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감상
헝가리의 피아니스트 조르주 치프라 (Georges Cziffra, 1921 ~ 1994)의 Chopin etude no.11 op.25
조르주 치프라 (Georges Cziffra, 1921년 11월 5일 ~ 1994년 1월 15일)는 헝가리의 피아니스트이다. 1968년부터 프랑스 시민권을 받았다. 헝가리 이름은 치프러 죄르지 (헝: Cziffra György)이다.
– 조르주 치프라 (Georges Cziffra)
.출생: 1921년 11월 5일, 헝가리 왕국 부다페스트
.사망: 1994년 1월 15일 (72세), 프랑스 우아즈 주 상리스
.국적: 헝가리 → 프랑스
.학력: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
.배우자: Soleilka
.자녀: 조르주 치프라 주니어 (1943 ~ 1981)
.직업: 피아니스트, 작곡가, 편곡가
.장르: 클래식
헝가리 출신의 프랑스 피아니스트다. 1968년에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동성동명의 아들 (지휘자)과 구별하기 위해 자기는 단순히 ‘치프라’라고 일컫고 있다. 리스트곡의 레코드는 물론 그 밖의 작곡가의 음반도 많이 있다. 쇼팽의 곡도 잘 치지만 이것은 다소 색다르다.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 등의 곡도 좋은 평가를 얻었다. 가장 유명한 연주로는 리스트의 “반음계적 대갤럽” 과 하차투리안의 “칼의 춤” 등이 있다.
리스트의 연주에 특히 뛰어나 ‘리스트 스페셜리스트’라고 불릴 정도이며, 그의 현란한 기교 중에서도 엄청난 속도의 도약과 옥타브 난사는 그의 대표적인 장기이기도 하다. 극도로 개성적이고 즉흥적인 연주에 호불호가 많이 갈리기도 했지만, 그 자신만의 피아니즘의 형성과 고전적인 관념을 탈피한 해석이 음악사에 중요한 한 획을 그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는 활발한 연주 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일명 ‘치프라 에디션’이라 불리는 편곡집을 남기고 있다 (이 중에는 그가 직접 작곡한 곡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이 편곡집에는 그가 연주 경험으로 익힌 자신만의 스타일의 작/편곡기법이 효과적으로 사용되어 있으며 치프라 자신이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만큼 작품들이 전체적으로 고도의 기교를 요구한다.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5번,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트리치 트라치 폴카 (Tritsch tratsch polka) 피아노 편곡, 림스키 코르샤코프의 왕벌의 비행 등의 피아노 편곡이 유명하다.
○ 생애 및 활동
조르주 치프라 (Georges Cziffra)는 1921년 11월 5일, 헝가리 왕국 부다페스트에서 출생했다.
매우 강인해 보이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가정 형편도 어려웠고 출생 때부터 계속 병약하여 피아노에 관심을 보였음에도 5세가 되어서야 침발롬 연주자였던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배워 연습을 시작했다.
물론 악보는 없었기 때문에 부모가 불러주는 여러 가지 선율, 오페라와 오페레타의 아리아 등을 듣고 왼손의 반주를 만들어 연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1년간 음악교사의 지도하에 리스트 음악원 오디션을 준비, 9세에 오디션에 응시하였고 당시 치프라의 연주에 매료된 도흐나니는 학칙을 바꿔 가며 입학시켰다.
이후 12세의 나이로 국내에서 첫 독주회를 열고, 13세 때는 연주 모습이 TV에 방영되는가 하면, 이후 18세까지는 네덜란드와 스칸디나비아에서 연주 여행을 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던 피아니스트였으나, 시기가 시기인지라 헝가리에도 나치의 영향이 미치기 시작하여 헝가리 군대에서 음악원의 학생들에게도 나치 사상을 따르는 군대에 들어갈 것을 종용했었으나 치프라는 단호히 거부했다.
21세 때, 아내 Soleilka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첫눈에 반한 나머지 만난 지 며칠만에 부모의 허락도 받지 않고 식을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 우크라이나 부근에서 주둔하던 중, 1년 넘게 피아노를 만져보지도 못했건만 크리스마스 이브에 독일군 장교들 앞에서 연주를 요구받았다.
슈트라우스, 바그너의 오페라를 주제로 즉흥연주를 했더니, 우연하게도 그곳에 베를린 음악원 출신 장교가 있어 “부조니보다 대단하다”는 찬사를 보내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소개장을 써 줬다.
하지만 치프라는 집시 혈통인데다 아내가 이집트 출신이기도 했고, 베를린으로 가면 죽음뿐임을 직감하여 장교들을 태우고 온 기차를 돌려 소련으로 몰고 가는 무모한 방법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곧 잡혀 포로가 되었다. 그곳에서도 탈출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제대 이후, 공산주의 헝가리에서 소련의 피아니스트를 우대하는 등 생활고에 시달려 국외 탈출을 결심했으나, 또 적발되어 정치범으로 투옥, 대학 건설을 위해 강제 노역을 했는데 이때 매일 10시간 동안 60kg의 대리석을 운반하도록 하여 오른손 손목의 인대가 늘어나 남은 평생동안 오른손 손목에 밴드를 하고 연주했다. 도망치다가 철조망에 상처를 입어서라고도 한다.
이렇게 4년간 피아노를 또다시 만지지도 못하였지만 출소 이후 부다페스트에서 4개월동안 특훈을 실시, 또다시 일자리를 찾았고, 이번에는 그 명성이 문화부 장관의 귀에 들어가 ‘국가의 피아니스트’가 되어 훙가르톤에서 녹음을 시작하고 체코슬로바키아와 스위스 투어, 1955년에 작곡가 이외의 음악가로는 처음으로 프란츠 리스트 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1956년에는 모스크바, 런던, 파리에 투어를 계획하였으나, 10월에 발발한 헝가리 혁명으로 모두 취소되었다.
사실, 혁명 전야에 치프라는 에르켈 극장에서 바르토크 협주곡 2번을 연주했다. 심지어 급히 준비해서 단 6주만에 연주한 것으로, 치프라가 이후 회고하길 연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연주 후에는 청중이 국가를 부르며 거리로 뛰쳐나갔다.
혁명이 발발하여 대내외적으로 혼란하던 시기에도, 이미 세번의 탈출 실패 경험이 있는 치프라는 탈출을 망설였지만 아내가 설득하여 국경을 넘어 도보로 빈으로 이동하였다.
그가 쓰던 피아노는 가보와 스타인웨이였는데, 70년대 후반부터는 야마하로 바뀐다.
1943년생인 그의 아들 조르주 치프라 주니어는 1981년 (유서가 발견되어 자살로 추정되는) 아파트 화재로 38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치프라는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아, 이후 회고하길 몇년동안 보드카와 와인의 나날을 보냈으며, 오케스트라와의 협주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또한 피아노에 대한 의욕도 떨어져 이후 테크닉이 급격히 퇴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말년에는 급성으로 진행된 폐 소세포암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1994년에 타계하게 된다. 향년 72세.
○ Georges Cziffra – Chopin etude no.11 op.25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