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기독교 윤리의 해석
라인홀드 니버 / 종문화사 / 2019.6.20
‘기독교 윤리의 해석’에서 주된 논지는 사랑-정의의 변증법이지만, 이른바 “예언적 기독교”를 주창하는 점 또한 『기독교 윤리의 해석』의 핵심요소이자 니버가 제시하는 독특한 논지다. 니버는 “역사의 모든 현실은 도래하고 나면 단지 이상의 근사치에 불과했다는 점을 스스로 드러내게” 되며, 그러한 의미에서 “사실상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다가오지만 결코 임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생각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가 바로 기독교의 두 형태들에 대한 분석이다.

니버는 정통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를 모두 지양하며 역사 속에 결코 완벽히 실현된 적이 없는 “예언적 기독교”를 제시한다. “예언적 기독교”가 실현된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는 “결정적인 도덕적·영적 과정”이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상징과 신화에 대한 문자주의를 고수하고 인간의 타락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을 지닌 정통 기독교와 예수의 절대적 윤리를 상대적 윤리로 격하시키고 “현시대 특유의 신조(信條)들과 편견들에 맞춰가[는]” 경향을 지닌 자유주의 기독교는 바로 인간의 죄라는 현실의 한계로 인해 기독교가 진정한 형태에서 엇나가는 모습들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역사 속의 특정한 형태의 정치체제, 사회체제, 심지어 종교체제에 결코 안주하지 않고 궁극적인 이상의 불가능성을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그 필수성을 역설하는 점에서 우리는 이상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로서 니버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다가오는 시대의 비극들을 짚어내는 니버의 예언적 목소리가 오늘날에도 강력히 발현되는 것은 그가 기독교인이라면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인간 실존의 원형적(archetypal)인 문제를 짚어냈기 때문이다. 그러한 문제는 한마디로 “복음서들의 절대적 윤리로부터 어떻게 사회 윤리를 끌어내는 것이 가능한가”이며, 이기심의 지속성을 상정하면서도 그리스도가 제시한 사랑의 윤리를 어떻게 하면 단순한 이상주의를 넘어 현실 속에 결착시킬 수 있는가이다.
– 목차
서문 5
1956년판 서문
1장 독립적인 기독교 윤리에 관해서
2장 예수의 윤리
3장 기독교적 죄의 개념
4장 불가능한 도덕적 이상의 타당성
5장 정치와 경제에서의 사랑의 율법(정통 기독교에 대한 비판)
6장 정치에서의 사랑의 율법(이어서)(기독교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7장 개인의 가능성으로서의 사랑
8장 용서로서의 사랑
옮긴이 후기

– 저자소개 : 라인홀드 니버 (Reinhold Niebuhr)
윤리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정치철학자인 니버는 1892년 미주리 주 (州)의 라이트 (Wright) 시에서 태어났다.
에덴 신학교와 예일 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디트로이트에서 13년 동안 목회활동을 했다.
1928년에는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 기독교 윤리학 교수로 부임하여 1960년에 은퇴할 때까지 머물렀다.
옥스퍼드, 하버드, 프린스턴, 예일 등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9년에 미국인으로서는 5번째로 에든버러대학 (Edinburgh University)의 기포드 강연 (Gifford Lectures)의 강단에 섰다.
그의 신학은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를 비롯하여 후대의 수많은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역자 : 곽인철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종문화사 편집·기획부에서 근무했다.
옮긴 책으로는 『예수는 신인인가』(종문화사), 『기독교 윤리의 해석』(종문화사)

– 책 속으로
1956년판 서문
25년 전에 처음 착상한 작품을 재발행한다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다. 나는 이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보기 전에 철저히 검토해야겠다는 충동이 들었다. 두 번째 충동은 거의 모든 장(章)을 주석으로 뒤덮고 그것을 통해 이전에 전개했던 견해와 다른 부분을 설명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새로운 서문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나는 서문에서 이 작품이 원래 어떤 풍조 속에서 쓰였고, 인상적이었던 지난 25년간 이루어진 사상의 전개와 삶의 흐름으로부터 저자가 체득한 추가적인 지혜를 어느 정도 설명하도록 하겠다.
이 작품은 본래 “라우센부쉬(Rauschenbusch)” 강연으로서 출판되었으며, 라우센부쉬가 선구자로 추앙받은 “사회 복음(Social Gospel)”의 목적들에 대한 저자의 전반적인 지지를 표명하기 위해, 동시에 기존의 사회 복음과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기독교(social Christianity)의 형태 사이에서 점차 벌어지는 차이점들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 차이점들은 주로 정의와 사랑을 극명하게 구분하는데 있었다. 이러한 구분은 사회 복음주의자들이 인간행동에 대해 제시한 분석이 지닌 결함, 즉 원죄 교리를 거부하는 데서 비롯된 결함에 대한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촉진되었다. 사회 복음은 곧 자유주의 운동 내에서 사회 정의에 대한 책임이라는 의식을 지녔던 부분이었다. 사회 복음은 사랑이 개인적인 관계들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들에서 삶의 법칙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러한 책임을 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회 복음은 대체로 사도 바울이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운다]”라고 묘사했던 인간행동의 측면을 도외시했다.
요컨대 사회복음은 개인의 측면과 집단의 측면 모두에서 이기심이 지닌 힘과 지속성을 의식하지 못한 것이다. 인간은 갈등하는 이해관계들과 세력들을 정의의 구조들과 사회의 기관들을 통해 관리하고 균형을 맞춤으로써 정의를 이루고자 했지만, 결과적으로 사회복음은 그러한 정의의 구조들과 사회의 기관들에 별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25년 전에 공동체 속에서 정의를 이루는 공동의 문제들에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사랑의 윤리를 연관 지으려고 하였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사랑이 사회행위의 동기일 수 있지만 이기심이 모든 단계에서 사랑의 원리들을 거스르게 되어 있는 세상 속에서 정의가 반드시 사랑의 도구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랑이 정의와 맺는 관계 속에는 당시는 내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고자 하는 많은 복잡성들이 존재한다. 내가 기존에 피력한 관점들에 대한 몇몇 수정안은 우호적인 비평가들과 적대적인 비평가들에 의해서도 촉진되었다. 몇몇 통찰들은 기독교 윤리학의 핵심 문제에 대해 더 숙고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러한 과정들을 되짚어 가는 것은 중복에 불과할 것이다. 오히려 이 책을 그 불완전함 속에 내버려두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핵심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복음서들의 절대적인 윤리로부터 어떻게 사회 윤리를 끌어내는 것이 가능한가이다. 복음의 윤리는 단지 자유의 최종적인 율법,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기만 하므로 절대적이다. 사회 윤리는 반드시 삶의 무난한 조화들, 정의의 무난한 형태들 그리고 삶의 유동성의 무난한 안정을 이루는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이기적인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라고 요구하지도, 그들의 이기심을 당연하게 여기지도 않고 이루어져야 한다. 즉, 사회 윤리는 반드시 이기심의 지속성을 상정해야 하지만, 또한 어떤 형태든 간에 부분적이거나 지역주의적인 충성심 혹은 집단이기주의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이 작품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명백한 결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 공동체에 지속적으로 부과되는 이 임무에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우리의 조국은 자유세계의 최강국으로 성장했으며 자유와 공산주의적 독재의 투쟁 속에서 막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 책이 쓰인 후로 사회 윤리의 문제는 더욱 중요해졌다. 우리의 책임을 수행할 수 있도록 모든 자원은 미국에 제공되어야 한다. 그러한 자원 중 하나로는 현실에 대한 만족에 의해서 저하되지도 않고 국가와 인류에게 불가능한 목적들을 설정하며 우리가 당면한 책임은 격렬한 갈등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재앙을 피하고 무난한 평화를 지키는 것임을 잊어버린 무책임한 이상주의에 의해 저하되지 않은 적절한 기독교 신앙을 들 수 있다.
물론 국제적인 상황은 인간이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마주하는 유일한 상황이 아니며, 신앙이 그저 이상주의로서 계시되어선 안 되며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되었듯이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헌신이라는 지침 아래 삶의 모든 우여곡절을 책임 있게 다루는 자원으로서 계시되어져야만 하는 유일한 상황은 아니지만 말이다. _ 라인홀드 니버, 1956

– 출판사 서평
라인홀드 니버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그의 출세작인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와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작품인 『인간의 본성과 운명Ⅰ.Ⅱ』(종문화사)(The Nature and Destiny of Man)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인 개인들도 집단에 소속되면 쉽게 악에 물든다고 주장하며 기독교적 가치를 정치-사회적 문제에 적용하려는 첫 번째 시도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였다면, 『인간의 본성과 운명Ⅰ.Ⅱ』은 죄의 보편성에 대한 강조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옹호하여 독자적인 신학적 인간학-윤리학을 완성시킨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니버 사상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명저들 사이에서 시기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작품이 곧 『기독교 윤리의 해석』(종문화사)이라 할 수 있다. 산투리가 서문에서 서술하듯이, 『기독교 윤리의 해석』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던져진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한편, 『인간의 본성과 운명Ⅰ.Ⅱ』에서 전개된 신학적 인간학에 대한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의심할 바 없이 『기독교 윤리의 해석』에서 주된 논지는 사랑-정의의 변증법이지만, 이른바 “예언적 기독교”를 주창하는 점 또한 『기독교 윤리의 해석』의 핵심요소이자 니버가 제시하는 독특한 논지다. 니버는 “역사의 모든 현실은 도래하고 나면 단지 이상의 근사치에 불과했다는 점을 스스로 드러내게” 되며, 그러한 의미에서 “사실상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다가오지만 결코 임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생각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가 바로 기독교의 두 형태들에 대한 분석이다.
니버는 정통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를 모두 지양하며 역사 속에 결코 완벽히 실현된 적이 없는 “예언적 기독교”를 제시한다. “예언적 기독교”가 실현된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는 “결정적인 도덕적·영적 과정”이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상징과 신화에 대한 문자주의를 고수하고 인간의 타락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을 지닌 정통 기독교와 예수의 절대적 윤리를 상대적 윤리로 격하시키고 “현시대 특유의 신조(信條)들과 편견들에 맞춰가[는]” 경향을 지닌 자유주의 기독교는 바로 인간의 죄라는 현실의 한계로 인해 기독교가 진정한 형태에서 엇나가는 모습들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역사 속의 특정한 형태의 정치체제, 사회체제, 심지어 종교체제에 결코 안주하지 않고 궁극적인 이상의 불가능성을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그 필수성을 역설하는 점에서 우리는 이상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로서 니버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다가오는 시대의 비극들을 짚어내는 니버의 예언적 목소리가 오늘날에도 강력히 발현되는 것은 그가 기독교인이라면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인간 실존의 원형적(archetypal)인 문제를 짚어냈기 때문이다. 그러한 문제는 한마디로 “복음서들의 절대적 윤리로부터 어떻게 사회 윤리를 끌어내는 것이 가능한가”이며, 이기심의 지속성을 상정하면서도 그리스도가 제시한 사랑의 윤리를 어떻게 하면 단순한 이상주의를 넘어 현실 속에 결착시킬 수 있는가이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