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소개
자크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루이 다비드 / 1787년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 작품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드는 순간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신을 부인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아테네 정부로부터 고소당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사상을 버리거나 아니면 독약을 마시고 죽는 사형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의 친구인 크리톤은 망명의 길을 열어 후일을 도모하도록 끈질기게 권유했으나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선택했다. 그는 법이란 시민 상호 간의 합의된 약속으로, 사회의 구성원인 시민은 이 약속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신념도 지키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도 이행했다. 개인의 이익에 앞서는 사회적 이념과 실천, 이것이 바로 다비드가 이 주제를 택해 그림을 그린 이유였다.

– 자크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예술가: 자크루이 다비드
.제작: 1787년
.위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시대: 신고전주의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플라톤의 ‘대화편’을 토대로 구성된 이 장면은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고 죽기 직전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침대에 앉아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으로 독배를 잡으려는 이가 소크라테스이다. 사실 작품 속 소크라테스는 그 어떠한 인물이나 대상보다 밝게 빛나고 있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게 표현되었다. 더구나 이 빛은 실내의 촛대나 혹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물 스스로 빛나고 있는 것으로 다비드는 이러한 명암 대비를 통해 소크라테스의 존엄성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또한 다비드는 이탈리아에서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조각과 르네상스 회화에 대해 연구하면서 근육과 힘줄을 실감 나게 묘사하는 방법, 고상하고 아름다운 신체를 고전적 필치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는데, 이 작품에서 그 성과를 십분 발휘했다. 작품 속 소크라테스는 고대 로마의 조각과 같은 모습으로, 고귀한 신체에 위대한 영혼을 가진 인물이요, 그 행위가 인간의 모범이 되고 사회의 이상이 되는 인물로 그려졌다.
침대 끝에 소크라테스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듯, 혹은 체념한 듯 앉아 있는 노인은 플라톤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 그림에서처럼 나이 든 모습은 아니었지만, 서양철학의 또 다른 거인인 플라톤을 너무 젊게 그릴 수 없었던지 이 작품에서 플라톤은 중후한 이미지로 표현되었다. 소크라테스의 무릎에 손을 얹고 있는 사람은 크리톤으로 마지막까지 망명을 권하던 친구이다. 한편 뒤쪽 원경의 계단으로는 그의 아내 크산티페가 나가고 있다. 비극적인 장면을 보고 충격으로 쓰러질 것을 염려하여 그의 제자들이 내보내고 있는 중이다. 최후의 순간 소크라테스는 왼손을 들어 천국을 가리키며 슬픔에 빠진 동료들과 제자들에게 불멸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침착하게 이야기하고(이 제스처는 라파엘의 ‘아테네 학당’의 중앙에 서 있는 플라톤의 손동작에서 본 따온 것으로 보고 있다.) 난 후, 건강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s)에게 평온한 죽음을 선사해 주는 독약을 내려준 것에 대해 감사하고 곧 독약을 마시고는 숨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밝게 빛나는 인물과 어두운 배경 사이의 명확한 명암대비, 고대 조각 같은 신체 묘사, 연극 무대 같은 극적인 공간 구성, 좌 하단에서 우 상단으로 이어지는 균형 잡힌 구도 등 신고전주의 미술의 특징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신고전주의란 이전 시대를 풍미했던 미술 사조인 바로크와 로코코의 과도한 표현을 거부하고 고대 그리스 · 로마의 균형미를 강조한 르네상스로의 복귀를 꾀했던 미술 사조이다. 신고전주의 작품은 엄격하고 균형 잡힌 구도 속에 세밀한 데생, 뚜렷한 윤곽선, 붓 자국이 보이지 않는 정교한 채색을 특징으로 한다. 하지만 다비드는 고대의 예술 형식을 재현하는 것만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그는 고대의 예술 형식에 고대의 도덕과 이상을 담아내고자 했다. 사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그리스 조각의 조형미보다는 로마 공화주의의 정신이었다. 따라서이 작품은 신고전주의의 미학적 완성도 만큼이나 작가의 주제의식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다비드는 고전주의 미학의 정점에 선 화가이지만 그의 작품은 하나같이 미학적 의미보다 주제의식이 더 중요하다.
다비드는 이 작품 외에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형리들이 부루투스에게 자식의 시체를 가져오다’ 등 고대의 도덕적 이상에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혁명 3부작을 선보였다. 그는 이들 작품을 통해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지켜내야 할 신념을 강조하고 시민의식을 고양하고자 했다. 이 작품에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길을 걸었듯이 프랑스 시민들도 목숨을 걸고 부패한 권력에 저항하고 시민의 권리를 쟁취하기를 바라는 의도가 담겨 있다.
급진 혁명당인 자코뱅당이었던 다비드는 1792년 국민공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루이 16세의 단두대 처형에 찬성표를 던지기도 했다. 정치에 적극적이었던 그는 이 시기부터 나폴레옹의 몰락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프랑스 미술계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 하지만 나폴레옹 실각 후 추방되어 1816년 벨기에 브뤼셀로 망명했고,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