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관용론
볼테르 / 한길사 / 2016.4.8
‘관용론’ (1763)은 계몽사상가로 유명한 볼테르 (Voltaire, 1694~1778)가 18세기 유럽을 휩쓸던 종교 전쟁의 광풍에 희생된 한 가장(家長)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관용’의 개념을 역설한 책이다. 볼테르는 이 책에서 탐사보도 성격의 글쓰기와 시각 자료의 적극적인 활용 등 오늘날 저널리즘의 표본을 보여주며 당시 막 세상에 빛을 비추던 계몽주의 사상과 자유주의 사상 등을 효과적으로 제시해 종교 전쟁의 종지부를 찍고 프랑스혁명을 앞당기는 데 공헌했다.
“네가 타인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너 역시 타인에게 하지 마라”는 유명한 명제가 실린 ‘관용론’은 오늘날에도 주목받고 있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지난해 ‘관용론’이 처음 출간된 지 250여 년이 지나 다시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을 정도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와 난민 문제 등을 계기로 관용과 불관용의 문제가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기 때문인데 ‘혐오’가 일상이 된 한국에서는 어떤 바람을 일으킬지 주목되는 이유다.
한길사에서는 지난 2001년 처음 출간된 이 책이 우리 사회에 여전히 울림을 준다고 판단해 완전히 새로 번역해 다시 출간했다. 초판에서 오역한 부분을 바로잡음은 물론이고 특히 볼테르가 히브리어와 라틴어로 쓴 부분을 다시 손봤다.
○ 목차
- 장 칼라스 사건의 개관
- 장 칼라스의 처형에서 얻은 각성
- 16세기 종교개혁에 대한 이해
- 신앙의 자유란 과연 위험한가
-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면
- 불관용이란 과연 자연법인가
- 그리스인에게도 종교적 박해가 있었을까
- 로마인들도 인정한 신앙의 자유
- 순교자들
- 거짓 성인전설과 박해의 위험성에 대해
- 종교적 불관용이 불러온 불행한 결과들
- 유대교에서 불관용은 신의 율법인가
- 유대인들의 크나큰 관용
-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관용
- 종교적 박해에 대한 반론들
- 죽음 앞에서 나눈 두 사람의 대화
- 어느 성직자가 보낸 편지
- 불관용이 인간의 정의의 일치하는 경우들
- 중국에서 벌어졌던 논쟁에 대한 보고서
- 사람들을 맹신에 묶어두는 것이 유용한가
- 미덕이 앎보다 더 소중하다는 점에 대해
- 신앙의 자유는 보편적이라는 점에 대해
- 신에게 올리는 기도
- 후기
- 칼라스 사건의 귀결 및 우리의 결론
보유 최종판결의 의의
볼테르의 주석
○ 저자소개 : 볼테르 (Voltaire, 본명 :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
18세기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시인, 극작가, 비평가, 역사가인 다재다능한 작가 볼테르 (필명)는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 (Franois Marie Arouet)’라는 이름으로 1694년 11월 21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난 볼테르는 열 살에 예수회가 운영하던 루이 르그랑 (Louis le Grand) 학교에 들어가는데, 이 학교에서 금세 두각을 드러내고 평생 이어갈 교유관계들도 형성한다. 한편,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대부 (代父)인 샤토뇌프 신부가 그를 쾌락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인 귀족들과 시인들이 모이는 ‘탕플 (Temple)’이라는 문학 살롱에 데리고 간다. 17세에 루이 르그랑 학교를 떠나면서 아버지에게 문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만 아버지는 이에 반대하며 법조계를 택하라고 강경하게 권한다. 그래서 법학 대학에 등록은 하지만 탕플을 계속 드나들면서 사치와 방탕을 선망한다.
이후에도 소 (Sceaux)성 (城)의 문학 살롱을 드나들면서 재기를 발휘하며 문학적 재능을 증명해 보이던 그는 청년 시대에 섭정 오를레랑 공을 풍자한 시의 작자로 간주되어 바스띠유에 갇혔다가 출옥한 뒤, 볼떼르란 필명으로 24세라는 아주 이른 나이에 『오이디푸스 (Oedipus)』(1718)라는 비극 작품으로 유명해진다. 그 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그렇듯 볼테르도 존중받는 장르였던 비극과 시로써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작가로서의 볼테르는 비극 작품들과 서사시, 역사물 등을 통해 빠른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은 오늘날에는 별로 읽히지도 않거니와 잘 알려져 있지도 않다.
반면, 나중에 재미삼아 쓰고 익명으로 출간한 콩트들이 오늘날까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그중 가장 많이 읽히고 널리 알려진 작품은 『캉디드 (Candide, ou l’Optimisme)』(1759), 『자디그 (Zadig, ou la Destinee)』(1748), 『랭제뉘 (L’Ingenu)』 (1767)다. 디드로의 『백과전서』 집필에도 참여하는 등 철학자로서, 작가로서,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평생 왕성한 활동을 벌인 볼테르는 84세까지 장수를 누렸지만, 프랑스 대혁명은 보지 못하고 1778년 5월 30일에 죽었다. 1791년에는 국가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인물들만 들어가는 팡테옹 (Pantheon)에 안치된다.
프랑스 계몽기의 대표적 철학자로 꼽히는 볼테르는 프랑스의 지성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종교적 광신주의에 맞서서 평생 투쟁했던 그는 관용 정신이 없이는 인류의 발전도 문명의 진보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그의 저서들 속에는 당대의 지배적 종교 권력이었던 가톨릭에 대한 비판이 꾸준히 등장한다. 그의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가 전통적 가치들의 토대인 기독교 정신을 무너뜨리려 하고, 풍기를 문란케 한다고 비난했다. 나이가 70세에 가까웠을 때는 그 유명한 ‘칼라스 사건’을 계기로 종교적 불관용의 희생자들을 변호하고 돕는 활동들을 사재를 털어가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벌여서 오늘날까지도 관용의 상징적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생전에는 대시인으로 대접받았지만, 그의 재능의 본질은 풍자 작가, 명쾌하고 기지에 찬 프랑스적 산문 작가의 전형에 있으며, 특히 철학적 에세이와 우화 소설에 뛰어났다. 이신론(理神論), 이성론의 입장에서 초자연을 강하게 부정하고 신랄하게 성서를 비판해, 후세에 그의 이름은 회의 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계몽주의의 보급을 통해 대혁명의 정신적 기반을 형성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철학의 간』(1734), 『깡디드』(1759), 『관용론』(1763), 『철학사전』(1764) 등이 있다.
– 역자 : 송기형
송기형 (宋紀炯)은 서울대학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프랑스 혁명기 언어정책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국대학교 교수로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현대 프랑스의 언어정책과 불어 사용법」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앙드레 말로, 문학과 행동』 『프랑스 문화예술, 악의 꽃에서 샤넬 No.5까지』(공저)가 있다.
– 역자 : 임미경
임미경 (林美京)은 서울대학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스탕달의 글쓰기와 자기 탐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민주주의로 가는 길』 『어느 전쟁영웅의 당연한 죽음』 『파르마의 수도원 1, 2』 『여성과 성스러움』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 장 칼라스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 ‘관용론’
어떤 이들은 자비나 관용 그리고 신앙의 자유란 가증스러운 것들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진정으로 반문하건대 자비나 관용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그와 같은 재앙을 초래한 적이 과연 있었던가? _ 48쪽
성실한 신교도 칼라스는 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광신적 대립이 지배했던 프랑스 남부의 툴루즈에서 모범적인 가장으로 평온하게 지내고 있었다. 1762년 5월 9일, 그의 큰아들 마르크 앙투안이 삶을 비관한 끝에 목을 매고 자살한다. 이 사건을 보려고 모여든 군중 가운데 누군가가 칼라스의 큰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려 했기 때문에 가족들이 그를 죽였다고 소리쳤다. 이런 소문은 신교도에게 적대적이었던 툴루즈 시민들 사이에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고 시정부는 성난 여론에 떠밀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칼라스 가족을 체포했다. 거듭되는 가혹한 심문에도 칼라스 가족은 범행을 부인했으나 맹신과 편견에 오도된 재판관들은 증거가 불충분한데도 이 가장을 수레바퀴에 매달아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에 처했다.
칼라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볼테르는 재판절차의 부당함에 분개했고 이 사건 속에 자신이 공격하고자 하는 옛 시대의 종교적 맹신과 야만적 형벌제도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절감했다. 이후 볼테르는 칼라스의 복권을 위해 『관용론』을 쓰고 각종 팸플릿을 제작해 유포하는 각종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동·서양의 역사와 『성서』 강론, 도덕론 등 각종 자료를 뒤져가며 불관용에 대한 반론의 논거를 정리한 『관용론』은 볼테르 특유의 감각과 재치 덕분인지 당시 독자들의 반응이 매우 폭발적이었다. 결국 ‘파리’, 즉 중앙정부가 이 사건을 인지하게 되었고 1765년 칼라스의 무죄와 복권이 선고되었다. 볼테르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억압해온 옛 체제의 낡은 권위를 무너뜨리고 야만적 형벌제도에 대해 계몽의 승리를 거둔 것이다.
– 자연법에 어긋나는, 예속을 강요하는 세속적 종교권력 비판
이번 축제의 백미는 저 교수대 위에서 칼라스 일가를 바퀴에 매달아 죽이는 행사가 될 것이라고 누구나 거리낌 없이 말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죄인들을 우리의 신성한 종교에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_ 33쪽
맹신에 빠져 칼라스를 사형장으로 내몬 대중에 대한 볼테르의 한탄 섞인 평이다. 볼테르는 이런 ‘마녀사냥식’ 처벌을 비판하며 각종 역사적 사례를 제시한다. 우선 고대 아테네에서는 사형 판결을 내리려면 의사결정에 참여한 시민 반수의 찬성에 더해서 50명이 더 찬성해야만 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다른 종교를 믿는 부족을 평화롭게 통치하고 있고, 콘스탄티노플에서는 20만 명에 달하는 그리스 정교도가 아무런 위험 없이 생활하며, 술탄은 그리스의 몇 개 섬을 위해 가톨릭 주교들을 임명해 파견한다. 그뿐인가. 아메리카 대륙 캐롤라이나의 법률에 따르면 어떤 종교가 법적으로 승인받기 위해서는 한 가족의 가장인 신도가 일곱 명만 있으면 된다. 이러한 종교의 자유 때문에 무질서가 초래된 적은 없었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볼테르는 당시 툴루즈를 비롯한 프랑스 사회의 이성의 불완전함과 법률의 불충분함을 비판한다.
그렇다면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박해를 일삼는 광신도들의 수를 감소시킬 묘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광신이라는 이 정신의 질병에 이성의 빛을 쬐는 것이다. 이성은 인간을 계몽하는 데 효과는 느리지만 실패하지 않는 처방이기 때문이고, 이성은 온화하고 인정미가 있으며 너그러움을 불러일으키고 미덕을 확고히 하며 기쁜 마음으로 법에 복종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성은 진보와 행복을 보증하는가? 아니다. 이성은 그 효율성과 합리성 외에 관용의 정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따라서 종교가 다르다고 박해하는 일은 볼테르가 보기에 매우 어리석고 잔인한 것이다. 볼테르는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이것은 호랑이 같은 맹수들에게나 어울릴만한 법이다. 아니 그보다 더 끔찍하다. 왜냐하면 호랑이들은 먹을 것을 다툴 때만 서로를 물어뜯지만, 우리 인간은 말 몇 마디 때문에 서로를 죽였던 것이다. _ 66쪽
– 관용은 가장 겸손한 형태의 인간에 대한 사랑
옮긴이는 해제에서 관용을 “소극적 인정과 방임을 넘어 다른 종류의 사고방식과 행위양식을 존중하고 자유롭게 승인하는 태도”라고 정리한다. 그렇다면 왜, 언제부터 관용은 문제시되었는가? 옮긴이는 절대적 진리를 요구하는 일신교의 정립과 함께 관용이 문제로 부각되었다고 말한다. 기독교가 국교로 승인된 후부터 종교개혁시대 이후까지 관용의 정신은 무시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볼테르에 따르면 기독교도들은 자신의 종교를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도 마다치 않았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은 종교적 감정이 매우 강한 민족이긴 했지만 에피크로스 학파가 신과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을 기꺼이 용인했으며 로마인들 역시 그들의 번영과 제국팽창을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해주는 관용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냈다. 심지어 플리니우스는 자신의 저술 첫머리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신이 있던 자리에 대신 태양을 놓았으며, 키케로는 지옥에 대해 “아주 어리석은 노인들조차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처럼 로마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인간의 권리 가운데서 가장 신성한 것으로 여겼다. 볼테르는 물론 네로 황제 때의 기독교 박해도 언급한다. 그러나 “네로 황제 시대에 불운한 유대교도들과 기독교도들이 당한 재앙을 종교적 불관용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종교적 박해가 국익에 기인한 정치적인 박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례들과 문헌들을 섭렵해가면서 볼테르는 소위 기독교의 순교자들에 대한 신화를 낱낱이 반박한다.
볼테르는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이 책을 통해 후일 열매를 맺게 될 씨앗을 하나 뿌렸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계몽의 빛을 널리 퍼뜨리기 시작한 이성의 정신에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리는 일”만이 남아 있다고. 그러나 볼테르가 기다리는 그 날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나치의 유대인 학살, 종교와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오늘날까지 자행되는 수많은 국지전 등은 볼테르 시대의 합리적 이성에 기초한 근대정신의 어두운 측면이자, 관용정신의 적나라한 결핍을 보여주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는 행동이 성스러운 것이라면, 이교도들을 가장 많이 죽인 사람이 천국에서 최고의 성인이 될 것”이라는 볼테르의 역설에서 우리는 결코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여전히 『관용론』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까닭이다.
○ 고전에서 인생을 묻다_볼테르의 <관용론>
– 인간관계를 따뜻하게 하는 관용의 미덕
내가 아무리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도 다른 사람의 신념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관용의 전제 조건이다.
관용은 모든 것을 관대하게 대하는 중립적 관찰자의 태도가 아니라, 나와 다른 존재 안에서도 가능한 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에 권리를 부여하고자 하는 태도다.
이런 관용은 어떤 인간도 결코 오류와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통찰에, 모든 사람은 자기 관점에 얽매일 수 있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 <관용론> 중에서
– 인간의 오류를 고발한 사람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한 적이 없지만, 평생토록 이 말의 힘을 믿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오는 이 말을 한 적이 없지만, 이 말을 증거했다.
“나는 당신이 하는 말에 찬성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기꺼이 바치겠다.”
프랑스의 작가 겸 철학가 볼테르는 이 말을 한 적이 없지만, 이 말대로 살았다.
말이란 문사들에 의해 그럴듯하게 지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말대로 사는 일은 오직 치열한 정신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볼테르는 그럴 만한 정신의 인간으로 평생을 살아냈다.
볼테르는 파리에서 부유한 부르주아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반골 기질이 강한 이 천재는 오류에 찬 구체제에 저항하는 언행으로 바스티유 감옥에 두 번이나 수감되었다. 그의 책은 으레 금서가 되었고, 그는 유럽 전역을 도는 우편 마차에 몸을 싣고 체포 영장을 피해 도망다녔다.
“볼테르는 일평생 인간의 오류를 고발하는 데 전념했다”는 프랑스 문학사 겸 비평가 귀스타브 랑송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볼테르가 남긴 명언처럼 “인간은 할 말이 없을 때는 욕을 한다(남을 비난한다).” 이렇듯 불완전하고 불관용적인 인간 존재의 오류를 고발하는 일은 바야흐로 지식이 폭발적으로 확장되고 정치·경제적 대혁명의 기운이 피어오르던 18세기에 가장 필요한, 하지만 가장 위험한 일이었다. 그는 그 누구보다 그 일에 자신을 바쳤다.
설혜심 교수는 <그랜드 투어>에서 근대 초 유럽의 어린 청년이 교육의 일환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을 장기간 여행하던 관행인 그랜드 투어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영국의 상류층은 자식을 유럽 대륙으로 보내 해외 문화를 체험하고 외국어, 세련된 매너와 외교술, 고급 취향을 배워오게 했다. 이런 여행은 곧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유럽의 근대를 이끈 초석이 되었다.”
그런데 그랜드 투어의 주목적 중 하나는 인맥을 쌓는 일이었다고 한다. 소개장을 받아 유럽 각처의 유명인사를 방문하곤 했는데, 그중 가장 만나고 싶은 인사는 바로 볼테르였다. 그는 18세기의 정신적 지배자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대문호이자 철학가였던 것이다.
– 불관용의 해악에 대한 준엄한 보고서
<관용론>은 장 칼라스 사건의 백서(白書) 형식의 책이다. 장 칼라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모범적인 가장인 장 칼라스는 툴루즈 지방에 사는 신교도 상인이었다. 그의 큰아들 마르크 앙투안은 변호사가 되고자 했던 꿈이 좌절되자 자살을 택한다. 하지만 구교도와 신교도가 서로 찢어 죽이는 광신의 시대에 이 자살은 왜곡되었다. 마르크 앙투안이 구교로 개종하려 했기 때문에 가족이 그를 죽인 것이라고 말이다.
구교도 재판관들은 장 칼라스에게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을 선고하고, 1762년 형을 집행한다. 장 칼라스가 처형된 후 박해받던 그의 가족이 볼테르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그는 그들이 겪은 중세적 박해의 이야기를 듣고 경악했다. 그리하여 볼테르의 노력 덕분에 이 사건은 재심에 회부되고 부당성이 입증되어, 장 칼라스는 처형된 지 3년 만에 무죄와 복권이 선고된다.
간단한 듯 보이는 이 사건은 18세기 유럽 사회에 팽배한 신·구교 간의 상호 편견이 빚은 잔혹한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서 볼테르가 호소한 관용은 단지 당대의 종교적 갈등이나 편견의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관용론>(한길사 펴냄)의 번역자 송기형·임미경 교수도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지적했다.
“그가 이 책을 통해 호소한 관용은 종교적 대립의 상처가 깊은 볼테르 당대의 시대적 요청이었고, 또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미덕이기도 했다.”
스스로 “나는 깊지 않기 때문에 밑바닥까지 보이는 작은 시내와 같다”고 말한 재기 발랄한 논객 볼테르는 <관용론>에서만큼은 위트를 버리고 진지했다. 비꼬지 않고 정곡만 찔렀다.
그리하여 그는 <관용론>을 인간과 인권의 역사 앞에 바쳤다.
“신앙의 자유에 대한 이 책은 권력과 신중함 앞에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겸허하게 내놓는 호소입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후일 열매를 맺을 씨앗을 하나 뿌렸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시간의 흐름에, 국왕의 호의에, 그의 각료들의 현명함에, 그리고 바야흐로 문명의 빛을 널리 퍼뜨리는 이성의 정신에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리는 일입니다.”
볼테르는 <관용론>의 후기에서 이와 같이 적고 있다. 그가 뿌린 ‘관용’이라는 씨앗이 튼실한 열매를 맺을지, 썩은 열매를 맺을지는 ‘관용’의 정신이 얼마나 살아 있는지에 달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기다리던 열매는 ‘장 칼라스 사건’보다 더 잔혹한 인종 차별, 세계 대전, 대학살 등이었다.
천재 볼테르 자신은 이렇듯 비극적인 미래를 어느 정도 직감했다. 기독교에 대해 늘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관용론>을 마무리하면서 장엄한 기도를 신에게 올렸다.
‘편견’을 이길 수 있는 위대한 미덕인 ‘관용’은 불완전한 인간에게 호소해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는 <관용론>을 신에게 올리는 기도로써 마무리한 것이리라.
“이제 나는 인간이 아닌 신에게, 즉 온갖 존재와 전 세계와 모든 시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당신에게 호소하려 합니다.
이 광대한 공간에서 길 잃고 떠도는, 우주의 티끌처럼 흔적 없는 미약한 존재들이 감히 당신에게, 모든 것을 주셨으며 또한 그 뜻은 변함없고 영원하신 당신에게 무엇을 간구하는 일이 허락된다면,
부디 우리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한 죄들을 가엾게 보아주소서. 그러므로 그런 죄로 인해 우리를 재앙 속에 던지지 말아주소서.
당신은 우리에게 결코 서로를 미워하라고 마음을 주신 것이 아니며, 서로를 죽이라고 손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도와 힘들고 덧없는 삶의 짐을 견디도록 해주소서.
우리의 허약한 육체를 가리고 있는 의복들, 우리가 쓰는 불충분한 언어들, 우리의 가소로운 관습들,
우리의 불완전한 법률들, 우리의 분별 없는 견해들, 우리가 보기에는 참으로 불균등하지만 당신이 보기에는 똑같은 우리의 처지와 조건 사이에 놓여 있는 작은 차이들, 즉 인간이라 불리는 티끌들을 구별하는 이 모든 사소한 차이들이 증오와 박해의 구실이 되지 않도록 해주소서.
(…)
붉은색이나 자주색 옷을 입은 사람들(고위 성직자들),
이 세상의 다만 흙덩이에 지나지 않는 한 조각 땅 위에 군림하는 사람들, 그리고 금은동으로 만든 둥근 금속 조각을 가진 사람들, 이들이 자신의 ‘지위’와 ‘부’라고 하는 것을 누리는 데 거만하지 않게 해주시고, 또 그 밖의 사람들은 이들을 시샘하지 않게 해주소서.
사실 당신도 아시는 바와 같이 이런 허세란 부질없는 것이라서 부러워할 것도 우쭐할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그들 모두가 형제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주소서!
사람들로 하여금, 노동과 정직한 생업의 결실을 강탈하는 강도들을 증오하듯 그들의 영혼에 가해지는 폭압을 증오하게 해주소서.
전쟁이라는 재앙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평화를 유지하는 동안만은 서로를 미워하지 않고, 서로 편 갈라 고통을 주지 않게 해주소서.
그리고 시암에서 캘리포니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그러나 당신을 경배하는 데서는 마찬가지인 수많은 언어를 통해, 우리가 이 땅에 머무는 시간을 우리에게 이 삶을 주신 당신의 은혜를 찬양하는데 쓰게 하소서.”
– 서로 편 갈라서 고통을 주지 않게 해주소서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0여 년이 되었다. 불완전한 형태로 휴전협정을 맺은 상태지만, 남북 간의 정치·군사적 마찰은 여전히 양쪽 국민을 모두 불안하게 하고 있다. 전 세계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불행한 분단국가의 국민은 정반대의 이념과 문화적 정체성을 각각 굳건히 구축했다. 마치 영원히 다시 하나가 될 수 없을 듯이.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다. 온 국민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을 추모하는 분위기다. 국립묘지에는 애도와 헌화의 인파가 줄을 잇는다. 오늘날 이만큼의 민주 정부를 갖고, 이만큼의 사회적 관용을 이룰 수 있음은 그 영령들에게 빚진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영령들이 피 묻은 무기를 잠시 내려놓고, 비방과 불관용의 마이크를 잠시 꺼놓고 온 애도와 헌화의 인파를 기꺼이 반가워할까? 모를 일이다.
그 영령들이 혹시 볼테르처럼, 이렇게 신에게 기도하는 건 아닌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당신은 우리에게 결코 서로를 미워하라고 마음을 주신 것이 아니며,
서로를 죽이라고 손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전쟁이라는 재앙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평화를 유지하는 동안만은 서로를 미워하지 않고, 서로 편 갈라서 고통을 주지 않게 해주소서. _ 글 정제원 / 일러스트 홍소희
참고문헌 <관용론>(볼테르 지음, 송기형·임미경 옮김, 한길사 펴냄), <고전 탐독>(정제원 지음, 평단문화사 펴냄), <그랜드 투어>(설혜심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글쓴이 정제원은 서울대학교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편입해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을 마쳤다. 1999년 월간 <순수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서울대학교와 백제예술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쳤으며, <죽도록 공부해도 죽지 않는다>, <교양인의 행복한 책읽기 : 독서의 즐거움>, <문학의 즐거움>, <고전 탐독> 등을 펴냈다.
○ 볼테르 (Voltaire, 1694~1778) 이해
– 생애
프랑스의 철학자, 역사가, 문학자, 계몽주의 운동의 선구자이다.
파리에서 태어나 가톨릭 계열 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는 반봉건적 풍자 때문에 당시의 정부에 의해 두 차례 체포되었고, 그 후 생활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냈다.
런던 체재 중(1726~1727) 로크의 철학과 뉴튼의 물리학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철학적 입장은 경험론, 종교적 견해로는 이신론자(理神論者)였고, 영혼이 특별한 실체라는 것을 부정하고, 지식의 원천은 경험에 있다고 했다.
그는 무신론자는 아니었지만 봉건적 사고와 종교적 광신을 강력하게 비판하여 성서와 가톨릭교회의 주장에 타격을 주었고, 이들을 진보에 대한 주된 적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의 역사 철학에 의하면 사회는 진보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관념이라고 하여 관념론적 사관을 드러냈다.
사회적 견해로는 반(反)봉건제를 원칙으로 했고, 빈부의 격차는 불가피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지만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을 주장했으며, 입헌 군주제가 이치에 맞는 국가 형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만년에는 공화제를 찬성했다. – 임석진 외, “철학 사전”-
– 장 칼라스 사건과 “관용론”
프랑스에서 형법을 개혁하기 위한 계몽 사상가들의 캠페인은 장 칼라스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장 칼라스는 룰루즈에 살던 위그노였고 옷장사를 했다. 1761년 10월 13일, 그의 아들 마르크 앙투안이 아버지의 가게 뒤에서 목을 맨 상태로 발견되었다. 처음에 그 가족은 마르크 앙투안이 살해되었다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자살이라고 했다. 그들이 그렇게 거짓말을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프랑스 법에 따르면 자살은 중대 범죄였고, 그 경우에 시체를 거짓 재판에 회부한 다음 발가벗긴 채 길거리로 끌고 다니다가 결국 교수형에 처했기 때문에 유가족으로서도 그런 모멸감을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웃의 증언에 따르면 장 칼라스가 아들이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살해했다는 것이었다. 툴루즈의 재판부는 칼라스를 화형에 처한다고 판결했다. 그는 자백을 거부한 탓에 여러 번 고문을 당했고 마침내 몸이 부서졌다. 그래도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다.
볼테르는 1762년에 이 이야기를 듣고는 몹시 화를 냈다. 이런 상황 자체가 그는 너무 싫었다.
칼라스는 종교적 편견의 희생양이며 증거라는 것도 하나같이 정황 증거였다. 이 사건의 사실들은 모두 그 아들의 자살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끔찍한 고문으로 아버지의 자백을 받아내려 했다. 이런 야만스러운 과정들은 프랑스의 형법과 딱 어울리는 것이었다.
볼테르는 스스로 이 사건에 뛰어들어 3년간의 노력 끝에 결국 정반대의 결과를 얻어냈지만 이미 칼라스를 돕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의 가족들을 도울 수도 없었다. 그러나 볼테르의 이러한 노력은 앙가주망(지식인의 사회 참여)의 시초가 되었으며, 종교적 불관용에서 불거진 이 사건을 낱낱이 비판하고 분석한 “관용론”을 저술하는 계기가 되었다. – 토머스 핸킨스, “과학과 계몽주의”-
– 인간의 불완전성과 관용
인간의 불완전성은 자연의 법칙이다. 인간은 과오를 저지른다.
“인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간이 저지르는 과오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라고 이탈리아 휴머니스트 아콘초는 증언했다. 거의 동시에 카스텔리옹은 사도들의 말을 본받아 “잘못하는 자에게 모두 처벌을 가한다면 처벌받지 않을 자가 누구일지 나는 알지 못한다.”라고 외쳤다.
이들 이외에도 특히 윌리엄 월윈은 1664년에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스스로 잘못이 없다고 자부할 수 없으며 “어떤 견해든 모든 견해에 잘못이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 바로 이것이 우리가 아무에게도, 어떤 것도 강제할 수 없는 이유이다.”라고 지적했다.
존 스튜어트 밀도 인간이 저지르는 잘못이 불완전성이라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과 연결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인간의 잘못은 일종의 불구에서 비롯되는 결과여서 마치 신체적 기형에서 비롯되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누구에게든 과오가 있다고 불평할 수 없는 것이다.
볼테르는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르게 하는 이 보편적 속성이 우리를 형제로 만든다면서 용서를 주장했고, 이러한 차원의 용서와 종교적 모독을 저지른 자에 대한 용서를 조심스럽게 결부시켰다.
인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종교적 모독 행위에 대해서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볼테르의 주장은 톨레랑스 중에서도 가장 절대적이며 실행하기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 급진적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종교의 영역에서, 즉 명백한 계명에 대한 복종을 특징으로 삼는 종교의 영역에서 발생하기 쉬운 종교적 톨레랑스(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차이를 이유로 억압하는 것)에 대응하려는 것이었다. – 필리프 사시에, “민주주의의 무기 톨레랑스”-
○ 캉디드 / 볼테르 _ 김용현 (아주대 인문대 ㆍ불문학)
– 볼테르의 사상
볼테르는 프랑스 18세기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철학자이며 이상을 위해 행동한 투사이다. 루소와 달리 볼테르는 살아생전에 큰 명성과 권위를 누렸다. 유럽 전역에 걸쳐 사상적 영향을 끼쳤으며, 군주의 후원이 아닌 자신의 저작권으로 많은 부를 얻기도 하였다.
18세기의 특징은 그 전 시기인 17세기와의 대조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루이 14세로 상징되는 절대왕권과 신분계급,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관념적 형이상학, 시대를 초월하는 영원한 인간본성을 탐구하고자 한 고전주의, 신비주의와 계시의 종교, 이 모든 것에 대하여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반기를 들게 되는데 볼테르의 사상은 바로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 위치한다.
부르주아라는 출신 계급은 구체제와 귀족계급의 횡포에 대한 저항을 예고한다. 바스티유 감옥 투옥과 영국 망명은 기성질서의 압제에 대한 그의 비판정신을 드러내는 사건이며 영국 생활에서 나온 『영국 서한』은 “구체제에 던져진 최초의 폭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볼테르에게 있어 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부여된 신성불가침의 권력이 아니었다. 그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옹호하였고, 동시에 제도의 진보를 믿었다. 그러나 볼테르는 사회계약론과 주권재민을 주장한 루소와 달리 명확한 정치 체제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이성의 비판적 사유라는 점에서는 데카르트의 사상을 이어받지만 볼테르의 철학은 구체적 현실과 사회적 상황 속에 놓인 인간에 초점을 맞춘다. 철학은 영혼의 본성이나 신의 속성과 같이 초월적이고 추상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을 개선하고, 사회의 진보에 기여해야 한다고 그는 보았다.
“영혼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다만 배열하고, 결합하고, 분해하고, 수를 세고, 무게를 달고, 크기를 잴 뿐이다”라는 말은 그의 현실지향성을 잘 드러낸다.
볼테르의 현실주의적 사상은 그의 종교관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종교 그 자체라기보다 인간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미신과 맹신, 종교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단죄와 살육 등 종교와 신앙이 인간의 삶에 끼친 해악을 비판하였다. 그래서 볼테르는 기독교의 초월적 신 대신 우주를 다스리는 보편적 원리를 믿었으며 계시가 아닌 인간의 합리적 이성에 바탕을 둔 이신론(理神論)을 주장하였다.
“신의 속성이 무언지 나는 통 모른다. 그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태어난 것은 아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또한 “모든 종교는 순전히 인간의 것이다”라는 생각에 따라 볼테르는 ‘종교 없는 현자’를 하나의 이상으로 추구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무조건적 믿음과 복종을 요구하는 종교적 교리와 계율을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양심을 따르는 도덕으로 대체하였다.
볼테르는 폭력적 권력과 광신적 신앙에서 모두 자신만이 진리이며 선이라는 독선과 오만이라는 문제를 보았다. 특히 신앙과 관련하여 이것은 가톨릭뿐만 아니라 개신교와 이슬람을 포함하는 모든 종교에 해당되는 것이었으며 볼테르는 이와 같은 문제의 원인이 인간의 불완전성과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관용 정신의 결여에 있다고 보았다.
관용은 볼테르의 사상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개념이다. 관용에 대한 그의 사상은 1763년에 발표된 『관용론』에 집약되어 있는데 이 저서의 탄생은 한 해 전 프랑스 남부지방의 도시인 툴루즈에서 일어났던 ‘장 칼라스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장 칼라스는 68세의 상인으로 신교도였는데 그의 큰아들이 신교도라는 이유로 변호사가 될 수 없게 되자 삶을 비관하여 집에서 자살을 하게 된다. 그런데 다음날 현장을 보러 온 군중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가족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소리쳤고 이것이 시민들 사이에 퍼져나가 칼라스 가족이 체포된다. 신교도에 적대적이었던 툴루즈 시민들은 신교도 부모는 자식의 개종을 막기 위해 자식을 죽일 의무를 지닌다고 생각하였다. 혹독한 심문 속에서도 범행을 부인하였고 증거가 불충분하였음에도 졸속한 재판절차를 거쳐 아버지 칼라스는 수레바퀴에 매달려 사지가 찢겨 죽는 거열형에 처해졌고, 아들과 딸들은 추방되거나 수녀원에 유폐되었다.
한 가족에게 자행된 집단의 폭력은 망각 속으로 사라지다가 사건을 우연히 접하게 된 볼테르에 의해 되살아났다. 그는 재판의 부당함과 종교의 광기, 형벌제도의 야만성에 분개하였다. 칼라스부인을 찾아가 상고할 것을 권유하는 한편, 툴루즈 고등법원의 사건기록을 구하여 분석하면서 재판의 부당성을 글로 써서 알렸다.
볼테르의 노력으로 재심의 요구하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마침내 사건이 발생한지 3년 만에 칼라스의 무죄와 복권이 선고되었다.
『관용론』에서 볼테르는 이렇게 묻는다.
“광신에 눈이 멀어 죄를 범한 쪽은 재판관들인가 아니면 피고인가?”
그리고 나아가 종교개혁과 그로인해 발생한 전쟁과 학살들에 대하여 “종교는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그리고 죽은 후에도 행복해지기를 위해 만들었다. 내세에 행복한 삶을 맞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현세의 삶을, 우리의 비뚤어진 본성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행복하게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관용을 알고 베풀 줄 알아야 한다”고 외친다.
볼테르의 행동은 단순한 개인의 선량한 행동을 넘어 계몽주의 사상이 지향하였던 인간정신의 자유와 사회적 실천을 대변한다. 그런 의미에서, 장 칼라스 사건을 규명하기 위해 벌였던 볼테르의 투쟁은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통해 드레퓌스 사건의 부당성을 고발함으로써 지식인의 현실참여에 불을 붙인 에밀 졸라를 예고한다고도 할 수 있다. 『관용론』의 마지막 장은 ‘신에게 올리는 기도’로 채워져 있는데 평화를 위한 볼테르의 간곡한 기원은 그가 한 평생을 통해 보여주었던 사상과 행동의 핵심을 잘 나타낸다고 할 것이다.
“… 우리의 허약한 육체를 가리고 있는 의복들, 우리가 쓰는 불충분한 언어들, 우리의 가소로운 관습들, 우리의 불완전한 법률들, 우리의 분별없는 견해들, 우리가 보기에는 참으로 불균등하지만 당신이 보기에는 똑같은 우리의 처지와 조건들 사이에 놓여 있는 작은 차이들, 즉 인간이라 불리는 티끌들을 구별하는 이 모든 사소한 차이들이 증오와 박해의 구실이 되지 않도록 해주소서.…
붉은색이나 자주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고위성직자들), 이 세상의 다만 흙덩이에 불과한 한 조각 땅위에 군림하는 사람들, 그리고 금은동으로 만든 둥근 금속 조각들을 가진 사람들, 이들이 자신의 ‘지위와 ’부‘라고 부르는 것을 누리는 데 거만하지 않게 해주시고, 또한 그 밖의 사람들은 시샘하지 않게 해주소서. 사실 당신도 아시는 바와 같이 이러한 허세란 부질없는 것이라서 부러워 할 것도 우쭐할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그들 모두가 형제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주소서! 사람들로 하여금, 노동과 정직한 생업의 결실을 강탈해가는 강도들을 증오하듯이 그들의 영혼에 가해지는 폭압을 증오하게 해주소서. 전쟁이라는 재앙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평화를 유지하는 동안만은 서로를 미워하지 않고, 서로 편 갈라서 고통을 주지 않게 해주소서. 그리고 시암에서 캘리포니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그러나 당신을 경배하는 데서는 마찬가지인 수많은 언어를 통해, 우리가 이 땅에 머무는 시간을 우리에게 이 삶을 주신 당신의 은혜를 찬양하는 데 쓰게 하소서.”
-『캉디드』
『캉디드』는 1759년 스위스에서 출간되었다. 원제목이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이지만 일반적으로 『캉디드』라고 불린다. 그리고 책의 유래와 관련하여 서두에 랄프 Ralph 박사가 쓴 독일어 원고를 번역하였다고 작가가 밝히고 있지만 랄프 박사는 볼테르가 검열을 피하기 위하여 사용한 가명이다.
『캉디드』는 볼테르와 계몽주의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작가의 생전에 20여 차례 재출판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50여 회가 넘게 재출판 되었을 정도로 프랑스 문학계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책들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캉디드』의 작품 형식은 매우 독특하다. 소설 형식을 띠고 있지만 등장인물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거나, 묘사가 거칠고 단순하며, 줄거리의 일관성이 약하고 사건의 전개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일반적인 소설과는 거리가 있다. 또한 저자의 철학 사상을 담고 있지만 전문 철학서와 달리 개념이나 논증이 치밀하지 않으며 논리적 기술이 아닌 패러디, 유머, 아이러니 등 다양한 문학 장치가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작품의 형식과 관련하여 『캉디드』는 넓게는 소설로 분류되지만 정확하게는 ‘철학콩트’로 정의된다. 철학콩트는 볼테르가 창조한 볼테르만의 문학 장르로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린 것이다.
『캉디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특징을 보면 작품을 통해 볼테르가 의도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다.
먼저 작품의 주인공 캉디드를 보면 그의 이름은 프랑스어 캉디드 candide에서 온다. 흰색을 뜻하는 라틴어 칸디두스 candidus에서 유래한 캉디드는 ‘천진한’ ‘순진무구한’을 뜻한다. 그래서 단어의 의미는 캉디드의 성격을 암시한다. 캉디드의 단순하고 순수함은 그의 성격인 동시에 어떠한 철학적 결정론에 물들지 않은 영혼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들은 팡글로스와 마르틴이다.
팡그로스는 캉디드의 스승이고 마르틴은 남아메리카의 수리남에서 만난 사람인데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학자 즉 어떤 주의나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이다. 형이상학적, 신학적 우주론을 가르치는 팡글로스는 현재의 세계가 항상 최선의 세계라고 믿는 낙관주의자이며 반대로 암스테르담의 서점에서 일한 마르틴은 자신이 가장 불쌍하고 자신의 처지에 가장 환멸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비관주의자이다.
즉 캉디드는 그가 겪는 다양한 모험을 통해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라는 선험적 이론의 타당성을 검증하고 비판하면서 세계에 대한 자신의 대답을 모색한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작품 속 사건들이 펼쳐지는 공간들을 살펴보자.
작품 속에 나타내는 장소들은 현실세계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볼테르의 상상세계이기도 하다. 볼테르가 거주하며 작품을 집필했던 스위스를 기준으로 할 때 먼저 북쪽으로 독일이 위치해 있다.
작품은 캉디드가 사는 툰더텐트론크 남작의 성이 있는 독일의 베스트팔렌지방에서 시작된다. 사건이 일어나면서 캉디드는 리스본을 거쳐 서쪽으로 남아메리카의 파라과이까지 간다. 그리고 이어 영국과 프랑스를 거쳐 유럽의 남쪽 베네치아를 여행하고, 마지막으로 동쪽으로 오늘날 터기의 콘스탄티노플에서 긴 여정을 멈춘다.
캉디드가 여행하는 드넓은 공간은 작품 속 배경이면서 동시에 당시 유럽인들의 의식 속에 펼쳐져 있는 세계 전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캉디드가 겪는 모험은 전 세계에 걸쳐 유럽인들이 경험한 사건들의 총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작품 속 공간과 사건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작품의 제 1장 ‘캉디드는 어떻게 성장하였는가, 그리고 왜 그 멋진 성에서 쫓겨나게 되었는가’는 또 하나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남작의 성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어느 날, 캉디드는 우연히 남작의 여동생인 퀴네공드와 있게 되는데 서로에게 이끌려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려고 하는 순간 남작이 목격을 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남작은 캉디드를 “지상 낙원”에서 추방하고 그로부터 생사를 오가는 캉디드의 파란만장한 모험이 시작된다. 이러한 구조는 마치 아담이 이브의 유혹으로 신의 명령을 어겨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그로인해 아이를 낳는 고통과 먹고 살기 위한 고통 그리고 죽음이라는 인간조건이 유래되었다는 인간의 탄생과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사의 설명 구조와 유사하다.
성에서 내던져진 캉디드는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든다. 캉디드가 보고 듣고 겪는 사건들은 그야말로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비탄과 불행의 종합이다. 그런데 그 사건들의 묘사와 전개가 비현실적인 것처럼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작품 속의 이야기들은 꾸며낸 것이 아니라 실제 일어났던 것들을 옮겨 놓은 것이다. 캉디드가 겪는 잔혹한 전쟁과 퀴네공드의 죽음은 1756년 발발한 7년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있으며, 리스본에 일어난 지진과 그로 인해 자행된 종교재판과 화형식은 1755년에 일어난 리스본 대지진을 묘사한 것이다. 식민지와 선교, 노예제도와 무역, 사기와 협잡, 면죄부 판매, 부패한 도덕 역시 18세기 당시 볼테르가 목격했던 유럽 사회의 문제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비극들을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캉디드는 자신 스승 팡글로스가 말하는 세상은 항상 최상의 세계로 만들어지게 되어있다는 낙관주의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진다. 팡글로스의 철학에 대한 캉디드의 의구심은 바로 세계는 신의 예정조화에 의해 진행되고 있으며 항상 최선으로 조직된다는 라이프니츠의 철학에 대한 볼테르의 반박과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볼테르의 의도가 세상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내는 부정과 불의를 고발하려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덧붙여야 할 사항은 볼테르는 불행이 인간의 조건 자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상황의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세상의 악이 피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노력에 의해 교정되고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볼테르가 제시하는 방안은 무엇일까? 작가는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르틴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헛된 공리공론은 집어치우고 일이나 합시다. 그것이 삶을 견뎌 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 말은 눈앞의 현실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추상적 형이상학에 대한 볼테르의 거부를 나타낸다. 그리고 캉디드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
캉디드의 대답은 인간 사회의 부조리를 개선해 나가려는 굳은 의지와 구체적인 노력을 드러낸다. 작품의 처음에 등장하는 순진무구한 청년은 온갖 시련을 경험한 현자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 18세기(II) 볼테르의 시대 이래
1. 볼테르(1694-1778)
① 아루에에서 볼테르로
본명은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François-Marie Arouet). 파리의 부르주아 공증인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예수회학교 콜레주 루이 르 그랑에서 수학. 이내 자유사상가의 모임인 탕플Temple 가의 사교계에 출입하기 시작하고 궁정에도 드나든다. 이때 본명인 아루에를 버리고 (평민처럼 들린다) Arouet l(e) j(eune)의 철자 순서를 바꾸어(uoltqjre j-> i, u-> v)Monsieur de Voltaire가 된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헤이그에서 법학 공부를 했으나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와서 1718년부터 극작가의 경력을 쌓는다. 1725년 귀족인 슈발리에 드 로앙과의 결투사건 때문에 투옥되었다가 영국으로 망명한다.
1726년부터 3년 간 영국에 체류하면서 볼테르는 정치적 자유와 개인적 자유의 나라 영국을 새로이 발견하게 된다. 1734년 영국서한을 발표하지만 파리 고등법원으로부터 소각 명령을 받았고 그에게도 체포영장이 내려졌다. 이에 볼테르는 국경을 넘어 로렌 지방의 시레Cirey에 있는 샤틀레 부인의 성으로 피신했다.
시레 성에서 볼테르는 연인 샤틀레 부인의 사랑을 받으며 자연과학의 탐구와 극작에 몰두한다.
1749년 샤틀레 부인이 사망하고 이듬해 볼테를 존경해왔던 프리드리히 2세의 초대로 프러시아에 정착한다. 역시 프리드리히 2세가 베를린 아카데미 원장으로 임명했던 모페르튀와 불화하여 프러시아를 떠나게 된다. 이후 스위스 주네브 근처(프랑스 국경 근처) 페르네에 정착했다. 1791년에 유해가 팡테옹에 안치되었다.
② 극작가 볼테르
볼테르의 첫 작품이자 최초의 성공작이 바로 비극이었다. 비극이 문학작품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고전주의 시대의 상속자로서 볼테르는 오이디푸스에서 코르네이유에 대항하려 했으나 라신을 잊은 적이 없다.
1. 볼테르는 달콤해져만 가는 연애담에 라신이 갖는 애정의 격렬함을 되살려보고자 했다. 또한 비극에 반드시 연애 이야기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족 관계, 종교적 광신, 정치적 야심도 훌륭한 비극의 대상이 된다(여성이 등장하지 않는 비극을 쓰기도 한다).
2. 세익스피어 극에서 본 것과 같은 장치와 의상의 특이성 등을 통해 흥미를 불어넣고자 했다.
->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으로 무대를 옮기고, 봉건적, 기독교적 중세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세기를 아우른다.
③ 철학자 볼테르
런던 체류 후 프랑스에 돌아와서, 그는 자유로운 정치체제란 어떤 것인지 보여주려고 했다.
동시대 프랑스인을 억누르고 있는 두 가지 압제의 힘, 즉 어리석은 전제주의와 가톨릭교를 비판하고자 했다. 여행자, 기자들이 영국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지만 그 정보들은 단편적이었다.
볼테르는 영국서한에서 그것들을 한데 모아, 체계를 세우고, 더없이 호의적인 견지에서 소개했다. 여기에 온갖 비평을 섞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편지 1-7은 영국의 종교, 특히 퀘이커 교도들을 다루고 있다.
편지 8-10은 영국의 정치 체제를 이상화하고 있는데 영국은 왕권을 억제하고 각각의 수입에 따라 과세할 줄 알았고, 상업을 통해 부강해졌는데,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복지를 확보해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편지 11-17은 철학에 관한 것으로 실험적 방법과 그 창시자 베이컨, 로크, 뉴턴에 대해서 찬사를 보내고 있다. 편지 18-22는 문학에 관한 것으로 여기서 세익스피어의 자연스러움과 강렬한 상상력, 숭고미를 논한다.
2. 철학적 비판
① 『관용론』의 개요.
툴루즈의 개신교도 장 칼라스는 개종하고자 하는 아들을 교살했다는 혐의로 차형에 처해졌다.(1762) 그런데 이 범죄에 관해 제출된 증거는 박약했고, 심리가 불충분했고, 줄곧 맹목적인 열성으로 왜곡되어 있었다. 볼테르는 서슴지 않고 툴루즈 주민의 광신, 그리고 특히 칼라스의 재판관들 중 몇몇이 가입하고 있는 고행회원들의 광신을 비난했다.
이외에도 그는 시르방 사건(1764), 라 바르 사건(1766), 몽바이 사건(1770), 랄리 톨랑달 사건(1776) 등에 뛰어들어 부정한 재판의 희생자들을 위해 교회와 법원을 상대로 투쟁했다.
② 볼테르의 사회비판
볼테르는 ‘교회’와 ‘이성’사이에 타협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므로, 어떤 경우에도 철저하게 교회와 싸운다. 이를 위해 볼테르는 저널리즘의 방식을 무기로 취한다. 그는 여론을 손아귀에 넣고, 그것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자기가 바라는 모든 효과를 거두게 만든다. 그는 가제본 책, 팜플렛 등의 인쇄물들을 통해 사람들의 흥미를 자아내고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기어이 관철시킨다.
3. 『캉디드』(1759)
① 줄거리
매우 유순하고 고지식하고 순박한 소년 캉디드는 베스트팔리아의 툰데르텐트롱크 남작의 궁전에서 자랐다. 그는 남작의 아들 및 그의 누이동생 키네공드양과 함께 팡글로스 선생의 교육을 받았다. 이 선생은 세상은 가장 최선의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곤 했다. 캉디드는 남작으로부터 퀴네공드 양을 사랑한다는 의심을 받고 궁전에서 쫓겨나, 불가리아 군대에 들어갔다가, 네덜란드로 탈주하여, 거기서 팡글로스를 다시 만났는데, 그의 모습은 변했으나 여전히 낙천적이다. 그들은 함께 리스본으로 간다. 당도해보니 리스본은 지진으로 황폐해졌다.
그들은 종교재판소에 체포되어 화형에 처해질 뻔했으나, 팡글로스는 교수형, 캉디드는 태형으로 감형된다.
그는 퀴네공드를 다시 만나 둘이서 아메리카로 달아났다가 다시 퀴네공드를 잃는다. 그는 퀴네공드의 오빠를 죽이고 온갖 사건을 다 겪은 뒤 엘도라도에 들어갔는데, 이곳은 이 세상에서 만사형통하는 유일한 나라이다. 그는 철학자 마르탱과 함께 유럽으로 떠난다. 아내에게 재산을 빼앗이고, 아들에게 얻어맞고, 딸에게 버림받은 이 철학자는 이 세상은 가장 최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캉디드는 베네치아에서 퀴네공드 양을 열심히 찾던 중, 그녀가 프로퐁디드 공작집에서 노예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기가 타고 가는 갤리 선의 죄수들 속에서 자기에게 죽은 줄 알고 있던 퀴네공드 양의 오빠와 교수형을 받았다가 되살아난 팡글로스를 다시 만난다. 이들은 모두 어느 조그만 소작지에 정착하고 다른 일에는 신경쓰지 않고 자기의 나날의 일을 해나가기로 한다.
② 볼테르의 아이러니
볼테르의 눈으로 보면 우리의 모든 행위는 이성에 달려 있다. 우리가 어리석은 짓, 부정,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잘못 추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기의 잘못을 고치기 위해서는 우스꽝스러움에 의해서, 우리의 추리에 결함이 있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볼테르는 도덕적, 또는 철학적 콩트의 대가가 되었다. 그는 익살스럽고 풍자적인 프랑스 콩트 작가들의 심술궂음, 명쾌함, 신속함 등의 장점을 완벽의 경지에 올려놓았다.
이야기의 사건 하나하나는 마치 잘 준비된 실험과도 같은 것이어서, 거기서 즉시, 이러저러한 추상적 이론 속에 숨겨져 있는 진실이나 오류의 내용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작은 사실들이 완전한 명확함을 가지고 일반적인 개념을 부각시키도록 상호 결합되어 있다.
③ 라이프니츠 철학에 대한 비판
팡글로스가 주장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이상 필연적으로 최선의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는 주장은 라이프니츠 철학을 희화화한 것이다. 철학적(과학적)으로 영국의 뉴턴주의에 의존했던 볼테르는 뉴턴과 경쟁했던 라이프니츠 철학과 대립했다.
그는 세상이 불행과 악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인간은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제 일을 하기만 하면 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