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소개
산드로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1445 ~ 1510)의 ‘봄’ (프리마베라, Primavera)
산드로 보티첼리 / 패널 위 템페라 / 314 x 203 cm / 1477~1482년 /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봄’ 또는 ‘프리마베라’ (이: Primavera)는 15세기 르네상스 시대 화가인 산드로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1445년 3월 1일 ~ 1510년 5월 17일)의 대표적인 그림 가운데 하나로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1482년경 보티첼리가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세스코 데 메디치의 카스텔로 별장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섬세하고 매끄러운 선과 가벼운 느낌의 옷, 여리고 서정적인 선율과 같이 보티첼리의 독특한 스타일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 중앙에는 베누스와 에로스가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제피로스와 클로리스가 그려져 있다. 왼쪽에는 케뤼케이온을 든 메르쿠리우스가 그려져 있고 그 사이로 플로라와 카리테스가 그려져 있다.
– 봄 (Primavera)

작가: 산드로 보티첼리
연도: 1477~1482년
사조: 초기 르네상스
장르: 신화화, allegory
크기: 314 x 203 cm
소장: 우피치 미술관 메디치 리카르디궁 (1498 – 1516),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현재)
전기 피렌체 르네상스의 위대한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 (1445 ~ 1510)의 ‘봄’은 꽃으로 넘쳐나는 그림이다. 그림 상단에는 오렌지 나무와 월계수에서 활짝 핀 꽃들이, 하단에는 세심하게 디테일을 살린 약 500여 종의 꽃들이 나타나 있다. 봄의 알레고리로 가득 찬 이 그림의 제목은 화가가 붙인 것이 아니다. 후일 ‘위대한 이탈리아 예술가 열전’ (1550)을 저술한 조르지오 바사리가 ‘La primavera’, 즉 ‘봄’으로 붙였다.
3m가 넘는 넓이의 그림 속 인물들은 등신대에 가깝다. 중앙의 비너스 좌측엔 머큐리와 삼미신 (三美神), 그리고 셋 중 하나를 향해 화살을 겨누고 있는 비너스의 아들 큐피드가 보이고, 우측엔 꽃들을 뿌리는 봄의 여신 플로라, 땅의 님프 클로리스와 연인인 서풍 (西風)의 신 제피로스가 차례로 보인다. 이 섬세하고 화려한 그림에서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인물들의 옷자락을 자세히 보노라면, 바람의 방향이 각기 다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신비스러운 분위기로 충만한 이 그림에 대한 해석은 지금까지도 분분하다. 먼저 바사리는 고대 로마의 달력으로 봄 석 달에 중점을 두었다. 그림 맨 우측, 3월의 신 제피로스의 날개를 시작으로 4월의 신인 비너스를 거쳐 5월의 신 머큐리로 연결된다. 단순히 봄 석 달만을 상징하기엔 나머지 인물들의 역할이 궁금하다.

무엇보다 사랑과 미, 풍요의 여신 비너스의 모습이 이상하지 않은가? 아이를 잉태한 비너스는 기독교 도상에서의 성모 마리아와 흡사하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플라톤 사상을 토대로 이집트나 소아시아의 신비주의 철학이 합쳐진 신플라톤주의 연구가 성행했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이 높이 평가했던 선묘 회화의 대가 보티첼리는 천상의 비너스가 신성한 사랑의 근원으로서 성모 마리아를 대신할 수 있다는 신념을 그림에 반영했다. 요컨대, 이 그림에서 비너스는 육체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여신인 동시에 영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그리스도교 성모의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1980년대에 이 그림을 해석한 두 연구가 발표되었다. 그림의 우측을 보면, 볼에 잔뜩 바람을 머금은 푸른색 몸의 제피로스가 꽃을 입에 문 채 자신을 뒤돌아보는 클로리스를 꽉 붙잡고 있고, 클로리스는 꽃으로 장식된 옷을 입고 당당히 걸어가는 플로라에게 도움을 청하듯 바짝 붙어있다. 한 연구자는 플로라 (Flora)의 그리스식 이름인 클로리스 (Chloris)에 주목한다. 그는 봄의 여신 플로라와 땅의 님프 클로리스를 언어적 유희를 통해 동일시함으로써 봄을 정지한 시간이 아니라 순차적으로 변화하는 계절의 흐름, 즉 봄이 다가오고 있음으로 해석한다.
나머지 한 연구자는 피렌체에 초점을 맞춘다. 머큐리는 상업과 교통의 신인 동시에 의학의 신이다. 교역과 금융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 피렌체 르네상스와 인본주의를 일으킨 메디치 (Medici) 가문의 성에는 의학(medicine)이란 단어의 접두사가 포함돼 있다. 또한 피렌체의 다른 이름인 플로렌스 (Florence)에는 봄의 여신 플로라의 뜻이 담겨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봄은 꽃으로 충만한 도시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의 영광을 노래하는 다분히 정치적 선동의 목적을 띠고 있다. 인문학자들의 견해와 메디치 가문의 정치적 의도를 예술적으로 종합한 ‘봄’은 미술이 자연의 모방 (mimesis)이라는 차원에서 벗어나 철학적 세계를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귀족적이고 아름답지만 이 그림에 깔린 멜랑콜리한 분위기는 감출 수 없다. 그림 전면을 흐르는 바람은 사후의 영광을 상징하는 듯하다. 어쩌면 비너스의 모델인, 당대 뭇 예술가들의 뮤즈였던 시모네타 베스푸치의 요절에 대한 애도의 의미가 깔렸을 수도 있고, 활동할 당시의 명성에 비해 종교적 ・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려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자신의 미래를 예측한 화가의 비전일지도 모른다. _ 박소영 (전시기획자, PK Art & Media 대표)
○ 산드로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1445 ~ 1510) 개관
산드로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1445년 3월 1일 ~ 1510년 5월 17일)는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본명은 알레산드로 디 마리아노 필리페피 (Alessandro di Mariano Fillipepi)이지만, “작은 술통”이라는 뜻을 가진 보티첼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메디치 가문과 그 가문의 추종자들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그의 초상화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후기 작품은 고딕 양식을 재수용하면서 감정적으로 강한 표현을 드러내는 특징을 지녔다. 그의 회화가 지니고 있는 몇 가지 요소를 19세기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이 재수용했고, 유겐트슈틸도 선과 장식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그로부터 몇 가지를 차용하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인 마리아노 디 반니 (Mariano di Vanni)는 제혁업자이다.
– 산드로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본명: 알레산드로 디 마리아노 필리페피
.출생: 1445년, 3월 1일,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현재의 이탈리아)
.사망: 1510년 5월 17일,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국적: 이탈리아
.스승: 프라 필리포 리피
.제자: Filippino Lippi
.분야: 회화
.사조: 이탈리아 르네상스
.주요 작품: 베누스의 탄생, 동방박사의 경배, 봄, Fortitude 등
1464년 프라 필리포 리피의 제자로 들어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제자로 들어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그렸다. 1470년 독립하여 자신의 공방을 세웠다.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고용되어 수많은 초상화를 그렸다. 1482년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를 그렸다.
피렌체의 조형적 전통과 스승의 영향이 있었으나, 그의 재능은 본질적으로 다른, 고딕적 전통과 시에나파의 양식과의 결합에 있다. 〈비너스의 탄생〉은 사실적 수법에서 벗어나, 상징과 장식을 강조하여 시적 세계를 이룩한 그의 대표작이다. 만년에는 영광적인 신앙에서 신비적 성격을 띠게 되어 〈신비의 십자가〉 등을 그렸다.
그의 대표작인 ‘비너스의 탄생 : Birth of Venus’ (1485경), ‘봄 : Primavera’ (1477 ~ 78)은 현대인에게 르네상스의 정신을 가장 잘 요약해 보여주는 작품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피렌체의 모든 주요교회들과 로마 시스티나 예배당의 종교화를 그렸다.

– 생애 및 활동
산드로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1445년 3월 1일 ~ 1510년 5월 17일)는 1445년 3월 1일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본명은 Alessandro di Mariano Filipepi로 피렌체의 초기 르네상스 화가다.
그의 이름은 일 보티첼로 (맥주통)라고 불리는 전당포 주인인 형 조반니에게서 따온 것이다.
– 초기의 발전
보티첼리에 관한 믿을 만한 전기적 자료는 많지 않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1458년 당시 13세가 다 되어서도 여전히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미술가들에 관한 전기작가인 조르조 바사리에 의하면, 보티첼리는 처음에는 금세공 밑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그후 화가 프라 필리포 리피 밑에서 공부한 것은 확실하다. 초기 대부분의 작품들은 리피나 그의 유파로부터 영향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많다. 보티첼리는 리피에게서 피렌체 회화의 위대한 혁신자인 마사초의 웅장한 양식에 친밀감을 첨가한 그림을 배웠다. 그가 배운 양식은 마사초의 명암 처리법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마사초와 달리 세부묘사에도 큰 관심을 가졌으며 보다 부드러운 감정을 나타냈다. 초기 그림에서는 동시대 피렌체의 화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영향도 찾아볼 수 있다.
1470년 이전에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차렸으며, 그해 아르테디메르칸치아 회관을 위하여 ‘불굴의 정신 : Fortitude’을 그렸고 1474년 1월 무렵에 ‘성 세바스티아누스 : St. Sebastian’를 완성했다. 1470년대초부터 보티첼리의 그림은 부드러운 명암을 이용하여 형태를 완전히 3차원적 개념에 맞추어 표현하는 양식에서, 밝고 고르게 빛을 받은 형태를 흐르는 듯 율동적인 선으로 윤곽지은 평부조 같은 표현양식으로 꾸준히 발전했다.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이러한 후자의 초기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 활동의 전성기
‘봄의 비유’ (Allegory of Spring)라고도 불리는 ‘봄’ (1477경)은 보티첼리의 다음 발전단계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비너스의 탄생’ (1485경)은 그 절정을 나타내고 있다. 이 두 그림은 카스텔로에 있는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의 별장을 위하여 그린 것이지만, 지금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있다. 선명한 색채와 사실적인 세부묘사가 특징인 14세기 후반 국제 고딕 양식의 영향이 ‘봄’에 크게 나타나 있지만, 이 그림에서는 표현이 더욱 부드러워졌고 고대 그리스, 로마 미술에 관한 새로운 이해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불굴의 정신’, ‘봄’, ‘비너스의 탄생’은 가장 잘 알려지고 유명한 보티첼리의 작품으로서, 그의 미술을 평가할 때 16세기의 바사리가 묘사한 ‘우아함’이나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 이후 20세기의 미술사가들이 말한 ‘선의 율동’ 등 항상 거론되는 그의 대표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교황 식스투스 4세의 초청으로 로마에 가서 1481년 여름부터 1482년 봄까지 머물며 교황의 초상화 몇 점과 시스티나 예배당의 벽면에 대형 프레스코 3점을 그렸는데 페루지노, 기를란다요, 코시모 로셀리, 시뇨렐리, 핀투리키오, 피에트로 디 코시모 등의 유명한 화가들도 이 일에 함께 참여했다. ‘코라의 처벌 : Punishment of Korah’을 비롯한 이 작품들에는 고대 로마 미술에 대한 그의 새로운 인식이 뚜렷하게 보이고 있는데 여기서는 로마 양식에 대한 핀투리키오 식의 현학적 표현이 자연주의 및 그 웅장함과 함께 융합되어 나타난다.
그는 1482년 10월경 페루지노 및 기를란다요와 함께 피렌체로 돌아갔다. 1483년 자노초 푸치와 루크레치아 비니의 결혼에 쓰일 2개의 결혼 예물함 (카소니)을 위한 4점의 그림을 설계·감독했다. 비슷한 시기에 볼테라 근처에 있는 로렌초의 빌라 델라 스파달레토에 페루지노와 기를란다요 및 리피와 함께 중요한 프레스코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외에도 그는 1480년대에 피렌체의 예배당과 교회에 많은 프레스코와 그림들을 남겼다. 1491년 보티첼리는 피렌체 대성당의 정면을 설계하는 위원회에서 일했다. 1494년에는 그의 형 시모네와 함께 산프레디아노의 입구에 집과 약간의 땅을 샀다. 1496년 여름 산프레디아노 근처에 있는 산타마리아디몬티첼리 수도원에서 ‘성 프란키스쿠스 : St. Francis’를 그렸고, 1497년에는 몇 명의 조수들과 함께 카스텔로에 있는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의 별장에 그림을 그렸다. 1498년에는 피렌체에서 산타마리아노벨라 교회 근처에서 살았으며, 그 다음해에 ‘아르테 데이 메디치 에 델리 스페치알리’에 들어갔다.

– 후기 양식 및 말년
보티첼리의 후기 양식, 즉 1490~1510년의 작품은 그 성격을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참고자료가 되는 작품 제작 연대가 확실하게 밝혀져 있는 것이 드물기 때문에 후기 양식의 발전 과정을 밝히기도 어렵다. 1490년대 초기에 보티첼리는 그 규모와 개념에 있어서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에 매우 가까운 웅장한 그림들을 그렸다. 틀에 박힌 감상적인 주제를 정성들여 각색한 보티첼리의 연작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지만, 다 빈치가 밝은 부분과 가장 어두운 부분의 경계를 부드럽게 스푸마토식으로 처리한 데 반해, 그는 그러한 기법에는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특히 이런 점에서 두드러지는 작품은 2점의 ‘피에타 : Pietà’인데, 하나는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에 있고 다른 하나는 밀라노 (폴디 페촐리 미술관)에 있다. 이 작품들에서 보티첼리가 사용한 색채와 빛의 효과, 양감의 처리, 평부조 양식 등은 ‘도니 마돈나 : Doni Madonna’에 뚜렷이 나타나 있는 것처럼 다 빈치의 양식보다는 미켈란젤로의 초기 양식에 훨씬 더 가깝다. ‘요한의 묵시록’의 예언을 묘사하고 있는 수작 ‘신비한 탄생 : Mystic Nativity’은 보티첼리의 발전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그림은 규모는 작지만 이전보다 풍부하고 선명한 색채를 사용하고 있다. 붓놀림은 유연해지고 형태는 더욱 단순화되었다. 공간은 고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관습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졌으면서도, 또한 새로운 색채와 함께 북유럽 미술에 대한 그의 새로운 관심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1501년으로 연대가 적혀 있는 이 그림은 보티첼리가 사보나롤라의 예언적 신학이론에 몰두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로 인용되어 왔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형의 일기에 보티첼리가 사보나롤라의 이론에 공감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점과 보티첼리가 사보나롤라의 신봉자였다는 바사리의 진술을 근거로 강력하게 뒷받침되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이 플랑드르의 화가인 휘고 반 데르 구스의 ‘포르티나리 제단화 : Portinari Altarpiece’와 도상학적인 유사점을 지니고 있으며, 게다가 15세기 이탈리아 미술에서는 성모를 일종의 예언자로 여기는 경향이 많았기 때문에, 보티첼리가 사보나롤라를 본받아 신비한 양식을 만들어냈을 것이라는 견해는 논쟁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자료에 따르면 보티첼리는 관례적인 길을 따르는 성공적인 생애를 보냈으며 강력한 후원자들을 통해 재정적으로도 상당한 도움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그의 재정적 불안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는 것은 보티첼리가 자신의 돈에 무관심했다는 바사리의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그는 피렌체의 모든 중요한 교회로부터 작품을 의뢰받았으며, 마침내 교황의 명령으로 로마에 불려가 시스티나 예배당을 장식하는 일에 참여했다. 개인적으로 의뢰받은 작품으로는 피렌체의 행정중심지인 팔라초 델라 시뇨리아와 메디치가의 사람들을 위한 것들이 있다. 그의 주요후원자는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였으며, 위에서 말한 작품들 외에도 후원자를 위해 단테의 ‘신곡 : Divina commedia’에 붙인 뛰어난 삽화 연작들을 남겼다.

‘장엄 양식’을 이루어나갈 무렵인 1490년대 중반, 보티첼리는 1495년경의 ‘아펠레스의 명예훼손 : The Calumny of Apelles’을 시작으로 해서 그의 가장 말기 작품으로 알려진 성 제노비우스의 생애를 다룬 연작물까지를 모두 다시 손보았다. 그의 후기 작품은 규모가 점점 작아지고 북유럽의 양식과 그가 젊었을 때 배운 화가들의 전통에 따라 의식적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양식을 받아들인 것이 눈에 띈다. 그는 해부학적 사실과는 관계없이 표현적·장식적으로 형태를 왜곡하여 묘사했다. 후기 작품들에서는 또한 무지개 색조에 기초를 둔 보다 선명한 색조가 특징적이다. 그러나 성 제노비우스 연작에 나타난 특징은 이전의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그는 위에서 약술한 양식상의 특징들을 기본으로 하되 크게 수정을 가한 일련의 환상적인 장면들을 그렸다. 배경은 건축가인 루치아노 라우라나가 사용한 초기의 건축적 원근법의 명료함을 떠올리도록 묘사되어 있으며 완전히 추상적이고 비자연적인 색채는 15세기초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들과 비슷하다. 보티첼리는 목판에 그린 이 그림에 매우 단순하며 정감있는 인물들을 가득 그려넣었다. 1502년 11월 보티첼리는 남색 (男色) 행위로 고발되었지만 결국은 혐의를 벗었다. 1504년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 David’를 놓을 곳을 결정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위원회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속한 종교단체인 ‘콤파냐 디 산 루카’에 낼 회비가 밀려 있었다 (1503~05)는 사실은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그의 재정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보티첼리는 1510년에 죽었으며 피렌체의 오니산티 교회에 묻혔다.
– 사후의 평판
보티첼리는 회화양식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에 살았다. 그는 다음 세대인 전성기 르네상스의 거장들에 가려져 그가 죽은 뒤 몇 세기 동안 비평과 역사적 해설에서 소홀하게 평가되어왔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같은 라파엘 전파 미술가들이 그의 공적을 크게 인정하고 찬사를 보냈다. 존 러스킨, 월터 페이터, 버너드 베런슨 같은 19세기 후반이나 그 이후의 비평가들이 처음으로 그의 양식을 분석한 해설들을 썼으며, 이것들은 아직도 현대비평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20세기에는 보티첼리의 주제에 관한 복잡한 문제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크게 집중되었다. 학자들은 특히 시학 및 철학서적들, 그리고 이 저술들에 대한 메디치 가 인문주의자들의 이해방식에서 그 근원을 찾으려고 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보티첼리의 회화양식에서 당대의 사고가 어떻게 표현되었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저술들에 나타난 사고체계를 분석함으로써 보티첼리의 미술을 이해하려고 했다.이러한 접근방법의 가장 훌륭한 본보기는 독일의 미술사가인 아비 바르부르크가 쓴 평론으로, 그것은 그 자체로 미술사의 한 학파를 수립했다. 바르부르크는 보티첼리와 동시대 화가들의 선적인 양식에 들어 있는 역사적 · 심리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봄’과 ‘비너스의 탄생’이 그려진 시기의 글들을 문헌학적으로 정밀하게 조사한 뒤 그 연구결과를 르네상스 양식의 감정표현법을 분석하는 데 적용했다. 결국 이 연구를 통해 학자들은 그와 당대 인문주의자들의 시와 철학 및 학문 등에서 보티첼리 회화의 기초를 찾아냈다.

종교적 주제를 다룬 보티첼리의 그림들에 들어 있는 복잡한 이미지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파악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고전시대의 신화적인 주제를 다룬 그의 그림들, 특히 ‘마르스와 비너스 : Mars and Venus’, ‘봄’, ‘비너스의 탄생’에 주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 그림들의 주제가 나타내는 정확한 의미는 아직도 논란이 많지만, 그래도 확실한 것은 이 그림들에서 주제를 다루는 방법은 당대의 그 어떤 양식에 못지않게 새롭고 근본적인 혁신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 그림들은 단순히 특정한 저술들의 삽화에 그치지 않고 여러 가지 저술들에 의존하면서, 묘사된 대상의 특성을 충분히 나타내려 하고 있다. 그리하여 ‘아펠레스의 명예훼손’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풍자작가인 루키아노스, 루키아노스를 해석한 구아리노 베로네세, 그리고 루키아노스를 의역한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등을 참고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다른 참고자료들도 확인된다. 따라서 보티첼리는 그림을 구상할 때 여러 자료를 모아 세밀하게 연구했다고 할 수 있다.
– 주요작품
동방박사의 경배
봄 (프리마베라)
비너스와 마르스
비너스의 탄생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의 이야기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