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하의 생명과학 이야기
도토리 이야기
블루마운틴 (Blue mountain) 도토리나무
필자는 한때 도토리 줍기에 빠진 적이 있었다. 블루마운틴 (Blue mountain)역 근처의 도토리 나무는 거의 다 뒤지다 시피하며 주워 모았었다. 심지어 캔버라 (Canberra) 까지 원정을 가서 몇 가마니를 주워 오기도 하였다. 도토리나무 종류에 따라 모양과 크기가 다소 차이가 나지만, 도토리받침과 열매 부분으로 되어 있는 것은 공통적이다. 도토리받침은 흔히 도토리모자로 알려져 있는 주름진 연갈색 지지대 부분이다. 사람들이 보통 도토리라고 하면 떠올리는 것은 둥근 도토리받침이 있고 약간 길쭉한 원형에 연갈색 반질반질한 껍질이 있는 도토리인데 이런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는 주로 졸참나무와 굴참나무이다. 본래 도토리와 상수리나무의 열매인 상수리를 구분했지만 현재는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도토리나무는 많은 수확량의 나무로서 큰 장점이 있다. 하지만 성장속도가 너무 느리고 수확할 시기에는 다람쥐와 경쟁해야 한다.
다람쥐, 청설모
다람쥐, 청설모는 잣 따위 다른 견과류를 두고도 인간과 경쟁한다. 잣을 채집하고 파는 사람들 입장에서 이 들은 문자 그대로 유해동물 [有害動物]이다.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도토리는 종류를 불문하고 대부분 탄닌 (tannin)이 포함되어 쓴맛과 떫은맛이 난다는 점이다. 작물은 보통 어느 정도라도 먹을 만한 맛이 나거나 맛이 약하면서도 무난한 게 좋다. 맛이 상대적으로 강한 거의 모든 채소 및 과일, 견과류, 고구마는 부식이 되고, 맛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무난한 벼와 밀을 비롯한 곡류, 콩, 감자, 옥수수는 오래 먹어도 물리지 않기 때문에 주식이 된다. 또한 도토리를 쓴맛이 안 나게 개량하기도 어려우므로 작물화가 어렵다.
결국 도토리와 닮은 열매를 맺는 나무 중에 작물화가 된 것은 탄닌을 제거하지 않아도 되는 밤, 개암, 돌참나무, 구실잣밤 뿐이며, 특히 밤은 가시가 귀찮을 뿐, 열매가 도토리보다 훨씬 크고 맛도 좋기에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널리 재배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더 맛있는 밤이 있는데 도토리를 굳이 작물화 시킬 수고가 필요 없었다는 것이다.
선호동물
도토리를 좋아하는 동물로는 다람쥐가 유명하지만 정작 다람쥐는 도토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이다. 도토리가 야생 다람쥐의 주식임은 분명하지만, 그냥 지천에 도도리가 깔렸으니 많이 먹을 따름이다. 애완 다람쥐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아는 것이지만, 해바라기씨나 아몬드, 잣 같은 맛 좋은 견과류와 귀뚜라미, 메뚜기 따위 곤충에 익숙해진 다람쥐는 도토리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도토리는 견과류 중에선 생으로 먹어도 맛이 좋다고 할 정도는 결코 아니다. 그러니 집에서 고급 견과류를 먹고 자라 입맛이 까탈스러워진 다람쥐가 이것들에 비해 맛이 현저히 떨어지는 도토리를 좋아할 리 없다. 물론 다람쥐에게 도토리를 쥐어주면 매우 열심히 까긴 한다. 의외로 도토리를 좋아하는 동물은 다름 아닌 멧돼지와 돼지다. 도토리라는 단어의 어원도 돼지의 옛말인 ‘돝’에서 따온 단어다. 중세부터 유럽의 농부들은 도토리를 따서 돼지 사료로 먹이고 있다, 캔버라에서 도토리를 줍는데 서양인 부부가 줍고 있어서 용도를 물어봤더니 사육하고 있는 양의 사료로 사용하려고 줍는다고 하였다
가축사료 (家畜飼料) 도토라
유럽과 미국에서는 가축의 사료용으로 도토리를 많이 쓰며, 특히 스페인 특산품으로 유명한 햄인 하몬 중에서 최고 등급인 하몬 이베리코 데 베요타 캄포 (Jamón Ibérico de campo)는 도토리만 먹여서 키운 건강한 돼지의 뒷다리로 만든다고 한다. 다만 이베리코 돼지를 기를 때 돼지들에게 먹이는 도토리는 한국에서 나는 도토리와는 종류도 맛도 다른 것이라고 한다. 산에 있는 도토리를 함부로 가지고 오면 안 되는데, 동물들이 겨울철을 보내는 데 있어 귀중한 식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림청과 지자체 등지에서도 이러한 행동에 대한 자제를 당부한다. 특히나 멧돼지의 주식 중 하나인지라 먹을 게 부족한 멧돼지가 민가로 내려오는 원인 중 한 가지 원인이, 도토리 남획이다. 농약을 치지 않은 도토리는 벌레들의 집산지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바늘 구멍만 한 구멍이라도 뚫렸다면, 안에는 이미 벌레가 있는 것이다. 얼핏 보면 구더기처럼 생긴 이 벌레는 도토리거위벌레 혹은 도토리밤바구미의 유충 (幼蟲)이다. 바늘구멍 같은 구멍은 바로 이 벌레가 산란관 (産卵管)을 찔러 넣은 흔적. 구멍이 대번에 눈에 띌 정도라면 알맹이는 다 녹아났다는 의미이고, 말 그대로 바늘구멍이라면 껍질을 벗겨보면 멀쩡해 보이는데 알고 보면 안에서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남·북한 (南北韓)의 도토리묵의 차이
남한에서는 보통 도토리묵으로 만들어 먹고, 북한에서는 도토리로 술과 된장과 떡을 만들기도 한다고 한다. 요리책인 산가요록에 따르면. 도토리 된장은 북한 사람들 기준에서도 하급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원래 콩으로 만들어야 하는 된장을 옥수수로 만들다가 그 마저도 여의치 않아 도토리로도 만들었고, 이렇게 만든 옥수수 된장은 간부들이 먹고 도토리 된장은 주민들이 먹었다는 증언도 있다. 도토리로 만든 된장은 그 맛이 쓰고 역했다고 한다. 도토리 자체는 보릿고개 때에 구황식량 (救荒食量)으로 사용했는데, 먼저 삶은 후 말려서 쓴 맛이 나는 물을 빼낸 후 방아질을 해서 다시 완두를 곁들여서 쪄서 먹었다. 물을 우려낸 도토리는 아무 맛도 없기 때문에 곁들인 완두 맛으로만 먹는 거라 끼니나 채우려고 억지로라도 먹어야 했다. 그런데, 도토리묵을 만들어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떫은 맛이 아예 안 날 정도로 우려내는 것은 물 낭비가 심하다. 순수 도토리가루만으로 만들지 않고 다른 곡물을 넣은 도토리묵은 일부러 도토리의 떫은 맛을 남긴다. 그러나 남북한을 제외하면 도토리로 뭔가 음식을 만들어 먹는 나라는 의외로 찾기 힘들다.
박광하 (전 여주대신고 교감, 전 수원계명고 교장)
필자 박광하 선생은 고려대학교 생물학과를 마친 후에 평생을 생물과학 강의와 교육에 헌신하여 왔다. 30여년 전 호주로 이주하여 시드니에 거주하며 민주화 실천과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생명과학이야기’ (북랩)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