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소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수련 연작’
Oil paint, 1895-1919, 오랑주리 미술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년 11월 14일-1926년 12월 5일)는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로, 인상파의 개척자이며 지도자다.
파리에서 출생하여 소년 시절을 르아브르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부댕의 문하생이 되어 정식 미술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 후 1859년 파리로 나가 피사로·시슬레·르누아르·바지유 등과 사귀게 되었다. 마네의 밝은 화풍에 끌려 밝은 야외 광선 묘사에 주력하였다. 마네를 중심으로 르누아르 및 피사로·드가·세잔 등과 함께 신예술 창조에 전력하였다.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에는 런던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터너 등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더욱 밝은 색조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귀국 후, 1874년 그의 동료 화가들과 함께 제1회 인상파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출품된 작품이 물체 본래의 색깔을 쓰지 않고, 신선하고 밝은 색채로만 그려진 데 대해 비난과 공격이 쏟아졌다. 특히 모네의 ‘인상, 해돋이’(1872)가 가장 심한 비난을 받았는데, ‘인상파’라는 말은 이때 모네의 작품을 야유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요 작품으로 ‘인상, 해돋이’ ‘짚단’ ‘생 타들레스의 테라스’ ‘파라솔을 든 여인’ ‘수련’ ‘루앙 대성당’ ‘일본식 다리’ 등이 있다.
클로드 모네는 다양한 풍경을 찾아 영국, 네덜란드 등을 여행했고 조국 프랑스에서도 여러 곳을 이사 다녔다. 1871년 파리를 떠나 시골 마을 아르장퇴유에서 작품 활동을 한 그는 이후 프아시와 베퇴유 등을 거쳐 1883년에는 지베르니라는 파리 외곽 시골마을에 가족들과 함께 정착하게 된다.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43년간 모네는 지베르니의 집에서 정원을 가꾸며 작품 활동에 전념, 걸작으로 꼽히는 ‘수련 연작’ 등을 완성한다.
지베르니의 모네의 집은 그가 지냈던 집과 작업실, 꽃과 나무로 이루어진 집 앞의 ‘꽃의 정원’, 그리고 연못이 있는 ‘물의 정원’으로 구성돼 있다. 작품 활동을 하며 부유해진 모네는 1895년 물의 정원 쪽 땅을 사 인공연못을 파고, 수련을 심고, 일본식 다리를 만들어 세웠다.
지베르니로 이사 온 후에도 한동안은 그림 여행을 다녔지만 말년에는 지베르니를 벗어나지 않고 수련을 그리는데 몰두했다.
모네의 대표작 ‘수련’은 오랫동안 수련을 습작했고, 연못과 그 위의 수련, 연못 위에 비친 나무 그림자와 구름 그리고 빛에 따라 달라지는 그들의 모습을 오랫동안 관찰했다.
빛과 반사가 만들어내는 자연의 변화를 오랫동안 관찰한 나머지 그의 시력은 망가지게 된다. 시력이 나빠지고 백내장에 걸린 그는 세 번의 수술을 받았지만 청시증과 황시증에 시달리다 왼쪽 눈은 시력을 잃었다. 약하게 시력이 남은 오른쪽 눈만으로 말년에 ‘수련 대장식화’를 완성하고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86년이라는 긴 인생 동안 오직 자연의 빛만을 찾아 헤멘 모네는 스스로 “나의 가장 아름다운 걸작”이라 칭했던 ‘수련 연작’을 통해 어떤 주제를 그릴까보다 어떻게 빛의 변화를 표현할 것인가를 열중했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모네는 1893년에 지베르니에 수련의 연못을 조성하고, 1895년부터 ‘수련 연작’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죽기 전 삼십 여년 동안 연못에 피어 있는 수련을 그렸는데 그 양만 해도 250편에 달한다. 1차 세계대전 동안 프랑스의 승리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님페아 대장식화’를 오랑주리 미술관 화랑 두 곳에 여덟 점으로 이루어진 연작물로 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모네의 ‘수련 연작’이다.
모네의 수련연작을 보면 그의 붓놀림이 매우 빠름을 볼 수 있다. 내일은 어떻게 빛이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가 항상 붓질을 시작한 첫 장소에서 무조건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그의 환경 조건이 필연적으로 그의 붓질을 빨라지게 했다. 또한 그는 팔레트에서 색을 섞지 않고 캔버스에서 색을 직접 혼합했는데 이것 역시 그림을 빠르게 완성시키기 위한 의도이기도 하고 선명한 색의 효과를 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모네는 당시 이 거대한 작업을 포기하고픈 유혹에 시달렸지만 사실 그가 제일 두려웠던 것은 백내장으로 시달리고 있어서 소중한 시력을 상실하지 않을까하는 염려였다. 수술을 강력하게 대했지만 결국 1919년 눈 수술을 받고 부분적이나마 시력을 회복하고 작업하며 위안하고자 애썼지만 1926년 86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모네 사망 후 정원을 돌보던 의붓딸이 죽자 이곳은 프랑스 정부의 소유가 되어 황폐해졌지만, 보존 의견이 일어나 20년간 복원이 이루어져 1980년 공개돼 현재에 이른다.
임운규 목사(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