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소개
성요한의 십자가의 그리스도
살바도르 달리 / oil paint / 1.2m × 2.1m / 1951년 / 켈빈그로브 미술관 및 박물관 (2018 ~ )
1930년대에 파리에서 초현실주의로 활동하다가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미국에서 활동후 다시 스페인으로 귀국해 무교에서 카톨릭으로 개종해 30년간은 종교적인 색채의 그림을 그렸다.
– 성요한의 십자가의 그리스도
.작가: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 1904 ~ 1989)
.크기: 가로 1.2m × 세로 2.1m, oil paint (1951년)
.화풍: 초현실주의
.위치: 켈빈그로브 미술관 및 박물관 (2018 ~ )
작가는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 출신이나 종교와는 거리가 먼 환경에서 성장했다. 교회가 다수가 되어 국교 (國敎)의 분위기가 된 곳에서 생길 수 있는 여러 문제점들이 그림자로 드리우게 된다. 전통과 교리를 앞세운 개인의 자유제한과 사랑과 자비의 외침과는 거리가 먼 위선적인 면들이 종교의 영향 아래 있는 곳일수록 더 극명히 드러나게 마련이다.
교회가 보이는 그림자에 실망해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더 극렬한 사람들은 종교를 인간 성숙의 방해물로 여겨 아예 없애야 한다는 견해를 지닌 반교회 주의자들이 생기게 되는데, 작가의 아버지 역시 무신론자로서 교회의 정치적 영향력이나 권위적인 태도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작가는 일찍부터 교회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키우게 되었고 당시 지성인들을 매료시켰던 독일 철학자인 칸트 (E. Kant, 1724 ~ 1804)와 니체 (F. Nietzsche, 1844 ~ 1900) 프랑스 계몽주의자로서 해박하고 날카로운 역사의식으로 신랄하게 교회를 비판한 볼테르 (Voltaire, 1694 ~ 1778)의 작품에 심취하면서 교회의 가르침과 거리가 먼 극단의 자유주의적인 경향에 빠지게 되었다.
이 자유로움은 미술을 공부하면서, 지난 회 연재된 ‘세 명의 증인들이 보는 앞에서 아기 예수님을 채벌하시는 성모’의 작가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와 함께 그동안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던 이성의 영역에서 벗어나 프로이드의 무의식과 꿈의 분석에서 야기된 무의식과 공포, 두려움, 강박관념의 표현을 중시하는 초현실주의 (Surrealism)에 심취하게 된다.
그는 잠재의식의 심상 (心像) 탐구로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잠재의식이 갖고 있는 성적 의미의 탐구를 위해 프로이드 (S. Freud, 1856 ~ 1939)의 무의식 이론을 수용하고, 인간 이성을 지배하는 잠재의식의 더 위대한 실체 확립에 노력했으며, 의도적으로 환각상태를 유발하면서까지 무의식 세계의 체험을 위해 노력한 결과, 그의 작품 양식은 놀랄만큼 발전해서 초현실주의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으며, 그의 대표작으로는 유명한 ‘기억의 집념’ (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년)이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이성적 논리에 바탕을 두고 전통 안에 영글어진 것을 진리로 강조하는 종교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자유로운 표현들을 통해 나름대로의 진실을 표현하고자 했기에, 전통적인 종교인들과 교회에 불편한 심기를 남기기도 했다.
작가는 초현실주의자로서 일생 동안 기괴함을 추구하면서 과대 망상적인 과시욕을 보여 주었는데, 이 모든 것이 바로창조력의 원천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예술가는 편집증의 일종인 망상을 개발해야 하며, 동시에 이성과 의지의 조절이 의도적으로 중지되었음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으며 이 작품은 바로 이런 작가의 성향을 극명히 표현하고 있다.
작가의 이런 태도는 종교와는 거리가 먼 그런 처지의 삶에서 종교적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것이 가능함을 입증하는 예가 되었다. 이 작품은 20세기의 종교화로서 가장 많이 알려진 유명한 것으로 가장 많이 복사되었으며, 그 평가에 있어서도 극단의 찬반의 회오리에 휘말린 것이다.
이 작품이 처음 전시되었을 때 2개월 동안 시장판의 상인에서부터 학생들에 이르기 까지 약 오 만명의 관객이 몰렸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이 작품이 사회에 주었던 충격과 파문을 이해할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라는 주제는 교회 역사상 여러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된 성 미술의 주제였으나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 대단한 충격이 되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세상을 바라보며 우리 위에 달려 계신다. 먼저 그는 골고타라는 전통적인 십자가의 장소를 자기 삶의 많은 시간을 보낸 스페인의 포르트 리카드 (Port Lligat) 바닷가로 설정했는데, 여기는 그가 열 살이나 연상의 연인과 지내던 곳, 자기 삶의 현장이었으며, 전통적인 골고타가 지닌 신성과는 거리가 먼 곳인데, 초현실주의가 의도하는 비현실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엉뚱하기 짝이 없는 이런 착상으로 표현하면서 십자가 사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하게 되었다.
주님은 작가가 생활하던 바닷가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에 달려 우리 가까이 계시는 내재적 존재로서의 친근성을 보이시면서도, 한편으로 구름 형상 속에 또 고개를 숙인 모습이 우리와 떨어진 삶의 공간에 계시는 분으로 묘사되면서, 하나님의 두 속성, 우리 가까이 계시는 내재성과, 우리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 차원에 계신 초월성을 표상하고 있다.
오른쪽 어깨에서 아래를 향해 떨어지고 있는 빛은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비추고 그 끝이 십자가 아래에 까지 떨어지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권능이 지상에 까지 내리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 작품 관련 이야기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로 유명한 살바도르 달리는 원래 스페인 출신이었으나 1930년 대에 파리에서 초현실주의로 활동하다가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미국에서 활동했다.
그는 카톨릭교인이 되기로 결심하여 30년간은 종교적인 색채로 그림을 그렸다.
카톨릭으로 개종 한 후에야 고향 스페인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그는 스페인의 예술적 전통과 더불어 인간과 신에 대해 심오하게 표현된 작품에 자극을 받고 카톨릭 신비주의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자리한 예수상을 그리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되는데 그와 친분이 있었던 지저스 마리 신부가 400년 전인 16세기 수사 성 요한이 예수의 형상을 보고 그렸다는 그림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달리는 그 이야기에 영감을 얻어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그리스도’를 그렸다.
달리는 헐리우드 영화감독을 찾아가서 십자가에 매달릴 스턴트맨을 구해서 줄로 공중에 매달리게 하여 위에서 예수상을 내려다보는 각도로 영화사에서 사진을 찍게했다. 그는 자신이 그릴 그림의 구도를 잡기위해 측량사의 자문까지 받으며 정확한 소실점과 면적을 치밀하게 계산하여 작품을 그렸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의 구도는 달리의 초현실주의의 표현으로 인해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비로움과 신선한 매력을 느끼게해 준다.
작품의 크기는 가로 1.2미터, 세로 2.1미터로 그림에 등장하는 배경 속 요소의 많은 부분을 다른 화가의 작품에서 차용하여 혼합하였다. 그런데 당시는 ‘벨라스케즈’의 사람과 ‘루이 르 나 인’이 그린 배 등의 8점의 그림을 모방했다고 고소까지 당했다. 그러나 표절로 취급당하지 않고 명작으로 남은 이유는 그만의 실험적인 방식과 작품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와 판이하게 다르게 가시 면류관도 손에 못박힘도 전혀 없이 마치 공중부양한듯 공중에 떠있는 신비로운 이 작품은 1951년 12월에 런던의 한 미술관에서 전시 되었다. 미술관에서 수많은 작품 중에 단연 돋보였던 작품은 ‘성 요한의 그리스도’로 많은 관중들이 모여있지만 갑자기 화풍을 바꾼 달리의 작품에 비평가들의 평은 냉담했다.
그 당시 글래스고 미술관 관장이었던 톰 허니맨은 이 작품에 가장 큰 관심을 갖았는데 그는 의대에 다닐 때에도 샌드위치와 사과를 들고 일주일에 이틀은 꼭 미술관에 가서 관람을 했던 열성적인 미술 애호가였기에 작품에 대한 안목도 컸을 것이다. 그는 이때부터 예술에 대한 관심과 흥미로움을 더욱 갖게 되었는데 결국 글래스고 미술관의 관장이 되었다.
글래스고는 영국에서 두 번째 큰 도시였지만 도시를 부강하게 해준 조선업이 하향길로 접어들었고 영국에서 제일 가난한 빈민가도 있었을 정도였으며, 사회적인 개혁도 많이 필요했었다. 톰 허니맨은 도시를 되살리고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게 하기위해선 예술이 큰 몫을 할 것이라고 믿었고 그러기위해 많은 사람들을 예술로 끌어들이는 것을 목적사업으로 정했다. 허니맨은 예술에 대해 고집도 있었고 이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지만 농담삼아 풋볼팀을 유치할 수 있다면 중앙 홀까지도 개방할 의사가 있다고까지 했다. 1950년대에 예술에 대한 그의 사고방식은 고정관념에 매여있지않고 창의적으로 열려있었으므로 존경할 인물이다.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은 철강산업으로 유명했으나 산업이 쇠락되면서 도시가 페허상태였다. 1990년대 후반, 시민들 사이에서 도시를 재건하기 위한 작은 움직임들이 시작되었고 도심지 근처에 남아있던 옛 항구를 시 외곽으로 옮기고, 그 주변을 하나씩 정비했다. 그런데 무엇보다 구겐하임의 세 번째 미술관을 이 도시에 유치한 것은 도시재생과 경제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했으며 세계에서 주목하는 도시가 되었다.
톰 허니맨은 미술관의 발전을 위해 달리의 ‘십자가의 성요한 그리스도’를 사들여야겠다고 결심했고 실제로 매매 계약 할 때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로 빈틈없이 저작권까지도 구입했다. 저작권 구입은 당시로서는 선례가 없는 상황이었고, 그렇게 하면 높은 가격을 회수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작품가를 120,000파운드에서 8,000파운드로 깎았으며 달리도 저작권을 양도하는데 동의함으로써 작품 매입을 했다. 그러나 거래가 성사되자 82,000파운드의 높은 가격에 작품을 산 것에 대해 모두 미친 짓이라며 언론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심지어 ‘대단한 달리’라고 비꼬는 평이 신문에 대서특필로 나왔다.
처음에 작품을 살 때 톰 허니맨 미술 관장은 교육적인 목적보다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는 수입을 목적으로 했고 이 작품은 2005년에는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 되었다. 작품은 톰 허니맨의 예견대로 글래스고의 문화와 역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달리는 무종교주의자로 스코틀랜드에서 종교적인 주제의 그림을 그렸지만 종교에 국한되지않고 그의 초 감각적인 시선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그러나 오늘 날에는 어떤 작품을 그리든 아무 문제가 되지않는 작품의 주제를 그 당시에 사회는 폐쇄적이었는지 그의 종교에 대한 순수한 마음은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작품은 보다 역사적인 장소인 캘빈 그로브 미술관 및 박물관 (Kelbpvingrove Art Gallery and museum)으로 이동했다.
달리는 사후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독특하게도 묘지가 아닌 자신의 고향인 피게레스의 박물관 지하에 묻혔다. 달리는 생전 3억 2500만 달러 (약 3513억원)의 가치의 작품들을 유산으로 남겼으나 상속받을 자녀가 없어 작품들이 정부에 귀속됐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