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1년 11월 10일, 독일 고전주의 극작가이자 시인 · 철학자 · 역사가 · 문학이론가 프리드리히 폰 실러 (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61 ~ 1805) 출생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폰 실러 (독: 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61년 11월 10일 ~ 1805년 5월 9일)는 독일 고전주의 극작가이자 시인, 철학자, 역사가, 문학이론가이다.
괴테와 함께 독일 고전주의의 2대 문호로 일컬어진다. 그의 작품들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바탕으로 하여, 1800년대와 1848년 혁명기의 독일인들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작품에는 베토벤의 ‘제9 교향곡’에서 노래한 ‘환희의 송가’와 역사극 ‘돈 카를로스’, ‘발렌슈타인’ 3부작, ‘빌헬름 텔’ 등이 있다.
– 프리드리히 실러 (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출생: 1761년 11월 10일, 독일 Marbach am Neckar
.사망: 1805년 5월 9일 (44세), 독일 바이마르
.묘소: Jacobsfriedhof Weimar Weimarer Fürstengruft
.직업: 시인, 철학자, 역사가, 사서, physician writer, 극작가, 소설가, 대학 교수, 번역가, 저널리스트, 작가
.언어: 프랑스어, 독일어
.국적: Duchy of Württemberg
.학력: Karlsschule Stuttgart, 예나 프리드리히 실러 대학교
.사조: 슈투름 운트 드랑, Weimar Classicism
.스승: Balthasar Haug
.부모: 부) Johann Kaspar Schiller, 모) Elisabeth Dorothea Schiller
.배우자: Charlotte von Lengefeld
.자녀: Emilie von Gleichen-Rußwurm, Ernst von Schiller
.형제: Christophine Reinwald
.주요 작품: 군도 (희곡), 돈 카를로스, 발렌슈타인, 마리아 슈투아르트, 빌헬름 텔, 간계와 사랑, On the aesthetic education of man, Die Huldigung der Künste, 오를레앙의 처녀
.영향 받은 인물: Karl Leonhard Reinhold,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이마누엘 칸트
프리드리히 실러 (Friedrich Schiller, 1759 ~ 1805)는 독일 서남부의 네카르 강변에 있는 마르바흐의 소시민 가정에서 1759년 11월 10일 태어났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신학을 전공해 목사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영주 (領主)인 카를 오이겐 공작의 명에 의해서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처음엔 법학을 공부했으나 의학으로 전공을 바꾼 그는 졸업 후 슈투트가르트에서 하급 군의관이 됐다. 학생 시절에 그는 몰래 문학 작품을 탐독하며 습작을 했다. 철학 교수 아벨의 권유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은 것은 그에게 충격적인 체험이었다.자비 출판한 처녀작 ‘군도’가 1782년 1월 13일 만하임에서 성공적으로 초연된 것을 계기로 그는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공작의 저술 금지령을 피해서 그는 1782년 9월 22일 밤에 만하임으로 도주한다. 그러다가 예나 대학의 비정규직 교수로 초빙되어 1789년에 예나로 이주했다. 그는 여기서 역사와 미학 강의를 하지만 학생 수의 감소와 신병으로 얼마 후 사직했다. 실러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괴테와의 만남이었다. 1794년부터 괴테와 실러의 본격적인 친교가 시작되었는데, 이들은 자주 만나서 문학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많은 서신을 교환하며 공동 작업을 했다. 특히 1802년에는 실러가 예나에서 바이마르로 이사를 해 이들의 친교와 공동 작업은 더욱 강화됐다. 실러는 1805년 5월 9일 오랫동안 앓던 지병으로 바이마르에서 사망했다.
○ 생애 및 활동
독일 남서부 뷔르템베르크 주에 있는 마르바흐에 거주하는 하급 군의관 Johann Kaspar Schiller의 1남 5녀 중 외아들로 1761년 11월 10일 태어났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신학을 전공해 목사가 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영주 (領主)인 카를 오이겐 공작의 명령으로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처음엔 법학을 공부했으나 의학으로 전공을 바꾼 그는 졸업 후 슈투트가르트에서 하급 군의관이 됐다. 그 후 사관학교를 졸업한 군인으로서 슈투트가르트 연대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그는 학생 시절에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유에 대한 동경이 싹터 저작에 몰두하였는데, 몰래 문학 작품을 탐독하며 습작을 했다. 철학 교수 아벨의 권유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은 것은 그에게 충격적인 체험이었다. 자비 출판한 첫 작품 ‘군도’는 독일 귀족 계급의 횡포에 대한 반항적 작품으로, 이 작품이 1782년 1월 13일 만하임에서 성공적으로 초연되자 실러는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연대 의무관이 되어 집필활동을 금지당했기에 공작의 저술 금지령을 피해서 1782년 9월 22일 밤에 만하임으로 도주했다. 도피 방랑생활을 하면서 ‘Fiesco의 반란’ (1783), ‘간계와 사랑’ (1784)을 썼다.
한때 만하임 극장의 전속 작가가 되었으나 중병을 앓고 사퇴한 후 크리스티안 쾨르너의 도움으로 ‘돈 카를로스’를 완성 (1787)했다.
1787년에 네덜란드 독립사를 연구, 인정을 받아 1789년 예나로 이주하여 예나 대학의 비정규직 교수가 되었다. 그 후 미학, 철학, 역사에 관한 논문을 잇달아 발표하여 생활의 안정을 얻고 역사와 미학 강의를 했지만 학생 수의 감소와 신병으로 얼마 후 사직했다.
1794년부터 괴테와 교분하여 함께 ‘크쎄니엔’이라는 시집을 내기도 했다. 이들은 자주 만나 문학에 관해 대화하고 많은 서신을 교환하며 공동 작업을 했다. 특히 1799년에는 실러가 예나에서 바이마르로 이사해 이들의 공동 작업은 더욱 확대됐다. 이는 쉴러가 그의 희곡 “발렌슈타인 3부작”이 바이마르 궁정극장의 무대에서 공연되는 과정을 보며, 바이마르 궁정극단 및 극장장인 괴테와의 협업의 중요성을 인지하였기 때문이다.
1799년경부터 실러는 만년 (晩年)의 희곡 창작의 시기에 들어가, ‘발렌슈타인’ 3부작 (1799), ‘마리아 슈투아르트’ (1800), ‘오를레앙의 처녀’ (1801), ‘메씨나의 신부’ (1803), ‘빌헬름 텔’ (1804) 등의 대표작을 써서 괴테와 견주는 대작가가 되었다. 희곡의 대부분은 운명과 대결하는 의지의 힘을 묘사한 것으로서 그리스 고전극 정신의 재생을 지향하고 있다.
1805년 5월 9일 폐렴 (아마도 폐결핵에 따른)으로 44세에 바이마르에서 사망했다.
○ 사후
지난 2005년에는 실러 사망 200주년을 맞아 독일은 전국적으로 “실러의 해”라는 행사를 열었다. 특히 만하임에서는 2년마다 국제 실러 축제가 열려 각국 극단이 참여하여 공연을 한다. 2005년 당시 국립극단도 참여하여 실러의 ‘군도’로 폐막공연을 하기도 했다.
○ 작품
Fiesco의 반란 (1783)
간계와 사랑 (1784)
군도 (1781)
환희의 송가 (1785)
돈 카를로스 (1787)
크쎄니엔 (공저, 1794)
메씨나의 신부 (1803)
빌헬름 텔 (1804)
다몬과 핀티아스 (Damon und Phintias) –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달려라 메로스의 원전.
마리아 슈투아르트 (Maria Stuart, 1800) – 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를 다룬 희곡.
오를레앙의 처녀 (die Jungfrau von Orleans, 1801) – 잔 다르크를 다룬 비극.
발렌슈타인 (Wallenstein) 3부작 (1799) –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을 다룬 희곡
대한민국에는 ‘빌헬름 텔’이 ‘윌리엄 텔’이라는 영어 발음으로 많이 소개되어 있으며, 그의 희곡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른 것은 독일 샤우뷔네에서 활동한 연출가 Frank Arnold의 연출로 국립극단이 1989년에 올린 ‘간계와 사랑’이 대표적이다.
실러는 1600년대 전반부의 30년 전쟁을 다룬 역사서적 ’30년 전쟁의 역사’ (Geschichte des Dreissigjährigen Kriegs, 1792) 등의 명저를 남기기도 했다.
* Works
– Plays
Die Räuber (The Robbers), 1781
Fiesco (Die Verschwörung des Fiesco zu Genua), 1783
Kabale und Liebe (Intrigue and Love), 1784
Don Karlos, Infant von Spanien (Don Carlos), 1787
Wallenstein, 1800
Maria Stuart (Mary Stuart), 1800
Die Jungfrau von Orleans (The Maid of Orleans), 1801
Turandot, Prinzessin von China, 1801
Die Braut von Messina (The Bride of Messina), 1803
Wilhelm Tell (William Tell), 1804
Demetrius (unfinished at his death)
– Histories
Geschichte des Abfalls der vereinigten Niederlande von der spanischen Regierung or The Revolt of the Netherlands
Geschichte des dreißigjährigen Kriegs or A History of the Thirty Years’ War
Über Völkerwanderung, Kreuzzüge und Mittelalter or On the Barbarian Invasions, Crusaders and Middle Ages
– Translations
Euripides, Iphigenia in Aulis
William Shakespeare, Macbeth
Jean Racine, Phèdre
Carlo Gozzi, Turandot, 1801
– Prose
Der Geisterseher or The Ghost-Seer (unfinished novel) (started in 1786 and published periodically. Published as book in 1789)
Über die ästhetische Erziehung des Menschen in einer Reihe von Briefen (On the Aesthetic Education of Man in a Series of Letters), 1794
Der Verbrecher aus verlorener Ehre (Dishonoured Irreclaimable), 1786
– Poems
An die Freude (Ode to Joy) (1785) became the basis for the fourth movement of Beethoven’s ninth symphony
Der Taucher (The Diver; set to music by Schubert)
Die Kraniche des Ibykus (The Cranes of Ibykus)
Der Ring des Polykrates (Polycrates’ Ring)
Die Bürgschaft (The Hostage; set to music by Schubert)
Das Lied von der Glocke (Song of the Bell)
Das verschleierte Bild zu Sais (The Veiled Statue at Sais)
Der Handschuh (The Glove)
Nänie (set to music by Brahms)
○ 부록 : 프리드리히 실러의 ‘환희의 송가” (歡喜― 頌歌, 독: Ode “An die Freude”)
환희의 송가 (歡喜― 頌歌, 독: Ode “An die Freude”)는 독일의 시인인 프리드리히 실러가 1785년에 지은 송가 형식의 시로, 단결의 이상과 모든 인류의 우애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이 시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1824년에 완성한 교향곡 9번 4악장의 가사로 쓰인 시이기도 하다.
– 가사
프리드리히 실러는 라이프치히의 고리스에 머물던 무렵, 대략 1785년 5월 초부터 9월 중순까지 그의 작품의 발행자인 게오르크 요아힘 괴센과 함께 머물며, 희곡 “돈 카를로스”와 더불어, 이 시의 첫 번째 버전인 “환희의 송가’ (Ode “An die Freude”)를 썼다. 그 후(1803년), 실러는 그의 사후인 1808년에 다시 출판되게 되는 시를 일부 수정하였는데, 베토벤의 설정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후기 버전이었다. 이 시의 지속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실러 자신은 그것을 그의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인 크리스티안 고트프리드 쾨르너에게 보낸 1800여 통의 편지에서 “현실과 분리되어 있다” “우리 두 사람에게는 아마도 가치가 있겠지만, 세상과 시의 예술을 위해서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의 인생 후반기를 실패로 간주했다 (쾨르너와의 우정은 실러에게 “환희의 송가”를 쓰도록 영감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베토벤은 1822 ~ 1824년에 실러의 이 시를 인용, 1824년에 완성한 그의 교향곡 9번 4악장의 가사로 사용했다. 베토벤은 1792년에 이 시의 초고를 접하고 감동해서 곡을 붙이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완성된 그의 교향곡 9번 4악장의 가사에서는 1808년 개고판의 시를 이용하고 있다 (“환희의 송가”의 1785년 초고는 1786년에 출판되고, 개고된 1803년 원고는 1808년에 출판되었다). 베토벤은 생애에 걸쳐서 실러의 시집을 애독했지만, 실제로 그의 교향곡 9번 라 단조 “합창”, 작품 125의 제4악장의 가사에 실러의 “환희의 송가”를 포함시킬 때, 3 분의 1 정도의 길이로 번안했다. 시작 부분에서 바리톤 가수가 독창으로 노래하는 “오 친구들이여! 이런 곡조들이 아닌, 좀 더 즐겁고, 기쁨에 찬 노래를 부르자” (O Freunde, nicht diese Töne! Sondern lasst uns angenehmere anstimmen, und freudenvollere). 부분은 베토벤 스스로 지은 것이며, 실러의 원시에는 없다.
– 개정된 가사와 번역
O Freunde, nicht diese Töne! Sondern laßt uns angenehmereanstimmen und freudenvollere.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Tochter aus Elysium, Wir betreten feuertrunken, Himmlische, dein Heiligtum! Deine Zauber binden wieder Was die Mode streng geteilt; Alle Menschen werden Brüder Wo dein sanfter Flügel weilt.
Wem der große Wurf gelungen Eines Freundes Freund zu sein; Wer ein holdes Weib errungen Mische seinen Jubel ein! Ja, wer auch nur eine Seele Sein nennt auf dem Erdenrund! Und wer’s nie gekonnt, der stehle Weinend sich aus diesem Bund!
Freude trinken alle Wesen An den Brüsten der Natur; Alle Guten, alle Bösen Folgen ihrer Rosenspur. Küsse gab sie uns und Reben, Einen Freund, geprüft im Tod; Wollust ward dem Wurm gegebenund der Cherub steht vor Gott.
Froh, wie seine Sonnen fliegen Durch des Himmels prächt’gen Plan Laufet, Brüder, eure Bahn, Freudig, wie ein Held zum siegen.
Seid umschlungen, Millionen! Diesen Kuß der ganzen Welt! Brüder, über’m Sternenzelt Muß ein lieber Vater wohnen.Ihr stürzt nieder, Millionen? Ahnest du den Schöpfer, Welt? Such’ ihn über’m Sternenzelt! Über Sternen muß er wohnen.
Seid umschlungen, Millionen! Diesen Kuß der ganzen Welt! Brüder, überm Sternenzelt Muß ein lieber Vater wohnen. Seid umschlungen, Millionen! Diesen Kuß der ganzen Welt!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Tochter aus Elysium,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Götterfunken.
오 친구들이여! 이런 곡조들이 아닌, 좀 더 즐겁고, 기쁨에 찬 노래를 부르자.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광채여, 천상낙원의 딸들이여, 우리는 정열에 취하고 빛이 가득한 신의 성전으로 들어간다ǃ 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은 자들을 신비로운 그대의 힘으로 다시 결합시키는도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온화한 그대의 날개가 머무르는 곳에서.
위대한 하늘의 선물을 받은 자여, 진실된 우정을 얻은 자여, 여성의 따뜻한 사랑을 얻은 자여, 다 함께 모여 환희의 노래를 부르자! 그래, 이 땅에 단 한 명 뿐일지라도 마음을 공유할 혼을 가진 자라면 환호하라ǃ 그러나 그조차 할 수 없다면 눈물 흘리면서 조용히 떠나라!
모든 존재는 자연의 품 속에서환희를 마신다. 모든 선인도 모든 악인도 자연이 선물한 장미의 오솔길을 걷는다. 자연은 입맞춤과 포도나무를 주고, 죽음조차 빼앗아 갈 수 없는 친구를 주었다. 하물며 벌레 같은 사람 조차 쾌락을 누리며 지혜의 천사 케루빔은 신 앞에 서있다.
태양이 수많은 별 위를 움직이듯이 광활한 하늘의 궤도를 즐겁게 날듯이 형제여 길을 달려라, 영웅이 승리의 길을 달리듯이.
모든 사람은 서로 포옹하라! 이것은 온 세상을 위한 입맞춤! 형제여 별의 저편에는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으니. 억만 인들이여, 엎드리지 않겠는가? 창조주를 믿겠는가, 온 세상이여? 별들 뒤의 그를 찾으라! 별들이 지는 곳에 그는 있다.
모든 사람은 서로 포옹하라! 이것은 온 세상을 위한 입맞춤! 형제여 별의 저편에는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으니. 모든 사람은 서로 포옹하라! 이것은 온 세상을 위한 입맞춤!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광채여, 천상낙원의 딸들이여,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광채여, 신의 광채여.
– 자유의 송가
실러가 원래 “자유의 송가” (Ode “An die Freiheit”)을 썼다가 “환희의 송가” (Ode “An die Freude”)로 변경했는 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계의 추측으로 남아 있다. 알렉산더 세이어는 베토벤의 전기에서 “베토벤의 마음에 처음으로 열광적인 찬사를 불러일으킨 시는 “자유의 송가” (‘환희의 송가”가 아닌)의 초기 형태였다는 것에 가깝다는 추측이 든다.”라고 썼다. 음악학자 알렉산더 레딩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ː “1989년의 한 공연에서 ‘자유’ (Freiheit)를 사용했던 레너드 번스타인 조차도 실러가 ‘환희’ (Freude)를 ‘자유’ (Freiheit)의 암호로 사용했는 지에 관해서 추측으로 남기고 있으며, 학자의 일치된 견해는 ‘이 신화에 대한 사실적 근거가 없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 베토벤의 설정 사용
세월이 흐르면서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는 항의의 애국가이자 음악 축하 행사의 곡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1985년에 유럽 연합이 환희의 송가를 유럽 연합의 찬가 (유럽가)로 채용하면서 부터는, 비공식적인 라틴어의 가사가 붙여졌다. 유럽가의 제안자는 리하르트 니콜라우스 폰 코우멜덴호페칼레르기 백작으로, ‘유럽 연합의 아버지’ 중 한 명이다.
1980년대 후반에 칠레의 시위대는 피노체트의 군사 독재에 반대하는 시위 도중 이 곡을 불렀고, 중국 학생들은 천안문 광장에서 이 곡을 방송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벨벳 혁명이 일어나 1989년 12월 14일에 수도인 프라하에서 혁명을 축하하기 위한 연주회가 바츨라프 노이만 지휘, 체코 필하모니 관현악단에 의해서 행해졌다. 그리고 이 연주회에서 불렸던 “환희의 송가”는 동유럽 혁명의 테마곡이 되었다. 연주가 끝나자 박수가 20분 넘게 울렸고, 새 대통령이 된 바츨라프 하벨은 V자를 치켜세우며 함께 혁명의 승리를 반겼다.
1989년 12월 25일에는 레너드 번스타인 지휘의 공연이 열렸다.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을 모체로, 동서 독일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당시)의 6개국으부터 유시를 모아 혼성 관현악단을 임시 편성했으며, 일본인 중에는 당시 뮌헨 방송 합창단원이었던, 나루토 교육대학의 음악 교수의 코로야스 토시히데가 합창단의 중앙에서 노래를 불렀다. 베를린에서도 전통이 있는 연주회장인 샤우슈필하우스에서 교향곡 9번을 연주하고, 동서 독일의 융화를 축하했다. 이 때는 “Freude” (환희)를 “Freiheit” (자유)로 대체하여 부른 것이 큰 화제가 되었다 (재통일은 이듬해인 1990년 10월 3일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융화를 축하한다’는 점이 중요한 포인트였다). 얼마후, 도이체 그라모폰 회사를 통해 이 크리스마스 공연의 라이브 녹음이 CD와 레이저 디스크 (LD)로 발매되었다. 번스타인은 그리고 1년이나 지나기 전에, 1990년 10월 14일에 급서했지만, 이 미국인 지휘자는 본연주회에서 독일어권의 사람들에게도 잊기 어려운 인상을 남겼다.
1998년 2월 7일, 1998년 나가노 동계 올림픽의 개회식에서는 오자와 세이지의 지휘 아래에서 세계의 5대륙 · 6개국 · 7개소로부터 동시에 노래가 불렸고, 이에 맞춘 호리우치 겐 안무의 발레 영상이 중계되었다. 노래가 불렸던 장소는 오자와 세이지가 지휘봉을 휘두른 나가노현 현민 문화회관,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독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희망봉, 미국 뉴욕의 유엔 본부, 나가노 올림픽 스타디움이다. 관현악단에 의한 연주는 나가노 현민 문화회관에서 행해졌지만, 합창단이 있는 각지를 향해서 동시에 연주를 전달하면, 관현악단과의 소리 엇갈림이 일어나고, 또 합창단의 목소리도 늦게 나가노까지 닿아 버리기 때문에, 1번 거리가 있는 희망봉을 기준으로 지연을 보정한 상태로 중계했다. 오전 11시에 시작한 개회식에서는 성화가 성화대에 점화된 뒤, 피날레로서 환희의 노래가 불렸고, 80명의 발레 무용수에 의한 발레가 전개되었다. 흐린 하늘의 나가노현, 기온이 마이너스인 베이징, 한 여름인 시드니, 한밤 중인 베를린 등 시각이나 계절이 뿔뿔이인 채로 불렸다. 또 희망봉은 일출과 맞물려, 노래가 진행되면서 일대가 밝아지는 모습을 담고 있다.
– 그 외 베토벤의 설정 사용
한때 서독의 국가였으며 동서 단일 독일의 올림픽 시상식에서 연주되었다.
일찍이 남로디지아 (현재의 짐바브웨)의 국가였다.
2005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의 국가가 되었다.
1996년부터 1998년까지 WWE의 송가였다.
찬송가는 페글 게임에서도 사용된다.
1907년에 미국의 시인 헨리 반 다이크는 교회에서의 매우 성공적인 찬송가 “기뻐하며 경배하세” (The Hymn of Joy)를 썼다 .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 (구 9번) 나단조, “더 그레이트”의 4악장에도 닮은 프레이즈가 나타나지만, 이것은 인용이라고 생각된다.
브람스의 교향곡 1번 다단조의 4악장의 주부의 주제와의 유사성은 오래전부터 지적되고 있으며, 현재는 브람스의 베토벤에게의 존경 (경의)의 표현이라는 해석이 있다.
참고 = 위키백과,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