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구토
장 폴 사르트르 / 문예출판사 / 1999.9.10
– 1964년 ‘말’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한 저자의 실존주의를 형상화한 장편소설
주인공 로캉탱의 예리한 관찰을 통해서 소시민적 권태와 부르주아의 위선, 그리고 더 나아가 무의미한 대화들만 주고받는 모든 인간들의 비진성성을 담아냈다.

실존주의의 형상화라는 난해한 주제를 지닌 이 작품은 주인공 로캉탱의 예리한 관찰을 통해서 소시민적 권태와 부르주아의 위선, 그리고 더 나아가 무의미한 대화들만 주고받는 모든 인간들의 비진정성을 드러낸다.
실존을 자각하는 순간 구토를 시작한 로캉탱은 철학 교사로 있으며 작가적 명성을 얻기 위해 열망하던 사르트르의 분신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앙투안 로캉탱은 부빌에 거주하며 3년째 ‘죽은 자’를 연구하는 서른 살 연금생활자이다.
그는 결국 언젠가는 자신을 버릴 도시의 깊은 우울함 속에 고립된 채 살아간다.
스쳐가는 사람들이 나누는 의미 없는 대화, 그와 접촉하는 소수의 사람들, 부빌의 풍광 등이 인상파 화가의 붓끝인 양 이어지고, 결국 로캉탱은 새롭지만 아주 작은 희망의 가능성을 가슴에 감춘 채 부빌을 떠난다.
○ 목차
1. 원서 발행인의 서언
2. 날짜 없는 쪽지
3. 일기
4. 작품 해설 : 고독의 참여자 사르트르
5. 옮긴이의 말 : 나의 스승 사르트르

○ 저자소개 : 장 폴 사르트르 (Jean Paul Sartre, 1905∼1980)
파리 출생으로 두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외조부 슬하에서 자랐다.
메를로 퐁티, 무니에, 아롱 등과 함께 파리의 명문 에콜 노르말 슈페리어에 다녔으며, 특히 젊어서 극적인 생애를 마친 폴 니장과의 교우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평생의 연인 시몬 드 보부아르와도 그 시절에 만났다. 전형적인 수재 코스를 밟아 졸업하고, 병역을 마친 그는 항구 도시 루아브르에서 고등학교 철학 교사로 일하다가 1933년 베를린으로 1년 간 유학, 후설과 하이데거를 연구하였다.
사르트르는 1938년에 『구토』를 출간하여 세상의 주목을 끌며 신진 작가로서의 기반을 확보하였고, 수많은 독창적인 문예평론을 발표하였다. 『존재와 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변증법적 이성비판』 등을 발표하고 『레탕모데른』지를 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2차 대전 전후 시대의 사조를 대표하는 위대한 사상가로 평가받았다.
그는 많은 희곡을 발표하여 호평받기도 했는데, 『파리떼』, 『출구 없음』, 『더럽혀진 손』, 『악마와 신』, 『알토나의 유페자들』 등은 그 사상의 근원적인 문제성을 내포하는 동시에 그때마다 작가의 사상을 현상화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964년, 『말』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한 일화로 유명하다.
1980년 4월 15일 작고할때까지 끊임없이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 역자 : 방곤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 졸업, 소르본 대학에서 불문학을 연구하였다. 현재 경희대학교 문리대 교수이자 한불협회 사무국장이다.
번역서로 루소의『고독한 산보자의 명상』, 샤르트르의『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알베레스의 『20세기의 지적모험 』, 카뮈의 『적지와 왕국』, 『표리 』, 『정의의 사람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 케셀의 『해바라기 여인 』, 모파상의 『비계덩이』, 『사랑은 죽음보다』, 장 루크 살류모의『현대 프랑스 사상』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 책 속으로
나는 안다. 그 도시가 먼저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나는 부빌을 떠나지 않았는데, 나는 이미 거기에 있지 않다. 부빌은 침묵하고 있다. 이미 나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고 있는 그 도시. 그 도시에 내가 아직 두 시간이나 더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더 버림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여기에 있고 우리라는 귀중한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먹거나 마시고 있지만, 존재하는 데는 어떠한 이유도 전혀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209쪽
이 기록은 앙투안 로캉탱의 서류 속에서 발견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아무런 수정도 하지 않고 발표한다.
휴머니즘은 그 반대되는 것들을 먹고 산다.— 221쪽
나는 그토록 나 자신을 팽개치고, 잊고, 잠들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숨이 찬다.
존재는 눈, 코, 입…… 도처에서 나의 내부로 침입해오고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대번에 베일이 찢어진다. 나는 알았고, 나는 ‘보았다‘. — 236쪽
나는 우리가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사실들은 느리고 게으르고 음침하여 내가 부여하고자 하는 엄격한 체계에 들어맞기는 하다. 그러나 로르봉은 그 사실과 외면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순전히 상상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차라리 소설의 인물들이 더 진실해 보일 것이라고, 적어도 더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여자는 괴로움을 드러내는 데에 인색하다. 자기의 쾌락에 대해서도 역시 인색할 것이다. 나는 혹시 그 여자가 때로는 그 단조로운 고통, 노래를 그치면 곧 되살아나는 그 수심에서 벗어나기를, 그리고 호되게 고통을 느끼고 절망 속에 빠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 여자는 옹졸해지고 만 것이다.
벽에 흰 구멍이 있다. 거울이다. 함정이다. 나는 이 함정에 걸려들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틀림없이 걸려들었구나. 거울 속에 회색빛 물체가 나타난다. 나는 가까이 가서 그것을 본다. 이제는 거기서 떠날 수 없다. 내 얼굴의 반사이다.
경험, 그것은 그들의 마지막 요새이다. …그는 참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하여 눈을 가리려고 하는 것이다. 고독하고, 알아낸 것도 없고, 과거도 없이 지성은 우둔해지고 육체는 무너져간다는 그 현실에 대하여. 그래서 그는 벌충이 될 만한 자질구레한 망상을 꾸며 그것을 잘 정돈하고 잘 꿰매어놓았다. 그는 자기가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안니 같으면, 이 아름다운 구름을 반영시키기 위해서 우리들의 가슴속에 어두운 잔물결을 만들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회를 이용할 줄 모른다. 나는 공허하고 침착하게 이 폐허의 하늘 아래에서 정처없이 간다.
나는 존재할 권리가 없었다. 나는 우연히 나타나서 돌처럼, 식물처럼, 세균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작은 그림의 성당 속에 한없이 고운 백합이여 안녕, 우리의 자전심이여, 우리의 존재 이유여 안녕, ‘더러운 자식들‘이여 안녕.
사물이란 순전히 보이는 그대로의 사물인 것이다.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안니는 표류물에 대해서 동정심이 없다.
그렇게도 많은 존재들은 없어졌다가는 악착같이 되살아나고, 또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 풍성함은 관대함의 결과가 아니라 그 반대였다. 그것은 음침하고, 괴롭고, 스스로를 어찌할 줄 몰랐다.
나는 사람이 늘 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긴다고 생각하는 놈은 개자식들뿐이다. 이제, 나는 안니처럼 하겠다. 나는 연명하련다. 먹고 자고, 자고 먹고, 나무들처럼, 물탕처럼, 전차의 붉은 의자처럼, 천천히 고요하게 존재하련다.
지금, 내가 ‘나‘라고 말할 때, 그것은 공허한 것 같다. 나는 이제는 더 분명하게 나를 느끼게 되지 않는다. 그만큼 나는 버림받고 있다. 나의 내부에서 여전히 현실적인 것은, 스스로 존재한다고 느끼는 존재인 것이다. …그것은 추상이다. 나에 관한 작고 창백한 추억이 나의 의식 속에서 흔들린다. 앙투안 로캉탱…… 갑자기 그 ‘나‘가 창백해진다. 창백해져서, 그래서 꺼진다.
나는 내 주위를 불안한 눈초리로 둘러보았다. 현재뿐이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각기 현재 속에 처박힌 가볍고 튼튼한 가구, 즉 탁자며, 침대며, 거울이 달린 양복장과 나 자신이었다. 현재의 진실한 본성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현존하는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현재가 아닌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물 속에도, 나의 생각 속에도 없었다. 확실히 오래 전부터 나의 과거가 나에게서 도주해버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것이 나의 능력 범위 밖에 있는 거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과거는 은퇴한 것에 불과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존재 양식이었으며 휴가 생태, 비활동 상태였다. 각각은 자신의 역할이 끝났을 때, 스스로 상자 속에 얌전히 들어앉아서 명예로운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무 (無)를 생각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 나는 알았다. 사물이란 순전히 보이는 그대로의 사물인 것이다.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 182쪽
실업자들이 뉴욕의 보도를 점령하고 있고, 여자들은 따뜻한 방안에서 미용사 앞에 앉아 눈썹 위에 화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쓸쓸한 거리에서 노이쾰른의 어떤 창문에서 나는 총소리, 운반중인 부상자의 피, 딸꾹질, 화장하는 여자들의 정확하고 섬세한 동작, 그 하나하나에 나의 한 걸음 한 걸음이, 그리고 가슴의 고동이 호응하고 있다. — 109쪽
세 시다. 세 시, 이 시간은 무엇을 하려고 해도 항상 너무 늦거나 이른 시각이다. 오후의 어정쩡한 시간. 오늘은 참을 수가 없다. 냉랭한 태양이 유리창들의 먼지를 희게 비추고 있다. 창백한, 희게 흐린 하늘.
나는 미래를 ‘본다’ – 미래는 거기에, 길 위에 놓여 있어, 현재보다 약간 희미할까말까 할 뿐이다. 미래가 실현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실현된다고 해서 무엇이 더 나아진단 말인가?
사람이 살고 있는 동안은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배경이 바뀌고 인물이 들어왔다가 나가고, 그뿐이다. 결코 출발이라는 것이 없다. 나날이 아무런 운율도 이유도 없이 나날에 덮친다. 그것은 끊임없고 단조로운 덧셈이다. 가끔 사람들은 부분적인 소계를 낸다.
산다는 것은 그와 같다. 그러나 사람이 삶을 이야기할 때에는 모든 것이 변화한다. 다만 그 변화는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 증거로는, 사람은 정말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정말 이야기나 있는 것처럼. 사건은 한 방향에서 생겨나고 우리는 그것을 그 반대의 방향으로 얘기한다.
다시 걷는다. 바람이 무적 (霧籍) 소리를 실어온다. 나는 고독하다. 그러나 나는 도시로 가는 군대처럼 행진한다. 바다 위에 음악이 울리고 있는 배들이 있다. 유럽의 모든 도시에 불이 켜지고 공산주의자들과 나치스들이 베를린에서 싸우고 있다. 실업자들이 뉴욕의 보도를 점령하고 있고, 여자들은 따뜻한 방안에서 미용사 앞에 앉아 눈썹 위에 화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쓸쓸한 거리에서 노이쾰른의 어떤 창문에서 나는 총소리, 운반중인 부상자의 피, 딸꾹질, 화장하는 여자들의 정확하고 섬세한 동작, 그 하나하나에 나의 한 걸음 한 걸음이, 그리고 가슴의 고동이 호응하고 있다. — p.109
5시 30분
시원하지 않다! 전혀 시원하지 않다. 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다. 고약한 그 ‘구토’를 . 그리고 이번에는 새롭다. 나는 그것을 카페에서 느꼈다. 카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또 대단히 밝기 때문에 이제까지 나의 유일한 피난처였다. 이제는 그 피난처조차 없어진 것이다. 내가 나의 방안에서 궁지에 몰리게 되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를 것이다. — pp.42∼43

○ 소설 ‘구토’ 개관
‘구토’ (프: La Nausée)는 장폴 사르트르가 지은, 1938년 출파된 장편소설이다. 사르트르의 최초의 소설이며 사르트르의 의견에 따르면 자신의 최고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앙투아느 로캉탕은 역사상의 인물인 로르봉 후작을 연구하기 위하여 해변의 소읍에 체류하던 어느 날 해안에서 돌을 줍다가 구토증을 느낀다. 그 구토증의 정체를 밝히려고 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낮에는 도서관에 다니면서 문헌을 탐독하고, 밤에는 카페의 마담과 타성적인 교섭을 가지며 단조로운 나날을 보낸다.
이윽고 공원의 벤치에 앉아 마로니에 나무를 바라보고 있을 때 드디어 구토증의 의미를 깨닫는다. 그것은 이유도 없이 존재하고 있는 존재물의 맛이란 것이었다. 로캉탕은 로르봉 후작의 연구를 집어치우고 그 후부터 역사책을 탐색하지 않고 소설과 같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쓰려고 결심한다.
‘존재의 우연성’을 주제로 몇 번이나 개고 (改稿) 하며 써나간 이 작품은 사르트르의 움트는 사상을 담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