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권 (福券, Lottery)의 역사
복권 (福券, Lottery)의 시초는 대략 기원전 200년 중국의 한나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오늘날 복권이라 할 수 있는 시스템은 줄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인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에 의해 만들어졌다.
- 고대 로마에서 세금 대체제로 사용된 복권
당시 로마는 보수가 절실히 필요했으나 이미 너무 높은 세금이 부과되어서 더 이상의 증세는 민심에 동요가 있을 것이 뻔했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는 국고를 증가하면서 동시에 민심을 아우를 수 있는 방법으로 복권을 제안한 첫 인물이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시대로부터 2천 년이 더 지났지만 정부는 여전히 복권을 도시 계획에 대한 자금책으로 사용하고 있다.
200년 뒤, 또 다른 로마 황제인 엘라가발루스는 복권에 특히 관심을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노예나 토지 등의 포상과 함께 게임으로 시작된 것이 강제적으로 대중적 복권으로 변모하였고 민중들에게 뿌려졌다.
복권과 함께 살아있는 뱀, 말벌, 꿀벌, 죽은 동물, 사형 등이 포상으로 날아오기도 했고 이로 인해 젊은 황제는 18세의 나이에 암살을 당했다.
현재 복권의 형태는 530년 이탈리아에서 번호 추첨식 복권 판매 이후, 이탈리아어로 ‘행운’이라는 뜻의 Lotto가 복권의 일반적인 고유 명사가 되었다.
-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1569년에 복권 발행
1569년 1월 11일, 영국에서 처음으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공식적 인가를 받은 복권이 발행됐다.
영국에서 1826년 복권제도가 도박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일시적으로 복권의 발행이 중단되기도 했다.
하지만 복권의 이익을 공공수입으로 하고, 공공사업 계획에 사용한다면 복권이 발행되는 것이 부정적이지 않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1990년대에 국가 복권제도를 재도입했다.
이후 복권제도는 1993년 말 여왕의 재가를 획득했다.
- 어떻게 볼테르는 복권으로 부를 축적했는가?
필명으로 알려진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는 수학자 샤를 마리 드 라 콩다민을 만나 드디어 재정적인 여유를 갖게 되었다. 두 사람은 만찬 파티에서 만났는데 라 콩다민이 황당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그들을 부자로 만들어 줄 계획을 제시했다.
프랑스 정부는 사람들이 채권을 사도록 유도하기 위해 복권을 만들었다. 각각의 채권 소유자는 채권 가치 1/1,000에 해당하는 금액의 복권을 살 수 있었고, 복권 당첨자는 잭팟에 당첨될 경우 당시로써는 어마어마한 금액인 500,000리브르 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수학에 정통하지 못했다. 잭팟은 채권의 금액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고 라 콩다민은 싼 채권을 죄다 사들여 우승 확률을 엄청나게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 콩다민과 볼테르는 부유한 후원자 그룹과 함께 복권 재단을 만들고 상금을 나눠 가졌다. 몇 년에 걸쳐 당첨이 계속되자 정부에서는 이들의 책략을 잡아내어 재판대에 세웠지만, 어떠한 불법 행위도 없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러한 부의 축적으로 볼테르는 남은 여생을 글쓰기에 매진할 수 있었다.
- 복권과 미국 대통령
미국의 헌법 제정자들은 정치적, 개인적 이윤을 위해 복권을 자주 사용했다. 조지 워싱턴에서 벤자민 프랭클린까지 자유와 기금이라는 이름으로 복권을 만들었다.
미국 대통령 중 자신의 빚을 갚기 위해 노후에 복권을 통용한 토머스 제퍼슨만큼 복권을 옹호했던 사람도 없었다.
1747년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장 세력이 아닌 현금이었다. 프랭클린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복권을 통용했고 결과가 너무나 성공적이어서 뉴욕과 뉴잉글랜드에서는 7개월 동안 팔린 복권이 필라델피아에서는 7주 만에 모두 팔렸다. 그는 이 수입으로 필라델피아 수호를 위한 대포를 구매했다.
대략 30년 후, 조지 워싱턴이 버지니아에 있는 앨러게이니 산을 통과하는 도로를 깔고 버지니아 핫 스프링스의 홈스테드로 알려진 리조트를 짓기 위한 모금 방법으로 복권을 통용하려고 시도했다.
복권을 통한 이 노력은 당시 복권의 수가 증가해 부분적으로 실패했다. 조지 워싱턴이 직접 서명한 복권은 현재 수집 대상품이 되었다. 2006년, 가장 최근에 팔린 25개 복권 중 하나의 가격은 $13,500였다.
하지만 토머스 제퍼슨보다 복권을 옹호했던 사람은 없다. 제퍼슨은 자신의 손자와 함께 빚을 갚기 위해 복권을 통용했다. 버지니아 의회를 설득하려는 의도로 쓴 그의 유명한 글은 다음과 같다: “부도덕함과는 거리가 멀며 인간 존재에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제퍼슨은 다행히 그의 이러한 책략이 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고 세상을 떠났다.
1800년대 중반에는 복권에 대한 과잉 열기와 더불어 불법도박 등 사행산업에 대한 열기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되자, 1900년대 초부터 미국 내에는 복권 발행 금지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불법 내기· 도박 등이 성행하자 결국 뉴햄프셔 주는 1964년 합법적인 복권 발행을 주 의회에서 승인했다.
- 대한민국의 복권
대한민국에서 발행한 최초의 복권은 1947년 12월 발행한 1948 런던 올림픽 참가 비용을 모으기 위해 만들어진 올림픽 후원권이다. 이때 액면가는 100원이었고 발행매수는 140만 매였다. 1등 당첨금은 100만원이었고 당첨자는 총 21명이었다. 이렇게 마련된 경비 8만 달러로 선수단들은 런던으로 떠날 수 있었다.
법에 의하지 않고 복권을 발매하는 행위를 복표발행죄라고 한다. 따라서 복권위원회 외에 개인이나 회사 등이 멋대로 복권을 만들어 판매할 수는 없다. 도박과 복표에 관한 죄 참고. 복권은 1인당 10만원까지만 구매 가능하며, 19세 이상의 성인만이 살 수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