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년 12월 6일, 동로마 제국에서 활동한 기독교의 성직자로 산타클로스의 유래가 된 성 니콜라우스 / 니콜라오, 니콜라스, 니콜라 (Saint Nicholas of Myra / Nicholas of Bari, 270 ~ 343) 별세
성 니콜라우스 니콜라우스 (Saint Nicholas of Myra 또는 Nicholas of Bari, 그: Άγιος Νικόλαος, 270년 3월 15일 ~ 343년 12월 6일)는 3 ~ 4세기 동로마 제국에서 활동하였던 기독교의 성직자로, 산타클로스의 유래가 된 인물이다. 니콜라오, 니콜라스, 니콜라라고도 한다.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대한민국의 서울에는 그를 수호성인으로 하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과 정교회 성 니콜라스 대성당이 세워졌다.
○ 생애 및 활동
니콜라우스는 270년 (또는 270년과 286년 사이에) 소아시아의 리키아 지방의 파타라에서 태어났다. 매우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자신에게 막대한 유산이 돌아오자 그것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활동에 사용하였다. 기독교를 믿은 후 신부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리키아 지방의 도시인 뮈라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당시 뮈라의 주교가 죽고 그 후계자로 마땅한 신부가 없자 다른 지방의 주교들이 모여서 열심히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러자 하늘에서 “내일 아침 제일 먼저 교회에 들어오는 자를 주교로 삼아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때마침 니콜라우스는 그 날 뮈라에 찾아왔으며,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제일 먼저 교회에 들어와 참배하였고, 그로 인하여 주교가 되었다고 한다.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때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으나, 나중에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무사히 석방되어 그리스도인들의 쇄신과 선교 활동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도 참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 성직자를 때렸다가 투옥되었다. 옥중에 있던 그에게 한밤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는데, 예수는 그에게 성서를 건네주었고 마리아는 그에게 오모포리온 을 어깨 위에 둘러주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에 경비병이 보니 니콜라우스가 감옥 안에서 오모포리온을 두른 채 성서를 읽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것이 기적이라며 너나할 것 없이 니콜라우스에게 달려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또한 니콜라우스 주교는 예전부터 했던 사회선교를 곧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일을 더욱 크게 확대시켜 그의 교구는 늘 자금이 넉넉하지 못하여 성직자들이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다. 그의 행적 가운데 가난한 집안의 세 딸에게 지참금을 준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세 딸을 둔 한 아버지가 있었는데, 너무 가난해 딸들을 시집보낼 수 없게 되자 사창가로 팔아버릴 결심을 했다. 우연히 이 소식을 들은 니콜라우스는 그 가난한 딸들을 돕고자 했으나 겸손한 성격이었던 그인지라 대놓고 낮에는 못하고 밤중에 남 몰래 창문으로 딸들이 출가하기에 넉넉할 만큼 황금이 들어있는 자루 세 개를 던져 놓고 돌아갔다.
그 덕분에 세 딸은 사창가로 팔려갈 위기를 모면하여, 정당하게 결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수세기를 거치면서 니콜라우스의 축일에 아무도 모르게 선물을 주는 관습으로 발전하였다. 이 외에도 사형 직전에 몰린 무죄한 죄수들을 구출하고, 난파선의 승객들을 구출하는 등 그와 관련된 전설은 부지기수이다.
343년 (또는 326년과 365년 사이에) 니콜라우스가 죽자 그의 명성은 곧 전 유럽에 널리 알려졌으며, 1087년에는 그의 유해를 바리로 이전하여 예배당을 세웠다. 그 후 그 예배당에서 각종 기적들이 일어났다고 한다.
한편, 니콜라우스는 산타클로스의 원형이기도 하다. 라틴어로 성 니콜라우스를 뜻하는 상투스 니콜라우스 (Sanctus Nicolaus)를 네덜란드어로는 산테 클라스라 불렀는데, 이 발음이 영어식으로 변형되어 오늘날의 산타클로스가 된 것이다.
– 산타 할아버지
어느 집의 세 딸이 너무 가난해 결혼을 할 수가 없어 사창가에 팔릴 위기를 맞았는데, 그 소식을 들은 니콜라우스 / 니콜라오는 그들이 무사히 시집을 갈 수 있게 돕고 싶었지만 요란스럽게 생색을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모두가 잠든 밤에 맏딸이 결혼 지참금으로 가져갈 수 있을 만큼의 황금을 담 너머로 조심스럽게 놓고 갔다. 그 다음날에는 둘째 딸 몫의 황금을 놓고 갔고, 두 딸을 구제할 수 있게 된 그들의 아버지는 셋째 날에는 대체 누가 이런 선행을 베푸는가를 알아내기 위해 뜬 눈으로 밤을 샜다. 니콜라오는 그 날도 셋째 딸 몫의 황금을 놓고 가려다 그만 아버지에게 들키고 말았고, 그는 제발 비밀로 해 달라고 사정했지만 알게 모르게 소문이 퍼졌다.
산타클로스 전설은 12세기 프랑스의 수녀들이 축일 전날인 12월 5일에 가난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하며,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에서는 성인의 축일인 12월 6일에 가족 중 한 명이 성 니콜라오의 분장을 하고 나타나 착한 어린이를 칭찬하고 나쁜 어린이를 혼내주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성 니콜라오를 ‘신터 클라스 (Sint-Nicolaas → Sinter Claes → Sinterklaas)’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영어 문화권에 퍼지면서 묘하게 바뀌고 크리스마스 행사와 결합한 것이다. 산타클로스가 입은 옷의 빨간색은 본래 주교 (추기경)의 수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편 영국 존무어 대학 안면연구소에서 복원한 성 니콜라오의 얼굴 복원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산타클로스인 이미지로 익숙한 전형적인 북서유럽인의 얼굴이 아니라 전형적인 중동계 백인 혹은 그리스인의 외모에 더 가깝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