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인리히 뵐 / 열린책들 / 2011.1.10
- 전후의 상황에 내몰려 침묵하는 가난한 부부의 이야기! 독일 문단을 이끈 하인리히 뵐의 작품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계적인 거장들의 대표 작품부터 한국의 고전 문학까지 젊고 새로운 감각으로 고전을 새롭게 선보이는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의 158번째 책이다. 하인리히 뵐의 이름을 알린 대표작으로, 주말 동안 벌어진 어느 부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족들과 단칸방에서 살다 집을 나온 프레드는 곳곳을 떠돌다 지인들을 찾아가 잠을 자거나 가끔 돈을 빌려 아내 캐테와 싸구려 호텔에서 시간을 보낸다. 남편이 보내오는 돈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캐테는 남편의 전화를 기다려 그날그날 다른 장소로 남편을 만나러 간다. 또다시 아이를 임신한 캐테는 사랑하는 남편과 헤어질 결심을 하는데….
1952년의 어느 주말,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한 부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전후의 풍경 속에서 가난한 부부의 시점이 교차되며 진행되는 이 작품은 독일비평가협회 문학상을 비롯하여 여러 문학상을 휩쓸었다. 씁쓸한 사색과 따뜻한 대화가 조화를 이루는 작가 특유의 글쓰기를 잘 보여준다.
○ 목차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역자 해설: 사라진 세계의 거울, 하인리히 뵐의 삶과 작품
하인리히 뵐 연보
○ 저자소개 : 하인리히 뵐 (Heinrich Boll)
저자 하인리히 뵐 (Heinrich Boll)은 <쾰른의 선인 (仙人)>이라 불리며 전후 독일 문단을 이끈 하인리히 뵐. 그는 1917년 12월 21일 가구 제작자인 빅토르 뵐과 그의 두 번째 아내 마리아 헤르만의 여덟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어린 자녀들이 히틀러 정권을 멀리하도록 교육시켰다. 열일곱에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습작을 시작한 뵐은 1939년 쾰른 대학에 입학하여 독문학과 고전 어문학을 공부할 계획이었지만, 그해에 군대에 징집되어 1945년 종전 직전에 미군과 영국군의 포로가 되기까지 폴란드, 프랑스, 소련 등지에서 6년간 참전했다. 1951년 『검은 양들』로 47년 그룹상을 수상하며 작가로서의 이름을 알렸고, 이후 바이에른 예술 아카데미상 (1958), 쾰른 시 문학상 (1961), 게오르크 뷔히너상 (1967) 등의 주요 문학상을 휩쓸었다. 독일 펜클럽 회장, 국제 펜클럽 회장을 역임하며 국내외 정치적 문제에 깊이 관여했으며, 1972년 『여인과 군상』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낙오자와 이탈자의 목소리로 현재를 각인하고 과거를 기억하였던 그는 독일 1985년 7월 16일 쾰른 근교의 랑엔브로히에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주요 작품으로는 『열차는 정확했다』, 『아담아, 너는 어디 있었느냐?』, 『아홉시 반의 당구』,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등이 있다.
– 역자: 홍성광
역자 홍성광은 1959년 삼척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으로는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의 형이상학적 성격」, 「하이네 시의 이로니 연구」, 「토마스 만과 하이네 비교 연구」, 「토마스 만의 괴테 수용」, 「토마스 만과 김승옥 비교 연구」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마의 산』,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소송』, 『성』,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미하엘 엔데의 『마법의 술』, 에리히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 등이 있다.
○ 책 속으로
가끔 나는 죽음을, 이승의 삶에서 저승의 삶으로 변화하는 순간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순간 내게 남아 있게 될 것을 상상해 본다. 아내의 창백한 얼굴, 고해실에서 본 신부의 빛나는 귀, 듣기 좋은 전례의 선율로 가득 찬 어스름한 성당에서 갖는 몇 차례의 차분한 미사, 아이들의 따스한 장밋빛 피부, 내 핏속을 돌아다니는 알코올, 아침 식사, 몇 번의 아침 식사… 그리고 커피 머신의 꼭지를 돌리는 소녀를 바라보는 그 순간, 나는 그녀도 남아 있게 될 것임을 알았다. – 본문 47면
나는 아내 캐테를 생각하며 그녀와 함께 저녁을 보낼 날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 전에 돈을 마련해 방을 빌려야 했다. 돈을 마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내게 돈을 줄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도시, 인구 30만이 사는 이 도시에서 부탁하는 즉시 돈을 내줄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부탁을 하기가 비교적 쉬운 사람을 몇 명 알고 있었다. 방을 얻을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어쩌면 호텔에 들를 수도 있을 것이다. – 본문 50면
나는 돈이 필요했고, 아내와 같이 잘 방이 필요할 뿐이다. 우리는 같은 도시에 살고 있지만 두 달 전부터 호텔 방에서만 결혼 생활을 영위해 왔다. 날씨가 따뜻할 때는 가끔 야외의 공원이나 파괴된 집의 현관, 그 밖에 남에게 들킬 염려가 없어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도심의 으슥한 곳을 찾아다녔다. 다른 이유는 없고 우리 방이 너무 작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와 우리 옆방을 가로막고 있는 벽이 너무 얇다. 더 큰 방을 얻으려면 돈이 필요하고, 에너지라 불리는 것이 필요한데, 우리에게는 돈도 에너지도 없다. 내 아내에게도 에너지가 부족하다. – 본문 93~94면
우리의 만남은 우리가 아직 시원하게 해명하지 못한 리듬을 따르고 있다. 갑작스럽게 그녀와 만나야 할 때면 저녁에 밤을 보낼 숙소를 잡기 전에 집에 들러, 내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우리가 약속한 초인종 신호로 그녀를 불러낸다. 내가 아이들과 함께 지낸 지난 몇 주 동안 그 애들을 때렸는데도 불구하고, 애들이 나를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나에 대해 말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 본문 97면
나는 산책을 많이 하고, 옛날 학교 때의 지식을 끄집어내 공부에 골치를 앓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에게 계속 팔아먹으며 틈틈이 돈을 벌려고 한다. 도시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대체로 멀리 교외까지 나가서 아직 문이 열려 있는 묘지들을 찾아다닌다. 잘 손질된 관목과 깔끔한 화단 사이를 돌아다니며, 명패와 이름을 읽고 묘지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저곳에 묻힐 거라는 생각에 가슴 떨려 한다. 전에 아직 우리에게 돈이 있을 때는 여행을 많이 다녔다. 하지만 정작 낯선 도시에 가서는 지금 내가 여기서 하는 것과 똑같이 행동했다. 호텔 침대에 누워 빈둥거렸고, 담배를 피우거나, 아무런 계획 없이 쏘다녔다. 가끔 성당에 들어가기도 하고 멀리 묘지가 있는 교외까지 나가 보기도 했다. 허름한 술집에서 술을 마셨고, 밤에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되는 모르는 사람들과 사귀었다. – 본문 128면
「내가 알았던 한 소위는 자기 애인한테 전화로 릴케 시를 읊어 주더군. 좀 다른 경우이긴 해도 그는 곧 죽어 버렸어. 어떤 사람들은 노래를 불러 줬고, 전화로 서로 노래를 가르쳐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전화에 죽음을 실어 보냈어. 죽음이 전화선 속을 허우적거리며 돌아다녔고 사람들은 작은 목소리로 다른 사람의 귓바퀴 속에 죽음의 소리를 퍼부어 댔어. 이 다른 사람이란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죽도록 신경을 써야 하는 사람이야. 고위 장교란 사람들은 사람이 떼로 죽지 않으면 대체로 전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거든. 사망자 수에 따라 전투의 크기를 평가하는 건 헛짓이 아니었어. 여보, 묘지도 그렇지만 시체란 지루함을 몰라.」 – 본문 172면
그녀는 캐테였지만, 내가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는 캐테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녀의 뒤를 따라 거리로 접어드는 동안 그녀, 어제 밤새도록 함께 있었고, 15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해온 내 아내는 여전히 내게 낯선 동시에 또 무척 낯익게 생각되었다. – 본문 223면
○ 출판사 서평
- <쾰른의 선인 (仙人)>으로 불리며 전후 독일 문단을 이끈 작가 하인리히 뵐
그가 죽은 지 25년째 되던 해인 2010년, 독일의 주요 언론들은 그의 삶과 문학을 집중 조명하며 특집 기사들을 게재했다. <뵐은 25년 동안 죽어 있다>(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독립과 자유를 추구한 그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귄터 발라프). 독일 문단 내에서는 이와 같이 오늘날 뵐을 바라보는 상반된 시선을 보여 주었다. 국내에서도 2000년대 후반에 뵐의 중, 후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가 출간된 바 있다. 열린책들 세계문학에서는 <하인리히 뵐>이라는 이름을 모두에게 각인시킨 뵐의 초기 대표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정식 계약을 통해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53)는 1952년의 어느 주말, 한 부부를 둘러싸고 48시간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성당 전화 교환수로 한 달 임금이 320마르크 80페니히인 프레드 보그너와 그의 아내 캐테 보그너를 주인공으로, 먼지와 얼룩, 담배 연기로 가득한 전후의 풍경을 배경으로 삼아, 쓰라린 사색과 따뜻한 대화가 조화를 이루는 뵐 특유의 글쓰기를 여실히 보여 주는 작품이다. 평단은 물론 독자들에게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출간된 해에 1만 7천부가 판매되었다), 가톨릭교회에 대한 절망감을 전면으로 드러내 논란이 되기도 했다.
- 전후의 먼지에 내몰려 침묵하는 가난한 부부 이야기
하인리히 뵐은 이 작품에서 가난한 부부의 시점을 교차시키는 형식을 통해 전후 하층민들의 동선(動線)을 추적한다. 주인공 프레드는 아내와 세 아이와 함께 좁은 단칸방에서 사는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왔다. 어느 토요일 오전, 그는 임금을 집으로 부치고 아이들을 가르치러, 돈을 빌리러 이 집 저 집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술집, 간이식당, 오락 기계, 광장, 성당, 묘지 주변을 떠돌다 지인들을 찾아가 잠을 자는 것이 집을 나온 뒤 그가 반복해 온 일과다. 한편, 그의 아내 캐테는 세 아이 때문에 좀처럼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토요일 오전, 그녀는 벽에서 부서져 내리는 석회 가루들을 끊임없이 닦아 내고, <힘 있는> 이웃들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아이들을 주의시키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외출이라곤 아이들이 학교에 간 사이 서둘러 장을 보고 성당에 들르는 것이 전부다.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지 못하고, 머물고 싶지 않은 곳에 머무는 모순적인 상황을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 쾰른 시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절묘하게 풀어내는 뵐의 재능은 가톨릭교회와 시민 계층에 대한 비판과 맞물려 깊이를 더한다. 불에 타서 무너져 내린 폐허 더미들 사이에 솟아 있는 고딕식 성당, 성당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바라보며 프레드는 생각한다.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저 안은 어쩌면 따뜻할지도 몰라.> (본문 38면) 그러나 실제로 그가 들어간 성당 안은 바깥보다 더 춥다. 프레드가 느끼는 박탈감은 성 히에로니무스 축일을 맞아 장엄하게 펼쳐지는 성체 행렬에서 붉은색 순교자 복장을 하고 위엄 있게 걷는 주교를 바라보는 순간 정점을 맞는다. 캐테 역시 집 안에서 같은 박탈감에 시달린다. 부부와 같은 집에 사는 프랑케 부인은 주택 위원회의 회장이라는 권력을 남용하여 자신의 방 하나를 부부에게 손수 내어 주면서까지 부부가 새 집을 갖는 것을 방해한다. 그녀는 <애들 중 하나가 화장실을 썼다 하면 서재에서 달려 나와 화장실이 청결한지 점검> (본문 151면) 하는 등 캐테와 아이들 위에 군림하는 시민 계층의 대변자다.
가끔 나는 죽음을, 이승의 삶에서 저승의 삶으로 변화하는 순간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순간 내게 남아 있게 될 것을 상상해 본다. 아내의 창백한 얼굴, 고해실에서 본 신부의 빛나는 귀, 듣기 좋은 전례의 선율로 가득 찬 어스름한 성당에서 갖는 몇 차례의 차분한 미사, 아이들의 따스한 장밋빛 피부, 내 핏속을 돌아다니는 알코올, 아침 식사, 몇 번의 아침 식사… 그리고 커피 머신의 꼭지를 돌리는 소녀를 바라보는 그 순간, 나는 그녀도 남아 있게 될 것임을 알았다. – 본문 47면
나는 아내 캐테를 생각하며 그녀와 함께 저녁을 보낼 날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 전에 돈을 마련해 방을 빌려야 했다. 돈을 마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내게 돈을 줄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도시, 인구 30만이 사는 이 도시에서 부탁하는 즉시 돈을 내줄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부탁을 하기가 비교적 쉬운 사람을 몇 명 알고 있었다. 방을 얻을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어쩌면 호텔에 들를 수도 있을 것이다. – 본문 50면
나는 돈이 필요했고, 아내와 같이 잘 방이 필요할 뿐이다. 우리는 같은 도시에 살고 있지만 두 달 전부터 호텔 방에서만 결혼 생활을 영위해 왔다. 날씨가 따뜻할 때는 가끔 야외의 공원이나 파괴된 집의 현관, 그 밖에 남에게 들킬 염려가 없어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도심의 으슥한 곳을 찾아다녔다. 다른 이유는 없고 우리 방이 너무 작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와 우리 옆방을 가로막고 있는 벽이 너무 얇다. 더 큰 방을 얻으려면 돈이 필요하고, 에너지라 불리는 것이 필요한데, 우리에게는 돈도 에너지도 없다. 내 아내에게도 에너지가 부족하다. – 본문 93~94면
우리의 만남은 우리가 아직 시원하게 해명하지 못한 리듬을 따르고 있다. 갑작스럽게 그녀와 만나야 할 때면 저녁에 밤을 보낼 숙소를 잡기 전에 집에 들러, 내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우리가 약속한 초인종 신호로 그녀를 불러낸다. 내가 아이들과 함께 지낸 지난 몇 주 동안 그 애들을 때렸는데도 불구하고, 애들이 나를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나에 대해 말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 본문 97면
나는 산책을 많이 하고, 옛날 학교 때의 지식을 끄집어내 공부에 골치를 앓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에게 계속 팔아먹으며 틈틈이 돈을 벌려고 한다. 도시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대체로 멀리 교외까지 나가서 아직 문이 열려 있는 묘지들을 찾아다닌다. 잘 손질된 관목과 깔끔한 화단 사이를 돌아다니며, 명패와 이름을 읽고 묘지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저곳에 묻힐 거라는 생각에 가슴 떨려 한다. 전에 아직 우리에게 돈이 있을 때는 여행을 많이 다녔다. 하지만 정작 낯선 도시에 가서는 지금 내가 여기서 하는 것과 똑같이 행동했다. 호텔 침대에 누워 빈둥거렸고, 담배를 피우거나, 아무런 계획 없이 쏘다녔다. 가끔 성당에 들어가기도 하고 멀리 묘지가 있는 교외까지 나가 보기도 했다. 허름한 술집에서 술을 마셨고, 밤에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되는 모르는 사람들과 사귀었다. – 본문 128면
「내가 알았던 한 소위는 자기 애인한테 전화로 릴케 시를 읊어 주더군. 좀 다른 경우이긴 해도 그는 곧 죽어 버렸어. 어떤 사람들은 노래를 불러 줬고, 전화로 서로 노래를 가르쳐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전화에 죽음을 실어 보냈어. 죽음이 전화선 속을 허우적거리며 돌아다녔고 사람들은 작은 목소리로 다른 사람의 귓바퀴 속에 죽음의 소리를 퍼부어 댔어. 이 다른 사람이란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죽도록 신경을 써야 하는 사람이야. 고위 장교란 사람들은 사람이 떼로 죽지 않으면 대체로 전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거든. 사망자 수에 따라 전투의 크기를 평가하는 건 헛짓이 아니었어. 여보, 묘지도 그렇지만 시체란 지루함을 몰라.」 – 본문 172면
그녀는 캐테였지만, 내가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는 캐테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녀의 뒤를 따라 거리로 접어드는 동안 그녀, 어제 밤새도록 함께 있었고, 15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해온 내 아내는 여전히 내게 낯선 동시에 또 무척 낯익게 생각되었다. – 본문 223면
- 고통스러운 기억의 재생, 뵐 문학의 정수(精髓)
작가 뵐에 관한 전기적 사실을 알고 나면 이 작품이 그의 문제의식, 그것을 문화적으로 형상화하는 방식 양면에서 명실공히 그의 대표작임을 확인하게 된다. 진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자란 유년 시절의 기억, 1939~1945년까지 6년간 전쟁에 참전하며 탈영을 반복했던 기억, 전후의 파괴된 쾰른에서 첫 아들을 잃었던 기억. 이 모든 기억들이 주인공 프레드의 기억을 통해 재생된다.
뵐의 뮤즈는 기억의 여신 므네모지네 Mnemosyne였고, 그의 모토는 <과거의 죄악과 상실의 아픔을 기억하라>였다. 그는 서독이 화폐 개혁과 군부 재무장으로 서구 사회에 편입되어 경제적 부흥을 이룩한 상황 속에서 번영의 그늘 속에서 곪아 가는 정신적 상처를 문학의 대상으로 삼았다. – <역자 해설>, 240~241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작품의 제목은 예수의 수난을 다룬 흑인 영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He Never Said a Mumbalin’ Word」에서 따온 것이다. 가톨릭과 시민 계층의 폭력 속에 침묵하는 사람들은 이 작품을 필두로 뵐의 여러 작품에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뵐은 침묵 속에서 소외된 자들의 얼굴을 담담히 조명한다. 농부의 얼굴을 한 신부 (교회 내에서는 낙제점을 받은 자)와 간이식당의 소녀가 그러하다 (하인리히 뵐이 작품을 집필할 당시의 제목은 <간이식당 : Imbissstube> 이었다). 상이군인 아버지와 지적 장애를 가진 동생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보살피는 소녀의 얼굴은 환한 빛을 발하는 천사와 겹쳐지며 절망한 부부에게 큰 힘을 준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열린책들이 2009년 말 펴내기 시작한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의 158번째 책이다. <열린책들 세계문학>은 젊고 새로운 감각으로 다시 태어난 고전 시리즈의 새 이름으로, 상세한 해설과 작가 연보로 독자들의 깊이 있는 이해를 돕는 한편 가볍고 실용적인 사이즈에 시선을 사로잡는 개성 있는 디자인으로 현대적 감각을 살렸다. 앞으로도 열린책들은 세계 문학사의 걸작들을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를 통해 계속 선보일 예정이다.
- 열린책들 세계문학
낡고 먼지 싸인 고전 읽기의 대안
불멸의 고전들이 젊고 새로운 얼굴로 다시 태어난다. 목록 선정에서부터 경직성을 탈피한 열린책들 세계문학은 본격 문학 거장들의 대표 걸작은 물론, 추리 문학, 환상 문학, SF 등 장르 문학의 기념비적 작품들, 그리고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한국의 고전 문학 까지를 망라한다.
더 넓은 스펙트럼, 충실하고 참신한 번역
소설 문학에 국한하지 않는 넓은 문학의 스펙트럼은 시, 기행, 기록문학, 그리고 지성사의 분수령이 된 주요 인문학 저작까지 아우른다. 원전번역주의에 입각한 충실하고 참신한 번역으로 정전 텍스트를 정립하고 상세한 작품 해설과 작가 연보를 더하여 작품과 작가에 입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했다.
품격과 편의, 작품의 개성을 그대로 드러낸 디자인
제작도 엄정하게 정도를 걷는다. 열린책들 세계문학은 실로 꿰매어 낱장이 떨어지지 않는 정통 사철 방식, 가벼우면서도 견고한 재질을 선택한 양장 제책으로 품격과 편의성 모두를 취했다. 작품들의 개성을 중시하여 저마다 고유한 얼굴을 갖도록 일일이 따로 디자인한 표지도 열린책들 세계문학만의 특색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