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하의 특별기고
4월의 인혁당 사건의 50주기
현재 한국 정국 (政局)은 풍전등하 (風前燈下)와 같은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무엇인가 터질 것 같은 위기감이 감돌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4월은 뼈아픈 역사가 새겨진 달이다. 제주4.3사건이며 4.19등 굵직한 사건이 즐비한 달이지만 4월 9일에 발생한 인혁당 사건만큼 잔인한 사건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인혁당이라는 조직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런 허울을 뒤집어쓰고 희생당한 사건 관계자들이 조국의 민주화와 평화적 통일이라는 목표를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1975년 4월 8일에 대법원이 사형을 선고한 후 18시간만에 사형이 집행된 끔찍한 사건이다.

희생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물론 4.19 직후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 혁신계 조직인 민족민주청년동맹, 민족통일 학생연맹 등과 진보적 색채의 ‘인물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이수병씨 같은 분은 4.19 당시 경희대 민족통일연맹 위원장으로 있었으며, 논문 ‘만적론’의 필자이기도 하다. 그는 5.16 쿠데타 후 혁명재판에서 15년의 징역을 선고받고 7년 동안 복역하기도 했다.
그리고 박정권이 인혁당과 민청학련을 연관시키기 위한 고리로 끼워 넣은 여정남씨도 경북대 총학생회장을 지냈으며, 6.3 사태 당시 학생 시위를 주도했었다.
그러나 8인 희생자의 한 사람이며 이수병씨의 절친한 친구였던 김용원씨 같은 분은 아마도 억울하게 희생당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서울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건실한 자연과학도로서 고등학교 동창인 이수병씨가 징역을 사는 동안 그를 꾸준히 돌봐 준 사람이다. 두 분은 네 것 내 것을 가리지 않을 정도의 사이였고, 따라서 일어학원의 강사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던 이수병씨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돈을 빌려주기도 했는데, 이것이 중정의 혹독한 고문에 의해 조직자금으로 둔갑한 것이다. 조용하고 성실한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다. 따라서 죽인다고 해도 주위에서 시끄럽게 떠들 사회적 관계가 거의 없다는 것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 놓은 이유의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사건의 개요를 다 열거할 수 없으나 이런 끔직한 사건이 한국역사 속에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작된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들은 크게는 냉전논리에 따라 그 냉전체제의 연장선 위에서, 작게는 특정 정권의 유지와 안보, 혹은 정치적 위기를 호도하기 위한 제물로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터무니없는 사건을 소설 쓰듯 조작해서 권력을 유지하며 떵떵거리던 세력의 주구들이 아직도 잔존하며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이다.
억울하게 숨진 이들 뿐만 아니라 남겨진 유족들 삶도 만만치 않게 힘들었다. 조작된 사건의 희생자들이 재심을 통해 국가로부터 무죄 (2007년 서울지방중앙법원)를 선고 받기 전까지 인혁당 낙인은 유족들을 따라다녔다.
인혁당 사건은 이 역사속에 묻혀버릴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아직도 호시탐탐 유사한 사건을 저질러서라도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출처 : 평화뉴스(https://www.pn.or.kr)

박광하 (전 여주대신고 교감, 전 수원계명고 교장)
필자 박광하 선생은 고려대학교 생물학과를 마친 후에 평생을 생물과학 강의와 교육에 헌신하여 왔다. 30여년 전 호주로 이주하여 시드니에 거주하며 민주화 실천과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생명과학이야기’ (북랩)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