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군도
프리드리히 폰 실러 / 서문당 / 2014.8.8
군도 (群盜, Die Räuber, The Robbers)는 독일의 ‘환희의 송가’라는 시의 저자로 유명한 프리드리히 실러 (Friedrich Schiller)가 1781년에 지은 희곡이다.
‘군도’ (群盜)라는 제목은 일본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 때문에 ‘도적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 책은 1871년에 발표한 프리드리히 실러의 대표희곡이다.
작품의 주제는 사회악에 대한 도전, 압제와 인습에 대한 반항, 자유와 이상에 불파는 정의감 등에 있다.
순진하고 용감한 주인공 카알은, 자기 친동생 프란츠의 모략으로 말미암아 집에서 쫓겨나고 순정을 짓밟히게 된자, 마침내 속세에 반기를 들고 도적단의 두목이 되어 주먹과 실력으로 썩은 사회를 개혁하려 든다.
○ 목차
해 설
제 1 막
제 2 막
제 3 막
제 4 막
제 5 막
○ 저자소개 : 프리드리히 폰 실러 (Friedrich von Schiller, 1759 ~1805)
의사이자 작가이며 역사가이자 철학자였던 프리드리히 실러 (Friedrich Schiller, 1759∼1805)는 1759년 11월 10일에 독일 남서부 뷔르템베르크 (Wurttemberg) 공국의 작은 마을인 마르바흐 (Marbach)에서 태어나 군의관인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슈바벤 지방의 로르히 (1764), 루트비히스부르크 (1766)로 옮겨 다니며 성장한다.
1773년 뷔르템베르크의 카를 오이겐 (Karl Eugen) 공작의 명령에 의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엘리트 사관 학교인 카를스슐레 (Karlsschule)에 입학해서 법학을 전공하다가 전공을 의학으로 바꾸어서 1780년에 졸업하고, 슈투트가르트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면서 1781년에 익명으로 첫 번째 드라마 『군도 (群盜) : Die Rauber)』를 자비로 출판하고, 그다음 해에 이 작품이 초연되면서 ‘질풍노도’ 문학의 중요한 작가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군도』의 혁명적인 내용으로 인해 신변의 위협을 느낀 실러는 1782년 9월에 공국을 탈출해서 만하임,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튀링겐 지방의 바우어바흐 (Bauerbach)로 피신해 리터 (Ritter)라는 이름으로 의사 활동을 시작한다. 1787년 7월 실러는 바이마르로 가서 괴테의 친구들인 헤르더와 빌란트를 만나고 이들의 영향으로 역사학과 그리스 고전 연구에 빠진다. 1788년 9월에는 드디어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괴테와 만나고 괴테의 주선으로 예나대학에서 역사학을 강의하게 된다.
사회적 신분을 얻게 된 실러는 샤를로테 폰 렝게펠트에게 구혼해 1790년 2월에 결혼한다. 실러는 열정적으로 역사 연구에 매진해 30년 전쟁사 : Geschichte des dreißigjahrigen Krieges를 비롯한 많은 역사 논문을 발표한다. 그러나 너무 열정적으로 일하다 보니 1791년 1월에는 심한 발열로 중병이 들어 그해 여름까지 생명이 위독할 정도의 상태에 빠진다.
병으로 교수직을 내놓은 실러는 칸트 연구에 몰두한다. 1794년 초에는 예나로 거주지를 옮긴다. 1795년 『호렌』을 발행하기 시작한다. 『호렌』에는 헤르더, 피히테,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 알렉산더 폰 훔볼트, 요한 하인리히 포스와 프리드리히 횔덜린과 같은 쟁쟁한 작가들과 철학자들이 함께 참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호응을 받지 못하자 괴테와 함께 자신들을 비방하는 문인들을 공격하는 2행시 모음집인 [크세니엔]을 실러가 1796년부터 발행하는 『문예 연감 : Musen-Almanach』에 발표하게 된다.
1797년은 실러의 “발라드의 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뛰어난 많은 발라드 (담시)가 나왔다. 그 가운데 [장갑 : Der Handschuh], [잠수부 : Der Taucher], [종 (鐘)의 노래 : Lied von der Glocke], [폴리크라테스의 반지 : Der Ring des Polykrates], [이비쿠스의 두루미들 : Kraniche des Ibykus]이 유명하다.
1799년 바이마르로 이사한 실러는 30년 전쟁(1618∼1648)의 비극적 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인 『발렌슈타인 : Wallenstein』과 시 [종의 노래 : Das Lied von der Glocke]를, 1800년에는 『메리 스튜어트 : Maria Stuart』를, 1801년에는 『오를레앙의 처녀 : Jungfrau von Oreans』를 연이어 완성한다. 1802년에는 귀족 칭호를 수여받아 프리드리히 폰 실러로 불리게 되었다. 1803년에 실러는 『메시나의 신부 (新婦) : Die Braut von Messina』, 1804년에 『빌헬름 텔 : Wilhelm Tell』을 차례로 완성하고 『데메트리우스 : Demetrius』를 작업하기 시작하지만 결국 끝을 맺지 못한다.
실러가 죽기 몇 달 전부터 실러가 죽었다는 가짜 뉴스가 나돌았다. 실러는 1805년 2월부터 실제로 심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실러는 5월 1일에 극장으로 가는 길에 괴테를 마지막으로 만났고, 9일에 폐결핵으로 인한 폐렴으로 마흔여섯 살의 나이로 죽었다. 1805년 5월 12일에 바이마르의 성 야곱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고 1826년 이장을 위해 발굴한 유골이 ‘안나 아말리아 도서관’에 보관되었다가 1827년 12월 16일 바이마르에서 새롭게 건설된 공동묘지의 ‘군주 묘역 (Furstengruft)’에 매장하지 않고 안치되었으며, 나중에 괴테도 본인의 바람에 따라 실러 옆에 놓이게 되었다.
실러는 평생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박차를 가했고, 최고의 이상을 추구하려는 명예심과 열정에 가득 찬 삶을 살았다. 그에게 이런 의지를 부여한 것은 뜨겁고 격렬한 감정으로, 더 높이 비약함으로써 헌신과 희생이라는 이상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실러는 비극적 운명을 도덕적 행위나 영웅적 행위 또는 범죄적 행위라도 인간의 위대함을 행해 가는 의지와 현세적 정의의 회복으로 생각되는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의 변증법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비극적 운명은 그의 드라마에서 역사적 세계와 현실의 세계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실러는 이 역사적 현실에 의해 운명적인 인간의 삶의 현실을 보여 주려고 했던 위대한 작가였다. 대표적인 희곡으로는 『간계와 사랑』(1784), 『군도』(1781), 『발렌슈타인』3부작 (1799), 『마리아 슈투아르트』(1800), 『오를레앙의 처녀』(1801), 『빌헬름 텔』(1804)이 있다.
– 역자: 박찬기
1928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서울대 대학원과 고려대 대학원을 졸업 (문학박사, 1974)하고, 서울대와 고려대 독문과에서 강의를 했다. 독일 문학에 대한 탁월한 식견과 번역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1973년 《기독광 der Narr in Christo》으로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에서 주는 ‘PEN 번역문학상’을 받았다. 독어 독문학회 회장 (1972~1973)과 괴테협회 회장 (1982-1984), 한국 훔볼트학회 부회장 (1987-1989), 한국 괴테학회 회장 (1986-1993)을 역임하고, 고려대 독문과 명예교수로 재직했다.
주요 저서로는 《독일 문학》(일지사, 1965), 《독일 고전주의의 문학사적 연구》(일지사, 1974), 《독일 문학사》(일지사, 1976), 《문예사조 (공저)》 (문학과지성사, 1977), 《새독일어사전》(장문사, 1979), 《괴테 연구》(문학과지성사, 1987), 《수용미학》(고려원, 1992) 등이 있다. 역서로는 《행복으로서의 의지》, 《군도》, 《물의 요정은 가다》, 《베니스에서의 죽음》, 《기독광》, 《하얀 도망자》, 《괴테 전집》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그의 최초의 작품 ‘군도’ (Die Rauber)는 1777년에 착안한 것이라고 하니까 그의 나이 18세 때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시 공작이 경영하는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으므로, 원고를 극비리에 집필하면서 한편으로는 우수한 학생으로서 논문 ‘인간의 동물적 성질과 정신적 성질에 관해서’를 작성하여 졸업논문으로 제출하였다. 1780년 가을 드디어 학교를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겨우 17그루덴을 받으면서 슈투트가르트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미 직장에 없었으며, 부지런히 ‘군도’의 원고를 완성시켜 1781년 5월에 자비로 출판하였다. 아무도 무명작가의 작품을 출판해 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작품의 평판은 불과 몇 주일 동안에 실러의 이름을 전 독일의 구석구석까지 떨치게 하였다. 그 이듬해에 그것이 만하임에서 상연 (上演)되었을 때는 공전의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뒤이어 그 성공에 따라 함부르크, 라이프치히, 베를린 등 주요 도시에서 차례차례 상연되었다. 특히 실러 자신이 의외로 생각한 것은 그 희곡이 바로 오이겐 공작의 근거지인 슈투트가르트 시에서 공공연하게 몇 번이고 상연되어 대단한 인기를 끈 사실이었다. 실러는 그 희곡을 쓸 때 대단한 결심을 하였었다. 친구에게 편지로 그때의 심정을 밝힌 바에 의하면, 그는 경우에 따라 그 작품 때문에 영영 고향과 가족을 이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하기도 했다. 물론 그 작품의 내용이 공작에 대한 반항을 표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군도’의 주제는 사회악에 대한 도전, 압제 인습에 대한 반항, 자유와 이상에 불타는 정의감 등에 있다. 그 속에는 열혈청년 실러 자신의 기백이 그대로 숨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공국 (公國)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탄압정치를 정면으로 공박하고, 그와 같은 탄압정치에 대하여 무력하게 아부, 굴복하는 동시대인에 대해서까지 신랄한 비평을 가하고 있다. 대체로 실러의 희곡은 후기 작품에서는 내적 자유의 추구가 많은 데 비하여, 초기 작품에서는 외적 자유를 좇는 경향이 강하였다.
특히 ‘군도’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잘 나타나 있으며, 슈트름 운트 드랑 정신에 가장 투철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순진하고 용감한 주인공 카를은 자기의 친동생 프란츠의 모략으로 집에서 쫓겨나고 순정을 짓밟히게 되자, 마침내 속세에 반기를 들고 도둑단의 두목이 되어, 주먹과 실력으로써 썩은 사회를 개혁하려 든다. 그의 넘쳐흐르는 격정은 비열과 불의에 대해서는 참지 못하고, 상대자가 왕후이든 승려이든 또는 자기 자신의 부하이든 그 자리에서 처치하고야 만다. 한편 그와는 정반대 되는 성격의 대표인 동생 프란츠는, 모략과 중상에 능할 뿐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는 아무리 신성한 것이라도 서슴지 않고 희생시킨다. 그는 아버지를 속여서 형 카를을 모함하고 나중에는 아버지마저 쫓아 버리고, 자신이 영주가 되어 무서운 탄압정치를 시행한다.
저자가 여기서 프란츠의 모델로 오이겐 공작을 암시한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결국 악은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이어서 프란츠는 갖가지 악행 끝에 무서운 보복을 받게 된다, 카를도 그 동기는 동정할 여지가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많은 인명을 살상하였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의 희생자 아말리아를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자기가 저지른 죄의 값을 받는 것이다. 자기 행위에 대한 벌을 받고, 파괴된 사회의 질서를 보상하려는 카를의 태도는 실러 자신의 독특한 도덕적 입장을 보여 주는 것이다. 카를은 마지막 장면의 독백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나는 이 세상을 폭력으로써 아름답게 할 수 있고, 국법을 유린함으로써 국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 아직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럽혀진 국법을 다시 보상하고, 어지럽혀진 질서를 다시 회복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 그것은 이 질서가 침범될 수 없는 존엄한 것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 앞에 전개해 보여 주는 것이다. 그 희생이 될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다. 나는 그 질서를 위하여 죽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그는 자진해서 국법의 제재를 받으러 간다.
○ 군도 (群盜, Die Räuber, The Robbers) 개관
군도 (群盜, Die Räuber, The Robbers)는 독일의 ‘환희의 송가’라는 시의 저자로 유명한 프리드리히 실러 (Friedrich Schiller)가 1781년에 지은 희곡이다. ‘군도’라는 이름 자체는 일본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 때문에 ‘도적떼’로 번역되기도 한다.
동생의 모함을 받아 아버지의 사랑을 잃고 애인을 빼앗긴 카를이 군도 (떼도둑)의 우두머리가 되어 아버지를 구하고, 애인의 사랑을 되찾으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애인을 죽이고 당국에 자수한다는 내용이다.
프리드리히 실러가 사관학교 시절 몰래 써서 알려졌지만 그 덕분에 좌절과 여러 고생을 해야했던 작품이다. 영주 오이겐 공작의 강제적 명령으로 사관학교에 들어가 의학을 배우던 실러는 엄격한 전제주의적 생활에 치를 떨며 몰래몰래 이것을 쓰던 중에 존경하던 괴테를 멀리서나마 보면서 언제나 억압적인 폭군 오이겐 공작이 괴테라는 작가 하나를 정중히 모시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못했다. 글이 사람을 바꾸게 한다! 라는 걸 더더욱 느낀 실러는 이 희곡을 가명으로 써서 마침내 연극 무대에 올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나중에서야 이 군도의 내용을 안 오이겐 공작은 불같이 화를 내며 실러를 구금시켰고 나중에는 의학 서적 집필 외 그 어느 서적의 집필행위도 모두 금지시킨다. 결국 실러는 사관학교를 탈출하여 다른 영지로 달아나서 가명으로 살아가며 수배를 피하며 작가로 살아가면서 점차 극작가로 알려지게 된다. 오이겐 공작이 이 군도의 줄거리를 알고 격분하던 것이 이해가 갈 정도로 그 시대에선 엄청나게 파격적이었다.
- 줄거리
영주인 모어 백작의 아들로 태어나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던 주인공 카를은 고리타분한 걸 싫어하고 대학에서도 술과 한량같은 생활을 보낸다. 그런 형을 시샘하던 못난 아우 프란츠가 형을 모함하는 통에 집안에서 절교를 당해 거리에 나오지만 가차없이 그런 생활을 즐기다가 빈민들과 어울리고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던 그들이 산으로 들어가 산적이 되자 그들을 도우면서 산적이 되어버린다.
비록 망나니같이 지냈으나 사실은 머리가 비상하여 기억력도 좋았던 카를은 대학시절 배운 여러 고위지식을 산적단에서 써먹으면서 산적단은 기세가 점차 오르고 나날이 세력이 커져간다. 결국 영주군이 엄청나게 파병되면서 신부를 보내 항복하지 않으면 다 죽인다는 경고까지 하는데 이를 무시하고 산적들은 20배에 달하는 병사들을 산으로 유인하고 군략에서도 소질이 있던 카를의 활약으로 영주군을 무찌른다. 하지만 그 와중에 카를을 아끼던 두목과 카를을 친구로 여기던 소중한 동료가 죽는다. 두목은 죽기 전에 카를을 새로운 두목으로 정하고,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 산적들도 기꺼이 따른다.
한편 프란츠는 나이 든 아버지를 구금하고 형과 결혼할 약혼녀도 차지하고 새로운 영주가 된다. 그리고 가혹하게 영지민을 탄압하고 세금을 거둬들이는데 사람들은 견디다 못해 하나둘 카를의 산적단으로 들어온다. 점차 산적단 규모가 커지면서 이들도 일행을 먹고 살리고자 대담하게 귀족들 집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귀족들의 하소연에 프란츠는 새로 군대를 보내지만 연이어 산적들에게 패하고 카를은 아버지를 구금하고 프란츠가 가혹한 군주가 되어있다는 걸 알고 이를 간다. 결국 영주령 본토로 공격하여 아버지를 구출한다. 한편 약혼녀도 속으론 늘 카를을 사랑해왔고 그녀도 카를을 따르고자 찾아온다.
마지막에는 프란츠는 모든 걸 잃고 분노한 민중들과 산적들의 공격으로 자포자기하여 스스로 자살한다. 그 와중에 아들이 산적단 두목이 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던 아버지도 충격으로 죽고 이제 카를은 여러 곳에서 악명을 떨치면서 여러 영주들의 대규모 공격을 받는다. 하지만 갈수록 자신이 추구하던 모든 게 허무함과 슬픔으로 끝나는 현실에서 폭력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다고 번민하면서도 여지껏 자신을 충실하게 따르던 부하들과 자신을 사랑하는 약혼녀를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애인을 죽이고 당국에 자수하며 이야기는 끝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