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토론모임 시드니시나브로
자본가의 탄생 : 자본은 어떻게 종교와 정치를 압도했는가
원제 : The Richest Man Who Ever Lived: The Life and Times of Jacob Fugger
그레그 스타인메츠 / 부키 / 2018.12.24
이번 연말연시 휴가지에 들고 간 책은 본서 ‘자본가의 탄생’이다. 본서는 격동의 시대에 세계 최대의 부를 쌓았던 한 자본가의 삶과 시대를 잘 담은 평전이자, 근대 국가와 자본주의가 형성되던 근대 초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흥미진진한 역사서다.
세계사에서 중요한 자본가를 꼽는다면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과 함께 독일의 ‘야코프 푸거’를 꼽는 것은 필수적이다. 본서는 야코프 푸거의 일대기다. 황제는 물론 교황까지 압도하는 막강한 자본가였던 그는 가톨릭교회의 성서 해석을 바꾸어 금융의 문을 열었다.
푸거가 활동했던 시대적 배경은 콜럼버스가 바다를 넘고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리던 바로 그 시대로 모든 방면에서 유럽은 바뀌고 있었다. 군소 가문에 불과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부상, 가톨릭교회의 대금업 금지 철폐, 면죄부 판매와 종교개혁, 한자동맹의 붕괴, 복식 부기의 전파, 경제 강국의 판도 변화,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 격화 등 15~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났던 이러한 굵직한 사건들을 거치면서 점차 유럽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나아가게 됐는데, 모든 일의 중심에는 야코프 푸거 그가 있었다.

○ 목차
머리말 – 9
1장 여정의 시작 – 17
2장 황제에게 꼭 필요한 존재 – 49
3장 사업의 확장 – 75
4장 금융의 마술사 – 111
5장 상인의 전투 – 125
6장 대금업의 합법화 – 143
7장 종교개혁의 불씨 – 173
8장 황제 선거 – 185
9장 승리 그리고 패배 – 213
10장 자유의 바람 – 239
11장 농민 전쟁 – 271
12장 북소리가 그치다 – 303
맺음말 – 327
후기 – 338
주 – 343
참고문헌 – 352
찾아보기 – 379
○ 저자소개 : 그레그 스타인메츠
미국 클리브랜드 오하이오에서 태어나 콜게이트대학을 졸업했으며 노스웨스턴대학 메딜 저널리즘 스쿨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15년 동안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으며, 《월스트리트 저널》 독일 지사와 런던 지사의 책임자를 맡기도 했다. 현재는 뉴욕에 있는 자산관리사에서 증권 분석가로 활동하고 있다. 《자본가의 탄생》은 야코프 푸거가 그 중요성에 비해 영어권에 제대로 소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쓴 그의 첫 저서다. 그의 책은 야코프 푸거의 역사적 의의를 일반 독자에게 가장 잘 소개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역자: 노승영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인지과학 협동과정을 수료했다. 컴퓨터 회사에서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환경 단체에서 일했다. “내가 깨끗해질수록 세상이 더러워진다”고 생각한다. 번역한 책으로는 《우리 몸 오류 보고서》, 《이빨》,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미국사》, 《바나나 제국의 몰락》 등 다수가 있으며,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을 썼다.

○ 독일의 은행가 · 자산가 야코프 푸거 (Jakob Fugger, 1459 ~ 1525) 개관
야코프 푸거 (Jakob Fugger, 1459년 3월 6일 ~ 1525년 12월 30일)는 독일의 은행가이다. 16세기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를 기반으로 활약한 거상 (巨商)이자 르네상스 시대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이다.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나 교황을 돈으로 협상할 수 있었고 유럽 정치사의 주요 국면마다 유동성으로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놓았다.
1459년 3월 6일, 독일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아버지와 어머니 바바라 푸거 (Barbara Fugger)의 7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한스 푸거는 그라헨 마을의 농부였으나 아우구스부르크로 이주해 직물상인으로 성공하여 푸거 가문의 기반을 닦는다. 본래 푸거의 조상은 방직공 출신으로 야콥 푸거의 조상인 요한 푸거의 대부터 상인이 되었다.
야코프 푸거는 조상으로부터 받은 재산을 바탕으로 은행·광산 등에 손을 대어 막대한 부자가 되었다. 마침내 그의 집안은 전 유럽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여러 나라에도 자금을 대주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를 후원해 황제가 되는 것을 도와주는 대가로 당시 합스부르크의 소유였던 울름 백작령을 비롯한 여러 영지를 구입하고 신성로마제국의 이권을 챙겼으며 평민 출신에서 일약 제국백작의 작위에 오르게 된다. 이후 그는 유럽 최고의 부자로 이름을 떨쳤으며 막시밀리안 1세가 죽자 그의 손자인 카를 5세가 황제가 되는 것을 도왔다.
지금은 박물관이 된 빈민주택단지 푸거라이 (Fuggerei)와 푸거 궁 (Fuggerplasat)을 각각 1500년대에 건설했으며, 야콥 푸거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1525년 유언장을 통해 가업을 조카 울리히에게 물려주고 1525년 12월 30일 별세한다.

○ 마치며
앞에서 언급한 푸거가 역사에 남긴 굵직한 사건들만이 아니라, 푸거는 베네치아에서 습득한 복식 부기를 개량해 알프스 이북에서 활용했다. 그는 근대적인 회계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정보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역사학자들이 ‘푸거 뉴스레터’라고 부르는 정보망을 구축했다. 이처럼 탁월한 투자 감각, 일을 추진하고 성사시키는 수완,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활용하는 배짱 등을 두루 갖추고 있던 푸거는 오늘날 자본가의 전형이 되었으며 그의 삶은 근대 국가와 자본주의가 태동한 시기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자 대신 권리를 받아 부를 쌓았고, 거대 자본을 장기 투자하여 신사업을 개척했으며, 가톨릭교회의 성서 해석을 바꾸어 금융의 문을 열고, 그 어떤 공격에도 살아남은 최초의 현대적 사업가였던 그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의 금융 체계와 역사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 이자 대신 권리 받아
야코프 푸거가 가업을 물려받을 때만 해도 푸거가는 직물 매매를 주력으로 삼아 크지도 작지도 않은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유럽 최고의 부자로 거듭난 발판 중 하나는 투자에 가까운 채권 방식의 대출이었다. 푸거는 종종 돈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이자 대신 권리를 받았는데, 이것이 성공하려면 막대한 이익을 낳는 권리를 알아봐야 했다. 무역이 활발해지고 전쟁이 빈발하던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가치가 높은 권리가 무엇인지 푸거는 일찌감치 꿰뚫어보았다. 바로 은과 구리 광산의 채굴권과 소유권이었다.
– 거대 자본을 장기 투자하여 신사업 개척
지기스문트에게 돈을 빌려주어 막대한 은을 손에 쥐게 된 푸거는 막대한 여유 자금을 확보했다. 어딘가에 이 돈을 투자해야 했다. 가장 간단한 일은 기존에 하던 직물 매매 사업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직물 매매는 경쟁이 심했고 부가가치도 많지 않았다. 푸거가 눈을 돌린 곳은 구리였다. 구리는 16세기 전쟁의 핵심인 대포와 소총의 주원료였기에 독점할 수만 있다면 막대한 이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 가톨릭교회의 성서 해석을 바꾸어 금융의 문 열어
15세기까지도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교회는 돈이 돈을 낳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 주어라 (누가복음 6장 35절)’ 같은 성경 구절에 근거해 이자를 물리는 것을 죄악시하고 고리대금을 금지했다. 푸거를 견제하려는 사람들은 예금주에게 5퍼센트의 이윤을 약속하는 아우크스부르크 계약을 문제 삼고 있었다. 푸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진작부터 후원하던 신학자들을 동원했다.
푸거는 신학자들의 힘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교황 레오 10세를 직접 움직였다. 푸거는 레오 10세에게 알 수 없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고 얼마 후 교황은 이자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교황 칙령에 서명했다. “고리대금은 본성상 불모인 것에서 얻는 이익, 즉 노동이나 비용, 위험 없이 얻는 이익을 일컬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돈을 빌려줄 때 노동, 비용, 위험 없이 이자를 부과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이제 금융은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왜 레오 10세는 푸거의 손을 들어주었을까? 레오 10세가 이탈리아 굴지의 금융가인 메디치 출신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시대가 급변해 교리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 탓일 수도 있다. 그러나 푸거가 교황, 주교, 신학자, 귀족들을 상대로 했던 막대한 로비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였을 것이다.
– 면죄부 판매의 배후가 되어 종교개혁 촉발
종교개혁하면 교황청의 부패, 성직자의 탐욕, 교회의 세속화 등에 분노한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하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종교개혁의 뒤에도 푸거가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514년 우리엘 폰 게밍겐이 사망하면서 마인츠 대주교 자리를 놓고 경쟁이 붙었다. 이때 알브레히트는 대주교 자리를 따내기 위해 푸거에게 많은 돈을 빗 졌고, 이제 빌린 돈을 갚을 방법을 궁리해야 했다. 이때 나온 아이디어가 바로 면죄부 판매였다. 교황의 동의하에 발행된 이 ‘편지’가 훗날 면죄부라 불리게 되는 것인데 알브레히트가 이를 돈을 받고 파는 아이디어를 내놓은 것이다. 그러나 면죄부를 팔아서 벌어들인 돈을 푸거에게 갚는 것은 신자들의 반발을 살 수 있었다. 핑곗거리를 찾아야 했고, 그것이 바로 성 베드로 대성당이었다. 교황과 푸거는 푸거 궁이라 불리는 그의 집에서 돈을 나누기로 모의하여 절반은 성 베드로 대성당이 나머지 절반은 푸거가 갖기로 했다. 그 뒤는 익히 알려진 대로다. 루터는 격분하여 95개조 반박문을 썼다. 루터는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를 설득하기 위해 편지를 보냈는데, 바로 그가 면죄부의 원흉임은 몰랐으리라.
– 르네상스 시대 왕좌의 게임을 좌지우지
신성로마제국의 헌법인 금인칙서에 따르면 황제 자리는 반드시 선거를 치러야 했다. 스페인 왕 카를과 프랑스 왕 프랑수아가 선거에서 경쟁하게 되었다. 이는 황제 선거에 표를 행사하는 선거후들에게는 한몫 잡을 절호의 기회였다. 선거후들이 신뢰하는 은행가가 푸거였기에 선거에서 이기려면 푸거를 잡아야 했다. 푸거는 전령을 파리로 보내 프랑수아와도 거래할 의사가 있음을 카를에게 보여주었다. 프랑수아가 푸거에서 손을 내밀자 푸거는 그 조건을 합스부르크 가문에 흘렸다. 카를이 푸거를 잡으려면 프랑수아보다 좋은 조건을 걸어야 했다. 카를은 선거후들의 압력에게 이기지 못하고 결국 푸거에게 돈을 빌렸다. 그 대가로 푸거는 여러 가지를 받았는데, 그중 하나는 인쇄기 통제권이었다. 언론의 자유가 푸거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다.
– 역사의 행로를 바꾸고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1525년 독일에서는 유럽 역사상 최대의 대중 봉기가 발발했다. 수많은 마을이 불에 타고 10만 명이 목숨을 잃은 이 사건은 훗날 독일 농민 전쟁으로 불리게 되며 엥겔스는 이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대결의 전초전이라고 평가했다. 독일 농민 전쟁의 계기를 푸거가 제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대중의 미움을 받고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 종교와 정치를 압도한 자본가의 탄생
푸거가 역사에 남긴 것은 앞에서 소개한 굵직한 사건들만이 아니다. 푸거는 베네치아에서 습득한 복식 부기를 개량해 알프스 이북에서 활용했다. 그는 근대적인 회계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정보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역사학자들이 ‘푸거 뉴스레터’라고 부르는 정보망을 구축했다. 이처럼 탁월한 투자 감각, 일을 추진하고 성사시키는 수완,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활용하는 배짱 등을 두루 갖추고 있던 푸거는 가히 오늘날 자본가의 원형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무엇보다 그는 종교와 정치 권력의 위세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던 시절에도 돈 앞에선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왕이든, 황제든, 귀족이든, 교황이든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하는 동등한 인간일 뿐이었다. 이에 푸거는 오늘날 자본가의 전형이 되었으며 그의 삶은 근대 국가와 자본주의가 태동한 시기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임운규 (독서토론모임 시드니시나브로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