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궁정사회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 한길사 / 2003.3.10
앙시앵 레짐의 궁정은 우리가 지금까지 몰두해 왔던 사회학 연구의 세부적 대상인 인간이 형성한 봉건사회나 대도시 같은 사회구성체에 관한 어떠한 연구보다도 많은 문제를 사회학자들에게 제기한다. 그런 ‘궁정’에서는 수백 아니 종종 수천 명의 사람들이, 나라를 무소불위로 지배하고 자신의 뜻에 따라 모든 사람의 운명 · 지위 · 생계 · 흥망성쇠를 상당한 정도로 그리고 일정한 한계 내에서 좌우한다고 믿어왔던 왕을 섬기며 보좌하고 그와 친교를 맺어왔다.
물론 이때 그 봉사자와 국외자는 쌍방간에 행사했던 특유한 억압기제를 통하여 한 장소에 얽매인 사람들이었다. 어느 정도 확고한 서열과 깍듯한 예법이 그들을 결속하였다. 그러한 결합태 속에서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거나 무엇을 관철하려는 필요성은 그들 모두에게 오로지 하나의 특유한 각인, 즉 궁정인의 특징을 부여한다.

그러한 결합태를 핵심축으로 형성할 수 있었던 사회영역의 구조는 무엇이었는가. 권력기회의 분배, 사회적인 욕구, 종속관계는 이 사회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이 결합태, 즉 궁정과 궁정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데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궁정사회의 구조로부터, 궁정사회 속에서 출세하거나 그렇게 되기를 원했던 사람들에게 어떠한 요구가 제기되었는가. 대략 말하자면 그것들이 앙시앵 레짐의 궁정과 궁정사회라는 사회구성체가 사회학자들에게 던지는 몇 가지 질문이다.
○ 목차
결합태 : 궁정사회를 움직이는 매커니즘 – 박여성
- 사회학과 역사학
- 문제제기를 위한 일러두기
- 사회구조의 지표로서의 주거구조
- 궁정과 귀족의 결탁
- 궁정예법과 의식 : 사회적인 권력구조의 기능으로서 인간의 행동과 성향
- 궁정예법과 특권기회를 통한 왕위 계승
- 사회 전체의 권력을 누적하는 기능체인 프랑스 궁정사회의 형성과 발전
- 궁정화과정에서 배태된 귀족적 낭만주의의 사회적 기원
- 혁명의 사회적 기원
부록 1. 구조적 갈등이 없는 국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하여
부록 2. 궁정- 귀족주의 경제윤리의 이해 : 궁정귀족사회 대규모 가계의 집사장의 지위에 대하여

○ 저자소개 :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Norbert Elias, 1897 ~ 1990)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Norbert Elias, 1897년 6월 22일 ~ 1990년 8월 1일)는 유대계 독일인 사회학자로, 나중에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Norbert Elias)는 1897년에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난 독일의 유대계 사회학자다.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철학과 의학을 공부했고, 1924년 신칸트학파 철학자 리하르트 회니히스발트를 지도교수로 하여 박사학위 논문으로 ‘이념과 개인 : Idee und Individuum’을 발표했다. 1925년 엘리아스는 당시 사회과학과 철학의 중심지였던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가서 사회학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문화사회학자인 알프레트 베버 밑에서 근대 과학의 발달에 관해 연구했으나, 1930년 이를 포기하고 친구였던 젊은 교수 카를 만하임을 따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그의 조교가 되었다. 엘리아스는 이곳에서 교수자격청구 논문으로 ‘궁정사회’를 집필하기 시작했으나, 1933년 나치 집권으로 만하임의 사회학연구소가 문을 닫으면서 엘리아스도 파리로 도피했다. 1935년 다시 영국으로 망명한 엘리아스는 대작 ‘문명화 과정’을 써서 1939년에 출판했다.
그후 케임브리지에 머물며 여러 곳에서 강의하면서 집단심리치료 공부도 했다. 1954년 레스터 대학에 전임강사로 임용되었고 1962년 정년퇴임 때까지 이곳에서 8년간 강의했다.
일부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사이에서만 회자되던 ‘문명화 과정’이 1969년 재출간되면서 엘리아스는 뒤늦게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현대 사회학계의 거장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1977년에 ‘아도르노 상’을, 1987년엔 ‘사회학 및 사회과학 부문 유럽 아말피 상’을 수상했다. 그밖에 ‘사회학이란 무엇인가?’ (1970), ‘죽어가는 자의 고독’ (1982), ‘인간의 조건’ (1985), ‘개인의 사회’ (1987) 등을 저술을 남겼다.
1990년 8월 1일, 암스테르담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 역자 : 박여성
1961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고려대학교 독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 대학교에서 1994년 언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뮌스터 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 초빙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제주대학교 독일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 기호 학회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공저로 『지식의 최전선』,『월경하는 지식의 모험자들』,『한국 텍스트 과학의 제과제』,『기호학으로 세상 읽기』,『기호학과 철학 그리고 예술』,『몸과 몸짓 문화의 리얼리티』,『책으로 읽는 21세기』,『텍스트 언어학의 이해』,『문화와 기호』등이 있고, 역서로 『구성주의』,『미디어 인식론』,『괴델, 에셔, 바흐』,『생명의 황금나무야 푸르러라』,『로티』,『궁정사회』,『구성주의 문학 체계 이론』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독일 출신의 사회학자 엘리아스의 저작 ‘궁정사회’는 중앙집권이라는 근대적 권력질서의 메커니즘을 형성하는 공간이자 장치로서의 프랑스 근대왕정에 대하여 루이 14세의 시대를 중심으로 조명한 걸작이다.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 천착해온 엘리아스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궁정을 문명화된 합리성의 틀로 형성된 최초의 공간으로 상정한다. 책의 핵심개념인 ‘결합태 (Figuration)’란 사회의 구성원인 개인들이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엮어가는 상호관계의 망으로, 궁정사회는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의 가능성을 총지휘하는 절대주의 군주를 정점으로 구축된 기능복합체이다.
중세의 무사 (기사) 귀족을 온건한 궁정인으로 길들여서 확립한 상호소통의 모델, 즉 결합태의 총체가 바로 루이 14세를 정점으로 하는 프랑스의 절대주의 궁정이다. 궁정인이란 감정을 제어할 줄 알고 심사숙고와 장기적인 안목, 광범위한 지식을 갖춘 이로서, 이들은 앙시앵 레짐의 법복귀족을 거쳐 산업적 시민사회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 독자의 평 1
우리에게 프랑스의 루이14세는 그의 궁정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그의 나라까지도 무소불위로 지배하는 인물로서, 자신의 뜻에 따라 모든 사람의 운명·지위·생계·흥망성쇠를 좌지우지 하는 존재로 각인되어있다.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 「왕의 춤 (Le Roi danse)」 또는 「아이언 마스크 (The Man in the Iron Mask)」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루이14세를 ‘무소불위의 절대군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대체적으로 이견이 없을 것이다.
엘리아스의 초기작 『궁정사회』는 이러한 상식의 틀을 깨는 것에서 시작한다. 루이 14세는, 당시 귀족과 제3계급 (시민)간의 갈등과 반목을 이용하는 군주로서, 카리스마도 없고 지능도 낮았으며, 심지어는 귀족들 간의 갈등이 없으면 존재의 이유조차 불분명한 인간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루이 14세는 그들을 적절히 통제하기 위해선 궁정 내에서 서열에 따른 깍듯한 예법과 예절, 서로간의 거리두기 등이 필요하였다.
당시 귀족들은 중세시대로부터 이어지던 지주로서 존재하였다. 그러나 귀족들은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요소로 인해 경제적인 위기를 겪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병중심의 기사귀족으로부터 보병중심의 상비군체제로의 변화로 군사적인 위기를 겪게 된다. 이러한 경제적·사회적 변화와, 전통적인 풍습인 ‘noblesse oblige (서열에 걸맞은 과시의무)’,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없는 신분적인 제약은, 귀족들로 하여금 살아남기 위해 왕에게 의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또한 이 당시 정기적인 세금 등을 통해 왕의 소유가 늘어나면서 전문가계층이 생겨난다. 제3계급, 즉 시민계급은 대학교육과 법률에 관한 지식을 통해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고, 관료계급을 형성한다.
당시의 시민계급은 귀족들에게 반발할 수 있을 만큼 힘을 키웠지만, 군사력이 없었다. 반면 귀족들은 시민계급에게 위협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아직 강하고 전투에 능하지만, 영지에서 들어오는 수입의 감소로 경제력이 없었다.
루이 14세는 이러한 사회적 차이와 갈등을 유지하는데 주력했다. 화폐유통이 증가하고 자본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시민계급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해지자, 왕은 귀족 편에 힘을 실어준다. 마찬가지로 왕이 귀족들을 부양하여 궁정귀족의 힘이 다시 강해질 때면, 이번에는 시민계급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카리스마 형’ 지배자는 위기관리능력을 활용함으로서, 그의 개인적인 권력, 우월감 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위기상황의 극복이야말로 카리스마가 발휘되는 순간이기에, 이들에게는 늘 새로운 예측 불가능한 투입의 위험이 요구된다.
그러나 루이14세가 집권했을 때는 중앙 집중 권력의 토대가 마련되었고, 왕위계승을 둘러싼 불협화음도 해결되었으며 국경을 둘러싼 분쟁도 종식되던 시기이다. 따라서 그의 지배과제는 정복이나 새로운 체제의 창출이라기 보단, 기껏해야 기존 지배조직의 구축을 안정시키고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결국 안정적인 권력수단을 지속하는 것 정도를 추구했던 루이14세는, 대립과 긴장이라는 질투를 이용하여 어느 정도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때 왕은 사람들 간의 관계를 적당히 조절하면서 이 긴장에 개입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왕의 입장에서 봤을 때 무엇보다도 그러한 조절과 안정, 감시가 수월한 장치가 바로 궁정예법인 셈이다.
물론 루이14세는 특정한 집단의 특권을 상승시키거나 줄이기에 충분한 권력이 있었으므로, 굳이 궁정예법을 거치지 않고서라도 모든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그의 관찰영역 안에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최고위 지배층, 왕비나 황태자들조차 궁정예법에 얽매이게 되었다.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서열, 특권 및 이권을 위한 경쟁자로서 얽매였기에, 상호간에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개혁을 시행할 수도 없었다. 그 결과 조직체는 경직되고, 궁정예법은 단지 ‘예법을 위한 예법’으로서 허공을 맴돌게 된다.
약간의 일탈마저도 서로에 의해 강제당하는 형태는, 마치 자신이 유리한 위치를 잃거나 놓칠까봐 위치를 바꾸지 않는 권투에서의 클린치 (교착) 상태와도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스포츠에서는 그 상태를 떼어 놓을 심판이 있지만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모든 개혁을 위한 상류층의 시도는 무산되었고, 결국 낡은 지배조직의 법률적 · 제도적 틀을 붕괴시키기 위해 폭력을 동원한 혁명이 발생한다.
엘리아스는, 파슨스의 원자론적 인간 (행위 이론) 내지 맑스의 집단으로서의 사회학을 넘어서, 서로 의존하는 결합된 형태의 다수의 개인들로부터 출발한다. 집단들의 의존형태 안에서 개인들의 의식은 결정되어 왔으며, 그러한 개인들이 집단간의 결합형태를 결정지었다는 것이다.
17, 18세기의 궁정에서의 다양한 결합태를 발견함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의식과 실존을 사회와의 결합태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아울러 당시 궁정인들이 자기 통제를 내면화하는 모습에서, 루이14세의 궁정과 근대사회가 별반 다를 바가 없음을, 궁정인과 근대인의 유사성이 오버랩 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독자의 평 2
기존의 서양 역사학에서 16-18세기는 이상하게도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닌 독립된 시기로 연구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사회경제사의 관점에서 봤을 때에 이 시기는 왕과 귀족이 농민을 착취하는 봉건제의 연장이었고, 제도사와 정치사의 관점에서 봤을 때에는 19세기의 국민국가를 준비하는 근대국가의 시발점이었다. 즉 이 시기는 언제나 중세의 아류로서 끝내는 없어져야 할 찌꺼기이거나, 19세기의 유럽국민국가가 되기엔 아직 무르익지 못한 풋내기였다.
기존의 관점들에 대해 미시적인 권력의 문제를 기본 관점으로 채택한 엘리아스는 중세와도 다르고 19세기와도 다른 이 시기만의 특성을 밝히고 있다. 중세 봉건제 권력의 바탕이 끊임없이 분열되고 통합되는 토지에 있었고, 19세기 부르주아 권력의 바탕이 늘 유동적인 자본에 있었다면, 이 시기의 권력의 바탕은 아무도 그 실체를 알지 못한 채 이용하면서 동시에 복종해야만 했던 왕에게, 더욱 정확히 말하면 ‘왕의 자리’에 있었다.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개인으로서의 왕은 전통귀족과 대검귀족이라는 한 부류와 부르주아 출신의 상인과 법복귀족이라는 한 부류 사이를 조정하고 중개하면서 권력의 균형을 유지했다. 이는 다시 양자에 대한 왕권의 개입을 극대화 할 수 있는 계기를 산출했다. 엘리아스는 이와 같은 절대왕정의 메커니즘을 앙리 4세에서 시작되어 루이 15세 시기로 끝나는 프랑스 절대주의 역사로 제시하고 있다.(이러한 관점에서 ‘문명화 과정II’는 중앙집권적 권력이 형성되는 과정을 14세기부터 고찰하고 있으며, 이 ‘궁정사회’에 대한 충분한 참고서가 된다.)
이와 같은 역사학적인 중요성 외에도 역사현상을 분석하는 그의 사회학적 이론틀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엘리아스가 강조하는 ‘결합태’, 즉 ‘figuration’ 이라는 개념은 한 사회가 구성되는 상호의존적인 권력의 기본 구도를 다층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 사회는 개인의 계획대로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간의 복잡한 상호의존관계를 통해 모습을 갖추게 된다.
예를 들어 궁정사회라는 커다란 권력의 틀은 왕이 의도한 모습은 아니었으며, 그가 모르는 사이에 그의 의도마저도 종속시킨 사회적인 공통의 권력구도 였다. 그것은 권력의 게임에 동참한 모두의 몸에 새겨진 보이지 않는 규칙이었기 때문에, 이 게임의 참가자들로서는 아무런 문제도 제기 할 수 없었던 삶의 기본태도였다. 엘리아스의 말대로 그것은 후천적으로 획득된 것, 즉 ‘하비투스habitus'(라틴어 ‘소유하다habere’의 과거분사)이다.
궁정사회란 바로 이러한 결합태의 특수한 한 종류이다. 그러므로 엘레아스의 입장을 밀고나간다면, 인간사회의 권력구조를 파악할 때 그 기본은 늘 탈주하려는 권력의 분산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공통지반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는 권력의 피드백작용이 된다. 메를로-퐁티의 지각하는 코기토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그의 지적은 역자가 주를 통해 누누히 강조하고 있듯이 체계이론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으며, 탈구조주의의 주장과는 또 다른 방식의 권력에 대한 관점을 제시한다.
뒤늦게야 서구지성사에 영향을 끼친 엘리아스 작업의 중요성은 시대를 앞서간 새로운 관점을 바탕으로 추상적인 이론의 차원에서나 구체적인 역사의 차원에서 진지한 문제를 던졌다는 데에 있다.

○ 독자의 평 3
엘리아스는 사회학의 기본적인 출발점을 ‘상호의존적 관계에 놓인 인간’으로 삼는다. 이를 위해 그가 제시하는 개념이 바로 ‘결합태’ Figuration인데 엘리아스에 따르면 인간들은 상호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특성 때문에 서로 간에 있어 상호적으로 결합되지만, 다양하고 유동적인 ‘세력균형’의 상태를 내포하고 있는 관계망을 형성하면서 살아간다. 즉 “인간은 기본적인 상호의존성 때문에 여러 가지 상호 결합되어 있으며, 따라서 가족, 학교, 도시, 사회계층, 국가 등 유동적 세력균형을 내포하고 매우 다양한 형태의 상호의존 구조 또는 ‘결합태’를 갖는 무수한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결합태 개념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바로 ‘세력’ macht이다. 그러므로 “이 결합태 개념의 핵심에는 바로 ‘세력’ Macht 관계가 내포되어 있다. 변화무쌍한 결합태들의 중심에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결합과정의 중심에 변화무쌍한 긴장, 즉 ‘세력균형’의 변화가 개재해 있는 것이다. 이 세력균형은 어느 한 편에 유리하게 이루어지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다른 한 편에 유리하게 바뀌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무쌍한 세력균형이야말로 모든 결합태의 끊임없는 흐름이 갖는 구조적 특성이 된다.” 요컨대 ‘결합태’는 필연적으로 상호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이자, 주체성과 타자성의 복잡한 고리의 실천적 효과로 형성될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인간들 상호간의 수많은 관계 맺음의 양상으로서의 배치와 그것이 사회적 장 場에 등록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효과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아스는 그의 책 『궁정사회』에서 ‘결합태’ 개념을 활용하여 서구사회에서 장기 역사적으로 형성된 ‘궁정사회’라는 독특한 결합태가 어떻게 형성, 변이, 해체되었는지에 대해서 규명한다. 우리는 이 책에서 엘리아스가 제시한 궁정사회적 결합태의 특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측면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 인간들 간의 상호의존적인 결합적 관계와 그것에 의해서 형성되는 ‘사회체’의 특성으로서의 결합태의 추상적․잠재적 측면은 특정한 사회적 맥락 [혹은 배치] 속에서 나타나는 상이하고 다양한 변형의 양태인 결합태로서 현실화된다. 가령 서구의 역사에서 ‘궁정사회’라는 독특한 결합태[특히 ‘앙시앵 레짐’기]는 ‘기사-종자-승려-농노-’라는 결합태의 양태를 취하는 ‘중세적 결합태’와 ‘노동자-사무원-경영자’ 또는 ‘고위층-중간층-하위층 관료’ 같은 ‘근대적 선진 산업국가의 결합태’와 차별적인 특성을 보인다.
- 궁정사회적 결합태는 ‘궁정예법’ Étiquette/Etikette이라는 특이한 장치에 의한 수단화와 거리두기 메커니즘을 통해서 규정된다. 이는 크게 다음의 두 가지 측면들에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1) ‘궁정예법’ Étiquette 장치는 ‘궁정사회’라는 독특한 결합태를 형성하는 궁정사회의 욕망의 집단적 배치를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들과의 관계와 연관된다. 2) ‘궁정예법’ 장치는 궁정인들이 궁정사회에서 부여받은 사회적 지위의 상징적 징표이자, 그들의 사회적 삶을 규정하는/규제하는 코드와 담론의 실천적 배치에 다름 아니다.
- ‘궁정예법’ 장치는 궁정사회의 합목적적 관계, 합리성을 표상한다.
- ‘궁정예법’ 장치는 사회적 행위자들의 행위의 자기제한성의 범위와 척도를 규정한다. ‘궁정예법’ 장치 때문에 사회적 행위자들은 한편으로, 자신의 서열에 한정적인 행위만을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특수한 행위의 행사 [권력의 행사라고도 할 수 있을]를 통해서 자신의 사회 내 권력적 위치를 확인, 규정, 차별화,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또한 ‘궁정예법’ 장치 안에서/통해서 궁정인들은 권력행사의 ‘기술’ technic [사람을 관찰하는 기술, 다루는 기술, 궁정적 합리성의 중요한 측면으로서의 행위의 자발적/내적 통제]을 습득, 행사, 발전시키기도 한다.
- ‘궁정예법’ 장치는 ‘궁정사회’에서 상호의존적 관계에 의해서만 살아가는 인간들의 예속성과 자율성이 동시에 공존하는 삶의 형태를 드러낸다. ‘궁정예법’ 장치에 연관되는 ‘궁정사회’적 결합태 [혹은 배치]는 주체와 타자들 사이의 상호의존적 관계에 기초한 권력행사와 권력관계의 평형상태를 통해서 유지되는데, 거기서는 어느 누구도 절대적 권력과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 따라서 ‘궁정사회’적 결합태 [혹은 배치]는 언제나 변화하고 유동적인 ‘세력’ [힘/권력]관계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닫힌 체계가 아니라 열린 체계, 역동적 형태를 띠었다.
- ‘궁정사회’적 결합태 [혹은 배치]는 왕이 매개가 되어 궁정귀족과 시민계급 간의 ‘세력’ [힘/권력]관계의 평형상태가 최고조에 이르게 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갈등의 잠재적 위험을 합리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통로가 막힌 상태에서, 부르주아 시민계급이 주도한 폭력적 혁명을 통해서 해체되게 된다. 이로써 부르주아적 시민사회의 결합태가 형성되게 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