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소개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 ~ 1519)의 ‘모나리자’ (Mona Lisa)
레오나르도 다빈치, 53 x 77cm,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1503년
‘모나리자 (Mona Lisa)’는 ‘동방박사의 경배’, ‘최후의 만찬’과 더불어 레오나르도의 3대 걸작이다.
모나리자 (Mona Lisa) 또는 라 조콘다 (이: La_Gioconda, 프: La_Joconde)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가 그린 초상화로,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모나” (mona)는 유부녀 이름 앞에 붙이는 이탈리아어 경칭이고, “리자” (Lisa)는 초상화의 모델이 된 여인의 이름이다.
즉, 한국어로 하면 “리자 여사”라는 뜻이 된다.
이탈리어로 “라 조콘다 (Giocondo)”는 “조콘도의 부인” 또는 “명랑한 여자”, “웃고 있는 여자”라는 뜻이다.
- 모나리자 (Mona Lisa)
.작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작품연도: 16세기경
.매체: 포플러에 유화
.크기: 53 × 77 cm
.소장: 파리 루브르 박물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형적인 걸작으로 여겨지는 이 작품은 “전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작품을 직접 보기위한 방문객이 가장 많으며, 가장 많이 언급되고, 가장 많이 노래되고, 가장 많이 패러디된 예술 작품”이다.
수수께끼 같은 표정 때문에 말도많고 끓임없이 다른 작가들에 의해 모방되고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그림이며 세상에 가장 많이 그리고 널리 알려진 그림이라는 유명세를 지니고 있지만 정작 이 작품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알려진 몇몇가지들은 대부분 후대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일 뿐이다. 작업을 시작한 시기나 총 작업기간, 의뢰자나 모델의 정체등을 명확히 알 수 없는 이유는 이 작품을 그리고 있을 당시에 그 과정을 적어놓은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 세계의 많은 연구자들이 이 작품의 수수께끼를 푸는 일에 매달리기도 하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작업을 처음 시작한 것은 1503년경으로 추정되며 의뢰자에게 전달하지 못하게 되자 자신이 보관하며 틈틈히 작업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로 이주한 후에도 조금씩 작업을 하여 1517년경에 프랑스에서 완성하였다고 한다.
눈썹이 없는 것이 작품의 특징중 하나인데 이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며 이로 인하여 미완성 작품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 작품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소장하고 있다가, 1797년부터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상설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던중 1911년 8월, 루브르 미술관에서 일하던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 빈첸조 페루자가 훔쳐서 이탈리아로 반출하였다. 피렌체의 골동품상에게 넘기려고 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되며 발각되었고, 1914년 1월 프랑스에 반환되어 현재에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 되어있다.
이 그림은 여러가지 면에서 선구적인 작품으로 당시로서는 새로운 방식인 유화기법을 사용했으며, 선을 부드럽게 하는 ‘스푸마토’ (sfumato) 기법을 사용하여 엷은 안개가 덮인 듯한 효과를 주고 있다.
이 작품은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는 여인을 그린 초상으로, ‘스푸마토’ (sfumato) 기법을 사용하여 엷은 안개가 덮인 듯한 효과를 주고 있다. 구도는 당시에 가장 기본적인 초상화 구도였던 피라미드의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인물을 배경보다 높게 배치하는 방식은 오늘날 화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드문 방식을 사용하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02년에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조르조 바사리의 말에 의하면 미완성작으로 남겨둔지 4년이 지난 후에서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회화란 정신적인 것이라고 늘 말해왔고 모나리자에는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다.
1503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 작품의 의뢰를 수락한 것은 돈이 필요해서였다 그런데 몇 달 뒤 베키오 궁을 장식할 프레스코 주문이 들어와서 이 그림은 주문자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에게 전달될 일이 없어졌고 레오나르도가 평생 동안 자신이 갖고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이 초상화를 완성을 했고 사람이 흔적이 보이지 않는 태곳적 풍경은 훨씬 뒤에 천천히 구상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등받이 없는 1인용 안락의자에 독특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나리자와 이 풍경이 맺고 있는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 모델
모델이 누군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리자 마리아 게라르디니 (Lisa Maria Gherardini, 1479-1542)라는 주장이다. 조르조 바사리에 의하면 그림의 모델은 1479년 피렌체에서 평민 가정에서 태어나 16세에 상인인 프란체스코 디 바르토로메오 델 조콘도 (Francesco di Bartolomeo del Giocondo)와 결혼한 리사 마리아 게라르디니이며, 그녀의 자연스러운 미소를 얻기 위해 악사, 광대 등을 동원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미국 뉴욕 소재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의 릴리안 슈워츠 그래픽 컨설턴트는 모나리자의 그림이 다빈치 자신의 자화상을 여성화시켜 그린 것이라고 주장하여 모델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또 다른 이론인, 그림의 주제는 레오나르도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모나리자의 아름다움과 매력, 그리고 후경의 풍경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모나리자를 관찰해보면 구도를 가로로 평행하게 배치된 팔은 안락의자의 팔걸이에 얹혀 있고 바로 우리 눈앞에 있는 듯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팔이 너무 아래쪽에 배치되어서 그림과 관람자 사이에 거리감을 만들어내는 공간이 하단부에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인물과 관람자 사이에 난간을 그려 넣어 그 둘 사이에 거리감을 조성하는 전통이 있었으나 모나리자는 난간 앞에 서있다.
인물이 눈에 훨씬 더 잘 들어는 플랑드리 초상화에서는 인물의 앞쪽 아랫부분에 작은 난간을 두어 인물이 그 난간 위에 손을 얹고 있도록 묘사하는 것이 가장 흔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난간을 그녀의 앞이 아닌 뒤에 배치하고 그 대신 팔로 방어 자세를 취하게 함으로써 어떤 틈도 없다.
레오나르도는 모나리자를 관람자의 공간 속으로 끌어다 놓은 것이다
○ 논란
모나리자 그림에는 눈썹이 그려져 있지 않다.
이것에 대해서는 눈썹을 뽑는 것이 당시 미의 기준이었기 때문에 모나리자의 모델도 눈썹이 없는 상태였다는 주장과, 모나리자 작품이 눈썹을 그리지 않은 미완성작이라는 설이 있다.
모나리자를 연구한 엔지니어 파스칼 코트는 “모나리자 눈썹이 청소 중에 지워졌다”며 “모나리자의 눈 주위를 자세히 살피면 미세한 금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큐레이터나 그림 복원가가 눈 부위를 부주의하게 닦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라파일이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리는 모습을 그린 그림에는 기둥이 있었지만 다빈치의 그림에는 기둥이 없는 이유에 대해 ‘액자 제작자가 그림을 액자의 크기에 맞추기 위해 기둥 부분을 잘라내버렸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현재 그림과는 달리, 처음에는 머리를 묶은 모습을 그렸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또한 그가 그린 그림에는 붓 자국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1919년에는 마르셀 뒤샹이 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만 붙인 L.H.O.O.Q라는 작품을 그려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07년 8월에는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 초안이 공개돼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 초안의 밑그림에는 원래 손이 포개지지 않은 상태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모나리자의 상반신 또한 4분의 3각도를 취하고 다 관람자를 향해 약간 목을 돌린 모습이다.
두 눈은 우리를 똑바로 내려다보듯이 쳐다보고 있는데 그녀의 눈에 우리가 다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다시 말해 그림 하단부를 막고 있는 팔부터 눈에 이르기까지 모나리자가 관람자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관람자는 그녀의 시선 아래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
서양화 최초의 누드화라고 알려진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베누스>에서도 느낄 수 있는 인물의 시선 아래 있는 것만 같은 느낌과 같이 <모나리자>에서 인물의 시선 아래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후경을 잘 관찰해보면 비논리적인 점이 보인다 .관람자의 시점에서 볼 때 오른쪽에는 높은 산과 거울처럼 평평한 수평선이 왼쪽에 비해 다소 올라와있는 호수가 보인다.
반면에 왼쪽 풍경은 오른쪽보다 낮다 다시 말해 두 부분이 하나로 이어진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사실상 거기에 인물 자체와 모나리자의 미소에 의해 감춰지고 변형된 간격인 단절이 있다. 모나리자의 입술은 오른쪽으로 약간 올라가 있다 (좀 더 높게 그려진 오른쪽 풍경 쪽으로). 양쪽 두 풍경 사이의 불가능한 이행이 인물 속에서 바로 인물의 미소를 통해 실현되었다.
레오나르도는 오비디우스 예찬론자로 <변신 이야기>를 열심히 읽었다. 레오나르도는 오비디우스와 마찬가지로 최고의 미란 바로 덧없음, 즉 시간의 무상함이라고 생각했다.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헬레나는 ‘제 모습이 오늘은 아름답지만 시간이 흐르면 과연 어떻게 변할까요?’라는 말을 한다 이는 시간의 무상함을 보여준다.
레어나르도는 <모나리자>에 바로 이런 우주적 사색과 통찰을 투영한 것이다. 바로 미소의 덕이기 때문이다. 미소란 덧없는 것으로 짧게 스치는 작은 웃음으로 얼굴에 잠시 머물 뿐이다.
또한 페드레티에 따르면 풍경에서의 다리는 시간의 흐름을 상징한다. 다리가 있다는 것은 강물이 있다는 것인데 강물은 덧없이 흐르는 시간의 상징이다. 이에 모나리자의 핵심 주제는 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부록 : 시대를 앞선 예술가이자 과학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 / 다빈치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 ~ 1519)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 (이: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근대적 인간의 전형이다.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 계획가,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였다. 그는 호기심이 많고 창조적인 인간이었으며, 어려서부터 인상 깊은 사물, 관찰한 것, 착상 등을 즉시 스케치하였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본명: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출생: 1452년 4월 15일, 이탈리아 빈치
.사망: 1519년 5월 2일, 프랑스 앙부아즈
.직업: 화가, 기술자, 천문학자, 철학자, 해부학자, 수학자, 조각가, 박식가, 건축가, 토목 공학자, 외교관, 발명가, 작곡가, 시인, 음악가, 물리학자, 생리학자, 식물학자, 화학자, 동물학자, 풍자화가
.언어: 이탈리아어 / 국적: 이탈리아
.종교: 로마 가톨릭 (세례명: 레오나르도)
.스승: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제자: 자코포 다 폰토르모, Francesco Melzi, Andrea Solari, Cesare da Sesto, Salaì
.후원자: 로렌초 데 메디치, 프랑수아 1세, 루도비코 스포르차
.분야: 예술, 과학 등의 다양한 분야
.사조: 전성기 르네상스
.부모: Ser Piero da Vinci (부), Caterina di Meo Lippi (모)
.주요 작품: 동방박사의 경배, 암굴의 성모,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흰 족제비를 안은 여인,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수태고지, 광야의 성 히에로니무스, 성 안나와 성모자, 세례자 요한, 헬리콥터 디자인, 이사벨라 데스테의 초상, 헝클어진 머리의 여인, 살바토르 문디 등
○ 생애 및 활동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토스카나 지방의 산골 마을 빈치에서 유명한 가문의 공증인인 피에로 다 빈치 (Ser Piero da Vinci)와 가난한 농부의 딸인 카타리나 (Catarina)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르네상스의 만능인으로 어릴 때부터 수학·음악·회화 외에 모든 학문에 있어서 다재다능함을 보였다.
레오나르도는 1466년 열네 살 때, 가족과 함께 토스카나의 수도였던 피렌체로 이주해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갔다. 베로키오는 그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공방을 이끌던 실력 있는 예술가였다. 레오나르도는 그곳에서 20대 초반까지 미술 및 기술 공작 수업을 받았다. 제자의 재능을 알아본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에게 그림을 맡기고, 자신은 조각에만 몰두할 정도로, 레오나르도를 제자가 아닌 화가로서 존중했다.
1472년 수업을 끝내고 피렌체 화가 조합에 등록하여 한 사람의 화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1476년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그림인 베로키오의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에 조력하고, 그 좌단에 천사를 그렸는데, 스승을 능가하는 천재성을 보였다.
– 제1피렌체 시대
레오나르도는 1481년까지 스승 베로키오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며, 1466-1482년을 그의 제1의 피렌체 시대라고 하는데, 당시의 작품으로 ‘석죽의 성모’, 성모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에게 예수를 잉태할 것임을 들은 이야기인 ‘수태 고지’, ‘베노바 가의 성모’ 등이 있다. 이 시기에 그려진 인물화와 풍경화에서 이미 레오나르도의 독창적인 구도와 분위기 표현 기술을 엿볼 수 있다.
– 제1밀라노시대
1481년에 밀라노의 스포르차 귀족 가문의 화가로 초빙되어 갔는데, 1482-1499년을 제1의 밀라노 시대라고 부른다. 밀라노에 간 목적은 스포르차 가의 선조인 프란체스코의 기마상 제작과 음악 교수 때문이었다. 약 12년 동안 화가로서 뿐만이 아니라 조각가, 건축가, 기사로서 오늘날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의 다방면에 걸친 천재성을 발휘했다. 이 시기에 세계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그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암굴의 성모’ (1483년, 루브르 박물관)와 ‘최후의 만찬’ (1495~1498년, 밀라노)이 제작되었다. ‘암굴의 성모’에서는 레오나르도 특유의 화법인 이른바 환상적인 색감을 살리는 스푸마토 (Sfumato)가 첫선을 보이게 되며, 뒤에 이 화법을 바탕으로 유명한 모나리자(1500~1503년, 루브르 박물관)가 그려졌다. 스푸마토는 원거리에서 물체를 둘러싼 공기 (대기)까지 그림으로써 완전한 삼차원의 세계를 그리는 기법으로 대기 원근법 (aerial perspective)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당시 로마 가톨릭의 통제에 따라 제작되던 교회 미술계의 풍토를 깨고,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는 등 자신의 소신에 따른 작품 활동을 했다. 1489년 인체와 말의 해부학적 연구에 몰두하고, 인체의 해부와 조류의 비상에 관한 논문, 광학에 대한 연구에도 전심하였다.
– 제2피렌체 시대
1500~1506년을 그의 제2의 피렌체 시대라고 하는데, 1499년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밀라노의 침입으로 1500년 피렌체로 돌아왔다. 여기서 제단화 ‘성 모자와 성 안나’를 그리고, 1502년에는 체잘레·보르지아에 토목 사업 운하 개발 도시 계획을 위해 초청되었다. 1503년에는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에는 그의 과학 연구가 한층 성장하여 새가 나는 방법, 지질학과 물의 운동, 해부 등에 관한 수기를 남겼다.
– 제2의 밀라노시대
1506년 밀라노에서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루이 12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는데, 1506-1513년을 그의 제2의 밀라노 시대라고 부른다.
– 앙부아즈 시대
1516년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1516년 프랑수아 1세가 있는 프랑스의 끌로 뤼세 (Clos Lucé)로, 그의 제자인 프란세스코 멜지 (Francesco Melzi)와 함께 이주한다. 그는 3점의 그림 (모나리자라 조콘다, 성 안나와 성 모자, 세례자 요한)을 가져간다. 여기서 ‘성 안나’와 ‘모나리자’를 완성하였다. 이 시대를 앙부아즈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 여러 방면에 대한 오랜 연구를 정리하고 운하도를 설계하였다.
– 별세
1519년 4월 23일 유언을 남기고 5월 2일 레오나르도가 사망했다. 그의 나이 67세였고, 조르조 바사리는 레오나르도의 전기에서 레오나르도가 프랑수아 1세의 품 안에서 숨을 거뒀다고 적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 자식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제자이자 동반자였던 프란세스코 멜지 (Francesco Melzi)가 그의 유산을 상속하였다. 1570년 프란세스지의 죽음으로 그가 평생 간직하고 있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엄청난 양의 크로키와 그림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 예술활동 외 업적
다 빈치는 파동 운동 이론, 연통관 내의 압력, 유체에 미치는 압력의 발견자이기도 하다. 그 응용면에 있어서 양수기와 수압의 발견자였다. 새의 나는 방법에 대한 연구로 비행기의 원리를 생각하고 공기의 연구에서 바람의 발생과 구름과 비의 발생도 이론적으로 추구했다. 또 공기 역학, 조류의 비행 등의 연구 노트에는 낙하산, 헬리콥터, 플레이트 날개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해부학에 있어서도 인체의 각 부분의 작용을 역학적 원리로서 분명히 하였다. 그 밖에도 식물학 등에 관해서도 연구를 하였다. 그는 예술과 과학의 창조에 대한 비밀을 밝힌 천재였다. 저서로 그림에 관한 르네상스 예술 이론의 중요한 문헌인 ‘회화론’을 비롯하여 많은 논문이 있다. 한동일 서강대학교 교수가 쓴 ‘라틴어수업’ (흐름출판)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림과 과학공부 뿐만 아니라 라틴어 공부도 했다.
○ 대표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 (1472년~1475년) –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베로키오 공방 시절: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왼쪽의 천사를, 베로키오는 오른쪽의 천사를 그린 것으로 알려짐. 교회의 통제를 거부하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그렸다.)
‘수태고지’ (1475년~1480년) –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예수를 잉태한 성모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왔다는 루가 복음서의 탄생 설화를 소재로 함
‘동굴의 성모’ (1483년~1486년) – 루브르 박물관, 파리, 예수가 헤로데를 피해 이집트로 갔다는 루가 복음서의 전승 내용을 소재로 함
‘흰 족제비를 안은 여인’ (1488년~1490년) – 차르토리스키 박물관, 크라코우 (Krakow), 폴란드 모델은 세실리아 가레라니(Cecilia Gallerani)로 뤼도빅 르 모르 (Ludociv le More)의 정부(情婦)로 알려져 있다. 그림 속의 흰 족제비는 다양한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순결함 혹은 순수함 그리고 모로 집안에 대한 상징으로 주로 해석된다.
‘음악가의 초상’ (1490년경) – 암브로시니아 미술관, 밀라노, 43 x 31cm 다 빈치의 유일한, 남성을 그린 초상화로 알려졌다. 모델은 프란치노 가퓌리오 (Franchino Gaffurio)
‘리타의 성모’ (1490년~1491년) – 에르미타지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최후의 만찬’ (1498년경) –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수도원 식당, 밀라노
‘모나리자’ (1503년~1506년) – 루브르 박물관, 파리
‘암굴의 성모’ (1508년경) – 내셔널 갤러리, 런던
‘성 안나와 성 모자’ (1510년경) – 루브르 박물관, 파리, 프로이트가 다 빈치의 동성애를 증명할 수 있는 단서로 본 그림. 성 안나는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즉, 예수의 외할머니이다.
‘세례자 요한’ (1514년경) – 루브르 박물관, 파리, 다 빈치의 손으로 완성된 마지막 작품으로 남성과 여성 사이의 모호한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