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소개
영원한 우상 (Eternal Idol)
오귀스트 로댕 / 석고조각 / 1893년 / 로댕박물관
여인은 지친 듯 힘없이 남자에게 기대고 있고, 남자는 이제 아무 걱정 말라는 듯 여인을 껴안고 있다. 까미유의 심리적 의존 상태와 로댕의 뜨거운 사랑을 암시한 작품 ‘사쿤탈라 (고대 인도의 칼리다사의 희곡)’다. 까미유가 만든 이 작품은 1888년 살롱전에 출품돼 대상을 차지한다.
로댕도 서로 상대방에게 어떤 존재인지 잘 보여주는 작품을 만든다. 바로 ‘영원한 우상’. 남자는 여인의 가슴 아래 두 팔을 뒤로한 채 여인을 숭배하듯 기대어있다. 여인도 팔을 뒤로 한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두 작품의 분위기가 서로 닮았다. 까미유가 만든 석고 작품이 로댕의 작품보다 1년 앞선 것이다 보니, 로댕이 까미유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둘의 작품들은 분위기가 비슷했는데, 그 이유로 표절시비에 자주 휩싸였다.
둘은 10년 동안 많은 시간을 함께했고, 아이디어를 숱하게 공유했으며, 작품에 대한 상대방의 의견을 서로 존중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일일 터. ‘지옥의 문’ ‘칼레의 시민들’ ‘입맞춤’ 등 로댕의 걸작들이 이 시기에 탄생했고, ‘사쿤탈라’ ‘지강티’와 같은 걸작들이 까미유의 손에서 나왔다. 특히 ‘지옥의 문’에 등장하는 손이나 발은 까미유가 전담하다시피 만들었다.
서로가 함께 한 시간, 지옥의 문, 키스, 칼레의 시민 등 로댕의 걸작들과 사쿤달라, 지강티와 같은 클로델의 주옥 같은 작품들이 탄생했으니, 이 두 예술가의 만남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은 실로 위대하다 할 수 있겠다.
1893년 제작된 ‘영원한 우상’에서 양 손을 뒤로 하고 무릎을 접은 채 여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기대있는 남성은 로댕 자신이고 몸을 뒤로 살짝 젖힌 채 남자를 내려다 보고 있는 여인은 까미유 클로델이다. 이 작품은 클로델의 ‘사쿤달라’와 종종 비교된다.
‘사쿤달라’에서 여인은 팔을 늘어뜨린 채 지친 듯 남자를 향해 기대있고, 남자는 그녀를 일으키려는 듯 온 힘을 다해 부둥켜 안고 있다. 반면 ‘영원한 우상’에서는 여성은 하나의 우상처럼 보인다. 여인의 가슴에 경외와 사랑의 입맞춤을 하고 있는 남자는 자신의 뮤즈를 향한 숭배와 헌신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클로델은 로댕을 누구와 공유한다는 사실을 못 견뎌 했고, 클로델이 결혼을 요구하자 로댕은 각서까지 써주며 로즈와 헤어지고 그녀만의 남자가 되겠다고 맹세했으나 로즈가 클로델을 찾아와 난리를 치자 로댕은 클로델을 홀로 내버려두고 로즈와 떠나고, 크로델은 그와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아마도 50이 넘은 로댕은 독점욕이 강한, 더 이상 어리지 않은 연인보다는 사회적 평판이나 쌓아 올린 명성이 더 중요했는지 모른다. 수십 년 동안 곁을 지켜온 사실혼 관계의 부인을 버리는 것은 당시의 도덕적 잣대로 볼 때 파렴치한 짓이라 여겼기 때문이리라.
로댕과 헤어진 클로델은 여성 조각가를 무시하는 화단의 풍토에서 홀로 서기를 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주위의 방해와 편견으로 생활고와 병에 시달리며 결국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 성공한 남자의 짙은 그림자 – 명성 뒤의 특별한 여자 … 로댕과 클로델
로댕은 명성을 얻기 전에도 고독했다. 그러나 명성은 그를 더 고독하게 만들었다.
로댕의 비서였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명성이란 결국 하나의 새로운 이름 주위로 몰려드는 모든 오해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남자에게 명성이란 무엇인가? 명성 뒤에는 항상 짙은 그림자가 있다. 그 그림자는 여자일 경우가 많다. 그것이 조강지처건 정부건 애인이건.
로댕 역시 성공을 거머쥔 후 숱한 여자를 만났다. 그는 여성을 숭배할 줄 알았다. 로댕은 “여자는 이 시대에 여전히 걸작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말하며 유혹의 화술을 기막히게 구사했다.
마치 조물주의 재능을 가진 듯한 방탕한 예술가 로댕은 피부를 종이에, 살을 흙에다 옮겨놓으며 그들을 불멸의 작품으로 변모시켰다. 그런 그를 저항할 수 있는 여자가 있었으랴. 동시에 어떤 여자도 그런 남자를 새장 안에 가두는 것 역시 불가능해 보였다.
1883년 말 이미 조각가로 성공한 마흔셋의 로댕은 19살의 카미유 클로델을 만난다. 클로델의 기발한 착상과 독창적 재능,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에 감동받은 로댕은 순식간에 그녀에게 빠져든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조강지처 같은 로즈 뵈레가 있었던 로댕은 숱한 여자를 만났지만 결국 언제나 로즈 곁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러나 클로델만은 그가 만났던 여느 여자와 달랐다. 어렸을 적부터 인문학 교육으로 뼈가 굵은 클로델은 그가 찾던 지식과 미모를 겸비한 이상적인 여인상이었다. 나이는 24살이나 어렸지만 지적인 대화에서는 로댕을 능가하는 부분이 있었다. 로댕의 조수가 되고 제자가 된 클로델 역시 더할 수 없이 그를 숭배했다. 로댕의 작업에서 손과 발같이 어려운 부분은 그녀 차지였다.
어디 그뿐인가? 사랑하는 연인 클로델은 로댕에게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모델이었다. 로댕의 ‘다나이드’는 클로델의 뒷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머리카락과 얼굴을 바닥에 파묻고 있는, 얼굴을 알 수 없는 여자의 등의 굴곡은 마치 훗날 비극의 주인공이 될 클로델을 앞서서 재현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로댕과 연인으로 지내던 1888년, 클로델은 ‘내맡김-사쿤탈라’로 살롱에서 최고상을 받고 조각가로서 입지를 다진다. 이 작품이 출품됐을 때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로댕이 손봐줬을 거라고. 클로델은 좌절했고, 그때 로댕이 나서서 그녀를 유능한 동료 조각가로 치켜세운다.
“클로델 양이 내 제자였던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그건 아주 잠깐 동안의 일이었소. 나는 그녀에게 의견을 묻고 비평을 들은 다음에 최종적으로 작업을 확정짓습니다. 한마디 더 하지요. 그녀에게 황금이 묻힌 장소를 가르쳐준 사람은 나일지 몰라도, 황금을 찾아낸 것은 결국 그녀라는 것을 믿어주세요.”
11년 후 두 사람이 완전히 결별한 후에도 미술계에선 여전히 클로델의 작품에서 로댕의 영향을 언급했다. 1899년 살롱에 ‘클로토’를 출품했을 때 평론가는 그 작품 속에서 ‘로댕의 데생’의 영향을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썼다. 클로델은 잡지사에 편지를 보내 거세게 항의했다. ‘클로토’가 온전한 자신의 창작품이니 기사의 일부를 정정해주기 바란다고.
그 후 급기야 로댕의 명성에 누를 끼칠 만한 반전이 일어났다. 로댕이 클로델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스캔들이다. 클로델의 1888년 작품인 ‘사쿤탈라’와 로댕의 1889년작인 ‘영원한 우상’이 표절 시비의 표적이 된 것이다.
사실 ‘영원한 우상’은 아무리 봐도 ‘사쿤탈라’와 전체적인 구조, 동적인 포즈가 흡사하다. 그뿐 아니라 긴장된 동작 속에서 느껴지는 격렬한 에너지와 육감적인 특징도 매우 유사해 로댕이 클로델 작품의 아이디어를 몰래 빌렸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표절 시비와 스캔들은 이미 사회적 성공을 거머쥔 로댕에게 엄청난 부담감을 줬다. 겁을 집어먹은 로댕은 의혹을 산 클로델의 작품을 출품하지 못하게 압력을 가함으로써 표절 시비를 잠재웠다. 그렇지만 두 사람 사이는 결정적으로 파국의 길로 향한다.
그뿐 아니라 로댕은 클로델의 작품 제작을 방해하기도 했다. ‘중년(1899년)’이라는 작품에서 클로델은 한 여자에게 끌려가는 나약한 남자와 애원하는 여자를 표현했다. 누가 봐도 그 작품은 로댕과 그의 아내나 다름없는 여인 로즈 뵈레 그리고 클로델과의 삼각관계를 표현한 것이었다. 로댕은 이 작품이 몰고 올 스캔들을 감지하고, 이 작품이 주물로 완성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물론 로댕이 그런 파렴치한 일만 했던 것은 아니다. 로댕은 자신의 치부를 폭로하지 않는 일이라면 기꺼이 클로델을 도왔다. 예를 들면, 로댕은 클로델 몰래 전시를 주선해주거나 고객을 소개해줬다. 남의 이름을 빌려 작품을 사주고 한 달에 몇백프랑씩 생활비를 보내주기도 했다. 또한 클로델의 대인기피증과 결벽증적인 태도를 걱정하며 편지를 보냈다.
“그대의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을 보는 것이 안타깝소. 자잘한 구설에 동요되지 마시오! 무엇보다 변덕스러운 싫증으로 친구들을 잃지 마오!”
그러나 로댕의 이런 이중적인 태도는 그녀를 더 자극할 뿐이었다.
클로델은 자신의 삶과 예술에서 로댕의 흔적을 완벽하게 몰아내기 위해 더욱 조각에 몰두했다. 그러나 생활은 점점 더 궁핍해져 최악의 재정난에 시달리게 된다. 그녀는 이 모든 불행이 로댕 때문이라고 치를 떨었다. 클로델은 ‘망할 놈의 로댕’ ‘교활한 놈’이라고 부르며, 로댕이 자신을 파멸시키기 위해 온갖 음모를 꾸민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댕은 대표작 ‘지옥의 문’ ‘생각하는 사람’ ‘칼레의 시민’ 등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승승장구한다. 이런 로댕의 대대적인 성공은 클로델에게 더 큰 좌절감을 안겨줬을 터다.
클로델은 문을 걸어 잠근 채 은둔생활을 시작했고, 모든 사람을 경계하며 금치산자처럼 지내기에 이른다. 자신의 작품을 파괴하는 등 우울증과 피해망상이 심해져만 갔다. 겉모습은 거의 길거리 부랑아처럼 도무지 씻지 않은 산발한 모습이었고, 작업실은 저장강박증에 걸린 사람의 쓰레기 하치장 같았다. 문은 꼭꼭 걸어 잠그고, 밤늦게만 외출하고, 중얼거리며 다녔고, 작업실엔 동네 고양이들이 득실거렸다.
급기야 그녀는 “로댕이 나의 재능을 두려워해 나를 죽이려 한다”고 주장했고, 1913년 클로델의 나이 49세 되던 해 가족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수용되기에 이른다. 클로델을 너무도 사랑했던 아버지의 죽음 이후의 일이었다. 이후 클로델의 병은 많이 회복됐지만 피해망상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녀는 로댕이 죽은 지 17년이 지났는데도, 그가 누군가를 시켜 자신을 독살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로댕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죽을 때까지 지속됐던 것이다.
클로델은 그렇게 30년의 수용소 생활에서 단 한 점의 조각도 만들지 못하고 죽었다. 그녀의 단호한 의지 때문이었다. 자기가 내일 당장 수용소를 탈출할 수 있을 거라는, 결코 가능하지 않았던 희망을 품었다. 수용소를 나갈 때까지 작품을 만들지 않겠다고도 결심했다. 가만 보면 그녀는 자기 의지의 희생양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_ 유경희 미술평론가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