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감상
루트비히 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 ~ 1827)의 교향곡 3번 ‘영웅’
교향곡 제3번 내림 마장조 (Eb 장조), 작품 번호 55 (또는 “영웅 교향곡”, 이: Sinfonia Eroica)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년 12월 17일 ~ 1827년 3월 26일)의 4악장 교향곡이다. 작곡가의 가장 유명한 작품중 하나인 영웅 교향곡은 베토벤의 혁신적인 중기의 시작을 알리는 대규모 작품이다. 1802 ~ 04년에 걸쳐 작곡된 이 작품은 교향곡의 형식, 길이, 화성, 감정과 문화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것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대 사이의 과도기적 시기에서 획기적 사건으로 널리 간주된다. 또한 종종 첫 번째 낭만주의적 교향곡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1828년 3월 이 작품은 파리에서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에 의해 베토벤의 교향곡 중 첫번째로 연주되었다.

–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 교향곡 3번
.조성: 내림 마장조 (Eb 장조)
.카탈로그: Op. 55
.시기: 고전주의
.음악장르: 교향곡
.작곡시기: 1803 ~ 04년
.헌정: 요제프 프란츠 폰 로브코비츠 공작
.출판: 1806 – 파트보; 1809 – 총보
.악장: 4
* 초연
.날짜: 1805년 4월 7일
.장소: 로브코비츠의 궁전
연주자: 오케스트라, 베토벤(지휘)

– 역사
.배경 및 작곡
이 교향곡은 원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헌정하는 것을 의도로 했던, 베토벤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이다.
베토벤의 무급 비서였던 안톤 쉰들러의 회고록에 의하면, 유럽의 “해방자”를 기리기 위한 그 아이디어는 1798년 빈에 파견된 프랑스 특사 장밥티스트 쥘 베르나도트, 또는 베르나도트의 측근으로서 방문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의 헌정자 루돌프 크로이처에 의해 제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베토벤의 제자 페르디난트 리스에 따르면, 그 아이디어는 작곡가 자신의 것이었다. 리스의 설명처럼 베토벤은 고대 로마의 가장 위대한 집정관처럼 나폴레옹에 대해 높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1804년 초 악보를 완성했을 때 그는 표지에 Buonaparte (“보나파르트”)라고 썼고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원고를 탁자 위에 자랑스럽게 올려놓았다. 보나파르트는 베토벤과 단 1년 차이인, 같은 동시대 사람으로서 베토벤의 감탄을 자아낸 인물이었다. 베토벤은 거의 의식적으로 나폴레옹과 그의 운명 사이에서 수평 관계를 확립하려고 했으며, 보나파르트의 모습으로 구현된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감탄했다.
베토벤은 빠르면 1789년에 영웅주의의 교향곡을 쓸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펜을 들지는 않았다. 베토벤은 1801년 자신의 청각 장애를 인식하고 난 후 그 해 여름 빈 기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일리겐슈타트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베토벤은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썼다. 그는 유서에서 심지어 “자살까지도 생각했지만, 예술만이 나를 붙잡았다”고 표현했다. 그는 이 단계에서 내면의 투쟁을 선언했고 교향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교향곡의 작곡은 공식적으로 1803년 5월에 시작되었고 1804년 초에 완료되었다. 주된 작업 시기는 베토벤이 바덴바이빈과 되블링에서 보내던 1803년 여름 (6월 / 10월) 즈음이다.

.나폴레옹에의 헌정 철회
일반적으로 알려진 영웅 교향곡이라는 부제는 원래 교향곡에 할당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 베토벤은 그것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헌정하려고 했었으며, 1804년 경 빈에서 파리로 이동할 계획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베토벤은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잠시 후에 일어난 작곡가와 악보에 관한 일화에 관하여는 여러가지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작곡가가 제목을 너무 세게 지워서 원고의 제목 페이지에 구멍이 뚫어졌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러뜨릴 정도의 힘을 가하여 펜으로 제목을 흐리게 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작곡가가 책상으로 뛰어올라가 제목 페이지 윗부분을 움켜잡고 반으로 찢어서 바닥에 던졌다고 말한다.
베토벤의 제자 페르디난트 리스는 1838년의 회고록에서 나폴레옹이 자신을 프랑스의 황제 (1804년 5월 14일)로 선포한 것에 대한 그의 스승의 반응에 대해, 다음과 전하고 있다:
“이 교향곡을 쓰면서 베토벤은 보나파르트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초대 집정관 시절의 보나파르트를 생각했다. 당시 베토벤은 그에 향한 큰 존경을 가졌고, 그를 고대 로마의 가장 위대한 집정관들과 비교했다. 나 뿐만 아니라 베토벤의 가까운 친구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의 테이블에서 이 교향곡을 보았는데, 원고를 아름답게 베껴 적었다. 제목 페이지 맨 위쪽에는 Buonaparte (“보나파르트”)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고, 맨 아래에는 Ludwig van Beethoven (“루트비히 반 베토벤”)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보나파르트가 스스로 황제를 선포했다는 소식을 그에게 가장 먼저 전했고, 그는 이에 격분하여 소리쳤다. ‘그렇다면 그는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군! 이제 그도 인간의 모든 권리를 짓밟고, 자신의 야망만을 탐닉할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이 모든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폭군이 될 것이다!’ 베토벤은 테이블로 가서 제목 페이지 윗부분을 움켜쥐고 반으로 찢어서 바닥에 던졌다. 그 페이지는 다시 만들어야 했고, 교향곡은 영웅 교향곡이라는 다른 제목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베토벤이 영웅 교향곡의 제목 페이지를 찢었다고 하는 일화는 리스의 회고록 이전에 1836년 3월 18일 런던 매거진 The Musical World (“음악계”)의 기사와 베토벤과 개인적 연분이 없었던 에른스트 오르틀레프의 1836년 베토벤 소설에서 이미 발견되고 있다:
“프랑스 혁명은 베토벤이 ‘보나파르트’라고 부르는 교향곡을 작곡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인 프랑스 집정관이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을 읽어야 했다. 이것은 그를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교향곡의 제목 페이지를 뜯어내었고 Symphonia (영웅) 또는 Sinfonia Eroica (영웅 교향곡)이라는 제목이 있는 다른 페이지를 만들었다.”
현존하는 사본의 악보에는 손에 의해 삭제되었지만 흔적을 알 수 있는 두 개의 문구가 나타난다; 먼저 이탈리아어로 된 Intitolata Bonaparte (“제목 보나파르트”)가 있고, 두번째로 독일어로 된 Geschriben auf Bonaparte (“보나파르트를 위해 씀”)가 이탈리아어 부제 아래 네번 째 줄에 있다. 이것은 현재 빈의 Gesellschaft der Musikfreunde (“악우회”)에 보관되어 있다. 원본의 자필 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초연
1804년 6월 9일 몇 달 동안 공연 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를 획득한 로브코비츠 공작의 궁전에서 비공개로 초기 리허설과 사적 연주회가 열렸다. 이것은 일부 오케스트라 음악가의 수수료 청구서에 문서화되어 있으며, 영웅에서만 요구하는 세 번째 호른이 관련되어 있음이 명시되어 있다. 공작의 카펠마스터 안톤 브라니츠키가 제출한 1804년 6월 9일의 기록에 따르면 공작은 두 번의 리허설을 위해 22명의 추가 음악가를 고용했음을 보여준다. 첫 공공 연주회는 1805년 4월 7일 안 데르 빈 극장에서 작곡가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이 연주회에서는 그의 친구 프란츠 클레멘트가 주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출판 및 헌정
1806년 10월 이 작품이 출판 되었을 때, 베토벤은 Sinfonia eroica, composta per festeggiare il sovvenire d’ un grand’uomo (“위대한 사람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 영웅 교향곡”)이라는 이탈리어어 부제를 부여했다. 이 위대한 사람은 이상적이고 존재하지 않는 영웅이었다. 그보다 베토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영웅주의 정신 그 자체였다. 헌정은 베토벤의 고귀한 후원자였던 로브코비츠 공작에게 이루어졌다.

– 의의
이 작품은 고전주의 음악의 이정표적인 작품이다. 요제프 하이든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교향곡에 비해 길이는 두배에 가깝다.
첫 번째 악장은 (주제 제시부의 반복과 함께) 고전주의 교향곡과 거의 비슷하다. 주제적으로는 베토벤의 초기 교향곡보다 더 많은 감정적 근거를 다루고 있으며 19세기 초 서양 예술 음악을 정의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사이의 과도기에서 중요한 이정표룰 세우고 있다.
두 번째 악장은 특히 장례식 행진 주제의 비참함에서부터 더 행복하고 중요한 주요 에피소드의 상대적 위안에 이르기까지 큰 감정적 범위를 보여준다.
피날레는 비슷한 감정적 범위를 보여주며 당시에는 들어 보지 못한 주제별 중요성이 부여된다. 초기 교향곡에서 피날레는 빠르고 산뜻한 결론이었다. 여기서의 피날레는 긴 변주와 푸가이다.

– 평단의 의견과 표현
기악법과 오케스트레이션에 관한 논문 (1844, 1855년)에서 헥터 베를리오즈는 베토벤의 관현악 사용과 이 교향곡의 호른과 오보에 의 적용에 대해 논했다.
J. W. N. 설리반은 제1악장은 “청각장애와 맞서고 있는 베토벤의 용기”를 표현하고; 제2악장은 “느리고 장송곡 같은 그의 절망을 전달”하고; 제3악장인 스케르초는 “창조적 에너지의 불굴의 반란”이며; 제4악장은 넘쳐나는 에너지”라고 말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메타모르포젠 (1945년)에서 영웅 교향곡의 장례 행진과 유사한 주제를 제시하고 있으며, 메타모르포제의 결론에 다다를 때 베이스는 영웅 교향곡으로부터 적절한 장례 행진을 인용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스트라우스의 부제목인 In Memoriam (“…을 기리며”)이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지휘자 겸 작곡가 레너드 번스타인은 영웅 교향곡의 녹음시 (1953년), 그리고 그의 책 The Infinite Variety of Music (“음악의 무한한 다양성”) (1966년)에서 제1악장과 제2악장은 “아마 모든 교향곡에서 가장 위대한 두 악장”이라고 말했다.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가레스 젠킨스는 베토벤의 Beethoven’s Cry of Freedom (“베토벤의 자유의 외침”) (2003년)이라는 글을 썼는데, 영웅 교향곡에서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사회를 위해 하는 일을 음악을 위해 하고 있었는데, 이는 전통을 뒤집는 것”이었며 프랑스 혁명 때 처음 등장한 “인간의 잠재력과 자유에 대한 감각’을 구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영웅 교향곡은 2016년 BBC 뮤직 매거진이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지휘자 15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역대 최고의 교향곡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 악기 편성
작곡 당시 오케스트라의 일반적인 편성에서는 호른이 2개 또는 4개였지만, 이 곡은 호른이 3개인 편성을 택했다. 3악장 트리오에서는 이 세 개에 의한 연주가 이루어진다.
목관악기 ː 두 개의 플루트, 두 개의 오보에, 두 개의 클라리넷, 두 개의 바순
금관악기 ː 세 개의 호른, 두 개의 트럼펫
타악기 ː 한 쌍의 팀파니
현악 5부 ː 제1바이올린,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 악장 구성
제1악장 – 알레그로 콘 브리오 (Allegro con brio)
제2악장 – 장송 행진곡: 아다지오 아사이 (Marcia funebre: Adagio assai)
제3악장 – 스케르초: 알레그로 비바체 (Scherzo: Allegro Vivace)
제4악장 – 피날레: 알레그로 몰토 (Finale: Allegro Molto)
○ 베토벤 교향곡 제3번 「영웅」 (카라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관현악단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