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소개
귀스타브 모로 (Gustave Moreau)의 작품 ‘살로메’ 시리즈 : 환영 (1875) • 춤추는 살로메 (1876)
귀스타브 모로 (Gustave Moreau, 1826년 4월 6일 ~ 1898년 4년 18일)는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이다.
성서의 이야기나 신화를 많이 그려 이름을 날렸다. 매우 화려한 기교로 시적·환상적 표현을 하였다.
귀스타브 모로는 1826년 파리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미술 대학을 졸업하고 22세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1848년 이후 테오도르 샤세리오와 들라크루아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 모로는 그림의 주제를 역사와 신화에서 찾기 시작하며 이는 후에 모로의 화풍을 대변하게 된다.
1857년에서 1859년까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신화적 주제를 모음과 동시에 그림기술을 향상시켰다. 파리로 돌아와 당시의 미술계에 유행하던 살롱 초대전에 약 20년간에 걸쳐 수시로 작품을 출품한다.
1864년 외디푸스와 스핑크스를 그려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다. 이후에 그려지는 대다수의 작품은 고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인물과 일화들을 주제로 하고 있다. 모로는 의식적으로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에서 인간의 번민과 고통, 이상적인 영웅상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손꼽힐 뿐만 아니라 후에 나타나는 표현주의에 결정적인 동기를 주게 된다.
1892년 파리의 예술학교의 미술과 교수로 초빙되어 마티스, 루오, 마르케 등의 화가들을 길러낸다. 특히 모로는 자상함과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교수 방법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존경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1898년 파리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사망후 유언에 따라 모로가 살던 파리의 9구 로슈푸코 거리 (프: rue de la Rochefoucauld) 14번지의 집은 현재 모로 박물관 (프: Musée Moreau)으로 되어 있다.
대표 작품으로 살로메 (1871), 에루로페와 황소 (1869), 레다 (모로 박물관), 오르페우스 (1865) 등이 있다.
○ 귀스타브 모로의 ‘살로메’ 시리즈 – 환영 / 춤추는 살로메

– 환영(1875) 캔버스에 유채, 103×142㎝,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파리)
관능적인 춤을 추며 의붓아버지 헤롯왕에게 세례 요한을 죽여 달라 부탁한 살로메에게 세례 요한의 목이 환영으로 나타난 장면을 상상하여 그린 그림이다.
성자인 그의 머리 둘레로 후광이 보인다. 모로가 그린 그림에서 살로메는 성서 속 단순히 춤 잘 추는 소녀가 아니라 팜므파탈적인 관능의 화신으로 재탄생된다.
모로는 ‘환영’이라는 작품에서 피를 흘리는 요한의 목을 그렸으나 그 눈은 오히려 힘이 있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14장과 마가복음 6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살로메 공주가 의붓 아버지 헤롯 왕의 생일을 맞아 그 앞에서 춤을 선보이는데 살로메의 춤을 보고 크게 기뻐한 왕은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맹세하게 된다. 그러자 자신의 어머니 헤로디아와 상의한 살로메는 세례요한의 목을 요구한다.
당시 세례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었었다. 살로메의 어머니 헤로디아는 원래 헤롯 왕의 동생 빌립의 아내였는데 헤롯이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삼자 세례요한이 왕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직언했기 때문이다.
비록 헤롯이 세례요한을 감옥에 가두기는 했지만 그를 죽이지는 못했다. 많은 민중들이 그를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고 요한을 죽일 경우 민중이 봉기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헤롯은 그의 말을 들으면 양심의 가책에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오히려 귀담아 들었다고 한다. 그만큼 미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인정하고 존경했던 것이다.
살로메가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하자 헤롯 왕은 몹시 고민하지만 자신이 맹세하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 때문에 살로메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곧 호위병이 나가서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 소녀에게 주고,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귀스타브 모로의 ‘환영: 살로메의 춤’은 이 이야기에다가 자신의 상상력을 가미하여 그린 그림이다. 세례요한의 환영이 살로메에게 나타났고, 살로메는 무엇인가를 요한에게 이야기하는 듯 하다.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세례요한의 표정이 보인다.
세례요한의 머리에서는 죽음 이후에도 후광이 비치고 목에서는 많은 피를 흘리고 있는 탓에 바닥에 피가 흥건하다.
자신은 어머니의 명을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하는 듯한 겁에 질린 살로메의 모습이다. 비명을 지르는 것 같기도 하고 손으로 세례요한을 가리키며 무슨 말을 하는 듯 하는데 이게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이 안되는 모양이다.
살로메의 뒤에는 근심어린 표정의 헤롯과 헤로디아가 있다. 그러나 살로메처럼 겁에 질려있거나 비명을 지르는 모습은 아니다. 환영은 살로메에게만 보이는 모양이다.
헤롯은 뭔가 회한에 젖은 듯 어두운 표정이고 헤로디아는 딸을 걱정하고 있는 것 같다. 딸의 선물로 누군가의 목을 요구할 정도로 독한 여자이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다 똑같은 모양이다.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를 그린 상징주의 화가이자 초현실주의 화가 귀스타브 모로가 50세에 완성한 그림 ‘환영: 살로메의 춤’은 사람들에게 관능, 공포, 환상 등 동시에 여러가지 느낌을 주고 있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사람들은 경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현실인지 꿈인지 환상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이런 몽환적인 그림이 처음이었던 모양이다.
눈에 보이는 것,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 또는 과학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면 믿지 않는 시대. 그러나 귀스타브 모로는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자신의 그림을 통해서 주장하고 있는 듯 하다.
요한은 목이 베어 육체적으로 죽었지만 그의 굳건한 신념은 오히려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모르는 이러한 확신을 표현할 줄 아는 작가였다.
한편 모로는 죽기 전 집과 화실 그리고 작품 8천여 점을 국가에 기증했다. 모로는 그가 죽은 후에도 작품의 위치를 변경하지 않는다는 약속도 했다. 국가는 1903년 모로의 집을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으로 꾸미고 주거공간과 작품전시공간을 구분하였고 모로와의 약속을 지켜가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또한 모르의 신념으로 이뤄진 것이다.

– 춤추는 살로메(1876) 캔버스에 유채, 106cmx72.2cm, 오르세박물관(파리)
1825년 파리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난 구스타프 모로는 일찍부터 그의 재능을 발견한 부모님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프랑소와 에드와드 피코와 같은 훌륭한 화가들로부터 미술교육을 받았고 데오도르 사세리오와 같은 당대의 유명한 화가들과 오랫동안 교우하면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였으며 말년에는 파리예술학교의 교수가 되어 초현실주의와 포비즘(야수파)의 기수들을 배출함으로 후세는 그를 초자연주의의 선구자로 꼽고 있다.
모로는 성경이나 신화의 주제들을 즐겨 그렸는데 여기에 소개하는 ‘춤추는 살로매’ 역시 신약성경의 마태복음(14:6-11)과 마가복음(6:21-29)에 나오는 살로매를 그린것이다. 살로메공주가 의붓아버지 헤롯 안티바스의 생일잔치에서 춤을 추자 흥분한 헤롯은 많은 손님들 앞에서 살로매에게 어떤 소원이건 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 살로메는 헤롯왕과 그녀의 어머니 헤로디아의 결혼을 죄악이라고 비난하여 투옥된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하여 헤롯은 내키지는 않으나 할 수 없이 세례요한의 목을 짤라 쟁반에 담아 주게 했는데 살로메는 그것을 어머니에게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 간단히 요약한 성경의 내용이다.
모로는 살로매에 무척 관심을 가졌던듯 살로매를 시리즈로 150여장의 뎃상에 19개의 그림과 6개의 수채화를 그렸다고 한다. 춤추는 살로매에 관한 것만도 40여개의 스케치에 거의 비슷한 8개의 그림들이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서 소개하는 ‘춤추는 살로매’는 살로매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살로매가 헤롯 앞에서 베일을 쓰고 음란한 춤으로 헤롯을 유혹해서 결국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요구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장면으로 살로매는 어머니의 사주를 수행한 비교적 청순한 여자로 성경에 묘사되어 있는 반면에 모르의 살로매는 매우 요염하고 전형적인 요부의 이미지로 묘사되어 있다.
살로매가 춤 주는 궁전은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다 . 어쩌면 음모와 죄가 벌어지기 알맞은 공간임을 상징하는듯 하다. 그 뒤에 붉은색 아치와 갈색 벽을 배경으로 앉아있는 헤롯은 흐리고 어두워서 얼굴 없는 유령같이 보인다. 그리고 양 옆에 있는 시종들도 컴컴한 배경과 잘 구분이 안될 정도로 그려져 음모와 죄악의 공간과 하나가 되는듯한 인상을 풍긴다. 그리고 살로매의 뒤쪽 아래부분에 앉아있는 여인은 악사인듯 하다. 이러한 신비로운 어둡고 음침한 궁전과 사람들을 배경으로 환희 빛나는 것이 사로매의 보석들을 잔뜩 단 베일만 두른 나신(裸身)이다. 빛을 발하는듯한 그녀의 몸매는 의붓 아버지의 정신을 홀딱 빼어버리고 사람들을 곤경에 삐트릴뿐 아니라 다른사람들도 다 빨아드릴듯한 욕망을 상징하는듯 하다
모르는 ‘춤추는 살로메’의 바로 다음 속편으로 ‘환영'(apparition)이란 작품을 그렸는데 춤추는 살로매와 요한의 피 흘리는 목을 같이 그리기도 하였다.
이 그림들은 1876년에 처음으로 ‘환영’과 함께 씨롱에서 전시되었으며 괭장한 시선을 끌면서 모로의 상징주의와 세기말 사상(퇴폐주의)이 잘 표현된 대표적인 작품으로 야수파 활동과 데카당운동(퇴폐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되었다..
결코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초현실적인 배경과 신비적인 분위기, 이국적인 어쩌면 비잔틴 적이기도 하고 동양적이기도 한 건물구조와 장식 등에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해석과는 대조되는 인물설정으로 상징주의 운동을 이끌어 낸 주요 작품들로 평가된다
‘춤추는 살로메’는 파리의 Musee d’Orsay에 그리고 ‘환영’은 Musee d’Gustave Moreau에 소장되어 있다.
○ 역사와 성경의 ‘살로메’
-역사의 살로메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살로메의 아버지는 헤로데 빌립보 2세(마태복음서 14:3, 마가복음서 6:17에 빌립으로 묘사된 인물)로 헤로데 대왕과 그의 세 번째 부인 미리암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유명한 헤로디아로 대제사장 시몬의 딸이었다.
살로메는 2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 결혼은 헤로데 대왕의 아들인 헤로데 빌립보 1세로 트라코니티아의 분봉왕이었다. 이 첫 번째 결혼에서 헤로데 빌립보 1세가 자식없이 죽자 두 번째로 칼리스의 아리스토불루스(헤로데 대왕의 증손자로 칼키스의 헤로데의 아들)와 결혼했고, 세 아들을 두었다. 이 칼키스의 아리스토불루스와 살로메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이 다수 발견되었다.
-성경의 살로메
살로메는 마태복음서(제14장)과 마가복음서(제6장)에 묘사되어 있는데 ‘헤로디아의 딸’ 또는 ‘여자아이’로만 기록되어 있고 이름은 없이 나온다. 이야기의 주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헤로데 안티파스와 헤로디아가 결혼하자 세례자 요한은 이를 강하고 공개적으로 비난한다. 안티파스와 헤로디아는 세레자 요한을 죽이려고 하지만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아 옥에 가두기만 하고 감히 처형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차, 헤로데 안티파스의 생일을 맞아 연회가 벌어졌을 때 헤로디아의 딸(살로메)는 아름다운 춤을 추었고 이에 고무된 헤로데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준다고 약속한다. 이에 헤로디아의 딸은 어머니의 사주를 받아 요한의 목을 쟁반에 담아 줄 것을 요구하고 결국 안티파스는 곧바로 요한을 처형했다. 그러나 그 딸의 이름이 살로메라고 밝히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세레자 요한의 처형은 정치적인 이유라고 한다. 세례자 요한은 온전한 덕성과 가르침으로 유대 민중의 신망을 받고 있었고, 그를 따르는 군중이 많아지자 헤로데 안티파스는 민중봉기의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봉기를 일으키기 전에 먼저 선수쳐서 요한을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그를 마르켈누스 성채로 붙잡아와서 처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