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고의 한서 (漢書) – 열전
권49 원앙조조전 (爰盎晁錯傳)
원앙 (袁盎), 조조 (鼂錯)의 열전이다.
○ 원앙 (袁盎)
원앙 (袁盎, ? ~ ?)은 전한 초기의 관료로, 자는 사(絲)이다. 본래 초나라 출신으로, 아버지 대에 안릉(安陵)으로 이주하였다.
– 생애
고황후 때 여록의 사인(舍人)이 되었고, 문제 즉위 후 형 원쾌(袁噲)의 임자(任子)로 낭중(郞中)이 되었다.
여씨를 축출하고 승상이 된 주발은 개국공신인데다가 문제를 황제로 추대하기까지 한 인물이라서 문제 또한 조심스럽게 대하였었는데, 원앙은 이렇게 진언하였다.
“승상은 여후 때에 태위가 되어 병권을 쥐었으면서도 (세도를)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공신이기는 하나 사직의 신하는 아닙니다. 승상이 날뛰고 폐하께서 겸양하심은 옳지 않습니다.”
원앙의 말을 옳게 여긴 문제는 이후 위엄을 보였다. 당시 주발은 원쾌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원앙을 나무랐지만, 원앙은 사죄하지 않았다. 훗날 승상을 사임하고 봉국으로 돌아간 주발은 반란을 획책하였다는 참소를 받아 하옥되었다. 아무도 그를 변호하는 자가 없었으나 오직 원앙만이 변호해 주었고, 덕분에 주발은 사면되었다. 이후 원앙은 주발과 교류하였다.
회남왕이 함부로 심이기를 죽이는 등 교만하게 행동하니, 원앙은 그의 봉지를 깎을 것을 상주하였으나 문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회남왕은 더욱더 교만해졌고, 결국 반란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었다. 문제는 회남왕을 촉(蜀) 땅으로 유배시키려 하였는데, 원앙은 이를 반대하였으나 역시 듣지 않았다. 그러나 회남왕은 유배지로 가던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문제는 후회하였다.

○ 조조(鼂錯)
조조(鼂錯, ? ~ 기원전 154년)는 전한 전기의 관료로, 영천군 사람이다.
– 생애
문제때 태상장고(太常掌故)로 임명되었고, 후에 태자가령(太子家令)이 되었으며. 당시 태자의 신임을 받았다. 곧 어사대부로 임명되어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누르는 중농억상책을 견지하였으며 흉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을 변방으로 이주시키고 제후의 봉지를 점차적으로 빼앗아 강력한 중앙집권제도를 구축할 것을 제한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상소를 올려 받아들여졌다.
“고조께서 처음 천하를 평정하였을적에 여러 형제가 나이가 젊고 후손들은 나약했으므로 같은 유씨를 여러 왕으로 봉했습니다. 지금 제나라에는 70여 개, 오나라에는 50여 개, 초나라에는 40여 개의 성이 있는데 이것은 천하의 절반을 그들의 영지로 봉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지금 오왕 유비는 병을 핑계로 입조조차 거부하고 있는데, 옛 법에 이르면 조정의 신하로서 조정에 입조하길 거부하는 자는 참해야 마땅하온데 선제께서 차마 그러지 못하고 특별히 선처를 베푸시어 몇 번의 매질로 끝냈는데, 이는 더할 나위 없는 인덕입니다. 헌데 오왕은 그 일을 계기로 반성하고 입조하여 새로운 면모를 보여 충신임을 보여야 할진대 더 교만해졌습니다. 산에서 구리를 캐어 동전을 만들고 바닷물을 졸여 소금을 만들며, 천하의 대역大逆들을 모아 모반을 꾀하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삭번을 해도 오·초·제 등이 모반할 것이요, 삭번치 않아도 역시 모반할 것입니다. 만일 삭번을 하며 그들의 반란이 좀더 일찍 일어날 진대, 그리하면 그들의 준비는 충분치 못하므로 그 피해도 적을 뿐더러 쉽게 진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삭번하지않는다면 반란은 늦출지언정 그 피해가 더 클 뿐입니다. 평정하는 데에도 전자만 못할 것입니다.”
.죽음
이것이 시행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나라 초나라 등 일곱 나라가 군주의 측근을 맑게 한다는 명분아래 무장 반란을 일으켰고(오초칠국의 난) 이에 황제는 조조와 평소의 원수지간이였던 원앙(袁盎)의 참언을 듣고 그를 장안 저잣거리에서 참수해 반란군을 달랬다.
– ‘상서(서경)’ 전수
태상장고였을 때 황제의 명으로 제남의 복생에게서 ‘상서’를 전수받았고, 이후 하비간에게 이를 전수하였다.
‘서경'(書經)은 중국 유교의 5경(五經) 가운데 하나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다. 중국의 고대 국가들의 정사(政事)에 관한 문서를 공자가 편찬하였다고 전한다. 특히, 주나라의 정치철학을 상세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말한 제일의 자료이다.
크게 우서(虞書)·하서(夏書)·상서(商書)·주서(周書)의 4부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 요순시대 · 하나라 · 은나라(상나라) · 주나라에 관련된 내용을 싣고 있다.
전국시대에는 공문서라는 의미로 ‘서(書)’라고 했다. 이후, 유학을 숭상하고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한나라 시대에서, 당시의 유학자들은 존중하고 숭상해야 할 고대의 기록이라는 뜻에서 상서(尙書)라고 하였다. 혹은 상(尙)은 상(上)을 뜻한다고 보아 “상고지서(上古之書, 상고시대의 공문서)”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송나라 시대에는 유교의 주요 경전인 5경(五經)에 속한다는 뜻에서 서경(書經)이라고 불렀다.
서경의 판본은 크게 나누어 ‘금문상서(今文尙書)’와 ‘고문상서(古文尙書)’가 있다. 신나라(新, 8년 ~ 23년) 왕망(王莽) 때 유흠(劉歆, ? ~ 23년)이 새로운 판본인 고문상서를 들고 나옴에 따라, 기존의 판본인 금문상서를 지지하는 금문가(今文家)와 새로운 판본인 고문상서를 지지하는 고문가(古文家) 사이에 금고문 논쟁(今古文論爭)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현존하는 판본은 ‘위고문상서’와 ‘칭화대본 죽간상서’가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