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소개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 (Jean-Désiré Gustave Courbet, 1819 ~ 1877)의 ‘돌 깨는 사람들’ (Oil on canvas, 1849)
장데지레 귀스타브 쿠르베 (프: Jean-Désiré Gustave Courbet, 1819년 6월 10일 – 1877년 12월 31일)는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이다.
쿠르베는 1819년 프랑스 프랑슈콩테 주 오르낭 시에서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중등학교 (Collège)를 나온 후, 1837년 브장송 (Besançon)의 왕립 고등학교 (Lycée)에 입학함과 동시에 근교에 있는 사립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배웠다. 리세 졸업 후 1840년 쿠르베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할 계획으로 파리로 간다. 그러나 곧 법학 수업을 포기하고 그림 그리기에 전념하여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847년 네덜란드를 여행한 후, 렘브란트의 화풍, 베네치아화파 그리고 에스파냐 화풍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 분석한다. 1850년을 전후로 하여 쿠르베는 자신의 고유한 화풍인 사실주의 색채를 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철저한 사실주의는 천사를 그리라는 주문에 “천사를 실제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릴 수 없다”라고 딱 잘라 거절했다는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예술활동에 숨기보다는 파리코뮌에 참여할 정도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58살에 짧은 생을 마감하셨다.
- 일화
부유한 농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는 법학가가 되려 했으나 포기하고 화가의 길을 걸었다.
그의 화가로서의 특징은 철저한 사실주의라 할 수 있다. 천사를 그려달라는 누군가의 요청에 “난 천사를 본 적이 없다. 천사를 내 눈앞에 데려다놔라. 그때 그려주겠다.”라 답한 것은 유명한 일화. 그래서 사실주의를 무척 싫어하던 인상파 화가 에드가 드가는 쿠르베가 그린 그림을 보고 “그래서 어쩌라고? 차라리 사진을 찍으면 될 거 아냐?”라는 비아냥을 쏟았는데 당연히 쿠르베와 드가의 관계는 물과 기름이었다. 1859년에는 국제박람회에 점잖은 그림을 낸다는 조건으로 자신의 작품을 출품해보라는 정부 미술관장의 권유가 있었으나 단호하게 거절하고 박람회장 정면으로 자리를 마련해 개인전을 열었다. 관람객이 없어서 실패했고 그 중 유명한 작품이 ‘화가의 아틀리에’였다.
원래 법학가 지망생이라 그랬는지 파리코뮌에 참가할 정도로 정치와 사회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훗날 파리 코뮌이 무너지자 의원이었던 쿠르베는 스위스로 망명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 돌 깨는 사람들 (Oil on canvas, 1849)
그림 속에 돌을 깨고 있는 두 사람이 보인다. 그들은 돌을 깨는 노동자로 그림 속에 그들의 충실한 삶의 현장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은 ‘사실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귀스타프 쿠르베 (Gustave Courbet)’의 작품으로 제목 역시 ‘돌을 깨는 사람들’이다.
쿠르베는 화폭에 노인과 소년을 그렸다. 그들의 옷은 헤어져 너덜너덜하고 양말은 구멍이 나 있다. 특히 소년은 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 같은데,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무거운 짐을 들기 위하여 깅낑거리고 있다. 노인 역시 무릎을 꿇고 돌을 깨고 있다. 이 그림은 밀레가 그렸던 농민들의 종교적 경건성과 낭만주의적 태도와 확연히 달랐다. 그가 그린 그림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정서를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회의 진실한 모습을 담은 이 그림은 파리의 살롱전에 처음 전시되었을 때 ‘추하다.’는 평을 받았다. 당대에 주목받던 들라크루아 (Ferdinand victor)나 앵그르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의 그림처럼 이상적인 외모의 인물도, 권위 있는 신분의 사람도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모습과 남루한 차림새가 눈에 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노동자를 그린 작품은 당시 사람들에게 낯설고 추하게 느껴진 것이다.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미술이 주목을 받고 있던 시절, 쿠르베는 신고전주의의 형식적 이상주의도 아니고 낭만주의의 감성적인 사물의 왜곡이 아니라 사물이 보이는 대로 그렸다.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은 예술의 사회적 공익성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이 작품에는 아름다운 여신도 품위있는 부르조아의 신사들도 없었다. 그리고 아픔다운 풍경도 없었다. 이 작품 속의 인물 주변에 있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계급적으로 말하면 프롤레타리아였다. 기존의 예술 세계, 특히 화폭에는 등장한 적이 없는 그런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을 화폭에 담았으니 당대의 귀족들과 부르조아지들은 이 작품에 대하여 맹비난을 퍼부었다. 그들은 화폭에는 아름다운 것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프롤레타리아를 화폭에 담았으니, 이 작품을 보고 “추하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미술사에서 사실주의 작품으로 불린다. 이 작품은 사실주의가 추구하는 미메시스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미메시스란 단순히 외형을 사실적으로 모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미메시스란 현실 속에 있는 실재 정신도 그대로 모사해야 하는 것이었다. 필요하다면 역시적 진실뿐만 아니아 자신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사상까지 모사하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이 작품은 미수사에서 아주 중요하다.
- 노동은 신성하고도 고되다
인간의 노동은 신성하다. 노동으로 생산된 가치야말로 부의 원천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만든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정문 위에 다음과 같은 구호가 아직도 붙어있다. ‘Arbeit Macht Frei (노동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이 말은 원래 성경의 바울 서신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구절을 나치가 강제노동을 정당화하려 견강부회 (牽强附會)로 붙인 구호다. 다만 이런 불온한 의도를 걷어내고 본다면 노동의 가치를 잘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쿠르베는 농부와 노동자의 누추한 모습과 중산층 부인의 뚱뚱하고 세속적인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 이처럼 사실주의 화가들은 현실에 대한 정직한 기록을 지향하며 현실을 주관적으로 변형ㆍ왜곡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충실하게 그리려고 하였다.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은 인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과장이나 꾸밈없이 묘사하고자 했던 그의 사실주의 미술을 집약한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1855년 파리 국제전에 출품했으나 거절당했다. 그의 그림은 예술이란 아름다운 것만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당시 회화의 전통과 사회관습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었기 때문에 화단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저개발지역 경제를 분석하여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아서 루이스 (Arthur Lewis) 교수는 저개발 경제에서 노동시장의 특징은 노동 공급이 ‘무한 탄력적’으로 많다는 점이며, 이 경우 임금 수준은 ‘최저 생계비’ 수준에서 결정된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태의 노동시장에서는 기업에서 노동 수요가 늘어날지라도 임금은 최저생계비 수준에서 상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제학자의 눈은 쿠르베나 밀레와 같은 사실주의 화가의 눈과 같을 것이다. 단 하나의 ‘수평적인’ 그래프로 저개발지역의 노동 공급곡선을 표시하지만, 그 수평적 공급곡선의 배후에 수많은 노동자들의 애환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경제학자는 노동자의 삶과 임금의 문제를 윤리적인 구호나 고용주의 동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적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그러나 마음속 한편으로는 단순한 곡선 뒤에 숨겨져 있는 노동자의 땀과 고통을 느낀다는 점에서 ‘돌 깨는 사람들’을 그린 쿠르베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