다. 무심코 내가 던 진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고 무심코 던진 눈 빛에 누군가는 예민하게 반응하며 차가움을 느낄 수 있기에 일상의 친절은 그런 점에서 성공적 결혼 생활에 상당한 장점이 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을 사기 그릇 다루듯 조심스럽게만 다룰 순 없지만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작은 친절과 사랑을 전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고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기 때문에 살 맛이 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몇 일전 스키 캠프를 간 딸이 그만 핸드폰을 잃어버렸다. 첫 날에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그것을 찾아 하얀 눈을 헤매고 다닌 딸을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짠하면서도 속상한 마음이 있었다. 결국 집에 돌아오는 날까지 핸드폰은 발견되지 못했고 밧데리가 없는 지 더 이상 연락이 되질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딸은 다행히 핸드폰을 잃어버렸지만 엄청 재미있게 놀았다고 이야기를 해서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이틀 후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어떤 한 사람이 핸드폰을 주워서 충전을 한 다음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멀리 살고 있는 사람인지 우편비만 받고 전화기를 보내준다고 한다. 그 사람의 작은 친절한 행동을 통해 그렇게 찾지 못하던 핸드폰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사람이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면 핸드폰을 거금을 주고 다시 구입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60시간을 아르바이트를 해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렇게 시간을 내어서 누군가를 위해 친절을 베푸는 이타주의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더 행복하다고 한다. 30년 동안 뉴욕 외곽에 사는 아내와 엄마 427명을 대상으로 추적 연구를 한 미국의 연구 결과는 일주일에 최소 1회 이상 자원봉사를 한 여성일 수록 자녀의 숫자, 직업, 교육, 사회적 지위를 비롯한 다양한 요인을 고려해도 수명이 길고 신체 기능이 더 뛰어난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어떤 한 연구에서는 참가자들에게 소액의 돈을 주고 임의로 용도를 지정해 주었는데 그 돈을 타인을 위해 또는 자선 단체를 위해 쓴 사람은 그날 하루를 훨씬 더 기분 좋게 보낼 수 있었다. 이 행복감은 돈의 크기에 달려 있지 않았다고 한다.
친절을 베푸는 것도 마찬가지다. 너무나 큰 친절과 장시간의 봉사가 아닌 작은 친절과 봉사도 바로 행복지수에 영향을 주고 일회적인 자원봉사라도 즉시 행복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런데, 친절을 베푸는 사람의 마음은 이기적일 수도 있고 순수하게 이타적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이타적 행동을 통해서 자신의 위신을 세우고 그것으로 사회적 명성을 얻거나 지위를 올리기 위해 또는 내가 타인보다 낫다고 하는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친절을 베푼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이익이 동기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서 순수하게 앞에서 나오는 예처럼 타인에게 도움을 주고 이익을 주려는 동기에서 나오는 이타주의의 친절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겉으로 보면 모르는 것이지만 개개인의 자신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자 내가 하는 친절의 행동이 자기 중심적인 이익을 위한 것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타인 중심적인 이타주의에서 나온 것인지를 잘 구분하고 이해해야만 진정한 친절과 그것으로 인한 행복감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이기적인 마음에서 베푸는 친절은 그 다지 행복감과 상관이 없다. 그것이 따뜻한 마음이나 베푸는 감정이 주는 마음의 만족감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나의 욕심과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마음에서 오는 위선의 마음조차 들어있기에 순수하게 타인을 위해 베푸는 친절에서 경험할 수 있는 기쁨이 결여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친절을 받은 누군가가 따뜻함을 경험하고 그 따뜻함의 보답으로 감사나 기쁨을 표현할 때 그것이 이기적인 마음에서 베푸는 친절을 행한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을 수 있다. 그럴 때 그 경험은 이기적인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 순수하게 타인을 위해 베푸는 친절을 행할 수 있게 하는 동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 실험에 의하면 공중 전화기에서 동전을 주웠거나 우연히 아주 맛있는 쿠키를 선물로 받아서 기분이 좋아진 경우 누군가 실수로 떨어뜨린 물건을 주워주는 친절을 베풀 가능성이 더 커진다고 한다. 이것은 친절을 받고 행복해진 사람은 자동적으로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고 자비를 베풀 가능성이 더 많아진다. 이것을 보면 “사랑은 받은 사람이 사랑을 할 줄 안다” 는 말이 맞는 것 같다. 행복한 사람이 그 행복을 누군가에게 선으로 베풀 확률을 더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지에 나가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하고 봉사일을 하며 지역교회나 병원을 섬기는 선교일을 하는 선교사님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다.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고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기에 남은 삶을 그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기부나 큰 봉사행동을 하려고 하면 대부분 부담감을 느낄 수 있지만 일 주일에 한, 두시간 정도 누군가를 위해 봉사한다면 해볼 만할 것이다. 작은 친절을 베푸는 일을 삶에서 실천함으로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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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박사 (호주기독교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