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소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의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 13.7x12m, 1534~1541년,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의 본명은 ‘미켈란젤로 디 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이탈리아어: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년 3월 6일-1564년 2월 18일)로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의 대표적 조각가, 건축가, 화가, 그리고 시인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유년 시절부터 조토와 마사치오의 작품들을 습작하며 그림에 많은 관심을 쏟아 집안에서 자주 꾸중을 들었다. 하지만 소년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본 메디치 가에서 아버지를 설득한 덕분에 미켈란젤로는 미술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가 13세 때 화가 도메니코에게서 배웠다.
로렌초 메디치는 엄청난 재력가로 유럽역사에서 많은 예술가들을 지원했다. 미켈란젤로도 이중에 한명으로 메디치에게 많은 지원을 받았다.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 시청의 위탁으로 다비드를 3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계속하여 원형 부조인 성 모자를 만들고, 원형화 성 가족을 그렸다. 1504년 피렌체 시청의 위촉으로 대회장의 벽화 카시나 수중 접전도를 그리게 되었는데, 맞은편 벽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앙기아리 기마 접전도를 그렸으므로 경쟁을 하게 되었다.
1505년에 미켈란젤로는 새로 임명된 교황 율리오 2세의 초대로 로마로 들어왔다. 그는 교황의 묘를 짓는 일에 위촉되었고, 그 작업에는 40개의 조각과 4년 정도 걸리는 공사였다. 교황의 후원받긴 했지만, 미켈란젤로는 수많은 다른 작업으로 무덤을 완공하는데 끊임없는 방해를 받았다. 40년 동안 묘 짓는 작업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스럽게 끝내지 못했다. 묘는 로마에 있는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위치하며 중앙에 놓인 1516년에 완공한 ‘모세’ 동상으로 가장 유명하다. 묘를 위해 만든 조각상 중에서, ‘반항하는 노예’와 ‘죽어가는 노예’로 알려진 2개의 조각은 루브르 박물관에 현재 보관되고 있다.
1508년 바티칸 사도 궁전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위촉받고 허리가 꺾이는 듯한 고통에도 4년 만에 완성하였다. 1520년 메디치가 성당의 묘비를 10년에 걸쳐 조각하는 한편, 산 로렌초 성당 부속 도서관 입구를 건축하였으며, 1529년 독일 카를 5세 군의 피렌체 포위 때 방위 위원으로 뽑혀 성을 쌓았다.
후에 메디치 가의 폭군 알레산드로와 사이가 나빠져, 1534년 고향인 피렌체를 영원히 떠났다. 로마로 옮긴 그는 새로운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시스티나 경당의 정면 대벽화를 위촉받고, 노령으로 발판 위에서 떨어져 가면서까지 혼자 꾸준히 그려 6년에 걸쳐 ‘최후의 심판’을 완성하였다. 1550년 바티칸 바오로 경당의 벽화 바오로의 회심과 십자가의 베드로를 완성하였다.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 주거하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주문을 받는 고급화가였다.
또한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 성 베드로 대성전의 피에타, 팔레스티나의 피에타, 론다니니의 피에타 등 세 조상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89세를 일기로, 외롭고 괴로운 긴 생애를 로마에서 마쳤다.
그의 예술은 인생의 고뇌, 사회의 부정과 대결한 분노, 신앙을 미적으로 잘 조화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시스티나 천장화’ 뿐만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 역시 명성이 자자하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강탈로 인한 상실감 가운데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그 분노를 후세에 남기고자 기획, 1535년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한 작품이다. 클레멘스 7세는 계약서에 서명을 한 직후 선종, 다음 교황인 바오로 3세 때에 가서야 완성을 보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많은 기대를 걸었던 바오로 3세는 1535년 9월 1일, 그를 ‘교황청의 최고 건축가, 화가, 조각가’로 임명하는 포고령을 반포하며 예우했다.
‘최후의 심판’은 ‘시스티나 천장화’와 함께 걸작으로 꼽히는데 사실 그림자체는 도저히 당시 성당에 그려 넣을 만한 그림이 아니다. 사람의 가죽을 벗긴 과격한 묘사, 근육을 드러내며 나체의 미를 뽐내는 수많은 나신들, 예수라기보다 아폴론에 가깝게 묘사된 예수 등. 이처럼 과격한 화풍은 상술했다시피 사코 디 로마로 인한 분노 보정이 반영된 까닭이라 평한다.
당시 교황의 의전담당관 ‘비아지오 다 체세나’ 추기경은 누드화로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고 ‘나체들은 거룩한 장소에 적절하지 못하며 홍등가에나 어울리는 것’이라고 혹평을 했다. 하지만 교황청이 자신을 후원해주고 있기에 이러한 혹평을 대놓고 표현하지 못했던 미켈란젤로는, 6년 반에 걸친 이 그림 제작 과정에서 4구역의 오른쪽 하단에있는 카논의 배 부분에 복수의 의미로 ‘지옥의 수문장 미누스’로 표현된 체세나 추기경을 직접 그리게 된다. 미누스의 귀는 당나귀귀로 표현되었는데 당나귀의 귀는 무지하다. 즉, 무뇌하단 상징이고 성기마저 뱀이 물고 있게 그려 인간의 성적 방종에 대한 하나님의 가혹한 심판을 보여준다.
낙성식은 1541년 10월 31일 가졌다. 이후 바오로 3세 선종 후 율리오 3세, 마르첼로 2세, 바오로 4세까지는 이 그림에 대해서는 별다른 터치는 없었지만, 비오 4세 이후 소집된 1564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비속한 부분은 모두 가려져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져 결국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다니엘레 다 볼테라가 그림의 인물에 옷을 그려 가리는 것으로 일단락이 된다.

임운규 목사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