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게으름에 대한 찬양
버트런드 러셀 / 사회평론 / 2005.4.25
이 책은 저자의 전공인 철학 수학 과학 논리학같은 골치아픈 종류가 아니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집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하는 그는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인류평화의 적으로 간주한다. 뿐만아니라 서구 기독교 문명이 지닌 불관용성과 그로 인한 잔인성을 질타한다. 또한 청소년들의 기존가치들 종교,국기,진보,아름다움,진리 등등을 왜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는가를 아버지의 시선으로 살펴보고 있다.
산업사회가 낳은 인간의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러셀의 에세이. 1999년 출간되었던 책의 개정판이다. 러셀은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과 달리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주체성 확립을 위해서는 오히려 여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러셀은 흔히 자신의 무능력과 게으름에서 불행의 원인을 찾는 현대인들에게 ‘행복해지려면 게을러지라’는 처방을 내리며,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스스로를 옭아맨 수많은 회의와 편견들에 저항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늘 일상에 쫓겨 살아가면서도 문득 ‘이렇게 살아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 때, 필요한 책이다.

○ 목차
게으름에 대한 찬양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
건축에 대한 몇 가지 생각
현대판 마이더스
우리 시대 청년들의 냉소주의
현대 사회의 획일성
인간 대 곤충의 싸움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이성의 몰락, 니체와 히틀러
내가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반대하는 이유
사회주의를 위한 변명
서구의 문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금욕주의에 대하여
혜성의 비밀
영혼이란 무엇인가
○ 저자소개 :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B.A.W. 러셀)

철학자, 수학자, 사회운동가, 교육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영국 수상을 두 차례 지낸 존 러셀 경의 손자로,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1910년에 화이트헤드와 함께 『수학 원리』를 출간하여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이후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세계에 영향을 줬을 뿐 아니라 분석철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논리학·인식론·존재론·윤리학·사회철학 등 철학 전반에 분석적 방법을 적용해 독창적 견해를 발표했고, 기호논리학도 확립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전쟁과 징병을 반대하는 글을 써서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쫓겨나고, 6개월간 옥고를 겪었다. 1927년에는 아내 도라 블랙과 함께 영국에 진보적인 대안 학교를 설립했고, 1938년부터 하버드대, 뉴욕시립대 등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철학을 강연했다. 1950년에 『러셀 서양철학사』, 『인간 지식』, 『결혼과 도덕』 등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과학의 힘을 믿는 무신론자이자 개혁적 자유주의자인 그는 1955년에 핵무기의 위험성을 알리고 평화적인 해결을 촉구하는 ‘러셀 아인슈타인 성명’을 발표하고, 각국의 과학자와 함께 군축 평화 문제를 논의하는 ‘퍼그워시 회의’를 개설했다. 이후 ‘100인 위원회’를 결성하여 88세에 대중적인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고, 1963년에 ‘버트런드 러셀 평화 재단’을 설립했다. 그 외에도 베트남 전쟁, 인도·중국 국경 분쟁, 쿠바 미사일 위기 등 당대 많은 현안에 적극 참여했다.
주요 저서로는 『러셀 서양철학사』를 비롯하여 『철학의 문제들』, 『행복의 정복』, 『권력』,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러셀의 교육론』, 『자유와 조직』, 『러셀 자서전』 등 70여 권이 있다.
– 역자 : 송은경
1963년 부산 출생.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게으름에 대한 찬양』,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런던통신 1931~1935』, 『프로방스에서의 1년』,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마키아벨리』, 『안데르센 지중해 기행』, 『상처뿐인 어린 천사 엘렌』, 『라테란의 전설』, 『바나나』, 『커피 이야기』 등을 번역했다.
○ 책 속으로
우리 세대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나도 이런 말을 들으며 자라났다. — 첫문장
개인적인 불행이든 공적인 불행이든, 의지와 지성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극복될 수 있다. 의지에는 악을 피하고 비현실적인 해결책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가 포함된다. 지성에는 그 악을 이해하고, 치유가 가능하다면 치유책을 찾아내고, 만일 불가능하다면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되 그것을 벗어난 다른 영역, 다른 시대, 행성간의 공간에 놓인 심연들에는 무엇이 놓여 있나를 되돌아봄으로써 그 악을 참고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 포함된다.
그러나 다수의 노동이 가치있는 이유는 일이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여가가 좋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수의 노동이 가치있는 이유는 일이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여가가 좋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 p.21
현대의 인간은 모든 일이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자체를 목적으로 일하는 법이 없다. 예를 들어 진지한 사람들은 영화 보러 가는 습관에 대해 끊임없이 비난하며 그런 버릇은 젊은이들을 범죄로 이끈다고 말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영화를 만드는 노동음 훌륭한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이기 따문에, 또한 돈을 벌게 해주기 때문에. — p.25
만일 사업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계속 가난하게 살도록 남겨 두고픈 마음보다 자신들이 부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정말로 더 크다면 세상은 금방 파라다이스가 될 것이다. — p.81
우리가 사는 것보다 파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된 심리적 근원은 기쁨보다 힘을 더 좋아하는 데 있다. — p.83
우리가 살펴본 현대 비합리주의자들의 교리의 특징을 살펴보자. 그들은 사고와 감정보다 ‘의지’를 강조하고 권력을 찬양한다. 객관적이고 귀납적인 검증보다 이미 정립된 것에 대한 직관적인 ‘단정’을 믿는다. — p.151
여가의 현명한 이용은 문명과 교육에 의해 가능하다. 평생 동안 장시간 일해 온 사람이 갑자기 일을 하지 않게 된다면 따분해질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상당한 양의 여가 없이는 최상의 많은 것들로부터 차단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박탈을 겪어야 할 이유는 이제 더이상 없다. 다만 우매한 금욕주의-그나마 자기는 지키지 않으면서 남에게나 강요하는-가 우리로 하여금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과도한 노동을 주장케 할 뿐이다. — 24쪽
아이들에게만 놀이가 필요한 게 아니다. 어른에게도 현재의 즐거움 이외엔 아무 목적도 없는 행위에 빠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놀이가 제 구실을 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과 관계 없는 부분에서도 기쁨과 흥미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현대의 도시인들은 점점 더 수동적이고 집단적인 여흥, 즉 다른 사람들의 능란한 활동을 피동적으로 구경하는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다. 물론 그런 여흥도 전혀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교육을 통해 일과 관계 없는 부분에서 폭넓은 지적 관심사들을 가지게 된 사람들의 여흥에 비하면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 45쪽
아니오. 나한테 석탄을 가져오지 마시오. 그러다간 장작 줍는 내 산업이 망할 테니까. 빵도 가져오지 마시오. 내 농사가 망쳐질 것이고 원시적이긴 하지만 내가 발명한 제분기도 쓸모없어질 테니까. 내게 옷을 가져오지 마시오. 내겐 짐승 가죽으로 옷을 만드는 초기 산업이 있으니까. 금을 가져오겠다면 상관없소. 그건 나한테 아무런 해도 주지 않을 테니까. 난 금을 지하실에 넣어두고 어디에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내가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배상하는 건 그 어떤 것도 받지 않겠소. — 76쪽
현대의 생산 방식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음을 영원히 이어나갈 이유는 전혀 없다. — p.33
우리의 불행을 초래한 사고의 혼란은 소비자의 입장과 생산자의 입장에 대한 혼란이다. 배상금을 부과할 당시 연합국측은 스스로를 소비자로 간주했다. 독일인들을 일시적 노예로 만들어 일을 시키면 자신들은 노동하지 않고도 독일인들이 생산한 것을 소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즐거워 했던 것이다. — p.75
가계의 생산력 덕분에 인류는 과거보다 훨씬 적게 일하고도 상당수준의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일부 꼼꼼한 저술가들은 하루 1시간씩만 일해도 충분하다고 주장하지만 그 계산에선 아시아의 상향을 충분히 차막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보기엔 하루 4시간 노동을 주장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 같다. 모든 상인들이 그만큼씩만 일한다면 분별력 있는 사람들이 바라는 만큼의 물질적 편의를 충분히 생산 할 수 있다고 본다. — p.184-185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