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요한네스 5세 /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Jan V. Palaiologos, 1332 ~ 1391)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Jan V. Palaiologos, 그: Ίωάννης Ε’ Παλαιολόγος, 1332년 6월 18일 ~ 1391년 2월 16일)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이다.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와의 내전에서 패배하여 공동 황제가 되었다. 그는 학문과 문학을 사랑하였다. 그는 또다시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 안드로니코스 4세 팔레올로고스와 내전을 치러야만 했다. 이 내전은 안드로니코스 4세의 재위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명령으로 요안니스 5세는 자신의 아들인 안드로니코스 4세의 한쪽 눈을 멀게 하였고, 결국 내전을 치르게 된 것이다. 이 내전에서 요안니스 5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하였다. 이 치열한 내전은 마누일 2세가 승리하고 황제가 되면서 끝이 났다.

–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Jan V. Palaiologos)
.제호: 요안니스 5세 (Ιωάννης Ε’)
.휘: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 (Ίωάννης Παλαιολόγος)
.생사: 1332년 6월 18일 ~ 1391년 2월 16일
* 동로마,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재위 기간: 1341년 ~ 1347년 (1차), 1354년 ~ 1376년 (2차), 1379년 ~ 1390년 (3차), 1390년 ~ 1391년 (4차)
동로마,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로 1341년부터 1347년, 1354년부터 1376년, 1379년부터 1390년 4월, 1390년 9월부터 1391년 2월까지 재위했다.
요안니스의 즉위는, 말기에 이른 동로마 제국이 본격적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신호와도 같았다. 요안니스의 아버지이자 선황인 안드로니코스 3세 때까지만 하더라도, 비록 이기지는 못했어도 오스만 술탄국의 침공에 적극적으로 응수하고 다른 지방에서도 영토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일부 확장하기까지 했다. 즉 안드로니코스 3세까지의 동로마 제국은 예전만은 못했어도 그래도 아직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잦은 내전과 흑사병의 유행, 이웃나라인 세르비아, 불가리아의 융성, 오스만 술탄국의 침입 등으로 그 희망마저 꺼져버린 때가 요안니스 5세의 치세였다.
○ 생애 및 활동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이후 예순의 나이로 병사할 때까지 그 생애는 참으로 파란만장했는데, 먼저 두 번이나 폐위당했다 복위하기를 반복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여러 번의 내전을 경험했다. 미하일 8세가 동로마 제국을 복원한 이래 제국 멸망 때까지 내전이 네 차례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무려 세 번이 요안니스의 치세에 일어났으며, 그러다 보니 역대 로마 제국의 황제들 가운데 두 번씩이나 폐위당했으면서도 그때마다 복위에 성공한 예는 요안니스 5세뿐이다.
– 첫 번째 치세 (1341 ~ 1347년)
아버지 안드로니코스 3세가 세상을 떠난 후 9살의 나이에 즉위했다. 황태후 안나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요한 14세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1341년 내란을 일으켜 1347년 요안니스 6세로 즉위하였다. 요안니스 5세는 1354년 말 요안니스 6세를 폐위시키고 일단 복위했다.
– 두 번째 치세 (1354 ~ 1376년)
복위에는 성공했지만 내전으로 제국의 국력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세르비아는 이 내전을 틈타 동로마 제국이 가지고 있던 발칸 반도 서부의 영토를 차지했다. 또한 오스만도 갈리폴리를 점령함으로써 유럽으로 건너왔다. 요안니스 5세는 서유럽과의 동맹을 꾀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요안니스 5세는 장남 안드로니코스 4세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안드로니코스 4세는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아버지와 동생 (훗날의 마누일 2세)를 투옥했다. 이에 오스만은 제국이 오스만의 속국이 되는 것을 조건으로 요안니스 5세의 두 번째 복위를 도왔다.
– 세 번째 치세 (1379 ~ 1391년)
하지만 이번에는 안드로니코스 4세의 아들, 즉 요안니스 5세의 손자인 요안니스 7세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마누일 2세와 오스만의 지원으로 복위했다. 그러나 오스만의 바예지드 1세는 이번에도 대가로 아나톨리아에 마지막으로 남은 동로마 영토였던 필라델피아 (오늘날의 터키 알라셰히르) 할양 등을 요구했다. 요안니스 5세는 1391년 사망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문 가운데 하나인 ‘황금 문’의 방비가 허술해진 것을 우려하여 성벽 밖에 있는 수도원 몇 채를 허물고 거기에서 나온 석재로 성문을 보강했는데, 그 소식을 전해들은 바예지드로부터 보강한 부분을 부수라는 편지를 받게 된다. 결국 요안니스는 황금 문의 방어시설을 원상복구하라고 명령했지만, 그 과정에서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아 화병으로 세상을 떴다고 전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비운의 황제였던 셈이다.
○ 정세
잦은 내전과 오스만 술탄국의 침입,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융성 등 동로마 제국의 가장 큰 멸망을 경험한다.
– 對 오스만
요안니스 5세의 치세는 오스만 술탄국의 유럽 침공이 본격화한 때이기도 하다. 물론 오스만 술탄국과 동로마 제국이 처음으로 충돌한 때는 요안니스의 할아버지 때인 안드로니코스 2세 때지만, 오스만이 유럽까지 건너온 것은 요안니스 5세 치세. 1354년에 갈리폴리 (=칼리폴리스, 갤리볼루)에 대지진이 일어났는데, 1341년부터 1347년까지 장장 7년동안 계속된 내전의 결과 심각한 수준으로 약해진 동로마 제국은 피해 복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 오스만 제국이 공격해 승리하자 요안니스는 1369년에는 직접 로마로 달려가 교황으로부터 군사 지원을 받는 대가로 동방 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까지 해야 했으나 물론 교황의 지원 약속은 말뿐이었다. 1371년에는 제국 역사상 최초로 황제가 다른 나라의 봉신이 된다는 치욕을 맛보기도 했다. 물론, 그 상대는 오스만 술탄국이였다.
– 對 세르비아, 불가리아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제국의 북쪽 및 북서쪽 국경에 접한 이웃 나라들인 세르비아와 불가리아가 하나같이 흥기하고 있다는 악재까지 겹쳐버렸다. 세르비아의 왕인 스테판 우로슈 4세 두샨 (Stephen Uroš IV, 재위: 1331 ~ 1355)는 동로마 제국의 내전을 이용하여 제국의 영토를 야금야금 갉아먹더니 1346년에는 황제를 자칭하기에 이르렀다.
그나마 스테판 우로슈 4세가 급사한 이후 세르비아 제국은 급격히 쇠퇴했다. 급사하는 바람에 확장한 영토에 대한 효율적인 통치체제를 구축하지 못했고, 각지에 파견한 지방 귀족들의 세력이 강력해지는 것도 제압하지 못했다. 그런 데다, 후계자인 스테판 우로슈 5세는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병약한 인물이었다. 결국 스테판 우로슈 5세의 치세에 세르비아 제국은 하나둘씩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1371년에 스테판 우로슈 5세가 후계자 없이 요절하면서 제국은 공중분해 되고, 세르비아 공국이 되었다.
불가리아 제2제국의 황제인 이반 알렉산데르 (Ivan Alexander, 재위: 1331 ~ 1371)도 세르비아만큼 잘 나가지는 못했지만 역시 동로마 제국의 내전을 이용하여 이런저런 이익을 많이 챙겨갔다. 영토 확장과는 별개겠지만, 이반 알렉산더르의 치세에 2차 불가리아 제국은 문화적인 전성기를 맞는다. 그러나 불가리아 제국도 이반 알렉산더르 치세 말부터 분열하려는 조짐을 보인데다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을 제대로 방어해내지 못했다. 실제로 불가리아 제국은 셋으로 나뉘어 내부 항쟁을 계속한 결과 1395년에 멸망하기에 이른다. 이반 알렉산더르가 죽고 겨우 24년 뒤의 일이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오스만 술탄국이 발칸 반도의 지배자로 군림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이 이 틈을 기회로 이익을 챙길 수는 없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