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4년 11월 9일, 메디치 가문 (Medici family)의 피에로 데 메디치가 프랑스 샤를 8세에게 패하고 피렌체에서 망명
1492년에 로렌로 데 메디치가 사망한 후, 그의 자리는 아들인 피에로 2세가 이어받았다. 프랑스 국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 북부를 침략했을 때, 피에로 2세는 그의 군대와 함께 저항하기로 택했다. 피사의 성문 앞에 있는 프랑스군의 규모를 깨닫자, 프랑스 국왕의 굴욕적인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는 피렌체 폭동을 일어나게 하였고 그들은 피에로 2세를 1494년에 몰아내버렸으며, 메디치 가문의 첫 통치는 공화정 정부의 복원과 함께 막을 내렸다.
메디치 가문 (Medici family)
그렇게 이름 하나만 가지고 권력을 유지한 가문은 없었다. ― 볼테르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에서 일종의 친족지배(일명 ‘시뇨리아’ (Signoria)) 체제를 확립하여 막대한 권력, 영향력을 행사했던 가문. 중세 이탈리아에는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과 스포르차 가문, 페라라의 에스테 가문, 만토바의 곤차가 가문 등 여러 유력한 귀족 가문들이 있었지만 그 중 가장 유명한 가문은 단연 메디치이다.
동시대의 여러 예술가들을 후원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 시대의 ‘마에케나스’와 함께, 문화예술 분야 진흥, 후원의 대명사로 불린다.
○ 역사
1400년대에 메디치 가는 피렌체의 평범한 부유층 가문이었다. 이 가문의 뿌리는 잠부오노 데 메디치의 장남이자 시의회 의원인 키아리시모가 베키오 시장의 여러 가옥과 탑들의 소유자임을 증명한다는 문서가 기록된 1201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다. 메디치 가의 성씨인 ‘medici’가 당대 이탈리아어로 의사 혹은 약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흔히들 메디치 가문이 본래 의사 가문이라고들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확실하지 않다. 메디치 가문은 1230년 기록에 처음 등장하기 때문에 그 이전의 행적을 알 수가 없다.
이러한 설이 발생한 연원은 크게 2가지로 추측된다.
첫째, 조반니 디 비치의 장남 코시모가 언어유희를 즐기던 중세의 풍습을 따라 자기와 자기 가문의 수호성인들을 의사 성인들인 성 고스마 (Saint Cosmo)와 성 다미아노 (Saint Damian)으로 정했고 이들이 코시모의 주문을 받아 제작된 그림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카트린 데 메디치 시대에 파리의 지식인들이 그녀를 깎아내릴 의도로 메디치 가문이 원래 약사 (medici)들이었고, 그 가문의 문장에 존재하는 구형이 그들이 만든 환약을 상징한다는 설을 유포했기 때문이다. 이들 설은 날조된 것으로 메디치 가문은 조반니 디 비치보다 2백 년 더 거슬러 올라가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는데, 이들은 내내 의사들 (혹은 약사들)이 아니라 상인들과 은행가들이었다. 일례로 메디치 가문은 약사 길드와 전혀 관련이 없으며 상인 조합에 속한 가문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근거지인 피렌체에는 대략 21가지의 길드가 존재했는데 피렌체 내에서 이들 길드 혹은 조합에 속하지 않은 채 경제활동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했다. 또한 약제사 길드와 상인 조합 모두 21가지 길드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큰 7가지 길드에 해당했으므로 이들 길드의 기록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무튼 메디치 가문이 유력한 은행업자 가문에서 유럽의 귀족 사회로 진입하게 된 이후,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가 메디치 가문과 그 수장이었던 코시모 데 메디치를 높이 평가하며, 그가 사망한 이듬해 1465년 백합 문장을 수여하게 되어 위와 같은 문장이 완성되었다.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피렌체의 정계에 진출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르네상스 예술의 대표적인 후원자였으며, 그리고 3명의 교황과 2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하는 등 유럽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된 귀족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로렌초 디 메디치는 보티첼리의 유명한 역작인 비너스의 탄생을 후원하였으며, 코시모 디 메디치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를 후원하여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디자인하게 하였다. 또한 당시까지 존재했던 각종 고서적들을 수집했고 이를 위해 책 사냥꾼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메디치 가문은 왜, 當代 베스트셀러 대신 古典을 사모았다. 그 외에도 자신들의 막대한 재력을 이용해 피렌체의 문화 발전에 큰 이바지를 했다.
“부유한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제일 아름다운 도시를 가리기 위한 경쟁을 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라고 하면 미술사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메디치 가문을 빼놓을 수 없다.
메디치가는 은행업으로 유명한 가문이었는데 권력과 예술에 집착했다. 피렌체에 가면 곳곳에서 여섯 개의 둥근 알약이 그려진 메디치가의 문장을 볼 수 있다. 메디치가는 전통적으로 가문의 누군가가 거인과 싸우면 그것을 기념했다. 전투에서 휘두른 무기는 메디치가 문장에 6개의 핏자국을 남겼다. 메디치가의 야망은 정치뿐만 아니라 당시 가장 권위있는 기관이었던 교황청까지 넘봤다. 그리고 1513년 메디치가 출신의 사람이 교황 레오 10세가 되었다. 교황 레오 10세가 서거하자, 역시 메디치가 출신인 클레멘스 7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최초의 지배자인 코시모 메디치가 1434년 권력을 잡았다. 그는 늘 예술가와 철학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건축도 끊임없이 진행했다. 또 유럽 최초의 공공 도서관을 세우기도 했다. 도서관 건립에는 건축가 브루넬레스키, 조각가 루카 델라 로비아, 화가 프라안젤리코, 화가 파올로 우첼로가 참여했는데, 이들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다. 미술의 원근법을 발견하면서 기법 면에서 큰 발전을 이뤘다.” – ‘뒤샹은 왜 변기에 사인을 했을까’ 중에서 (호세 안토니오 마리나 글 / 풀빛 / 2012)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으로 인해 그동안 안정되어 있던 이탈리아 반도 여러 소국들의 세력균형이 깨지고 전란의 시기가 찾아왔을 때, 사보나롤라의 신정혁명으로 일시 피렌체의 권력을 잃었고 코시모 메디치의 직계도 단절되었으나 16세기 들어서 메디치 가문 방계인 코시모 1세가 토스카나 대공으로 즉위하면서 통치가문인 대공가로 도약하였으나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쇠퇴하였다.
메디치 가문이 대공으로서 다스린 토스카나는 이탈리아 중부의 중소국가로 그럭저럭 지냈지만 상공업의 쇠퇴로 활기를 잃어갔으며 나중에는 재정마저도 궁핍해지게 이른다. 그리고 18세기에 계승 위기에 휩싸인다. 1670년부터 1726년까지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토스카나를 다스린 코시모 3세에게는 두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세 자식들이 모두 후사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장남인 페르디난도 (1663~1713)는 방탕한 양성애자로 수많은 애인들과 문란한 성생활을 즐겼는데, 그로 인해 성병에 감염되어 생식 능력을 잃었다.
차남인 잔 가스토네 (1671~1737)는 형을 능가하는 동성애자로 부인인 작센-라우엔부르크의 안나 마리아를 혐오하였고 동성 애인인 줄리아노 다미의 품에 파묻혀 살았다. 안나 마리아는 팔츠-노이부르크 궁정백의 미망인으로 이미 아이를 3명 낳은 미망인이었는데, 부친인 코시모 3세가 일부러 생식 능력이 검증된 여인을 배우자로 붙여주었는데도 끝내 관계 자체를 갖지 않았다.
장녀이자 유일한 딸인 안나 마리아 루이사 (1667~1743)는 세 자식 중 가장 총명하고 모범적인 자녀로 부모의 총애를 받았다. 그녀는 팔츠 선제후 요한 빌헬름과 결혼했는데, 남편을 통해 매독이 옮아 첫 아이를 유산한 후 다시는 임신하지 못했다. 코시모 3세는 내심 후계자로 그녀를 점찍어 놓았는데, 그녀가 피렌체로 돌아온 1716년에 페르디난도는 이미 죽었고 잔 가스토네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줄리아노 다미와만 대화하는 히키코모리 상태에다 알코올 중독자여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1713년 코시모 3세와 토스카나 의회는 안나 마리아 루이사를 차남 잔 가스토네 다음 순위의 후계자로 선언했으나 이는 열강들의 개입으로 인해 무산되고 로렌 (로트링겐) 공작 프란츠 슈테판이 후임 대공이 되었다. 1737년 오스트리아는 안나 마리아 루이사에게 섭정 직위를 제안했으나 불쾌해하며 거절했다.
코시모 3세는 이렇게 상속 문제로 골치를 썩다가 1723년 만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리고 메디치 가의 마지막 대공이 된 잔 가스토네는 14년에 달하는 재위기간을 침대에만 누워서 미소년들과의 정사만을 즐기다 1737년 자식 없이 사망했다. 그의 누나이자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인 안나 마리아 루이사도 끝내 자식을 낳지 못한 채, 메디치 가가 소장하고 있던 모든 예술품을 ‘피렌체 밖으로 반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피렌체에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1743년에 사망했다. 이로써 메디치 가는 피렌체 인들의 열렬한 애도 속에 긴 역사의 막을 내린다.
당시 기증된 예술품들은 오늘날 피렌체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우피치 미술관의 콜렉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말하자면 메디치 가문은 자신들의 생물학적 수명이 끝난 후에도, 자신들의 터전이었던 피렌체에 막대한 경제적, 문화적 자산을 선물로 남겨준 셈이다.
그리고 피렌체를 방문한 프랑스인 샤를 드 브로스는 “시민들은 메디치 가의 복귀를 위해서라면 자기 전 재산의 2/3을 내놓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1/3을 로렌 가를 제거하는 데 사용할 것이다.”고 말했다.
다만 오타야노 공작과 같은 메디치 가의 방계 가문들은 지금도 남아있다.
○ 출신 인물
– 조반니 데 메디치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메디치 가문을 부유하게 만든 금융인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레오 10세): 로마 가톨릭 제217대 교황
–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의 군주로 만든 금융인. 국부 칭호를 받았다.
– 피에로 데 메디치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 별칭 ‘통풍병자 피에로 (Piero il Gotosso)’
피에로 디 로렌초 데 메디치: 별칭 ‘불행한 피에로 (Piero il Fatuo)’
– 로렌초 데 메디치
로렌초 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은행가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 별칭 ‘로렌초 일 포폴라노 (Lorenzo il Popolano)’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 별칭 ‘위대한 로렌초 (Lorenzo Il Magnifico)’
로렌초 2세 데 메디치: 우르비노의 공작
– 줄리아노 데 메디치
줄리아노 디 피에로 데 메디치: 위대한 로렌초의 동생, 클레멘스 7세의 아버지
줄리아노 디 로렌초 데 메디치: 느무르 공작
– 줄리오 디 줄리아노 데 메디치 (클레멘스 7세): 로마 가톨릭 제219대 교황
– 카테리나 마리아 로물라 디 로렌초 데 메디치: 프랑스 왕비
– 마리아 데 메디치: 프랑스 왕비
그 외에 카테리나 스포르차의 마지막 남편 조반니 데 메디치도 메디치 가문 방계 출신이다. 그들의 아들 ‘검은 깃발의 조반니’의 아들이 스페인 왕으로부터 정식으로 토스카나 대공으로 책봉받은 코지모 1세이며, 그 자손들이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피렌체를 지배한 토스카나 대공가가 되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