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교회분열의 사회적 배경
원제: The Social Sources of Denominationalism
리차드 니버 / 종로서적 / 1983.10.1
라인홀드 니버의 친동생이자 ‘그리스도와 문화’의 저자로 잘 알려진 리차드 니버의 본서, ‘교회분열의 사회적 배경’ (The Social Sources of Denominationalism, 1929)은 교회의 분파주의와 그 분열에 따르는 근원을 어떤 신학적인 또는 교리적인 차원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배경에서 그 원인을 찾는 점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저자 스스로 머릿글에서 밝히듯이, 자신은 교회사가나 사회학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교파간의 문제상황을 신학으로부터 눈을 돌리어, 역사와 사회적 그리고 윤리적 차원에서 교회분열의 상황을 주시하고 그에 대한 일련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 글은 반세기도 훨씬 지나버린 옛 얘기이며, 나아가서 저편에 있는 미국의 상황을 토대로 전개된다 할지라도, 기독교적 문화배경을 미국에서 받아들인 국가들은 기독교문화와의 차이는 크게 다를 바 없는 문화적 배경을 무대로 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결코 타산의 지석으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 구성
본서의 내용은 모두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총론적 성격으로서 본서 의 주제가 되는 교회분열의 사회적 배경의 정신사적 이유를 교회의 ‘윤리적 패배’라는 관점에서 포착하고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제2장부터 제4장까지는 교회분열의 원인을 경제적인 문제의식으로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역시 쟈크 엘룰의 말대로 ‘하나님이냐 돈이냐’라는 문제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제5장에서는 교회분열의 원인을 정치적인 배경에서 찾고 있다.
특히 인종적 국가적 문제를 집약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제6장과 7장에서는 지역주의의 배경이 교파주의를 낳는다는 다소 우리에게는 생소한 의견을 펼치고 있다. 굳이 한국의 현실과 억지로 꾸며 맞추어 본다면 초기 선교사들이 진입해 온 경로에 따라서 감리교 우세지역, 장로교 우세지역 정도를 꼽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미국의 현실을 읽어 나간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현실과도 전혀 무관하지는 아니할 것으로 안다.
이어서 제8장과 9장에서는 문화적 배경과 인종적 배경을 교회분열의 원인으로 그 모습을 그려나가고, 마지막 종장에서는 대안으로서 교회가 일치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 본문에서
1. 교회의 분열-그것은 교회의 윤리적 패배이다.
자연적 세계와 영적 세계사이의 긴장, 그리고 용서와 신앙이라는 수단을 통한 긴장의 해결이라는 두 가지 사실 가운데에는 기독교의 본질적 문제가 놓여 있다. 그리스도교는 행위와 믿음에 있어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며 인간의 본능적인 삶과 반대의 영향을 추구하고 불합리한 것에 대한 합리성을 고양시킨다.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 안에 살면서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속적인 삶을 초월할 것을 명령받지만, 세상적 이익을 위하여 이 세상과 공모하는 데서 오는 더러움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비록 처음부터는 아닐지라도 그리스도교를 구형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의 마지막에는 타협이라는 것이 생겨나고야 만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 가운데에서나 신의 분노를 사고있는 이 세상가운데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되는 것 가운데서 정당함의 최종적인 근원을 찾아야 한다. 타협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은 죄악 됨을 완화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파주의는 너무나도 쉽게 이루어지는 타협의 산물이다. 때때로 교파주의가 그리스도교의 대단한 공적인양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인간사회의 계급적 신분에 순응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인간의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는 것에 불과하다. 교회의 분열은 민족적인, 인종적인 그리고 경제집단 가운데 나타나는 인간들간의 신분계급에 의존하고 있다.
예수님은 의로운 소수자들과 의롭지 못한 다수자들을 구별하던 유대인의 계급제도를 공격했다. 예수의 가르침은 바울을 통해서 구현되었다. 바울사도는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사이의 종교적 차이를 거부하였다. 하나님 안에서의 인간들 사이에는 구분이 없다고 가르친 것이다. 하나님주시는 항존성 중에서 분열의 구실을 찾고자 하는 성향에 대해서 유기적 통일을 가르쳤다. 우리는 야고보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등성을 만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희생적인 사랑을 배우고 있다.
현대의 그리스도교는 형제애의 이상들에 관해서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인 등급에 있어서 특권으로 인한 불평등은 형제애에 관한 연구를 다시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또한 민족중심주의적 정책들도 교회가 비난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윤리를 냉소적으로 멸시해 버렸으며, 다른 사람들의 민족적 특성에 대해서는 경멸하면서도 자기들의 것에 대해서는 자만심을 가진 채 오랜 세월을 두고 뿌리내려진 그 릇 된 감정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인종적 차별의 편견은 서양집단이 누리는 특권을 동양인종의 집단에게는 배제시키거나 흑인들에게 사회적-정치적 자격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형제애를 표방하는 교회에서 보여지는 이 기괴한 현상에 대한 전통적 설명은 영원을 구원하기 위한 수단에 있어서 인간들 사이에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일단 정해진 교리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는 견해를 고백하는 집단들 을 제외시켜 버림으로써, 많은 교파를 발생하게 했던 종교적 불관용은 교파주의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윤리적 문제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리스도교 내에서 교파주의에 대한 전통적 해석은 교회들이 공식적인 교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여기에는 교회의 차이점에 대한 특성과 기원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 각 교파의 특정에 따른 교파주의를 일별하면, 1) 루터교;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신앙, 은총의 최고수단으로써 나타나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고양, 만인 제사장직에 대한 고백 등은 다른 교회와 특징을 지어 주는 요소, 2) 칼빈주의; 성경의 율법주의적 성격이나 교회 계율 둥에 있어서 예정론적 관심이 그 특성을 이루고, 3) 침례교; 그들은 세례에 있어서 오직 물에 잠겼다가 나오는 등의 특징이다.
또한 사이비종교, 품위없는 정직자, 헌금의 지나친 강요와 같은 문제들이 개신교의 경우 심각한 현안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대다수의 지적은 사회적 공신력의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한국 갤럽조사의 마지막 부분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신앙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과 타종교인과 무종교인에게 배타적 성향을 보여 주는 것도 우리의 반성을 불러오게 하는 이슈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반성을 가져오게 하는 것은 노골적인 물질중심주의에 있다. 이것은 무리한 교세확장에서 오는 폐해가 그 원인이 된다. 다음으로 반성해야 할 것은 진정한 믿음과 마음이 부족하다는 지적과 함께 사회 봉사와 이웃사랑 실천이 아쉬운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교파간의 대립과 권위주의가 가져오는 폐해도 크다.
이제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눈을 돌려야 할 기로에 서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를 세워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하나님인 양 착각에 빠지는 성직자 아닌 성직자, 자기를 위한 이웃사랑실천자, 자기의 교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가르침이다, 우리 교회만이 세상의 첫째 가는 하나님의 몸이라는 등의 환상적인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은 곧 남을 나와 같이 생각할 때 진정한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길이요, 하나님의 몸 된 교회가 하나되는 걸이다.
○ 저자소개 : 리처드 니버
미국 신정통주의의 좌파를 대표하는 학자였다. 그는 그리 많은 책을 남기지 않았지만, 남긴 책들은 모두 뚜렷한 공헌을 했다.
저서 중 The Meaning of Revelation (1941),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 1951), Radical Monotheism and Western Culture (1957년 강의를 기초로 하여 쓴 책) 등이 그의 3대 주요 저술이며, 그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와 문화」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이와 더불어 그 밖의 모든 저작은 그의 통합적인 시각과 유형론 제시의 은사를 뚜렷이 보여 준다.
- 약사
에덴신학교, 예일 대학교 신학부 박사과정중 아버지의 뒤(공석)를 이어 5개월간 목회함.
1915년 목사안수, 디트로이트 목회 (유니온신학교 파송, 13년간).
1928년 뉴욕 유니언 신학교에서 강사.
1931년 기독교 사회연맹주의자 결성, 사회주의당원으로 1930년 뉴욕시의원, 1932년 주의원 출마했으나 낙선됨.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대한 과격함에 회의를 느끼고 탈퇴하여 자유민주당의 루즈벨트 지지함.
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정치적 현실을 바라보면서 사회주의 사상과 평화주의 포기함.
1937년 옥스포드에서 삶과 노동, 1939년 기포드 강연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에서 강연.
1964년 대통령이 수여하는 자유의 메달 수상.
1960년까지 뉴욕 유니언 신학교 교수 역임.
○ 출판사 서평
교회는 자신의 본연의 정신을 잃어 버리고 너무나 자주 세상과 타협하며, 권력과 손을 잡았다. 용서나 화해의 정신은 또 다시 예수께서 질책 하셨던 율법주의로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는 갈기갈기 교파와 인종, 그리고 자신들의 교리와 의견에 따라 분열되었다. 그리고 리차드 니버는 이러한 교파와 종파들은 사회학적인 집단이라고 말한다. 사실이다. 이것은 ‘보이는 교회’, ‘제도화 된 교회’ 일 뿐이다. 그러면서 리차드 니버는 ‘교파주의는 교회에 대한 이 세상의 승리, 그리스도교에 대한 세속화의 승리를 상징’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교파주의는 결국 ‘도덕적 실패’ 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리차드 니버는 이렇게 교회의 분열에 대해 설명한 후에 그 배경들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래서 크게는 경제적 배경, 정치적 배경, 지역적 배경, 문화적 배경, 인종적 배경으로 나누고 있다. 종교는 물론 종교적, 경제적, 인종적인 요인들 중 어떤 것이 독자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문화적이며 경제적인 배경이 함께 존재하기도 하고, 또 경제적인 요소는 문화적인 요소에 영향을 주고,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요인들은 상호 작용을 한다.
- 요약
이책에서 니버는 교회분열의 원인을 교리적, 신학적 차이에서 찾지 않고 사회적인 배경의 차이에서 찾고 있다. 그는 경제적, 정치적, 지역적, 문화적, 인종적, 차이는 상호 배타적인 계급을 형성하고, 그 계급의 선을 따라 교회를 분열시킨다고 말한다. 그 결과 가난한 자의 교회, 중산층의 교회, 국가주의 교회, 서부개척지 교회, 동부 교회, 영어사용 교회, 독일어사용 교회, 흑인교회, 백인교회 등과 같은 방식으로 같은 교리를 신봉하면서도 서로 분열하고 갈등하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교회분열은 교회의 윤리적 패배이며, 교회는 개인적 윤리와 구원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연대감, 형제애, 평등, 정의 등과 같은 사회적 윤리에도 관심을 가져야한다. 이 글에서는 교회분열의 경제적 배경을 살펴보기로 하자.
제 1 장 교회의 분열 – 그것은 교회의 윤리적 패배이다
기독교는 때때로 그 창시자의 가르침을 무시함으로써 외견상으로는 성공을 성취한 때가 있었다. 기독교가 자신을 세상에 적응 시키는데 있어서 꼭 하느님께 속해야만 된다고 여겨지지만 않는다면 가이사에게 속한 것은 가이사에게 주어버리는 것이 편하다는 사실을 교회는 발견한 것이다. 기독교는 이세상 안에 살면서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세속적인 삶을 초월 또는 승화 시킬 것을 명령받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기독교는 자신이 경멸하고 있는 이 세상적 이익을 위해 세상과 공모하는 데서 오는 모든 더러움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꼭 처음부터가 아니였다 할지라도, 결국 기독교를 구현화시키고자 하는 모든 노력의 마지막에 이르러 타협이 생겨난다.
이러한 위선은 성인(聖人)들이 말씀하시던 때에 가지고있던 믿음으로부터 자기 자신이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거짓된 복음을 만들게 된다. 교파주의는 바로 이와같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위선이다. 교파주의는 기독교가 인간 사회의 계급적 신분체제에 순응해 버렸다는 사실을 말해줄 뿐이다. 교회분열은 역사 속에서 신분계급에 의거하여 왔던 것이다. 예수는 의로운 소수자들과 의롭지 못한 다수자들을 구별하던 유대인의 계급제도를 공격했다. 바울또한 게바파, 아볼로파, 바울파, 그리스도파 사이의 종교적 차이를 거부했을 뿐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선 남자나 여자, 노예나 자유인,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아무 구분이 없다며, 다양성 속에서 분열의 구실을 찾는것에 거센 반발을 하였다.
민족 중심주의적인 정책들 또한 교회가 비난받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윤리는 탈민족주의였으나 역사상 기독교는 민족교회로서 상호 대립구도를 이어왔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앞에서 기독교의 윤리는 언제나 냉소적으로 멸시 되어왔으며, 오히려 예수의 원리를 국가주의의 윤리 안으로 종속시켜왔다. 특히 카톨릭 교회는 로마-이탈리아적인 유산과 이해관계를 그리스도의 이상보다 더 강조한 커다란 실수를 범하였다. 정교회나 종교개혁가들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모든 교회들은 국가교회의 부속물로서 자리를 잡는다.
교파마다 서로 다른 교회 정체(政體)에 대한 각각의 설명을 살펴보면, 자기들의 교회는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초대교회 조직에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 교회들은 제각기 감독제, 장로제, 조합 교회제 등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면서, 자기들이야 말로 기독교의 본래적인 이상적 조직의 반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을 따져 보면 이것은 성서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경험이나 자기들 속에 있는 여러 집단들의 요구에 더욱 기인한 것이다.
교파주의의 죄악은 교회나 종파의 분열 그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가 자신을 계급적인 조직이 되도록 몰고가는 사회상황을 초월하지 못한 것, 교회 유지와 교회 확장만을 힘써 이루어야 할 일차적인 목표로 삼고 싶은 유혹에 굴복한것등이 바로 교파주의의 죄악이다. 이것은 단지 기독교의 힘을 분산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형제애의 윤리가 계급의 윤리 앞에 패배했다는 사실로 도덕적 취약성을 스스로 드러내는 원천이 되는 것이다.
교회는 국가적 위기 상황이나 전쟁, 혁명 가운데서 특히 그 윤리적 약점을 잘 드러낸다. 인간에게 있는 저급한 공통적 목표와 공통적 두려움을 통해 교회는 분열되고 통합된다. 미국혁명이 일어났을때도 미국교회는 기독교 교회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아니라 정치적 계급기관으로써의 역할을 담당하여 교회들끼리 분쟁하고 정치 경제적 당파로 나뉘어 동맹과 분열을 거듭했다. 노예제도 문제에서도 초기에는 노예제 반대를 강령으로 삼던 교회가 노예소유자들의 교회로 성장함에 따라 끝내 남북전쟁을 계기로 남-북 감리교회로 분열되고 만다. 그 외에도 교회는 이러한 정치 경제적 문제로 대립하고 분열되며, 동맹하였다. 교파주의는, 교회에 대한 이 세상의 승리를, 기독교에 대한 세속화의 승리로 볼 수 있으며, 기독교회의 복음이 정죄하는 분열을 교회 스스로가 시인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제 2 장 교회분열의 배경 –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
원래는 인종적인 특징만을 가지고 있던 교회가 경제적 실체까지 가진 집단이 됨에따라 그들의 분리된 상태를 어떻게 지속시키고 있는가 하는 것들에 대한 예들을 종교의 역사는 많이 보여 주고 있다. 미국 교회만 하더라도 먼저 이주해와서 경제적인 기틀을 잡은 사람들의 교회는 나중에 이주해 온 사람들과 경제적 문화적으로 구분되어진다. 이러한 경제적인 요인들의 영향을 깊이 숙고하여야만 종교운동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교파의 특성에 대해 설명이 가능해 질 것이다.
교파주의 역사의 한 장은 종교적으로 무시되어진 가난한 자들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부유한 자들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거부행위로써 그들의 중요한 경제적 이익과 일치하도록 기독교를 해석하고자 힘썼다. 이에 반하여 나타난 교육받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한 계급이 만드는 교회는 그들 집단의 요구에 부응되는 어떤 두드러진 윤리적, 심리적 특징인 감정적 열정과 믿음, 단순함, 가난한 이들에게 향한 하느님의 강한 확신등을 갖는다. 이들은 부자로 살고 있는 그리스도교 형제들 보다 훨씬 강경하게 복음의 도덕이 세상과 타협하는 것을 거부한다. 기독교는 가난한 자들의 종교로서 시작되었고, 당시의 문명으로부터 자신의 몫을 거절당하고 착취당한 자들의 종교로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후 새로운 믿음은 교양있는 자들의 종교, 지배자의 종교, 그리고 학식있는 자들의 종교로 변질되어지게 되었다. 그 때부터 계속적인 종교혁명의 물결은 시작되었다. 종교개혁이 농민들과 기타 피착취 집단들의 종교적인 요구를 채워주는데 실패한 것은 역사에서 두드러지는 사건이다. 그 결과 교회는 중산계급과 귀족의 종교로 전락했고, 농민전쟁과 재세례파 운동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티즘도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정치, 경제적 지배자들에게 복종하라는 이중적 기준을 제시한다는 사실을 루터에게서 알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처음 몇 년 동안은 후에 경제적인 경계선을 따라 분열되는 경향을 나타낸다. 이런말도 나왔는데 “가난한 자들은 그들의 영적 요구를 반대파들이 인도하는 비밀집회에서 공급받고 있지만, 루터교회는 공식적인 기성교회가 되어서 귀족과 중산층의 이해관계를 옹호하는 집단이 되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 역시 브르조아 기독교와 가난한사람들의 기독교 사이의 분열로 끝나고 만다. 쯔빙글리는 제6 계명에 근거해 사유재산을 신이 인정한 것으로 여김으로 공산주의를 죄악으로 생각했다. 바로 그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고소되어 가난한 자들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은 벌금을 내고 추방당하거나, 어떤 경우엔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영국의 장로교회에 있어서도 결국 귀족주의적인 성향은 강하게 드러나며, 그리하여 결국은 부정의와 불평등으로 부터의 자유 보다는 사치와 육욕의 죄로 부터의 자유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생겼다. 얼핏 들었을 때,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 처럼 들리나, 사치스런 생활의 유혹이란 말은 추상적이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거리건 먼 개념으로,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힘을 모아주는 취지가 전혀 담겨 있지 않다. 장로교는 지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귀족적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신앙을 원했고 사회적 개선에 대한 어떤 약속을 포함하는 신앙을 요구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가난한 자들이 일으킨 반란들은 특출한 헤게모니나 지도력의 결핍으로 거의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분파와 분열 속에서도 어떤 통일성을 찾을 수 있는데 첫째는 권위의 원천이 되는 것은 내적인 체험이라는 교리이며, 둘째는 이 땅에서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왕국(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공통적인 소망이었다. 이들은 종파적인 조직을 형성하고, 평신도의 설교에 의존하고, 성경을 영적으로 이해하고자 했으며, 위계제도를 거부하고,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공산주의적인 발상을 나타내기도 했다.
17세기에 한 퀘이커교도가 의원들의 집단을 향해 칼을 뽑아든적이 있었다. 그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의사당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이라는 명을 받았다고 했다. 아무튼 그들이 혁명적인 활동을 통해서든, 계시록적인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인내와 무저항 운동으로 기다리든 간에 이들에겐 가난한 자들의 좋지 않은 상황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 감정적인 신앙과 함께 복음의 사회적 급진주의가 함께 나타나고 있으므로 퀘이커교도의 운동은 가난한 자들이 일으킨 한 사건으로 큰 획을 그리게 된다. 영국의 종파들은 격렬한 혁명을 일으키려는 노력이 지배계급의 더 큰 힘 앞에서는 무익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에야 무저항의 방법을 따르게 된다. 퀘이커교는 재세례파보다 더 오랫동안 가난한 자들의 교회에서 주창하는 사회적 이상주의의 대표자로서 그 위치를 지켜왔다. 그러나 퀘이커교도 자신들을 사회상황에다 자신들을 적응 시켰으며 사회개혁을 위한 그들의 노력을 제한시키고 만다. 이 교파가 혁명적인 집단에서 안정된 사회집단으로 변하여 자기들의 진로를 그 정도에서 만족한 이유는, 첫 세대의 교인들이 고통스럽게 싸워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획득한 신념을 제2세대 교인들은 너무 쉽게 물려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교회도 경제적인 성장의 영향으로 곧 중산층의 교회로 변하게 되어 가난한 자들이 간직한 이상주의의 많은 부분을 포기해 버린 것이다. 그리스도교 종파의 역사 속에서 계속하여 반복되어진 이런 과정은 퀘이커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특별히 미국 퀘이커교도의 경제적 성장은 급속하였다. 따라서 가난한 자들은 또 다시 복음을 갖지 못한채 소외 되어지게 되었다.
18세기 전반기의 영국은 그 이전의 오랜 시대보다 훨씬 더 번영했다.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듯이 가난한자들이 그 것을 만들어 내는 데 도와주기는 했지만 함께 누리지는 못하는 사치를 부자들이 바로 그들 앞에서 자랑했고, 경제적 영역 밖에서까지도 소유물이 많다는 사실이 부자들의 우월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 인해 그와 같은 경제적 번영은 계급간의 격차를 더욱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개신교이래 그 어느 시기보다도 앞서 말한 시기와 감리교의 부흥운동이 일어나던 시기에 계급간의 격차는 더욱더 실재적인 것이었다. 이와 같은 층화현상은 가난한 자들을 교회 밖으로 축출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 왔다. 18세기 후반에 산업혁명으로 인해 영국사회는 더더욱 층화되는 경향을 갖는다. 부의 분배에 있어서의 불평등은 심각한 것이었다. 어마어마한 사치와 빈곤이 서로 대조되는 모습이 그전 보다 더욱 두드러졌다.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는 언제나 혁명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종교적 혁명이었다. 감리교는 퀘이커교나 메노나이트파와는 달리 더 많은 지도력에 의존했다. 일차적 최고 지도력은 상류게급에서 공급되었지만, 이차적인 지도자들과 평신도 설교자 및 신도들은 약간의 예외가 있었지만 경제적-문화적으로 서열이 낮은 사람들로부터 충당되었다. 이러한 운동은 그 당시의 지배계층에 상당한 반발과 불쾌감을 주었다.
새로 생긴 교파의 특징적 모습은 가난한 자들의 교회라는 말로 나타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감리교의 감정주의는 열정주의를 싫어하는 상류계급과 그들이 추구하는 구원을 혐오하게 되었다. 감리교 지도자의 열렬한 기도와 훈계는 점잖은 체 하는 가르침에 대하여 전혀 무감각하기만 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후에 가서 감리교의 종교적 열정은 줄어드는데, 감리교회가 점차 지적이고 합리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며, 부와 문화적 교양이 증대 되면서 힘든 노동에서 오는 단조로움과 피곤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러 다른 방법들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리교의 윤리는 중산층이나 귀족들의 윤리와는 확실히 구분이 되었다.
그러나 감리교의 변질은 이미 예고가 되어있었던 것이었다, 감리교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윤리는 산상설교에 나오는 사회윤리가 아니라, 절실한 소명의식과 냉철한 개인윤리였다. 사회적인 문제와 이상주의를 선도하는 종교적 관심은 다소간 부수적인 것이었다. 감리교가 가져온 사회적 반향은 계획적인 것이 아니었고 이 운동의 부산물로서 이해될 수 있다. 감리교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중류계급에서 태어나 거기서 성장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가난한자들이 괴로움을 당하는 사회적 악에 대하여 직접 당했던 사람들 만큼 강한 자극을 받지는 못했다. 그래서 웨슬리는 개인적인 악의 해결에 더욱 관심한 나머지 탄광부나 군인들의 개인적 악은 부각시키면서 사회적, 구조적 악을 상대적으로 가볍게 만들어 버렸다. 더욱이 감리교 속에 포함되어 있는 사회적 관심이나 영향력 같은 것들도 암암리에 중간계급 출신의 지도자들에 의해 왜곡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비록 감리교의 감정주의가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가졌다할지라도 감리교는 처음부터 존경받을 만한 중산층의 교회가 되고자 자기자신을 재조정했다. 이는 신도들이 금새 경제적-문화적으로 높은 계층으로 되어진 사실들에서 볼 수 있다. 중산층 교회로서의 감리교회는 새로운 전망이 펼쳐짐에 따라, 그 설립자가 활동하던 당시에 하층계급의 구원을 위해 효과적인 작용을 할 수 있었던 종교적 접근방식을 단념하고 말았다. 다른 어떤 경우 보다도 빨리 가난한자들의 종교가 되었던 감리교는 어느새 위세있는 계급을 위한 위세있는 교회로 변하였다. 평신도 설교는 이내 폐기되었고, 교역방식에 있어서도 여러측면에서 수정되고 완화되었다. 처음 종파를 형성했을 때는 강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작했던 종교적 반란은 마침내 중산층 교회로 안주하게 되었고 교회가 세속적인 사회질서에 다시 한번 굴복하는 한 예를 남겨놓았다. 그러나 감리교 부흥 운동은 지금까지 기독교내에서 가난한 자들이 일으킨 운동 가운데 마지막으로 나타난 위대한 종교적 혁명이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종교운동이 채워주지 못하는 빈자리를 사회주의가 차지하게 되었다. 기독교는 현실의 구조적, 사회적 모순인 <현실적인 지옥>에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을 포기했으며 그들의 천년왕국적 소망이 소멸되도록 그냥 방치해 버렸다. 또한 하느님왕국에 대한 기대를 먼 천국의 상징으로 대치시켜 버렸다. 오늘날의 가난한 자들 사이에는 어떤 효과적인 종교운동이 없는 듯하다. 그 결과 그들은 조직화 되어버린 기독교의 울타리 밖에서 서성거릴 수밖에 없게되었다. 가난한 자들의 종교적인 반란에 의해 자기들의 안일한 메시지를 검토해 보도록 계속적으로 도전받아 오던 교회는 지금은 점점 빈약해져가고 있는데, 그이유는 오늘날에 와선 그들에게 충고하던 가난한 자들의 종파(교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과연 가난한 자들의 교회가 있는가, 라는 질문에는 그나마, 다일공동체나 활빈교회와 같은 교회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물론 숨은 곳에 이름 도 빛도 없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많다.) 아직 그러한 운동이 한국교회를 움직일 큰 힘을 지니고 있지는 못한 것 같지만 진정으로 예수가 꿈꾸었던 하느님의 나라를 이땅에 조금은 실현시킨 몇 안되는 사람들인 것은 분명하다. IMF라는 특수상황에서 이제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는 더 많이 생길 것이다. 여기에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대처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큰 분열을 낳아 모양은 같지만 전혀 다른 교회들로 존재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것은 우리들의 과제이며, 어떻게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 독자의 평
들어가는 말
라인홀트 니버의 친동생이자 『그리스도와 문화』의 저자로 잘 알려진 리차드 니버의 본서, 『교회분열의 사회적 배경』(The Social Sources of Denominationalism, 1929)은 교회의 분파주의와 그 분열에 따르는 근원을 어떤 신학적인 또는 교리적인 차원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배경에서 그 원인을 찾는 점이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저자 스스로 머릿글에서 밝히듯이, 자신은 교회사가나 사회학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교파간의 문제상황을 신학으로부터 눈을 돌리어, 역사와 사회적 그리고 윤리적 차원에서 교회분열의 상황을 주시하고 그에 대한 일련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 글은 반세기도 훨씬 지나버린 옛 얘기임에는 틀림없다. 나아가서 지구 저편에 있는 미국의 상황을 토대로 전개된다 할지라도, 기독교적 문화배경을 미국에서 받아들인 우리의 기독교문화와의 차이는 크게 다를 바 없는 문화적 배경을 무대로 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결코 타산의 지석으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본서의 내용은 모두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총론적 성격으로서 본서의 주제가 되는 교회분열의 사회적 배경의 정신사적 이유를 교회의 ‘윤리적 패배’라는 관점에서 포착하고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제2장부터 제4장까지는 교회분열의 원인을 경제적인 문제의식으로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역시 쟈크 엘룰의 말대로 ‘하나님이냐 돈이냐’라는 문제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제5장에서는 교회분열의 원인을 정치적인 배경에서 찾고 있다. 특히 인종적 국가적 문제를 집약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제6장과 7장에서는 지역주의의 배경이 교파주의를 낳는다는 다소 우리에게는 생소한 의견을 펼치고 있다. 굳이 우리의 현실과 억지로 꾸며 맞추어 본다면 초기 선교사들이 진입해 온 경로에 따라서 감리교 우세지역, 장로교 우세지역 정도를 꼽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미국의 현실을 읽어 나간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현실과도 전혀 무관하지는 아니할 것으로 안다. 이어서 제8장과 9장에서는 문화적 배경과 인종적 배경을 교회분열의 원인으로 그 모습을 그려나가고, 마지막 종장에서는 대안으로서 교회가 일치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작금의 우리 현실은 심각할 정도의 교회분열의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종교단체의 분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거의 부정적이다. 교파분열에 대한 1984년의 81.3%의 부정적 견해가 1997년에는 무려 89.7%를 기록하고 있는 현실의 상황은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절대적인 문제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반성적으로서 적극 대처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본서를 비평하는 것은 본고의 필자가 가지고 있는 이해의 천박함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서평의 견지를 한 단계 낮추어서 각 장을 요약 검토하는 수준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다만 각 장의 주안점을 살펴보고 우리의 문제상황과 연계점이 드러날 때는 본고의 말미에 코멘트를 덧붙이는 것으로 진술에 기한다.
Ⅱ. 본문검토
- 교회의 분열-그것은 교회의 윤리적 패배이다.
자연적 세계와 영적 세계사이의 긴장, 그리고 용서와 신앙이라는 수단을 통한 긴장의 해결이라는 두 가지 사실 가운데에는 기독교의 본질적 문제가 놓여 있다. 그리스도교는 행위와 믿음에 있어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며 인간의 본능적인 삶과 반대의 영향을 추구하고 불합리한 것에 대한 합리성을 고양시킨다.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 안에 살면서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속적인 삶을 초월할 것을 명령받지만, 세상적 이익을 위하여 이 세상과 공모하는 데서 오는 더러움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비록 처음부터는 아닐지라도 그리스도교를 구형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의 마지막에는 타협이라는 것이 생겨나고야 만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 가운데에서나 신의 분노를 사고있는 이 세상가운데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되는 것 가운데서 정당함의 최종적인 근원을 찾아야 한다. 타협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은 죄악 됨을 완화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파주의는 너무나도 쉽게 이루어지는 타협의 산물이다. 때때로 교파주의가 그리스도교의 대단한 공적인양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인간사회의 계급적 신분에 순응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인간의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는 것에 불과하다. 교회의 분열은 민족적인, 인종적인 그리고 경제집단 가운데 나타나는 인간들간의 신분계급에 의존하고 있다.
예수님은 의로운 소수자들과 의롭지 못한 다수자들을 구별하던 유대인의 계급제도를 공격했다. 예수의 가르침은 바울을 통해서 구현되었다. 바울사도는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사이의 종교적 차이를 거부하였다. 하나님 안에서의 인간들 사이에는 구분이 없다고 가르친 것이다. 하나님주시는 항존성 중에서 분열의 구실을 찾고자 하는 성향에 대해서 유기적 통일을 가르쳤다. 우리는 야고보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등성을 만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희생적인 사랑을 배우고 있다.
현대의 그리스도교는 형제애의 이상들에 관해서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인 등급에 있어서 특권으로 인한 불평등은 형제애에 관한 연구를 다시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또한 민족중심주의적 정책들도 교회가 비난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윤리를 냉소적으로 멸시해 버렸으며, 다른 사람들의 민족적 특성에 대해서는 경멸하면서도 자기들의 것에 대해서는 자만심을 가진 채 오랜 세월을 두고 뿌리내려진 그 릇 된 감정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인종적 차별의 편견은 서양집단이 누리는 특권을 동양인종의 집단에게는 배제시키거나 흑인들에게 사회적-정치적 자격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형제애를 표방하는 교회에서 보여지는 이 기괴한 현상에 대한 전통적 설명은 영원을 구원하기 위한 수단에 있어서 인간들 사이에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일단 정해진 교리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는 견해를 고백하는 집단들 을 제외시켜 버림으로써, 많은 교파를 발생하게 했던 종교적 불관용은 교파주의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윤리적 문제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리스도교 내에서 교파주의에 대한 전통적 해석은 교회들이 공식적인 교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여기에는 교회의 차이점에 대한 특성과 기원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 각 교파의 특정에 따른 교파주의를 일별하면,
1) 루터교;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신앙, 은총의 최고수단으로써 나타나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고양, 만인 제사장직에 대한 고백 등은 다른 교회와 특징을 지어 주는 요소,
2) 칼빈주의; 성경의 율법주의적 성격이나 교회 계율 둥에 있어서 예정론적 관심이 그 특성을 이루고,
3) 침례교; 그들은 세례에 있어서 오직 물에 잠겼다가 나옴으로써 의로워진다는 사실,
4) 감리교; 그들은 Armenian적인 수정을 통해서 칼빈주의의 기초를 조화시킨다는 점을 각각 강조하고 있다.
이상에서 발견되어지는 많은 예하 집단들의 경우에도 약간의 교리직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러한 차이가 그들의 분열과 상호 적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와 같은 설명방식은 Josephus가 바리새인이란, 죽은 자의 부활과 구전되어 은 전통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철학자들의 집단인데 비하여 사두개파란, 그와 반대되는 견해를 가진 교파간의 차이를 설명해 주는 방식이 되어 왔다.
모든 종교적인 견해와 생각들을 합리화의 카테고리 속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인간의 참 도리와는 상관없는 동기로부터 생겨난 행위에 그럴듯한 이유를 대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성향이다.
이러한 근거가 종교적인 견해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합리화의 카테고리이다. 교파마다 서로 다른 교회정체에 대한 각각의 설명을 보면, 모두가 신약성서에 말하는 초대교회의 조직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교회들은 제각기 감독제, 장로제, 조합교회제 등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자기들이야말로 그리스도교 교회의 본래적이고 이상적인 조직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윤리와 정체에 있어서 정당한 것이 신학에 있어서도 정당한 것이다. 이 말은 종교적 생활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사회환경과 뒤얽혀 있기 때문에 신학의 형성이 사회환경에 의해 필연적으로 조건지어 진다는 얘기이다. 교리의 차이에 따라 해석되어지는 사회적 상황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회적·경제적 이해가 주는 부담 등이 종굦거 진리를 규정하는데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교파주의의 죄악은 교회나 종파의 분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흥종파의 발생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도록 만들어버린 그 상황자체에 있다. 교파역사와 이와 같은 국면은 비록 그것이 통일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즉 교회가 자신을 계급적인 조직이 되도록 압력을 가하는 사회상황을 초월하는데 실패한 것, 교회가 자신들의 충성을 이 세상의 규범과 제도에까지 승화시키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이상에 반대되지 않는 정도에서 미약한 연관을 맺는 것에 그치고 마는, 그리고 교회유지와 교회확장만을 힘써 이루어야 할 일차적인 목표로 삼고싶은 유혹에 굴복해버린 것 등에 바로 교파주의의 죄악이 놓여있는 상황이다.
교회의 윤리적 약점은 위기 가운데서 그리고 전쟁과 혁명 가운데서 더 잘 나타난다. 교회들이 서로 대항하여 분열되어버리면 사회를 건설하는 일은 다른 세력들에 넘겨주어야 한다. 미국의 역사 속에서 국가적인 위기에 봉착했을 때, 교회들이 간직한 충성심은 분열되어 버렸고 서로 투쟁하는 정치 경제적 당파들과 교회들이 서로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은, 효과적이고 공통적인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교회 내에 결여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교파, 교회, 종파 등은 사회학적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 가운데서 보여지는 분열의 원리는 이들이 사회적 계급들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교파들이란 종교적인 목적을 가진 집단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옳지 않은 말이다. 따라서 교파주의는 교회에 대한 이 세상의 승리를 그리스도교에 대한 세속화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정죄 하는 분열을 교회 스스로가 시인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파주의는 도덕적인 실패를 말한다. 이를 극복하는 걸은 교회의 교파주의가 가지고 있는 세속적인 특성이 무엇인가 알아내야 한다. - 교회분열의 경제적 배경
종교의 역사를 경제적 문제와 관련지어 고찰하여 보면, 교파주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설명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서부에서 더욱 자주 교회의 분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경제적 계급들은 서로 다른 문화적 특성들을 나타내는 성향이 있으며 집단 간의 경제적 차이는 그들 간의 교육적 심리적 차이를 가져오기도 한다. 먼저 미국에 이주해 온 사람들은 나중에 이주해 온 사람들에 비해 경제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경제적 수준은 문화적·경제적으로 구분된다. 경제적 조건들은 종교적 운동이 지닌 종교적 가치를 결정해 주지도 않으면서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일련의 경제적 요인들은 종교운동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교파의 특성에 관한 설명이 가능하다. 이렇게 보면, 교파주의의 역사의 한 장은 종교적으로 무시되어진 가난한자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그들의 특수한 요구에 부합되는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를 만들어 냈고, 그와 같은 종교적 영향을 받으면서 살다가 보니 경제적인 수준이 높아지게 되고, 그 뒤에 떤 가난한자들의 이야기는 또 다른 교파를 형성하게 되는 데 이는 눌라울 정도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이다.
재세례파(Anabaptist), 퀘이커교, 감리교, 구세군 기타 이와 비슷한 유형의 종파들은 가난한자들의 교회가 어떻게 생겨나서 어떻게 발전해 나가는가 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부유한 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거부하는 가운데에서도 교파역사의 흔적을 남기는 경우도 있다. 트뢸취는 말하기를 “진정으로 창조적이며, 교회를 형성하게 하는 종교운동은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오직 그들에게서만이 손상되지 않은 종교적 상상력, 단순성, 자발성 그리고 열정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계층에서만 종교의 순수한 필요성이 나타난다.” 이러한 말은 사회에서 문화적으로 하층에 속하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는 종교운동의 특성을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층계급에 대한 종교적 추방이 어떤 면에서 새로운 종교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변증의 과정으로 나타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가난한자들의 종교의 발달과정은 그리스도교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종과의 역사 가운데서 뿐만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 그 자체의 발생 가운데서 잘 보여지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가난한자들의 종교로서 시작되었고, 당시의 문명으로부터 차지할 수 있는 몫을 거절당한 자들의 종교로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사회주의 운동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데 중점을 둔 종교적 혁명이었다. 그리스도는 이 땅위에서 가난한자, 어부, 하층농민 그리고 일반백성, 국외자들에게 전달되었다.
종교개혁이 농민들과 기타 피착취 집단들의 종교적인 요구를 채워주는 데 실패한 것은 역사적 관심사이다. 그것은 중산층과 귀족들의 종교로 남아버렸다. 그 결과로 남은 것이 농민전쟁과 재세례파 운동이다. 이 두 운동은 서로 구분되어지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밀접한 관계가 있다. 루터의 적대자인 뮨쪄(Thomas M nzer)는 혁명적인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재세레파였다. 재세례파는 최초의 프로테스탄트라 할 수 있다. 재세례파는 주로 가난한 계급들 즉 농민들, 가난한 수공업자들, 그리고 도시의 직공들로 구성된 운동이었는데, 그들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억압된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호소력이 있었다. 유럽대륙에서 재세례파는 억압과 박해에 의하여 사라져버렸지만, 나중에는 부와 위신을 구비한 강력한 교회가 되었다.
감리교의 부흥운동은 지금까지 그리스도교 내에서 가난한자들의 운동가운데 마지막으로 나타났던 위대한 종교적 혁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민중운동으로는 되지 못했다. 19세기 이전의 가난한자들이 보여준 혁명적 성향은 종교적 성향이었는데 반하여 당시의 교인들의 성향은 완전히 세속적이었다는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재세례파의 경우를 보더라도 강자는 끌려 내려오고 낮은 지위의 사람들은 지위가 올라간다는 사회적 재생에 대한 희망을 당시의 사회주의 성향들이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회주의에 대한 귀족주의의 표본이었다. 또한 인간에 대한 존엄과 가치에 대한 의식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인식되고 있었다. 그 결과는 종교적 반란이었다. 사회주의는 반종교적인 운동의 성격을 취하고 있었다. 또한 과학적 사고의 분위기 유물론주의, 산업주위가 일구어 낸 기계론적 사고의 유포, 마르크스가 훈련을 받아 왔던 헤겔철학의 결정론,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이 종교인이 아니었다는 사실 등은 이러한 세속주위를 설명하는데 충분하다.
그리스도교가 가난한자의 덕이라고 할 수 있는 온순함의 덕을 원래 강조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혁명과 연결되면서 그리스도교의 연합체가 형성되자 이론가들은, 신앙이란 그 성격상 본질적으로 프로레타리아적이라고 일반화 시켰다. 이 말을 정의한 것은 니체가 말한, 그리스도교는 노예의 종교라고 한 말에서 찾을 수 있다. 베버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속에는 현대 자본주의의 특징이 많이 있다고 하였다. 베버의 말은 일리가 있다. 중류계급의 종교적 욕구는 가난한 사람들의 그것처럼 쉽게 규정되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르주아는 프로레타리아의 그것보다 사회학적 구조나 관심에 있어서 보다 복잡한 유형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들 집단의 종교는 개인적인 성향을 강하게 나타낸다. 그들에 있어서는 사회적 구원보다 개인적 구원에 치중하기 때문이다.
중산층의 윤리는 그 지도자들의 도덕적 진술이나, 전통을 수정해서 만든 중산층의 경제적 이해관계의 산물이다, 중산층의 종교적 윤리는 시종일관하여 개인주의적 성격에 의하여 일관된다. 종교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윤리생활에서 추구해야 하는 선이란, 개인의 도덕적 복지를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은 사회정의를 위한 희망을 줄 수가 없다. 개인적 사업의 후견자는 되지만 인간 전체의 위대한 후원자나 형제애를 이루기 위한 선구자가 되지는 않는다. 중산층의 종교는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와 구분될 뿐만 아니라 상류층과도 구분된다.
확실히 종교개혁은 부자들의 가난한자들에 대한 반란은 아니었지만, 마지막에 나타난 결과를 놓고 보면, 종교개혁은 부르주아와 귀족을 위해서는 종교적인 은신처를 제공하는 교회를 세워 주면서도, 가난한자들을 향해서는 그들의 신앙을 위해서 다른 집을 찾아보라고 말하면서 빈손으로 내쫓아 버린 결과가 되었다. - 교회분열의 정치적 배경-국가주의와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가 자기 자신의 구조 속에서조차도 인간의 정치적인 분열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것과 타협해 버렸다는 사실이 많은 국가들로 이루어진 유럽대륙과 많은 민족들로 이루어진 미국에서 선명히 나타나고 있다. 유럽의 비판가들이 신대륙에서 나타나고 있는 수많은 종파들을 경멸하면서, 그것은 개인주의라고 하는 “전형적인 미국”의 정신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전형적인 유럽”의 정신이 미국에서 잡다한 종교적인 경험과 조직을 만들어 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다양한 종파들의 분립의 책임은 어느 정도 유럽에 있다. 즉 미국의 수많은 종파주의는 태생적으로 유럽에서 건너온 유럽의 인종적 국가적 요소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인종적이기보다는 오히려 국가적 요소가 더 지배적이다. 그것은 신체적 차이가 아니라 언어의 차이, 사고의 유형과 관습에 따라서 구분되어진다.
정치적, 문화적 분열의 시작은 로마제국에서 생겨났다. 제국의 분열은 교회의 분열이었으며, Arian파, Nestorian파, Monophysite 등과 정통교회사이에 있었던 오랜 논쟁이나 그 결과 생겨난 종파운동 등에 관한 사회사는 아직껏 불분명한 상태로 남아 있다. 아리안파의 희랍정통과 아다나시우스의 희랍민족주의, 동방과 서방의 교회, 그리고 그에 따른 이단적 종파주의가 분열의 씨앗이었다. 예를 들어 성찬식에서의 무교병 사용문제 등에 관한 신학적 논쟁들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를 갈라놓는 원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두 갈래로 나뉘어진 채 이어져 내려오는 기독교의 역사는 정치적, 문화적 요소들이 교파의 전개과정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을 처음의 분열 자체보다 더욱 자세히 보여 준다. 콘스탄틴 이후 동방교회는 세속 영역에서도 황제의 지배권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동방교회가 정치조직과 밀착되었기 때문에 비잔틴 세력이 기울고 슬라브주의 국가가 생겨나자 교회는 분열될 수밖에 없었다. 교회의 조직에 눈을 돌려보면, 그것은 교회의 집괴(集塊)에 불과하였다. 그것은 오직 정치적 세력들의 마음에 맞는 교회를 자기의 마음에 맞도록 형성시키고 분열시켰기 때문이다.
문화의 원리로서의 민족주의는 휴머니즘과 함께 태어났다. 르네상스는 문화를 각양각색으로 만들어 놓았다. 민주주의와 함께 종교개혁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내적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학과 예배를 포함한 교회개혁은 민족주의적 야망이나 정책과 타협하지 않고서도 잘 진행될 수 있었다. 교회의 분열은 민족국가와 신교의 종교적 정신이 잘 부합되어 기독교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 가장 심각한 교회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정치세력의 후원 아래서 이루어진 종교개혁의 결과로 생겨난 교회의 성격은 몇 가지 조직의 원리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이러한 조직의 원리는 다른 종류의 종파들과 이들을 구별시켜 주며 이들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난 근거가 되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 이들 국가주의 교회는 가난한자들이 만든 종파들과는 달리, 카톨릭적 사회조직의 제도적 원리를 간직하고 있다. 루터교회, 영국 성공회, 장로교회, 개혁교회 등과 같은 모든 교회들이 동방이나 사방에서의 카톨릭 교회와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범주에 들어간다.
둘째; 이는 첫째의 경우에서 생겨난 결과로서, 교리와 의식에 있어서 기독교의 기본적 요건이란 신조와 의식에 순응하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대개의 경우 sect(분파, 교파, 종파)는 당시 사회윤리로부터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기독교의 윤리에 헌신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국가의 전체 문화적 집단 안에 그 자신이 속하기를 바라는 교회는 섹트와는 다른 태도를 취한다. 즉 이러한 church(교회)는 사회윤리에 있어서 미해결의 영역을 국가의 통치당국에 위임해 버리며 처어치의 신조에 따라서 행동을 결정하는 개인들을 신뢰한다. 콘스탄틴 대제의 제의로 만들어진 Nikea신조에서부터 Westminster Confessen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중요한 신조들이 교회와 국가의 연합으로 생겨났다. 웨스트민스터 고백은 영국의 장기의회(1640-60)에 의해서 지명된 성직자에 의해서 생겨났다.
셋째; 국가주의 교회는 기독교 윤리를 제정함에 있어서 인간행위보다는 개인적 측면에 한정시켜야 하며, 사회적인 측면에는 가족의 범위 정도에 한정하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같은 특징이 생겨난 것은 부분적으로는 교회와 국가 간의 관련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해도 루터교와 칼빈교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국가의 윤리를 신이 내려주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카톨릭이나 루터, 칼빈교가 상당한 일치를 보이고 있다. 즉 국가의 윤리를 자연적 윤리와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또한 그것을 구약성서의 윤리나 이 죄 많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방법으로 인정해 준다.
교회는 국가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과 더불어 국가의 통치권을 신이 부여해 준 것으로 받아들이며, 이미 확립된 사회 관습을 신이 인정해 준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결국 국가주의가 공통적인 종교적 사고나 이상보다 더욱 강력하였다. 교회는 기도시간에 국가가 되고 만다. - 교회분열의 지역적 배경-지역주의와 교파주의
미국 내에서 번창하고 있는 200여 개의 기독교파 가운데 대다수는 미국 내에서 생겨난 것이다. 유럽이 하층민교회, 중산층교회, 국가주의교회 등이 미국 내에서 계속적으로 분열하고 그들 사이에서 새로운 형태의 갈등이 생겨나며 더 나아가 미국인 전부가 분열 가운데로 빠지게 하는데 몇 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다. 그것은 지방주의, 이질성 그리고 흑백의 인증 차이이다.
미국은 계급 구조에서 나타나는 수직적인 선을 지방주의적인 사회에서 나타나는 수직적인 선으로 바꾸었다. 교파 분열의 또 하나의 이유는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이주해 온 흑백인 간의 특수한 관계는 분리된 교파가 계속해서 나뉘어진 상태를 유지하도록 박차를 가하였다. 미국의 교회 분열의 역사 속에서 남북 간 또는 동서간의 반복되는 싸움은 미국의 종교생활에 큰 흔적을 남겼다. 동서간의 정치·경제적 싸움은 그들간의 문화적 차이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도시사회의 세련되고 인공적인 것들은 농촌사람들의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고, 반면에 농촌의 소박함은 도시사람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서부의 문화적 분화가 생기게 되는 것도 가난한 사람들의 교육에 따른 어려움에 있었다. 동서간의 정치적, 경제적 갈등을 초래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종교적인 논쟁과 분열이 촉진되었다. 유럽 못지 않게 미국의 교회들도 공통적인 복음의 신앙에 복종하기보다는 지역적이고 계급적인 환경의 영향력에 더 잘 복종해왔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분열은 정치적인 분열보다 더 자주, 더욱 일찍부터 더욱 오랫동안 지역 간 갈등의 영향을 받았다. 동부의 기성 사회와 개척자들의 자유로운 문명간에 생긴 종교적 갈등은, 정치·경제적 싸움을 가져오게 했던 것과 똑같은 환경 조건에서 생겨났다.
미국교회의 대부분은 최소한 어느 한 시기 동안은 개척자들 가운데 있었다. 첫째, 개척지의 상황에 영향을 받아 미국에 건너온 유럽교회들은 sect로 변하는 경향이 있었다. 둘째, 개척의 시대가 지나고 사회가 안정됨에 따라 유럽과 미국의 sect들은 Church로 변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각 교파에 미친 개척지의 영향은 각양각색이었다. 이러한 교파들 가운데는 그들의 규약과 신도들의 문화적 성격 때문에 초기의 식민지였던 동부 지역에만 국한되어 발전한 교파가 있는데, 성공회와 프로테스탄트 감독교회가 그 예이다. 감독교회와는 반대로 뉴잉글랜드 지방의 조합교회는 개척자들의 종교적 활동을 위한 기관으로 태어났다. 조합교회의 주된 성격은 분리주의가 아니라 청교도주의였다. 기존 사회와 개척 지역사이에 있었던 뉴잉글랜드 조합교회의 최초의 실질적 위기가 대각성(the Great Awakening)의 시대에 발생했다.
이 부흥운동은 1734-1735년경에 매사추세츠와 코네티컷의 개척지에서 일어났다. 미국적 토양 위에 생겨난 이 운동은 열렬한 설교, 풍부한 상상력, 일종의 신경장애 현상, 급속히 퍼져 나가는 열기 등과 같은 특성들은 거의 동시대에 있었던 영국의 감리교와 상당히 유사했다. 개척지목사관이나 예일대학에서 훈련받은 성직자들이 당시의 대각성 운동을 주도했다. 그리하여 평신도 설교는 그렇게 널리 시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부흥운동이 회개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불가불 종파적 조직이 생겨나게 되었다. 열정에 사로잡힌 설교자들은 옛날의 성직자들을 공격했다. 이들의 분파는 부흥운동을 반대하는 분파와 그렇지 않는 파로 나뉘게 되었다. 개척자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의 신앙과 기존 지역 사람들의 신앙사이에 생겨난 갈등은 교회의 분파로 이어졌다. 대각성 시대에 이미 분열의 징조가 있었다. 뉴저어지나 뉴잉글랜드의 개척자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장로교 부흥운동파와 반부흥운동파 지도자들이 등장했다.
미국에서의 장로교회 역사는 여러 측면에서 조합교회의 역사와 비슷하다. 장로교회도 유럽에서 기성사회의 교회였기 때문에 개척자들의 요구와 이해 관계에 잘 적응할 수 없었다. 장로교회의 제도가 견고하여 서부사람들의 생활과 잘 맞지 않았으므로 교회의 통일이 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기들의 요구와 일치되는 신앙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개척자들이 기존의 질서 속에 있는 동부 사람들을 향해 종교적 반란을 일으켰고 그리하여 장로교회는 동서의 분파로 나뉘게 되었다. 장로교회와 같이 교리중심의 교회는 여러 당파들간의 갈등이 신학적인 성격을 띄기 마련이다.
최소한 표면적인 문제만 보더라도 아르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간의 문제가 있다. 1803년에 발톤 스톤(B. W. Stone)은 남서 지방을 중심으로 스프링필드 장로회가 분열되어 그리스도의 교회(Christian Church)라는 독립적인 교파를 조직하려 하였다. 이 교회는 모든 교리적 신조들을 거부하고 성서에 근거하여 단순하고 평신도 중심의 교회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8세기와 19세기 초의 종교 운동은 모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온 상당히 많은 종파를 만들어 냈다. 미국의 교파주의가 전국적으로 떨어져 나가던 당시의 교회 분열의 많은 원인 중의 하나가 동서간의 지역적 갈등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분열은 신학적 성격이 아니라 사회학적 성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개의 커다란 개척자들의 교회가 들어서면서 대규모의 종교반란은 종식되었다.
3개의 교파란 감리교회, 침례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도교회를 일컫는다. 개척시대 동안에 동부의 교파로부터 떨어져 나와 이 나라의 종교생활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서부교회에 있던 세 번째로 큰 교회가 본토태생의 그리스도 사도교회였다. 감리교와 침례교는 자기 자신들을 개척지의 상황에 적응시켰고 자기들의 성질을 개척지의 정신과 조화시킴으로써 큰 이득을 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사도교회는 참으로 서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교회는 여러 가지 개척지에서의 종교운동이 연합되어 나타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제임스 오켈리가 지도한 공화주의 감리교의 반란에서 시작하여, 분리론자들에 의한 스프링필드 장로교회의 분리, 다음에 나타난 개척지의 기독교인을 비교파적인 교회로 조직해 보려는 마샬과 스톤의 시도 등을 거쳐서, 한때 장로교도였다가 침례교도가 되었던 설교자 알렉산더 캠밸(Aexander Campbel)의 노력에 힘입어 개척지의 신앙을 근거로 한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사도)들을 모으게 되었다.
침례교나 감리교와 마찬가지로 이 사도교회에서도 부흥회의 방법을 사용했고 감정에 호사하는 것을 통하여 즉각적인 체험을 일으키려 하였고 평신도 설교를 채택했다. 또한 이 교회는 목사를 뽑는데 있어서도 신학적인 교육을 필수적인 것으로 요구하지 않았으며 교회를 조직하는 데 있어서도 종파적인 원리를 따랐다. 이들은 모두 개척의 원리를 따랐다. 그들은 교파의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교파적 신조를 기부하고 오로지 성경의 기준에 근거하여 통일된 원리를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사도교회는 개척지의 신앙에서 나타난 공통적인 특징을 표현하는 미국 본토출생의 교회 모습을 유지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서 기독교의 미국적인 변형을 대표한다고 할 수 없다. 동부 기존 사회의 교회에서 행하는 여러 관행들, 즉 그들의 예배의식, 제도적인 성격, 신앙에 대한 철학적인 방어, 등에 대해서 초기의 사도교회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것으로 취급해주지 않았다. 사도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무시함으로써 성경 해석에 도움이 되었다. 즉, 신약성경은 첫 세 대의 제자들에 의해서 쓰여졌으며 그 속에서 종교적 단체의 제도적 성격에 의한 것이나 가족의 유대감에 대한 주장 등이 분명하게 표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 사도교회는 앞의 두 교파보다 감정적 열정이 부족했다. 이 교회는 영혼의 구원에 대한 개인적인 원리보다 연합의 사회적 원리에 더 관심을 두었다. - 교회분열의 문화적 배경 -이민 온 사람들의 교회
18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동안, 수백만의 유럽인이 미국으로 이민은 사건은 게르만 민족 대이동만큼이나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사건이었다. 신대륙에 정치·경제 생활에 미친 이민의 영향은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새로운 미국화를 가능케 하는 환경을 제공하였다. 미국의 정치·경제적 발달에 있어서 민주주의와 자유의 토양이 지니는 의미는 종교 발달에 있어서의 그것과 궤적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이민자들의 종교적 태도와 문화적 유산을 공통적인 미국적 유형으로 변형시킨 요소는, 미국적인 환경과 전통을 이어받은 미국 기독교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실용주의적인 신앙의 특성을 꼽을 수 있다. 구원이란 믿음에만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마저도 구원의 교리에 대한 설교나 관행에 있어서 행위에 의한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신조로써 명문화되지는 않았지만 설교, 찬송, 교회 기관의 조직 등과 같은 것들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국·교 분리의 정책은 국가보조를 받는 유럽의 교회와 너무나도 많은 성격의 수정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민 교회의 구조는 국가조직을 본떠 만들었으며, 정치적 구조 속에 통합되어 갔다. 이민자들은 교회의 성원이 되는 처어치적인 원리 대신에 어느 정도까지는 자발적으로 성원이 되는 섹트적인 원리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이들 교파는 자기들의 신도를 확보하기 위해 개인적인 호소를 하게 되었고, 이러한 사실은 복음주의와 회심의 원칙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성향을 강화해 주었다.
유럽의 국가 교회들이 미국에서 재조직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교회치리에 대한 기본법이 완전히 수정되어야 했다. 기독교 협의회나 종교회의 긴 역사, 종파 또는 자유 교회적인 원리, 미국의 정치 조직 등이 교회 헌법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로마 제국의 유형을 따라서 만들어졌듯이 미국의 교회는 미국의 국가체제나 입법부, 행정부 등과 순응하면서 자기들의 교회를 조직하였다. 그들 가운데서 최고의 권위는 일반적으로 교회회의, 총회 등에 부여되었는데 이러한 회합에서 각 교파를 위한 법이 제정되고 행정직원을 선출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이민 교회들 사이에는 통일된 교회통치의 형태가 보여졌다.
마지막으로 국·교 분리의 원칙은 이민교회들로 하여금 세속 정부에 대한 그들의 통례적인 태도를 바꾸도록 하였다. 식민지가 본국으로부터 독립을 성취하자 영국 성공회는 오랜 전통에서 탈피하여 미국 감독교회라는 이름으로 재조직되었다. 이것은 미국 교회 역사상 가장 놀라운 사건 중의 하나이다. 옛날의 왕에 대한 정치적 충성을 포기한 감독교회는 그때까지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되어져 왔던 정치적 성격을 그 자신의 조직체 내에서 성공적으로 제거하였다. 국·교 분리라는 미국의 원칙은 종교에 대한 국가의 우위에 반항하여 생겨났던 종파보다 한때는 국가기관이었던 교회에서 더 잘 나타났다.
이민 교회들이 새로운 정치적 환경에 적응됨에 따라 새로운 공통적 미국교회를 설립하고자 하는 성향을 나타나기도 했다. 교회 정체, 평신도 대표, 자발적인 교회 성원의 원리 채택, 세속 정부 활동에 개입하는 것에 대한 공통적인 자제 등과 같은 일을 통해 미국으로 이민해 온 유럽의 국가주의 교회들은 어떤 공통적인 형태에 접근하게 되었다. 문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언어이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던 사람들을 제외한 미국에 온 모든 유럽의 교회들은 영어에 적응해야만 했다. 언어 문제는 이민교회들이 다루어야 하는 문제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다. 언어의 변화는 민주적인 정신, 산업주의, 애국주의 등을 포함하는 전체 문화에 적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미국의 교회는 전체적인 적응의 과정을 통해서 모교회와 눈에 띄는 유사성을 지니면서도 또한 그것과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니기도 하였다. 교회 내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함에 따른 파벌간의 갈등, 종교 조직체의 문화적 성격에 대한 강조, 교회를 통해서 자기 종족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옛날의 관습이나 이상을 키우려는 노력 등이 계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 교회분열의 인종적 배경-인종차별과 교파주의
신학적 합리화로 말미암아 교회분열의 사회적인 원인이 모호해지는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에, 피부색에 따라 교회 안의 선이 그어져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일이 무척 드물다. 인종간의 차별은 미국 내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어서 교회로 하여금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어떠한 핑게거리도 필요 없는 것으로 되어 버렸다. 인종에 따라 교회를 분열시키는 교리라는 것은 신학적이 아니라 인류학적이다. 교회가 여성의 열등함에 대한 교리를 받아들이고 여성이 성직자가 될 수 없다는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흑인에 대한 평등성을 거부했던 것이다. 예배드리는 성전에서 남자와 여자를 분리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백인과 흑인을 분리시켰고 또한 그 분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미국 교파주의의 혼합된 여러 유형 중에서 인종에 따른 교회의 분열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유형이다. 4개의 큰 교파, 즉 민족 침례교회 협의회, 아프리카 감독교회, 아프리카 감리교 감독 시온교회, 흑인 감리교 감독교회 등은 순수히 흑인들로만 조직된 교회이다. 인종간의 차별이 교회를 분열시켰다고 해서 그것이 이전의 친교를 쇠퇴하게 만든 퇴보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불평등 속에서의 친교를 벗어나서 독립을 거쳐 궁극적으로 평등 속에서의 바람직한 교제로 향해 나가는 것이 때로는 진보적인 발걸음이 되기 때문이다.
흑·백인이 혼합되어 있는 교회에서도 어느 정도 분열은 모두 있었다. 친교에서 분열로 넘어가는 각 단계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처음에는 백인과 흑인지역 교회에서 온전한 친교를 누린다. 다음에는 지역교회 내에서 분리가 일어나게 되어 교파는 같지만 지역 교회별로는 인종에 따라 서로 다른 교회가 형성된다. 그 다음에는 교파 내에서의 최고 사법기관은 인정하지만 지역 교구 교회협의회가 인종에 따라 분리되어진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완전히 다른 교파가 형성된다. 어떠한 인종적 차별도 두지 않은 온전한 친교는 미국 기독교 역사상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인종에 따른 교회분열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결정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학이나 교회 체제의 문제는 그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 교파주의가 생겨난 것은 순전히 사회적인 원천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계급의 원리가 그리스도의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이러한 계급의 원리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일차적으로는 경제적·문화적으로 우월한 집단 속에서 생겨났으며, 이차적으로는 이것에 대한 반발로서 경제적·문화적으로도 열등한 집단 속에서 생겨났다. 확실히 흑인들이 앞장서서 분리된 교회를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 책임은 백인들에게 있다. 그들이 가진 우월적 특권의식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사회 계급의 선에 따라서 한번 더 쪼갯던 것이다. - 일치를 위한 길
교회분열의 역사는 기독교 패배의 역사였다. 교회는 그 역사를 시작하면서 분열된 세계를 향하여 평화와 형제애의 약속을 가지고 등장했다. 그러나 교회는 변화시켜야만 하는 사회의 분열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초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싸움에 가장 열심히 뛰어들었다. 인간성을 통합시키는 일에 지도력을 발휘하던 위치에서 정치·경제적인 힘에 이끌려 사회적 과정을 뒤쫓아 다니는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교회를 분파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이 세상의 한 부분이나 한 조각에 불과하게 되며 다른 많은 기관과 나란히 서 있는 하나의 사회적 기관이 되어버린다. 또한 그것은 전체 문화의 한 단면이 되어버려서, 다른 문화에 의하여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세상의 왕국은 우리 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변화되어야만 한다는 옛날의 비젼은 일상 속에 파묻혀 그 빛이 희미해져 버리고 말았다. 불변하는 인간성, 경제적·정치적 사회의 흔들리지 않는 요새, 인종적 자만심, 경제적 자기이익, 실력정책 등과 같은 야만적 사실이 이러한 일상생활에서 그 잔혹한 본성을 유감 없이 나타냈다. 이러한 근거 위에 세워진 교파주의는 교회의 패배를 고백하는 것이며 교회가 이 세상에 굴복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상징이다.
기독교 신앙이 서구 세계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 현재의 교회 형태로는 그 일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서구 문명을 곤궁으로 몰아간 바로 그 영향력 밑에 교회들이 무릎을 꿇고 있기 때문이다. 교파주의적인 기독교는 국가나 경제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사회적인 힘에 대한 지도력을 포기한 기독교이며 이러한 기독교는 쪼개져 있는 세상에 대하여 아무런 희망도 줄 수 없다. 복음에 따르는 기독교에는 의심할 바 없이 우리가 요구하는 이상이 포함되어 있다. 비록 이러한 기독교가 하나님이 통치하는 사회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며 그리스도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이라는 형이상학을 이루어지도록 전제하지만, 그것의 목적은 인간 속에 잠재 해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속성을 온전히 드러내고 인간 상호간에 존재하는 형제 됨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데 있다. 이러한 계시는 교리적인 용어로써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속에서, 특별히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나타난다.
기독교 신앙이 인간 앞에 내어놓은 최고선이란 오직 사랑을 통한 영원한 조화일 뿐이다. 이러한 조화 가운데서 개개인은 아버지와 모든 형제들로 이루어진 사랑의 공동체 (Beloved Community)에 자기 희생의 헌신을 드림으로써, 영원한 생명에 포함되어 있는 온전한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을 향하여 이러한 이상에 호소를 하면 잘못될 일이 없다. 이러한 이상은 사회 과학이나 윤리학에 의해 희미해지기도 했고, 경제적 문제를 고려하는 가운데 무턱대고 기대되어지기도 했으며, 기껏해야 가족생활 가운데서 그 모습이 드러난 적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스도와 복음에 입각한 이러한 기독교를 선포하기 위해서 필요한 교회는 이 세상의 분열에 초연해야 하고 지역적인 이해관계나 계급, 인종, 국가 등의 요구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전체의 공동이익과 아직 실현되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스스로를 적응시키는 교회이어야 한다. 교파주의적인 교회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관점이 아무리 넓다 해도, 이러한 일을 충분히 해낼 수 없다. 교회가 이러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으려면, 국가를 향한 교회의 충성심 때문에 교회의 국제적인 친교를 통한 통일이 침해를 당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교회 안에서는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서 만연되었던 것과 같은 사랑의 공산주의에 의하여, 부자와 가난한자들의 사이가 폐지될 것이다. 이와 같은 공산주의는 오직 조화와 사랑의 원리 위에서만 성립될 수 있는데, 이러한 원리에 따르면 성원 각자는 능력에 따라 공동체에 공헌하고, 필요에 따라 공동체에 받을 것을 요구하지 양적인 평등이나 어떤 미리 정해진 특권의 원리에 따라 일하거나 받을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사랑의 공동체 교회는 하나님의 집안에서 완전한 친교를 실행할 뿐 아니라 그러한 친교를 삶의 모든 관계 속에 확장시킴으로써 인종간의 갈라진 틈에 다리를 놓아줄 것이다.
또한 교회는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모두에게 기회의 평등을 제공하고 공동의 과업과 공동의 사람 속에서 그들 각각의 몫을 제공함으로써 문화의 차이를 중간에서 연결시키게 될 것이다. 오직 이러한 교회만이 인간의 분열을 초월할 수 있고, 그러한 교회만이 인간들을 치유할 수 있다. 오직 이러한 교회만이 자기 이익과 교파적 취향이 놓여져 있는 자리에,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마음과 친밀한 교제를 통한 자유로운 행동을 대신하여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친교가 증가되는 것은 전체 기독교 세계의 희망이며 전 세계의 희망이다. 이러한 교회야말로 세속주의에 빠지고 그 결과 생겨난 분열로 인해 파멸에 처한 여러 교회들을 구해 낼 수 있는 것이다.
Ⅲ. 나가는 말
선교 100주년을 맞이한 한국의 기독교에서 해결해야 할 숙제 중의 하나 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교회분열의 문제이다. 교회 분열의 현상은 교리의 문제나 그 차이에 대한 신학적 판단의 문제를 벗어나 이미 사회적 문제로 보는 것이 분열의 문제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본서에서 주목한 분열의 현상은 특히 교파주의에서 문제를 찾고 있다. 이것은 비록 미국사회에서 일어난 문제를 제기한 것이지만, 교파주의적 분열의 현상은 사실상 우리의 현실과 궤적을 같이한다고 보아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교파 분열은 세포분열만큼이나 빠르게 분열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분열의 현상은 교리에서도 찾을 수 있겠지만 사실은 어떤 숨은 이익이나 새로운 교주 창설의 문제가 더욱 두드러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사이비 종파나 교회의 문제도 날로 심각한 현실임에 틀림없다. 또는 무분별한, 무모한 물질주의에 의한 교파 분열 현상도 지적되어야 마땅하다. 아울러서 교회내의 알력 다툼 또한 교회분열의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정도 성장한 교회에서 전도사의 직에 있는 사람이 목사와의 불화 또는 자기 과시의 일환으로 또는 무모한 신도 집단이 서로의 이권 때문에 한 살림을 차려서 세포 분열되는 경우도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사이비 종파가 난무하여 선량한 신도들을 혹세무민하는 현실을 간과할 수 없다. 한국의 종교현안 문제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종교의 영향력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시각이다. 1980년대까지 계속적인 성장세를 나타내던 종교인구가 1990년대에 와서는 감소하기 시작했다. 비종교인 이 종교를 갖지 않는 이유는 주로 종교에 대한 무관심과 종교에 대한 불신, 실망 때문인데, 젊은 층은 주로 무관심, 그리고 기성 세대는 불신과 실망 때문에 처음부터 종교를 믿지 않거나 믿던 것도 중도에 포기하는 실정이다.
기독교 윤리학자로 알려진 저자는 교회의 분열을 윤리적 패배라는 견지에서 찾았으며 이제 그 일치를 위한 길은, 개인적 윤리는 물론이고 신도들간의 연대감, 형제애, 평등 그리고 분배적 정의에 의한 사회적 정의의 원리가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주장하고 있다. 옳은 말씀이다. 그러나 그 길은 요원한 길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물질 만능적인 사색의 근원은 일소하고, 온전한 하나님과 이웃에 대 한 사랑의 실천에서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사랑만이 그 해답을 제시 할 수 있다. 사랑의 실천은 멀리서 구할 필요도 없이, 무극 천주교 꽃동네의 최귀동 할아버지에게서 찾으면 된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축복입니다” 라는 말을 우리가 기억하고 “서로 남의 짐을 져줍시다.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이룰 것입니다”(같 6:2)라는 말씀에서 기독교 사회정의문제는 해결된다. 그러면 우리의 교회 문제도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실천이 없이 입으로만 중얼거리고 자기 밥그릇만 챙기기 때문에 교회분열과 사회적 해악이 주님의 몸된 교회에까지 침투해 들어오는 것이다.
한국종교에 대한 불신의 표적은 교파분열에 가장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더구나 사이비 종교의 우후죽순은 참 종교, 참 진리의 신앙집단을 퇴색시키기에 안성맞춤이다. 또한 헌금을 너무나 노골적으로 강조하고, 사랑의 실천에는 소극적이고 아울러 저질 성직자가 많다는 데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조하는 것도 현실의 문제이다. 한국 개신교의 문제 양상은 실로 심각하다는 지적이 있다. 이원규의 조사에 의하면, 개신교의 종교현황과 변화의 특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첫째, 종교침체의 현상은 다른 종교들의 현상과 비슷하지만, 타종교로의 개종률이나 무종교인으로의 종교 포기률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젊은층, 지식층들이 개신교를 떠나고 있다. 둘째, 초월적 존재나 현상에 대한 믿음, 의례참여, 개인적 수행(기도, 경전 읽기, 헌금) 등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신앙의 자기확인에 대한 종교성은 매우 강하며, 과거보다도 더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 그러나 구원이나 교리와 관계된 믿음에서는 매우 폐쇄적이며 이에 따라 타종교인이나 무종교인에 대하여 매우 배타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과거보다 더 심화되고 있다. 바로 이점이 한국인의 전체적인 추세, 타종교인의 추세와 반대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 본고와의 견련성이 있는 소위 교파분열, 사이비종교, 품위없는 정직자, 헌금의 지나친 강요와 같은 문제들이 개신교의 경우 심각한 현안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대다수의 지적은 사회적 공신력의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한국 갤럽조사의 마지막 부분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신앙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과 타종교인과 무종교인에게 배타적 성향을 보여 주는 것도 우리의 반성을 불러오게 하는 이슈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반성을 가져오게 하는 것은 노골적인 물질중심주의에 있다. 이것은 무리한 교세확장에서 오는 폐해가 그 원인이 된다. 다음으로 반성해야 할 것은 진정한 믿음과 마음이 부족하다는 지적과 함께 사회 봉사와 이웃사랑 실천이 아쉬운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교파간의 대립과 권위주의가 가져오는 폐해는 곧 바로 교파분열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오늘날 IMF시대를 맞이하여 개신교 내에서 도 물량위주와 교회성장주의와 기복주의 신앙이 경제난국을 초래했다는 지적이 있다. 1998년 3월 23일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IMF체제와 한국교회’라는 심포지움에서 손인웅 덕수교회 목사는 지난 30여 년 간 복 받고, 병 고치는 개인적 기복신앙에 치우쳤다고 자복 하면서 복된 삶이란, “바르고 보람 있게 사는 것이라기보다는 많이 소유하고 출세하는 것”이라고 교회는 가르쳤다고 하면서, 이제는 교회에서의 공동체 강화, 지역사회 봉사 등을 지적했다고 한다.
이제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눈을 돌려야 할 기로에 서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를 세워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하나님인 양 착각에 빠지는 성직자 아닌 성직자, 자기를 위한 이웃사랑실천자, 자기의 교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가르침이다, 우리 교회만이 세상의 첫째 가는 하나님의 몸이라는 등의 환상적인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은 곧 남을 나와 같이 생각할 때 진정한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길이요, 하나님의 몸 된 교회가 하나되는 걸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