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미진 박사의 특별기고
위기를 극복하는 건강한 가정
사람들은 살아가다 보면 많은 위기를 경험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그 위기를 통해서 전화 위복의 계기가 되어 그 이후에 더 잘 되고 잘 풀리게 되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위기에 모든 부분에서 와르르 무너져서 아주 힘든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경우도 있다. 미국의 나브라스카 대학에서 연구했던 행복한 가정의 특성에 보면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들어있는 것을 보게 된다. 건강한 가정은 위기를 만날 때 그 위기를 건강한 가정의 위로와 지지로 이겨내는 반면 건강하지 못한 가정은 위기를 만날 때 서로 지지하고 위로해주는 기반이 없다 보니 서로를 오히려 원망하고 서로에게 비난을 쏟아내다 보니 가정이 깨어지고 힘들어지는 것이다.
힘든 시기를 지나는 가정에서는 그 구성원들은 자신만이 이해 받지 못하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래서 자신과 상호작용하는 가까운 가족에게 원망을 돌리고 그들을 비난하게 된다. 그런데 가족은 각각의 구성원이 모여 있지만 각각의 합이 아니라 그 것보다는 훨씬 더 큰 유기체로서 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힘든 나를 대하고 있는 가족들도 힘들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Covid19라고 하는 외부적인 어려움이 있었을 때 가족들은 한 사람만 힘든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학교를 가지 않고 집에만 있으니 매일 심심하고 친구를 못 만나서 힘들고 온라인으로 공부하는 것이 재미가 없을 수 있다. 부모는 어떠 한가? 하루 종일 부부가 같이 있다 보니 삼시 세끼 밥을 지어서 먹어야 하고 자신만의 시간이나 공간이 없이 함께 부대끼다 보니 짜증이 많아진다. 또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은 일이 진전이 안되고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배우자가 자꾸 불러서 일을 시킨다. 이런 경우, 한 사람만 힘든 것이 아니다. 모두가 함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자칫 잘못하면 서로 힘든 점을 공감해주고 지지해 주기 보다는 자꾸 배우자를 탓하게 된다거나 아이들을 희생양 삼아서 혼내 주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다 보면 행복하고 따뜻한 가정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더 힘들게 만드는 게 가족이 서로 서로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필자의 가정에는 올해 여러가지 이슈들이 있다. 이사를 가야 하는 것도 있고 또 아이들이 진로를 바꾸는 일 그리고 또, 해외로 가야 하는 아이, 학교를 옮겨야 하는 아이 등의 여러가지 일들이 있는데 주어진 시간 안에 여러가지 일을 하다 보니 서로가 힘들어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필자의 아들이 자신의 정신 건강 상태가 요즘 좋지 않은 것 같아서 상담을 받아보아야 겠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어떻게 안 좋은 지를 들어본 후에 상담을 받고자 하는 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말해 준 다음 필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 가족들이 함께 힘들어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서로 지지를 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할 수가 있겠구나. 그리고는 각자 힘든 것을 버텨내고 있는 거지. 어떻게 해야 이 시기에 우리 가족이 함께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까?’ 라고 생각을 하다가 결론을 내린 것이 가족의 시간을 만들어 각자 어려운 점을 나누고 그 부분을 듣고 격려를 해주고 기도를 해주어야 겠다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가족 회의를 했고 각자 돌아가면서 요즘 어떤 부분이 힘들고 어려운 지를 나누었다. 함께 이야기를 하면서 가족 구성원들 안에 있었던 오해의 부분도 풀 수 있게 되었고 각자 힘들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그 중에 가족의 지원과 사랑이 더 많이 필요한 것도 알게 되었다. 서로 각자 어려움을 나눈 다음 돌아가면서 한 사람 씩을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고 그 후에는 돌아가며 한 명씩을 위해서 기도를 해주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지치고 힘들게 보였던 온 가족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 것이다. 가족이 함께 지지하고 격려하는 힘으로 인해서 눈빛이 그리고 표정이 평안하고 용기가 있는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상담사로 일하고 있는 필자는 가족들이 순 기능하게 될 때 얼마나 아름다운 지를 많이 보게 된다. 반대로 가족이 역기능 적일 때 그것이 얼마나 파괴적인 가도 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의 가족이 어려움이 있을 때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지지자와 위로자가 되려면 가족 간에 의사소통이 정말 중요하다. 가족은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소통의 부족이나 건강하지 못한 소통으로 인해서 그것을 읽어내지 못하고 서로에게 오히려 생채기를 내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평소에 가족 구성원과 소통을 하려고 노력하고 소통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소통의 내용보다 소통의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전문가의 도움을 통해서라도 자꾸 소통하려고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 여성분은 자신의 남편이 공감을 너무 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소통을 위해서 상담을 받고 싶다고 요청을 했다. 상담을 진행하면서 알게 된 것은 남편만 자신을 공감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자신도 잘못된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었고 남편을 공감하지 못했다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소통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고 쌍방적이며 나는 옳다라고 생각하며 소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실상은 나의 소통 방식은 내가 잘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의 잘못된 부분을 보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데 제3자를 통해서 나의 소통 방식을 보면 그 때 내가 보지 못하는 나를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Covid19 이후에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이상 기후로 인해서 더 살기 어려워졌다. 이럴 때 잘못하면 가정들이 더 깨어지기 쉽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가 더 쉬워진다. 그러므로 좋은 소통을 통해 위기에 처한 가족 구성원들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지지해주는 것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는 건강한 가정을 이루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우울감의 원인과 해석
오랫동안 우울한 감정을 더 이상 많이 느끼지 않았다. 젊었을 때는 생리 증후군이 있어서 생리전만 되면 기분이 우울하고 작은 일에 짜증이 쉽게 난 적이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성숙해져 가고 감정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나를 이해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우울한 감정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루를 감사하면서 살아오던 날이었는데 어제 아침에는 일어나는 데 왠지 많이 우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마음을 다잡고 해야 할 일이 많은 월요일이기에 아이들 도시락을 싸고 사무실에 출근을 해서 일을 하고 모임에 참석을 하고 공원을 산책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우울감의 원인이 무엇인지 찾기가 쉽지가 않았다.
오늘 아침에도 어제의 연속인 듯 침대에서 나오는데 눈이 잘 떠지지 않고 온 몸이 피곤한 듯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서 마음으로 “오늘 아이들 도시락을 그냥 돈을 주고 사 먹게 할까?” 라는 생각까지 하면서 일어나다가 “그래도 이러면 엄마가 안돼지!” 라는 생각으로 나를 다독여 가며 부엌으로 갔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아들이 부엌에 들어오면서 “엄마, 나 오늘 왜 이렇게 피곤하지? 너무 너무 일어나는 게 힘드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비슷한 증상이 있다고 말하자 아마도 알러지 때문일 수 있다고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나서 조금 있다 일어난 딸도 “엄마, 어제, 오늘 진짜 피곤하고 힘들다” 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사실, 필자도 지난 주부터 꽃가루 알러지(hay fever)로 인해 계속 재채기를 하고 콧물을 흘리고 있었다. “여기에서 내려진 결론은 극심한 알러지가 몸을 피곤하게 만들어서 온 가족이 신체적으로 지치고 지금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입증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침에 사무실에 가니 사무실 직원도 출근을 안 했는데 새벽 한 시에 남겨진 메시지에 의하면 알러지가 심해서 출근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영국의 브리스톨 의과 대학 연구팀은 우울증, 불안증 같은 정신 건강 장애와 알레르기, 꽃가루 알레르기 사이의 유전자 인과관계를 조사했다고 한다. 그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알레르기와 우울증은 강력한 상관 관계가 있고 꽃 가루 알레르기와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최근 경험한 꽃 가루 알러지와 우울한 감정이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일을 계기로 어제부터 일어난 사건을 재조명하면서 귀인(사건의 원인을 어디에 두느냐) 과 해석 (사건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우울함의 감정에 대해서 나름대로 귀인을 찾고 해석을 하게 되는데 필자의 경우 우울했던 감정에 대해서 먼저는 내적인 것에서 찾고 답을 찾으려고 애를 썼었다. 최근에 해결되지 않는 개인적 문제로 인해 지속적인 스트레스가 있었기에 스트레스와 우울질의 기질적 소인이 우울감을 느끼게 했다고만 생각을 했다. 그래서 최근에 일어난 스트레스를 일으킨 사건들에 원인을 찾고 이런 것들을 잘 극복해내지 못함으로 우울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다고 해석을 하자 우울감이 깊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내적인 소인에 무게를 많이 싣지 않고 꽃가루라고 하는 외적인 환경적 소인이 현재로는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면서 어제와는 사뭇 다르게 마음이 가벼워졌고 내 자신을 비난하고 우울의 감정에 더 깊이 빠져들고 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렇게 사람은 원인을 어디에 두고 또 어떤 해석을 하느냐 에 따라서 감정을 조절할 수 있게 되기도 하고 반대로 그 감정을 누군가를 해치는 것에 사용하기도 하고 그 감정에 깊이 빠져서 감정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떻게 해석을 하고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
우울한 감정적 소인을 연약한 자신의 기질로만 본다면 자신을 탓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비난하는 자기 증오를 낳게 된다. 또는 낙심을 하고 우울함에 처함 자신을 불쌍하게 연민으로 바라보면서 우울함에 더 깊이 빠져 들 수도 있다. 세상의 모든 짐을 짊어진 불우한 예술가처럼 우울한 음악을 듣고 침대에 오래 머물러 있으며 창문 밖을 멍하게 바라보며 우울의 늪에 빠져드는 것이다.
또한 우울한 감정의 원인을 나의 감정을 몰라주고 위로해 주지 않는 가족 또는 배우자에게 둘 때는 어떻게 될까? 자신을 비난하는 화살을 타인에게 돌리면서 타인에 대한 적개심 그리고 원망을 마음에 쌓아 놓고 그들의 무관심과 배려 없음을 탓하고 그들 때문에 나의 우울한 감정이 증폭이 되고 지속되는 요인이라고 믿으며 나는 희생자, 그들은 가해자라고 하는 프레임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 변화되지 않는 프레임속에 나는 갇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의 덫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우울의 원인을 사회적 제도나 불합리한 세상과 불특정 다수인 타인들에게 돌리면 어떻게 될까? 그런 경우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있는 용기가 없어서 히꼬모리처럼 방안에만 쳐 박혀서 세상을 두려움으로 또는 증오의 대상으로 대하게 될 수 있다. 그 억압된 분노가 때로는 자신을 돌보는 가족들에게 때로는 자신을 모르는 세상의 특정 다수에게 칼을 휘두르거나 악행을 저지르는 모습이 될 때 그들은 이제 가해자가 되어 세상에게 원망을 쏟아내는 반 사회적인 사람이 되기도 한다. 최근 이런 사건들이 수시로 생겨나는 일을 보게 되는데 어제도 호주국립대학 운동장에서 무고한 두 여학생이 누군가의 소행으로 칼에 찔려 중상을 겪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인관계 심리 치료 (interpersonal psychotherapy)에서는 우울증의 원인을 다른 것에 두지 않고 우울증이라고 하는 질환에 둔다. 그래서 누군가를 원망하기 보다 나타나는 증상들의 모든 것이 우울증이라고 하는 질환이 가지고 있는 증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해서 환자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행사할 수 있게 한다. 많은 경우 우울증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질병이기에 우울한 사람이 아무것도 못하고 있으면 그것을 질병으로 받아들이기 보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게을러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이기적이어서’, ‘야망이 없어서’ 라고 잘못된 원인으로 해석하여 우울증 환자를 부정적 편견을 가지고 이해할 때 관계적 측면이 더 나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우울증의 증상을 심화 시키게 한다.
필자가 앞부분에서 최근에 경험한 우울의 원인을 알러지로 이해하고 나에게만 있는 현상이 아니라 모두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했을 때 우울한 감정을 잘 극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울한 감정이 다가올 때 그것의 원인을 어디에다 두는 경향이 있는 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 지를 생각해보면 감정을 다스리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게 된다. 각자가 그것이 다 다른 양상일 수 있기에 똑같은 답을 생각할 수는 없으나 자신에게 해가 되는 방식 (무조건 내 탓, 또는 남 탓)으로 해석하기 보다 또는 부정적으로 해석(나는 어리석어, 또는 나는 피해자야 )하기 보다는 우울한 감정을 다루는데 도움이 될 만한 방식 그리고 현실에 기반한 생각 (지금 꽃가루가 워낙 심해서 우울한 감정을 갖게 하는 구나)으로 해석함으로 우울한 감정을 극복해 보자.
대인관계의 어려움은 왜 생기는가?
어린 시절 필자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은 모두 권위자들이었다. 부모님으로 부터 학교 선생님, 그리고 교회 사역자들이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나에게 관심이 있고 나에 대한 삶의 기대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런 지 권위자와의 관계는 아직도 필자에게는 쉽지 않다. 그런데 그것은 필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한국인들에게 해당되는 것 같다. 지금도 교회에서 점심을 먹을 때 보면 장로님이나 목사님들이 있는 테이블에는 성도들이 쉽게 다가가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권위자들에 대한 불편함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권위자들에 대한 불편감이 정도가 심해지면 그것은 사람에 대한 공포증으로 발전되어질 수도 있다. 권위자들이 또는 타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자꾸 예민해지고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왠지 긴장이 되고 편안하게 되질 않는 것이다. 이렇게 권위자이든 특정 어떤 사람이든 사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사회적 불편감을 사회 공포증이라고 한다. 사회 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대인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늘 긴장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운 사람이다. 이런 사회 공포증은 불안의 일종인데 사람들과의 관계를 자꾸 회피하게 만들고 긴장하게 하다 보니 사회적인 고립감으로 또는 사람들과 점점 관계하기가 어려운 사람이 되게 하기도 한다.
이렇게 경험하는 대인 관계의 어려움의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대인 관계에 어려움을 가지는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생리적인 이유와 심리적인 이유와 사회적인 원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생리적인 이유는 유전적 소인으로서 스트레스에 아주 취약한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반응이나 표정에도 예민한 것이 사람에 대해서 부정적인 해석을 하게 되면 대인 관계를 피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사람들과 자주 만나지 않으면 대인 관계 기술이 발달하지 못하게 되는 부분이 생긴다. 또한 기질적으로도 내성적인 사람은 외향적인 사람에 비해서 관계의 폭이 좁고 타인에게 관심이 적다 보니 대인 관계의 기술을 잘 배우지 못하는 부분도 있을 수 있고 또 기질적으로 예민한 기질이라면 모든 부분에서 늘 조심하다 보니 사람과의 관계도 조심하게 되고 조금이라도 위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피하게 되는 데 관계에서도 조심스럽게만 접근하다 보니 친밀한 관계를 잘 경험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이렇게 생리적인 이유가 사람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주는 부분이 있다.
한 여성분이 생리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생리 직전에는 아무것도 하기 싫고 사람도 아무도 만나기 싫고 작은 일에도 짜증만 많이 난다고 한다. 이 분의 경우 생리적인 이유가 대인 관계에 손상을 줄 수도 있고 관계를 피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경우다. 이런 어려움이 주위 사람들과 잘 소통이 되어서 이해를 받을 경우에 관계에 어려움이 생기지 않을 수 있으나 증상이 나타날 때 짜증이나 화로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폭발적으로 상처를 주게 된다면 그것은 관계를 해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심리적인 이유를 들 수 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따뜻하지 않고 무섭고 아픈 경험이라고 할 때 사람들에 대해서 신뢰할 수 없게 되고 그것은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고 관계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은 어릴 때 알코올 중독자 가정에서 자라면서 술을 안 마실 때는 너무나 좋은 아버지가 술만 마시면 악인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늘 조용한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눈에 띄지 않고 많은 사람과 관계를 하지 않는 있는 듯 없는 듯 한 사람으로 독립적으로 살아왔다고 한다. 이렇게 어린 시절의 경험이 대인 관계에 영향을 준다.
또한 심리적인 이유로 애착의 이슈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태어나자 마자 주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한 경우에 관계에서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이 되거나 관계에 무관심한 사람이 되거나 관계하는 것이 일관성이 없이 늘 힘든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람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따뜻한 시각과 안전감을 경험하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관계를 하는 것이 쉽지 않은 법이다.
마지막으로 관계를 잘 하지 못하는 요인으로 현재의 사회적 관계에서의 갈등이나 사회적 기술의 부족일 수 있다.
먼저, 현재의 사회적 관계의 갈등을 살펴보자. 예를 들어, 나와 맞지 않은 남편을 만나서 늘 갈등 상황을 경험하고 있을 때 가장 중요한 관계에서 갈등을 경험하는 것이 그 외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남편과 싸움을 한 후 그 스트레스를 자녀에게 풀면서 자녀를 학대하는 경우다. 이렇게 현재 어려운 갈등 관계가 또 다른 관계의 갈등을 가져오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현재의 갈등뿐 아니라 과거의 해소되지 않은 갈등은 현재의 갈등을 더 증가시키는 역할을 또 하기도 한다. 반대로 지금의 갈등은 또 미래의 관계의 어려움으로 다가오게 된다. 많은 이혼자들이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때 자신감을 잃어버리는 것도 이에 해당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현재에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건강하게 갈등을 극복하는 갈등해소 기술과 효과적의사소통 기술이 있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할 경우 더 많은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사회적 기술이 부족한 사람은 자칫 잘못하면 오해를 받을 여지가 있어서 공동체에서 왕따가 되기도 하는 상처의 경험도 갖게 될 수 있는데 그것이 또 대인 관계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사회적 기술이란 나의 감정과 생각을 상대에게 잘 전달 할 수 있고 상대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고 거절이 필요할 때 ‘아니요’를 건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기술일 뿐 아니라 도움을 잘 주고 받고 소통을 잘 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한다. 선천적으로 이런 기술을 잘 타고 태어난 사람을 정서지능이 높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만 사회적 기술은 선천적이라 기보다는 환경을 통해서 훈련되어질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나는 대인 관계 기술이 없어 라고 하면서 쉽게 관계를 포기하지 말고 배울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배워서 대인 관계의 폭을 넓히고 또 지속시켜 나가는 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다.
대인관계가 쉬운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필요한 것이기에 노력하고 변화를 시도하면 발전될 수 있는 기술이다. 그러므로 나의 안전한 곳을 벗어나 더 나은 관계를 위해 회피와 도망을 선택하기 보다는 대인 관계 기술을 배우는 용기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더 나은 관계를 맺어가자.
서미진 박사
(호주기독교대학 부학장, 호주한인 생명의 전화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