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소개
프랑스의 화가 장프랑수아 밀레 (Jean-François Millet, 1814 ~ 1875)의 작품들
장 프랑수아 밀레 (프: Jean-François Millet, 1814년 10월 4일 ~ 1875년 1월 20일)는 프랑스의 화가로, 프랑스의 한 지방에 위치한 바르비종파 (Barbizon School)의 창립자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이삭 줍는 여인들,’ ‘만종,’ ‘씨 뿌리는 사람’ 등 농부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으로 유명하며, 사실주의 (Realism) 혹은 자연주의 (Naturalism) 화가라 불리고 있다.
그는 데생과 동판화에도 뛰어나 많은 걸작품을 남겼다.
밀레의 그림은 19세기 후반의 전통주의로부터 모더니즘으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이삭줍기’와 같은 밀레의 작품은 사회주의자로부터는 찬사를 받았지만, 보수주의자로부터는 비판을 받았다.
사실주의,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 바르비종 화파의 창시자
바르비종파는 1800년대 초중반에 프랑스 파리 교외에 위치한 작은 도시인 바르비종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사실적 풍경화를 자주 그렸던 화가들의 그룹을 지칭한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장프랑수아 밀레가 있다.
주변에 퐁텐블로 숲이 있고, 숲 풍경을 자주 그렸다고 하여 퐁텐블로파라고 불리기도 한다.
바르비종파의 사실주의적 풍경화는 점점 유명해져 미국에까지 그 말이 전해졌으며 여타 풍경화가나 인상주의 화풍에 영향을 미쳤다.
밀레는 숲이나 자연 풍경을 주로 그렸던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들과는 달리 농민의 풍경에 사실적 묘사와 종교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등 독특한 화풍을 추구하였다.
- 씨 뿌리는 사람 (1850년. 미술 박물관, 보스턴)
1849년 밀레는 ‘추수하는 사람들’ (The Harvesters)를 그려 국가에 기증하였다.
파리 살롱에서는 같은 해에 ‘숲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양치기’ (Shepherdess Sitting at the Edge of the Forest)라는 작품을 전시했다.
이 작품은 매우 작은 유화작으로 이전까지 그가 그려왔던 미화되고 목가적인 주제에서 보다 더 사실적이고 화가 개성적인 기법을 사용했다.
같은 해 6월 그는 파리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파리의 교외인 바르비종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농민 화가로서 전원 생활의 정경을 그렸다.
그는 가난에 쪼들렸으나 신념을 굽히지 않고, 농민의 모습을 종교적인 분위기로 심화시켜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하였다.
1850년 밀레는 그의 열렬한 후원자인 상시에에게서, 그에게 작품을 그려주는 대가로 지속적인 후원을 약속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물론 그는 다른 구매 희망자를 위해 작품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 해에 파리 살롱에서 밀레는 ‘이삭 줍는 여인들’ (The Gleaners), ‘만종’ 과 함께 걸작이라 평가되는 3개의 작품들 중에 가장 초기 작품인 ‘씨 뿌리는 사람’ (The Sower)을 전시하게 된다.
목가적인 서정성이 우러나오는 ‘만종’과 ‘이삭줍기’ 못지않은 걸작으로 알려져 있는 ‘씨 뿌리는 사람’은 밀레가 바르비종에서 처음 그린 유화 중 하나다.
이 그림은 어둠이 오기 전인 해질 녘, 가파르게 경사진 산비탈을 배경으로, 건장해 보이지만 아주 젊다고는 할 수 없는 농사꾼이 씨를 뿌리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어둡게 가려진 눈, 마른 듯 굳건한 턱과 벌어진 입 모양은 그가 아주 힘겨운 노동을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더군다나 일몰 직전 마지막 씨 뿌리기를 서두르는 마음까지도 절절히 와닿는다.
1850~1851년 이 작품이 프랑스 살롱에 전시되었을 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그림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렸다.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평범한 농부가 역사화가 그려질 법한 커다란 캔버스에 영웅처럼 등장하고 있는 점을 못마땅해했다.
이전까지 미술작품의 주인공은 신화 속 인물, 역사적 영웅, 상류계급의 사람들에게 한정되어 있었으며, 농부는 그저 어리석은 사람으로 묘사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그림은 사회에 대한 불만을 퍼트리는 아나키스트를 연상시킨다는 등 혁명을 선동하는 불온한 그림으로 여겨져 혹평을 받았다.
1850년에서 53년까지 밀레는 그가 가장 중요시했으며 가장 오랫동안 작업하게 된 작품 ‘추수하는 사람들의 휴식시간’ (Harvesters Resting)을 그리게 되었다.
미켈란젤로나 푸생과 같은 그의 개인적인 영웅 화가들에게 필적하기 위하여 그려진 이 그림은, 밀레의 그림 인생에 있어 농부들의 일상만을 상징적인 형태로 표현하기보다 사회적인 상황 자체를 상징적인 기법으로 나타내는 전환점이 되어주었다.
이 작품은 밀레가 날짜를 기록한 유일한 작품이며, 파리 살롱에서 1853년 2위에 해당하는 메달을 수여받으면서 공식적인 명예를 쌓도록 도와준 작품이었다.
- 이삭 줍는 여인들 (1857년. Musée d’Orsay, 파리)
밀레의 작품들 중 가장 유명한 걸작인 이 작품은 1857년에 그려졌으며 1854년 세로로 긴 캔버스에 그렸던 첫 번째 버전을 다시 각색하여 그린 작품이다.
또 1855년에서 56년까지사용한칭 기법의 영향은 오르세 미술관 (Musée d’Orsay)에 전시된 현재의 작품에 대한 예시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여인들이 밭에서 허리를 굽히고 추수 이후에 남겨진 이삭을 줍고 있는 모습을 서정적으로 그린 것이다.
가난과 곤궁에 처한 유럽과 아메리카의 노동자 계급 (working class)에 대한 민중들의 삶을 그린 상징적 작품이었다.
추수 이후에 남겨진 것들을 줍는 것은 사회에서도 가장 최하급의 일들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밀레는 이 작품에서 이 여인들을 마치 영웅과도 같은 구도 속에서 표현하고 있다.
이전에 그려졌던 첫 번째 버전에서는 옆에 시중드는 종까지 그려넣어져 가난하고 멸시받는 민중들을 마치 귀족이나 왕과 같은 존귀한 인물들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 작품에서는 그 모습은 사라지고 대신 빛이 열심히 일하는 그녀들의 어깨를 밝게 비추고 있다.
그들의 뒤로 수평선까지 끝없이 펼쳐진 밭은 드넓고 장대한 하늘아래 저물어가는 노을빛을 받아 금빛으로 물들어 있다.
이 세 명의 여인들의 모습은 이렇게 밝게 빛을 받은 밭과 달리 그림자가 많이 들어가 배경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은 자연주의에 속한다.
- 만종 (The Angelus, 1857-1859년. Musée d’Orsay, 파리)
이 작품은 부유한 미국인이었던 토머스 G. 애플턴 (Thomas G. Appleton)의 청탁으로 그리게 된 작품으로, 1857년 여름에 교회의 뾰족탑을 배경에 더하면서 완성되었다.
밀레는 처음에 이 작품에 “감자의 수확을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가 “만종”으로 바꾸었다.
1859년, 작품의 구매자가 이 작품을 가져가지 못하게 되자, 밀레는 1865년부터 이 작품을 공개적으로 전시하게 되며 작품에 나타난 손을 여러번 바꾸게 된다.
몇몇 사람들은 그의 정치적인 공명을 의심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밀레는 손의 모양을 계속 바꿈으로서 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렸을 뿐이었다.
십여 년 뒤 밀레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프랑스 사이에서는 이 작품을 사기 위한 경매 경쟁이 계속되었으며 몇 년 후, 프랑스 측에서 80만 프랑을 제시하면서 비로소 끝나게 되었다.
이렇듯 그림의 가치는 비싼 가격으로 매겨졌지만 정작 생존하는 밀레의 가족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이러한 불균형은 ‘droit de suite’를 고안해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Droit de suite’란, 화가의 작품을 되팔게 될 경우 그 수익의 일부를 화가나 화가의 가족에게 필수적으로 지급하는 정책이다).
여담으로 요즈음에 그림에 엑스레이를 비추면 그림의 수정과정을 알 수 있는데 그림 속 감자바구니가 원래는 죽은 아이를 넣어 논 관이였다고한다.
즉 맨처음에는 아기가 죽자 기도하는 모습이었다가 밀레가 감자바구니로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 빵을 굽는 여인 (1854년. Kröller-Müller 박물관, 오텔로)
밀레의 작품에서 여인들은 강인함과 인내를 가지고 있다.
‘빵굽는 여인’ (1854년)에서 여인은 고된 생활로 단련된 억센 힘으로 가족에게 먹일 빵을 굽고 있다.
아름답다기 보다는 후덕한 여인의 몸집과 자신의 일에 집중해 화덕으로 반죽을 밀어 넣는 여인의 모습에서 우리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된다.
1855년 작 ‘빨래하는 여인들’을 보면 해는 지고 사위는 컴컴해지는데 하늘에 걸려있는 초승달이 무심하게 무거운 빨래를 등에 지고 서있는 여인들을 비추고 있다.
강에는 쪽배가 떠있어 낭만적인 풍경을 연출하는데, 여인의 어깨에 올려진 젖은 빨래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무겁게 느껴진다.
파리 살롱에 전시했던 그의 작품들에 대한 각양 각색의 비평들에도 불구하고 밀레의 명성과 성공은 1860년대까지 계속해서 자라났다.
이 시기에 그는 달마다 봉급을 받는 것으로 3년간 25여 점의 작품을 작업할 것을 계약하게 된다.
1865년 또다른 고객, 에밀 가베 (Emile Gavet)는 훗날 90여 점의 작품을 수집하게 되는 그의 수집품 목록에 추가하기 위해 밀레에게 파스텔 작품을 의뢰했다.
1867년에는 World’s Fair에서 밀레의 작품들 중 ‘이삭줍는 여인들,’ ‘만종,’ 그리고 ‘감자를 심는 사람들’ 등을 전시회의 대표적인 작품들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프레데리크 아르만 (Frédéric Hartmann)은 2만 5천 프랑에 ‘사계’를 그려줄 것을 의뢰하게 되며 밀레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아 Chevalier de la Légion d’Honneur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 평가
19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 출신의 자연주의 화가로, 농부였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농촌의 고단하고 열악한 일상의 삶을 관찰자로서 그린 19세기 프랑스 바르비종파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작가다. 그는 프랑스 시골의 바르비종 학교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 밀레는 농민을 그린 그림으로 유명하다. 같은 시기의 쿠르베와 항상 비교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경력 말기에 이르러서는 순수한 풍경을 그리는 데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밀레는 유화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파스텔, 콘테 크레용 드로잉, 에칭으로도 유명하다.
한편 밀레의 그림에 대한 해석에서 간혹 논쟁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그가 사회 비판적인 철학을 가진 화가였기 때문이다. 그의 평소 철학과는 달리 만종이나 이삭줍기 등의 대표작들은 평화로운 외견상의 내용과는 달리, 그림의 배경은 역설적인 경우가 눈에 띈다. 이렇다보니 그의 그림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며 숨겨진 메시지를 찾으려는 비평가들이 생기게 된다.
한 예로, 후대의 유명한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는 만종을 보고 왠지 감자 바구니에서 관 (죽은 아이의 관)이 느껴진다는 식으로 말하며 밀레가 단순히 “추수기의 풍요와 평화와 감사”같은 그림이 아니라 죽은 아이를 애도하는 기도를 올리는 부모의 모습을 그렸다고 주장 했다. 후대의 기술발전으로 그림에 대한 정밀 엑스레이 검사가 가능해져서 살펴보니 실제로 바구니 주변에 직사각형 형태의 펜 선이 있는게 확인되었다. 다만 이게 실제로 관을 그린것인지 단순히 구도를 잡기 위한 것인지는 불명. 흔히 스케치 전 구도를 잡기 위해 캔버스에 십자 형태의 펜 선을 그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게 십자가를 그렸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또한 ‘이삭 줍는 여인들’의 이삭을 줍는 여인들은 수확이 끝난 후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최하층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수확물은 원칙적으로 지주의 것이나, 떨어진 이삭은 예외였기 때문이다. 여인들의 모자와 옷의 색은 파랑, 빨강, 흰색의 프랑스 혁명의 깃발 색을 상징하며 멀리서 수확을 감시하는 감독관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식으로 그의 그림은 “다시 한번 쳐다보고 곰곰히 생각해보면 사회비판적 요소로 다시 보일 수 있는” 요소들을 갖추고 있기에, 진정 화가가 의도한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두고 꽤 다른 해석 및 평가가 존재한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