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년 4월 10일, 동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 (Flavius Theodosius, 401 ~ 450) 출생
테오도시우스 2세 (401년 4월 10일 ~ 450년 7월 28일)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408년부터 450년 죽을 때까지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 테오도시우스 2세 (Flavius Theodosius)
.출생: 401년 4월 10일, 콘스탄티노폴리스
.사망: 450년 7월 28일, 콘스탄티노폴리스
.배우자: 아일리아 에우도키아 (421 ~ 450)
.자녀: 리치니아 에우독시아
.부모: 부) 아르카디우스, 모) 아일리아 에우독시아
.저서: Aula sancta Theodosii Junioris, S. Pulcheriæ Sororis, Eudociæ Uxoris, Augustorum res gestas complexa, e Latinis Græcis, editis, ineditis scriptoribus extructa, concinnata, perpolita 등
* 동로마 제국의 황제
.재위: 408년 5월 1일 ~ 450년 7월 28일
.전임: 자아르카디우스 / 후임: 마르키아누스
402년부터 아버지 아르카디우스와 함께 공동통치를 했으며, 7세의 나이에 단독 황제로 즉위해서 408년부터 450년까지 동로마 황제로 재위했다.

○ 생애 및 활동
전임황제 아르카디우스와 그 황후 아일리아 에우독시아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408년 아버지가 죽자 불과 7살의 나이로 로마 제국 동부의 황제가 되었다. 어린 황제인 그를 보필하기 위해 당시 민정 총독인 안테미우스가 초기에 섭정을 맡았다. 안테미우스는 탁월한 행정가이자 외교가로 황제를 대신했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난공불락의 육지성벽인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건설한 것도 바로 안테미우스이다. 414년 안테미우스가 죽자 섭정의 자리는 테오도시우스의 2살 차이 나는 누나인 풀케리아에게 돌아갔다. 단호하고 강인한 성격의 풀케리아는 ‘황후’ (Augusta)가 되어 권력을 독점했다.
421년 테오도시우스는 그리스 아테네 출신으로 헬레니즘에 심취한 아일리아 에우도키아와 결혼하였고 이듬해 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를 낳았는데 이 에우독시아는 나중에 서로마 제국의 황제인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결혼하여 황후가 된다. 이 두 사람의 결혼은 동방과 서방의 황제의 어설프나마 결합을 의미한다.
테오도시우스는 그림을 그리고 필사본을 만드는 취미가 있었고 종교보다는 철학과 라틴, 그리스 사상에 심취했다. 그는 칼리그라포스 즉, 서예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사냥을 즐겼으며 오늘날의 폴로에 해당하는 페르시아의 추칸이라는 경기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450년 테오도시우스는 사냥을 나갔다가 낙마사고로 죽었다.
– 서로마와의 관계 개선
먼저 그는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문제로 사이가 벌어져있던 서로마와의 관계 개선에 힘을 쏟아 성공했다. 이 결과, 동방 황실과 서방 황실들은 다시 손을 잡게 되었다.
– 테오도시우스 법전
테오도시우스는 온화한 성품에 학문을 좋아했고 헬레니즘에 심취한 유도키아와 함께 425년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교를 설립했고 이 대학교에서는 학자들이 모여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 편찬된 모든 로마법을 집대성하는 작업을 벌였다. 약 9년에 이르는 작업끝에 마침내 438년 2월 15일 ‘테오도시우스 법전’ (Codex Theodosianus)을 공표하였는데 서방 황제와 동방황제가 공동으로 이 법전을 반포하였다.

– 테오도시우스 성벽
서로마와의 관계 개선과 동시에 안테미우스는 기존의 콘스탄티누스 성벽만으로는 거세지는 야만족의 침략으로부터 제국 수도 방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없다는 점을 인지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추가로 난공불락의 육지 성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아르카디우스의 정권 때부터 시작되어 테오도시우스 2세가 군림 할 때 건설이 마무리가 된 이 성벽은 바로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다. 이 성벽 건설은 테오도시우스 법전과 함께 테오도시우스 2세 시대의 최고의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3중 성벽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서쪽으로는 마르마라 (프로폰티스) 해부터 골든 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내항)까지 이어진 육중한 성벽으로, 이 성벽 건설의 결과 과거 콘스탄티누스 1세 때 건설한 성벽으로 방어할 수 없었던 넓어진 시가지를 방어할 수 있게 되어 더욱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다.
구조를 살펴보면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해자를 갖추고 있는 성벽으로, 해자 뒤의 흉벽과 너비가 2미터 높이가 5미터인 내성벽, 너비 5미터 높이 12미터인 외성벽의 삼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내성벽과 외성벽에는 각각 96개씩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어 적을 견제하기에 용이했다. 이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전체를 감싸고 있었는데, 육로에 면한 6km 정도만이 앞서 설명한 구조로 되어 있었고 해안가의 성벽은 보통의 단일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렇게 건설된 성벽 방위력은 매우 강력해서 동로마 제국이 약화되어 수도가 침략을 받았을 때조차 정공법으로 이 성벽을 넘어 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군대는 14세기까지 아무도 없었다. 이 성벽은 그 유명한 훈족의 아틸라가 성벽만 보고서는 공략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퇴각하게 만들었고, 수도를 포위해 쳐들어온 아랍 군대를 물리치는 등 여러 위대한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영원히 적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 성벽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두 대륙에 걸친 신흥 강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고자 했던 21살의 젊은 술탄의 야심 앞에서 열리고,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도 함락, 2천 년 역사의 로마 제국은 멸망에 이르고 만다.
– 이교 (Paganism) 금지 정책
425년에 모든 미신은 근절되어야 할 것, 그리고 ‘이교도’에게는 법원 재판에 당사자로서 참여할 수 있는 권리와 군복무 자격을 박탈할 것, 이렇게 두 가지를 규정하는 법을 반포했다. 다음 해인 426년, 기독교를 버리는 배교행위를 불법화했다. 사실 그라티아누스와 할아버지 테오도시우스 1세 때도 배교를 불법화했지만 유명무실해졌었다. 여하튼 435년에는 이전 황제 시절에 반포되었었던 ‘이교’ 의식과 희생물을 바치는 행위를 불법으로 재강조할 구상을 했고, 그 구상 속에는 형량이 최대 사형까지 올라가 있었다. 또한 지방관들에게 해당 지역 소속의 잔존한 ‘이교’ 사원을 파괴할 것과, 그것에 실패할 경우 사형을 명하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이 구상은 438년에 법제화되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도 현실을 깨닫고 현실적으로 이교 제물 의식을 모두 없앨 수는 없음을 인정하는 그의 의견이 ‘Corpus Legum Novellarum Theodosii’에 실려 있다고 한다.
– 페르시아, 반달족, 훈족
페르시아의 왕 바흐람 5세 (Varanes, Vahram, Varahan, Bahram)은 421년 테오도시우스2세가 페르시아에서 망명한 그리스도교도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구실로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동로마는 이들의 침략을 단호히 격퇴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 치하에서 동로마는 주기적으로 페르시아, 훈족에게 위협을 받았다. 특히, 훈족은 제국이 페르시아와 전선을 형성할 때마다 어김없이 도나우 강을 건너 침입했다. 실제로 바흐람 5세의 선전포고로 양국이 전쟁을 벌일 때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훈족의 왕 루아는 트라키아를 침공했고, 테오도시우스 2세와 동로마는 매년 금 350파운드를 주곘다는 약속을 하며 그들을 돌려보내야만 했다.
434년, 서로마의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반달족과 싸우고 있었다. 이에 테오도시우스 2세는 서로마를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지원했는데 부대는 패했고, 훈족의 루아는 동로마 전력의 공백을 틈타 평화유지비로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이때 루아가 갑자기 죽었고, 새로운 후임자 블레다는 연례 공납금으로 700파운드로 증액하여 받아내었다.
441년, 반달족을 공격하기 위해 동로마의 다른 대병력이 서로마로 떠난 사이, 페르시아가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동시에 블레다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테오도시우스 2세는 442년 페르시아 군대를 완전히 격퇴했지만, 한동안 블레다에 대해서는 많은 도시들이 유린되고 로마인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묵인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동로마는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시작할 준비를 하면서도 블레다에게 금 6000만 파운드를 일시불로 지불하고 매년 2100파운드라는 살인적인 공납금을 바치는 조건으로 마무리되었다.
447년, 동로마는 아틸라의 공격을 받았다. 훈족은 동로마군을 쳐부순 다음 도나우 강 유역의 로마 점령 지대를 5일간 여행할 길만큼 비우라고 요구했다. 이에 449년 실권을 쥐고 있던 크리사피우스는 아틸라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시도했다가 실패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크리사피우스의 이런 시도는 아틸라의 응징보다는 훈족의 공격대상을 바꾸게 만들어 아틸라는 공격의 칼을 서쪽으로 돌려 이동했다.
계속되는 굴욕 속에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부자들과 원로원 의원들은 훈족에게 바치는 거액의 공납금에 대해 분노했다. 이들은 크리사피우스의 정책들로 부담해야하는 금액들이 자신들이 부담해야 된다는 것에 더 화를 냈다. 또한 크리사피우스의 아틸라 제거 계획도 실패하면서 제국의 위신이 떨어졌다는 것도 이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결국 크리사피우스는 위신이 크게 추락하고 말았다.
– 네스토리우스파와의 관계
427년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로 임명된 네스토리우스는 열성적으로 아리우스파를 배척했고 그리스도 예수가 니케아 신경에서처럼 단일한 위격 (位格)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위격과 신의 위격, 서로 다른 두개의 위격을 가지고 있다고 설교했다. 그의 설교는 급격히 대중의 호응을 얻어 세력을 확대해 갔는데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주교인 성 키릴루스의 반대를 받았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찬동했으나 키릴루스는 풀케리아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는 파문당했다. 테오도시우스는 435년 네스토리우스를 아라비아의 페트라로 유배보냈다.

– 사망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는 취미였던 사냥을 나갔다가 낙마사고로 척추가 심하게 손상되었고 몇 달 있다가 죽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새로운 계승자로 트라키아 출신의 장군 마르키아누스 (Flavius Marcianus, 396년 – 457년)가 형식적으로 풀케리아와 결혼하여 뒤를 이었다. 이렇게 황녀가 정통성을 갖고서 군주로서의 남편을 택군 (擇君)하는 제위계승 메카니즘은 후대 레오 왕조의 아리아드네와 마케도니아 왕조의 조이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하지만 여제까지 오른 것은 조이뿐인데, 이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통치기간이 테오도시우스 왕조나 레오 왕조와는 달리 당시 기준으로 150년이 넘었을 정도로 오래되어서 정통성 내지는 통치정당성을 더욱 높게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 평가
테오도시우스 2세는 그림그리기와 필사본 제작이라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아울러 아버지와 누나처럼 종교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철학, 라틴 사상, 그리스 사상에 심취해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런 까닭에 그는 “칼리그라포스 (서예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또 그는 사냥을 즐겼으며 오늘날의 폴로에 해당하는 추칸이라는 경기를 페르시아에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입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